중부고속도로 西청주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조치원으로 가는 1번 국도와 公州의 武寧王陵(무녕왕릉) 북쪽을 스쳐 지나는 36번 국도를 거쳐 칠갑산 산마루에 있는
定山휴게소에 들렀다. 칠갑산 定山휴게소에는 조운파 작사 작곡의 「칠갑산」을 새겨 놓은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정작 칠갑산이 어떤 山인지는 몰라도
애잔한 노랫말에 끌려 가끔 한번씩은 흥얼거리는 「국민가요」 중 하나이다.
<콩밭 매는
아낙네야/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무슨 설움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 홀어머니 두고 시집 가던 날/ 칠갑산 산마루에/ 울어주던 산새
소리만/ 어린 가슴 태웠소>
7월2일― 일기예보로는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 오전
중에 비가 온다는 날이었다. 그러나 고대했던 비는 오지 않고 햇볕만 쨍쨍했다. 노랫말 그대로 「베적삼이 흠뻑」 젖을 만한 더위였다. 차령산맥의
끝자락을 뚫은 대치터널을 통과하여 칠갑산 남쪽 기슭(청양군 대치면 장곡리)에 자리 잡은 長谷寺(장곡사)를 찾아갔다.
장곡사 입구에는 樹齡(수령) 600년 넘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멋진 모습을 뽐내고 있다. 높이 18m, 둘레 6.7m에
이르는 保護樹(보호수)다.
장곡사는 통일신라 文成王 12년(850)에 普照禪師 體澄(보조선사 체징)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천년 고찰이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重修(중수)를 거듭했다. 규모는 작지만 속내가 꽉 찬 절이다. 국보
두 점, 보물 네 점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장곡사는 大雄殿(대웅전)이 두 채 있는 특이한
절이다. 경사도가 급한 地勢의 좁은 곳에 배치한 관계로 건물들을 한 군데로 모으지 못하고 上處(상처)가람과 下處가람의 두 곳으로 나누어 지었기
때문이다.
낭떠러지 위의 上대웅전
보물 제162호 上대웅전은 上處가람에 위치하고 있어 그렇게 명명된 것이다. 그 대지는
좌우가 비교적 넓고 前後의 폭이 좁으며 바로 앞은 낭떠러지다. 장방형의 基壇(기단)은 자연석으로 나지막하게 축조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조선 中期의 목조 건물이다. 고려시대의 기둥도 일부 남아 있다.
앞의 초석 위에 배흘림이 강한 둥근
기둥을 세웠다. 동·서·북의 3面은 벽체이다.
多包집이기는 하지만, 기둥과 기둥 사이에 소박한 공포
하나씩만 더 짜여 있을 뿐이어서 柱心包 집(기둥 위에만 공포(처마끝의 무게를 받치게 하려고 기둥 머리 같은 데 짜맞추어 댄 닭벼슬 모양의
나무쪽들)를 짠 건물)과 거의 같은 느낌을 준다. 지붕도 소박한 맞배지붕(책을 펴서 엎어 놓은 듯한 모습의 지붕)이다.
前面의 처마는 서까래(椽木·연목)와 浮椽(부연: 서까래만 가지고 처마를 깊이 빼기 어려워 서까래 끝에 덧얹어 건 짧은
서까래)으로 구성된 겹처마이고, 背面(배면)은 부연이 없고 長椽(장연)이 길게 빠진 홑처마이다.
실내
바닥에는 고려시대에 제조한 暗灰色(암회색)의 벽돌을 깔았다. 보존을 위해 벽돌 위에 융단을 덮어두고 있는데, 참배객이 통행하지 않는 佛像
뒤편에는 화려한 벽돌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이 네모形 벽돌의 前面에는 중앙에 滿開(만개)한 8葉 연화무늬를 새기고 네 가장자리에는
唐草紋(당초문)을 배치했다. 벽돌은 縱橫(종횡) 23.5cm, 두께 6cm이다.
上대웅전은 세 분 부처를 모시고 있다. 向右側(향우측: 참배자가 보기에 맨 오른쪽)에 석조 대좌 위에 봉안된
불상이 국보 제58호 약사여래좌상이다. 이 국보는 臺座(대좌)가 압권이다.
대좌는 화강석을 깎아
下臺石(하대석)·中대석·上대석으로 구성되었다. 下대석은 2段으로 중첩되어 있다. 그 1층 4面에는 각각 眼象(안상)이 조각되었다(前後面 4개씩,
左右側面 3개씩). 그 위로는 겹잎의 伏蓮紋(복련문)이 유려하게 새겨져 있고, 그 네 모서리에는 귀꽃(耳花)이 솟아올랐다. 다시 그 위에는
층층의 크기가 줄어드는 4段의 받침돌을 놓았다.
下대석 위에는 4角 長方形으로 된 中대석을 놓았는데, 이
中대석의 4面에도 피망(西洋 고추) 모습의 眼象을 조각했다(前後面에 2개씩, 좌우측면에 1개씩). 中대석 위에 놓인 上대석은 仰蓮紋(앙련문)이
새겨진 4角 板石으로 구성되었다. 이 화려무비한 臺座는 신라통일기의 秀作으로 손꼽힌다. 제작시기는 10∼11세기로 추정된다. 대좌 높이
137.5cm.
이 鐵製 佛像(철제 불상)은 최근 金가루를 칠했다. 종전에는 胡白粉(호백분)을 발라 흰색
불상이었다. 상투는 얕고, 두 귀가 어깨에 거의 닿을 만큼 길다. 눈썹은 半月形을 그렸고, 반쯤 뜬 눈은 그 끝이 약간 올라갔다. 콧대는 우뚝
섰는데, 입술은 작다. 얼굴의 균형이 잘 잡혔다.
목에는 三道, 즉 3개의 주름이 뚜렷히 잡혀 있다.
法衣는 왼쪽 어깨만 가려 오른쪽 가슴이 넓게 드러났다. 結跏趺坐(결가부좌)의 단아한 자세를 취했다. 왼손은 작은 약병을 받들고 있다. 이렇게
약병을 들고 있는 부처는 중생을 질병이나 재난에서 구해 준다는 藥師如來(약사여래)이다. 佛像 높이 90.46cm.
光背는 木造이다. 돋을 새김 무늬로 단청 채색되었는데, 초록색 色感이 좋다. 광배 높이 137.5cm.
上대웅전의 主佛은 물론 중앙에 좌정한 보물 제174호 鐵製 毘盧舍那佛(비로자나불)이다. 왼손 검지를 곧추세워 놓고 오른손으로
감싸쥐는 智拳印(지권인)이다. 이런 손 모양을 하고 있는 부처가 바로 비로자나불―智德의 빛으로 온 세상을 두루 비춘다는 진리의 부처이다.
이 鐵造 비로자나불상은 主佛이면서도 웬일인지 上대웅전의 三尊佛 중 가장 왜소하게 조형되어 키가
60cm밖에 되지 않는다. 어깨가 딱 벌어졌지만 유순하게 보이는 모습이다.
등을 받치고 있는 光背는
나무로 만들었다. 불꽃 모양이 솟아오르는 모습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은 石燈(석등) 모양의 臺座 위에 앉아 있다.
王·王妃·世子의 長壽를 위해 조성한 괘불탱화-국보
300호 장곡사는 국보 제300호 미륵불 掛佛幀(괘불탱)도 소장하고 있다. 이것은 「彌勒下生成佛經(미륵하생성불경)」의
내용을 회화한 佛畵이다. 미륵하생성불경에 따르면 석가모니의 入寂後(입적 후) 56억7000만 년 후에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인간세계로 下生하여
正覺(정각)을 성취하고 미륵불이 되어 중생을 구제한다.
「幀(탱)」은 불교적 그림, 즉 幀畵(탱화)의
준말이다. 괘불은 큰 掛圖(괘도)처럼 만들어 야외 법회 때 내거는 佛畵를 말한다.
이 국보의 그림은
미륵불이면서 釋迦佛(석가불)로 化現하여 영축산에서 法華經(법화경)을 설법하는 靈山會上圖(영산회상도)이다. 麻本(마본)으로서 全長 8.69m, 폭
5.99m의 대형 괘불이다.
이 괘불에는 그림을 그린 내력이 적혀 있다. 畵記에 따르면 조선왕조 顯宗
14년(1673) 5월에 그려진 佛畵이다. 중앙에 主上殿下壽齊年(주상전하수제년), 王妃殿下壽萬年(왕비전하수만년),
世子殿下壽千秋(세자전하수천추)를 기록하고, 그 아래에 괘불 조성에 관여한 施主(시주)들의 명단이 쓰여 있다.
이 괘불탱화는 1997년 12월15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보물 제181호 下대웅전과 보물 제337호
금동약사여래坐像 上대웅전에서 가파른 계단을 100여 개쯤 딛고 내려가면 바로 보물 제181호 下대웅전이다. 下대웅전도
上대웅전처럼 맞배지붕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조선 中期 건물이다.
全面은 마당인데, 그 바닥에
견치돌로 2段의 높은 石築壇(석축단)을 쌓았고, 그 위에 같은 수법으로 낮은 한 段의 壇을 더 축조했다. 背面과 兩측면으로도 자연석으로
石築했다.
축대 위에는 礎石(초석)을 배치했다. 초석은 上面을 약간 평평하게 治石한 10개의 자연석 덤벙
柱礎(주초)의 형식을 취하였다. 그 돌이 重厚하여 안정감이 있다.
平面 구성은 급경사의 땅을 깎아
ㄴ字형으로 整地하여 臺地를 만들었다. 기둥은 上대웅전의 기둥이 강한 배흘림인 것과는 달리 경미한 배흘림의 모습이다. 건물 내부는 8칸의 넓게
트인 공간을 이루고 있다.
법당에 들어가면 보물 제337호 金銅 약사여래坐像을 마주 본다. 얼굴이 달걀
모양으로 갸름하고 눈·코·입도 부드럽다. 옷은 두 어깨를 다 감싸는 통견이지만 가슴께가 벌어져 속옷이 보인다. 光背는 木造이다.
이 약사여래의 몸 속에서 발견된 기록에 의하면 고려 忠穆王 2년(1346)에 조성된 불상이다. 국보
제58호 鐵造 약사여래坐像처럼 통일신라시대의 鐵佛 양식의 계보를 잘 지킨 佛像으로 평가된다.
오후 6시
무렵 장곡사에서 나오면서 주지 스님을 만나 다음날 아침에 다시 방문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국보 제58호 鐵造 약사여래坐像에 대한 사진 취재가
미흡했기 때문이었다. 이 鐵佛이 국보로 지정된 것은 石造臺座(석조대좌)가 결정적 역할을 한 셈인데, 그것이 큼직한 禮佛臺(예불대)에 가려져 있어
사진 촬영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주지 스님은 사진 취재에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다.
下山하면서 칠갑산
자연휴양림內 콘도나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으려 했지만, 피서철이라 방을 구할 수 없었다. 35℃를 넘나드는 폭염, 우선은 발이라도 담글 수 있을
만한 계곡이나 냇가를 찾아 나섰다. 칠갑산은 名山이지만 물이 부족한 산이다. 더욱이 최근에 가물어서 개천의 바닥도 말라 있었다. 물어 물어서
찾아간 곳이 댐 공사 중인 七甲池(칠갑지) 서쪽 다리 밑 개천이었다. 그러나 맑은 물이 아니었다.
運이
좀 나빴던 셈이다. 우리가 답사를 끝내고 上京한 바로 다음날인 7월4일 하루동안 청양에 큰비가 내렸다고 보도되었다. 후텁지근한 청양 읍내로 다시
들어가 잠자리를 구해야 했다.
靑陽고추의 짜릿한 맛
답사 이틀째인 7월3일 아침에는 여관 종업원의 추천으로 숙소에서 100m쯤 떨어진 부국식당으로 찾아가서 매콤한
올갱이국(5000원)으로 해장을 했다. 올갱이는 다슬기의 충청도 방언이다. 청양에 들르는 나그네라면 한 번은 찾아가 볼 만한 음식점이다.
청양고추, 제가 매우면 얼마나 매운지 눈 딱 감고 한번 도전해 보기로 했다. 검초록색 청양고추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온천지가 샛노랗게 보이고 입술이 부르틀 정도였다. 물을 먹는다, 맨밥을 먹는다, 이렇게 수선을 떨었더니 주방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까지 달려나왔다.
『좀 안 매운 청양고추 없소』라고 물었다.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좀 있는데, 주방 아주머니가 이번에는 연두색 고추 한 접시를 가져다 주면서 『금방 밭에 나가 따왔시유』 했다. 이런 것이 「충청도
아줌마」의 人情 아니겠는가. 이번에는 별로 맵지 않고 향긋했다.
다시 장곡사로 올라갔다. 주지 스님은
아침부터 출타 중이었다. 사찰의 직원이 上대웅전의 예불대를 치우고 촬영해도 좋다는 주지 스님의 허락을 전했다.
예불대는 굉장한 무게여서 둘만의 힘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침 上대웅전의 부처님을 拜見(배견)하려고 들어온 장골 두
명이 합세하여 예불대를 옮겨 놓고 사진 촬영을 했다.
正祖 개혁을 뒷받침했던 蔡濟恭의
고향 청양읍 중심가에는 여태까지 「이해찬 국무총리 취임을 축하합니다」라는 플래카드가 나붙어 있었다. 李총리는 靑陽
출신으로는 조선왕조 正祖 때 영의정을 지낸 蔡濟恭(채제공) 이후 처음으로 「宰相」(재상)이 된 셈이다.
채제공은 조선조 왕들 가운데 學德이 가장 높았던 正祖의 개혁노선을 적극 보좌했다. 그는 영의정 재임 중 천주교 처리문제에 대해 온건정책을
유지하여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를 확대시키지 않았다. 正祖가 총애한 丁若鏞(정약용) 형제 등 南人 畿湖學派(남인 기호학파)의 實學者들은 西洋의
근대학문을 연구하면서 어느덧 천주교도가 되었다. 正祖 재위시절의 조선왕조는 中興期(중흥기)를 누렸다.
蔡濟恭은 1799년 일흔아홉 살에 죽었지만, 正祖는 1800년 마흔여덟 살의 젊은 나이로 急死(급사)했다. 正祖의 죽음은 당시의 검시보고서에
의하면 毒殺(독살)의 가능성이 높다. 당시 정계의 다수파는 老論(노론)이었지만, 正祖는 蔡濟恭을 獨相(독상: 3人 정승의 역할을 1人의 정승이
修行함)에 임명하는 등 南人을 중용했다.
正祖의 죽음으로 조선왕조는 더 이상 更張(경장)을 추진하지
못하고 급속히 쇠퇴했다. 개혁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식견이 없는 집권자가 개혁한다고 떠들기만 하면 나라가 더 어지러워지게 마련이다.
正祖는 임금과 스승을 겸한다는 뜻의 「君師」로 불릴 만큼 식견이 높았고, 또한 實用主義를 重視(중시)했다.
모처럼 청양까지 와서 正祖 개혁정치의 핵심인물 蔡濟恭의 유적지를 둘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읍내 쪽으로 들어가 청양군의
맨서쪽 化城面에 있는 蔡濟恭의 사당 「尙義祠(상의사)」를 찾아갔다. 읍내에서 승용차로 36번 국도를 타고 10분쯤 달리다가 화성면 진입로로 길을
바꿔 조금 가면 화성중학교가 마주한다. 화성중학교 입구에서 우회전해 좁은 길로 500m쯤 더 들어가면 상의사 앞에 닿는다.
상의사의 문은 잠겨 있었다. 무려 30분 동안 상의사 관리인 집의 대문을 두드리며 고함까지 쳤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담
너머로 보니 상의사는 영당, 내·외삼문, 재실, 장판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매년 가을에 제향을 올린다고 한다.
콩국수로 늦은 점심을 먹은 후 보물 제18호 定山 西亭里 9층석탑을 보러 갔다. 청양군 정산면에서 公州로 가는 국도 36번
도로변 북쪽 논 가운데 서 있다. 9층에 이르는 다층탑인데도 불구하고 균형이 잘 잡혀 안정감과 경쾌감을 주는 석탑이다.
日帝 때인 1934년 9월 국보 제29호로 지정되었다가 1963년 1월 보물로 강등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잘생긴 9층석탑은
그리 흔치 않다. 2중 기단 위에 꽤 가파르게 9층이 올라갔는데, 지붕돌 크기의 遞減(체감)으로 멋진 比例美를 드러내고 있다. 높이 6m.
구조와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사찰의 탑이 확실하다. 9층이나 되는 큰 탑이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일대에 매우 큰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동산 붐으로 흥청거리는 땅 땅 땅
땅 9층석탑 쪽에서 定山面 중심가를 쳐다보니 「신행정수도부동산」, 「행운공인중계사」,
「행정타운컨설팅」, 「땅 땅 땅 땅」 등등의 요란한 간판이 난립해 있다. 面소재지로서는 사람과 차량의 통행량도 매우 많다. 외국어학원,
컴퓨터학원, 음악학원, 입시학원도 들어서 있다.
전국이 심각한 불경기의 늪에 빠져 있지만, 遷都(천도)
후보지 일대 또는 그 주변만은 예외인 것 같다. 부동산 바람이 조용한 시골마을이던 定山의 모습까지 변화시키고 있다. 충청도로 遷都(천도)를 하면
우리 경제가 거덜나고, 충청도로 천도를 하지 않으면 충청도 사람이 야단을 낼 것 같다.
定山에는
「天上天下逐鬼大將軍」(천상천하축귀대장군) 「東西南北中央逐鬼大將軍」 등이라 쓰인 장승들이 유별나게 많다. 장승들은 동구 밖에서 「마을의 지킴이」
노릇을 해 왔다.
그러나 이제 장승들은 그런 역할을 접어야 할 것 같다. 「땅 땅 땅 땅」 하는 판에
제자리를 지키기 어려울 것이다. 청양군은 장곡사 입구에다 300여 개의 장승으로 조성된 장승공원을 조성해 놓기는 했다. 하지만 사찰 밑
장승공원은 좀 어색하다. 장승은 역시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한적한 초가집을 배경으로 삼아야 제격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