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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寶紀行(27) - 國寶 제49호 修德寺 大雄殿

야생초요 2006. 7. 3. 13:07
國寶紀行(27) - 國寶 제49호 修德寺 大雄殿
 
고려 忠烈王 때(1308년) 지은 맞배지붕집
 
주변은 高僧과 志士들의 고향

글 : 鄭淳台 月刊朝鮮 편집위원〈st-jung@chosun.com〉
사진 : 趙明東 寫協홍보분과위원장〈chj011@hanmail.net〉

청순한 세련미
<국보 제49호 수덕사 대웅전의 아침. 백제적 곡선을 보여주는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 건물로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건립되었다.>

  충남 예산군 德山온천장 소재 관광호텔에서 1박한 사진작가 趙明東씨와 필자는 이른 아침 해장국으로 요기하고 인근 修德寺(수덕사)로 직행했다. 조계종 제7교구 本寺인 수덕사는 舊韓末에 鏡虛(경허) 스님이 머물며 禪佛敎(선불교)를 중흥시킨 이래 그 제자 滿空(만공) 스님이 禪風을 크게 일으켜 후일 우리나라 불교계의 4大叢林 중 하나인 德崇叢林(덕숭총림)을 껴안게 되는 절이다. 1911년 조선총독부의 사찰령이 반포되어 불교종단을 禪·敎 兩宗으로 통합하고 30本山制를 실시할 당시 수덕사는 충남의 大本山인 公州 마곡사의 末寺에 불과했었다.
 
  一柱門을 지나 긴 계단을 오르면 이 절의 집전의식의 장소인 黃河精樓(황하정루)다. 황하정루를 끼고 돌면 長大石으로 쌓은 축대 위에 동양화 한 폭 같은 金堂이 보인다. 바로 국보 제49호 修德寺 大雄殿(대웅전)이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구조로 된 맞배지붕집이다. 중간 부분이 부풀려진 배흘림기둥과 그 위에 ♥包(공포)를 올린 소박한 柱心包가 청순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평이한 빗살무늬로 장식된 세 쪽의 分閤門(분합문)도 한 마리 鶴(학)이 나래를 활짝 편 듯한 느낌을 준다.
 
  외부에 노출된 架構(가구)에 새로 단청을 입히지 않았다. 화장하지 않은 木材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세월의 나이테도 느끼게 한다. 대웅전은 고려 忠烈王 34년(1308)에 세워졌다. 건립 연대가 확실하고 조형미가 뛰어나다. 그런 점에서 한국 목조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건물이다.
 
  측면에 나타난 각 部材들의 곡선미는 이 대웅전이 現存 古건물 중 百濟式 부드러움의 美學을 계승한 유일한 木造건물로 평가받게 한다. 특히 소 꼬리 모양의 牛尾梁(우미량)은 그 白眉(백미)이다. 얼핏 보면 소박한 듯하지만, 실은 얕은 기교를 배제한 세련미의 극치이다.
 
  내부도 그러하다. 천장이 없어 내부 部材가 그대로 드러난 燃燈(연등) 천장이다. 특히 들보에 그려진 金龍圖(금룡도)는 고려시대 작품으로 그 가치가 높다. 바닥의 우물마루도 얌전하다.
 
  불단에 모신 三尊佛은 金堂의 크기에 비해 조금 왜소해 보인다. 1938년 滿空 스님이 전북 남원 歸政寺에서 옮겨 왔다. 現在佛인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왼쪽에 過去佛인 藥師如來佛(약사여래불), 오른쪽에 未來佛인 아마타불이 좌정하고 있다. 三世佛 양측에는 두 분의 挾侍菩薩像(협시보살상)이 배치되었다.
 
  수덕사 掛佛(괘불)은 보물 제1263호이다. 조선 顯宗 14년(1673) 4월에 수덕사에서 조성한 것으로 盧舍那佛(노사나불)이 그려져 있다. 괘불은 야외에서 法會를 할 때 걸어놓고 예배하는 의식용 佛畵(불화)이다.
 
 
 
 
  修德寺의 山內 암자들
 
  수덕사가 등을 대고 있는 德崇山의 암자들은 자연과 어우러져 秘境을 이룬다. 滿空 선사가 30세에 祖室이 되어 수많은 제자를 배출한 定慧寺 能仁禪院(정혜사 능인선원), 鏡虛·滿空·혜월 선사의 영정을 모신 金仙臺(금선대), 그리고 小林草堂(소림초당)·轉月舍(전월사)·香雲閣(향운각) 등 滿空 스님의 숨결이 느껴지는 암자가 어우러져 있다.
 
  滿空 스님은 日帝 말기에 우리 불교계를 지킨 분이었다. 1937년 조선총독부가 朝鮮 불교의 日本 불교화를 위해 31개 本山 주지들을 불러 모으자 滿空 스님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에게 직접 日帝의 불교정책을 힐책했다. 그는 근대 한국 禪의 중흥조인 鏡虛의 법제자로 스승의 선지를 계승하여 禪風을 드날렸다.
 
  滿空 스님은 1871년 전북 태인의 宋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13세 되던 1883년 공주 東鶴寺로 출가했다. 鏡虛 스님으로부터 傳法揭(전법게)를 받은 뒤 수덕사에 金仙臺를 짓고 참선하며 후학을 지도하여 德崇門中의 法脈을 형성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禪學院을 세우고, 선승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禪友共濟會運動의 지도자가 되었다. 말년에 덕숭산 頂上 가까이에 轉月舍라는 초가집을 짓고 지내다가 1946년 10월20일 입적하니 그의 나이 75세였다.
 
  一柱門 서쪽으로 난 숲길을 조금 걸으면 歡喜臺(환희대)와 만난다. 비구니들이 기거하며 수도하는 암자다. 이 암자에서 一葉 스님이 기거하다가 열반했다. 스님은 출가하기 前 속세에서 新여성 문필가로 날리던 金元周였다. 1920년에 문학활동을 시작해 문예지 「廢墟(폐허)」의 同人으로 참가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잡지 「신여성」을 간행하기도 했다. 1933년 수덕사에 入山하여 滿空의 제자가 되었다. 1962년에는 수상록 「청춘을 불사르고」를 출간했다.
 
 
  大院君의 시대착오적 發想―南延君墓
 
  덕숭산 頂上에 올라 동쪽을 보니 간밤에 1박한 덕산온천이 빤히 내려다보이고, 그 너머론 충청도 내포지방의 젖줄인 예당저수지가 펼쳐져 있다. 눈길을 북쪽으로 돌리면 바로 伽倻山(가야산)이 다가선다. 이곳까지 와서 가야산 기슭에 있는 南延君 묘소를 지나칠 수 없다.
 
  南延君 李球는 興宣大院君 昰應(하응)의 아버지다. 이하응은 가야사 金塔(금탑) 자리가 「2代 天子가 나올 明堂 자리」라는 풍수쟁이의 말을 믿고 절을 헌 다음, 경기도 연천에 있던 南延君의 묘소를 이곳으로 이장했다. 그때 운구에 사용된 상여는 현재 이곳 「남은들」 마을에 보존되어 있다.
 
  풍수쟁이의 말대로 이하응의 아들과 손자가 과연 차례로 황제에 올랐으니, 바로 500년 社稷(사직)을 망친 高宗과 純宗이다.
 
  南延君墓는 독일 사람 오페르트의 도굴사건으로 유명해졌다. 高宗 5년(1868) 2차에 걸쳐 통상을 요구하다 실패한 오페르트와 그 일당은 동년 5월 덕산군 고덕면 구만포에 상륙했다. 이들은 국내 천주교인을 길잡이로 앞세워 南延君墓에 도착, 어둠을 틈타 무덤을 팠다. 그러나 날이 밝아 오고 썰물 때가 다가온데다 마을 사람들까지 모여들기 시작하자 파낸 관곽을 그대로 버려 둔 채 달아났다.
 
  이에 대원군은 크게 분개하여 鎖國洋夷(쇄국양이) 정책을 더 한층 강화했다. 또 이 사건에 內應(내응)이 있었다고 하여 『잔존 천주학쟁이를 엄단하라』는 불호령을 내려 다시 한 번 피바람이 불기도 했다.
 
  1868년이라면 이웃나라 日本에서는 富國强兵(부국강병)을 위해 明治維新(명치유신)을 일으켰던 바로 그 해다. 이런 시기에 이 땅의 집권자 大院君은 風水地理說 같은 것이나 맹신하면서 나라의 근대화는 외면했다. 이런 점에서 南延君墓는 오늘의 우리에게 反面敎師(반면교사)의 역할을 하는 역사의 현장이다.
 
  墓碑(묘비)의 글씨는 아들인 흥선대원군의 친필인데, 과연 소문대로 名筆이다. 묘비문의 끝에 「崇禎 紀元後 四乙丑 三月 立」이라고 쓰여 있다. 西紀로 하면 1845년(헌종 11년)에 墓碑를 세웠다는 것이다.
 
  「崇禎(숭정)」이라면 1643년 3월 李自成의 반란군이 쳐들어오자 왕궁인 紫禁城 뒤편 景山에 올라가 자결한 明의 마지막 황제 毅宗(의종)의 年號이다. 그렇다면 200년 전에 사망한 「崇禎」을 들먹이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漢族의 왕조 明을 숭배하여 滿洲族이 세운 정복왕조 淸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식의 소치이다. 이런 위선적 慕華思想(모화사상)이야말로 민족적 자존심을 두 번 상하게 하는 것이다.
 
  李昰應은 정권을 잡는 데는 유능했지만, 그의 통치는 시대착오적이었다. 그는 후세교육에도 실패한 인물이다. 그의 아들 高宗과 손자 純宗이 써서 남긴 글씨를 보면 帝王으로서 부끄러울 정도의 拙筆들이다. 대원군은 南延君墓의 移葬보다는 가정교육에 더 신경을 썼어야 했다.
 
  南延君墓를 살피고 내려오다 우리 역사상 최고의 名筆이었던 秋史 金正喜(1786∼1856)의 古宅(고택)을 만났다. 안채로 드는 中門과 「ㅁ」자형 안채 뒤편 사당으로 오르는 一脚門이 書畵(서화)의 大家를 키워 낸 古宅답게 高雅(고아)하다.
 
 
  청산리대첩의 영웅 金佐鎭 장군의 生家
 
  禮山·洪城을 중심으로 하는 충청도 내포지방에는 근대 이후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金佐鎭(김좌진)·尹奉吉(윤봉길)·韓龍雲(한용운)·朴憲永(박헌영)― 이들 抗日鬪士가 모두 이곳 출신이다. 저녁밥을 먹으려고 서해안 쪽으로 향하다가 홍성군 갈산면 소재지에 이르렀는데, 金佐鎭 장군과 韓龍雲 스님의 생가 터를 알리는 안내판을 보았다.
 
  먼저, 靑山里 대첩으로 이름을 떨친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소재 白冶 金佐鎭 장군의 생가를 찾아갔다. 청산리 전투는 독립군을 소탕하려고 출동한 일본군 19·21사단을 北路軍政署(북로군정서) 총사령관 金佐鎭 장군의 부대가 靑山里·甲山 등지에서 반격하여 대승한 싸움이다.
 
  1920년 10월, 일본군은 북로군정서에 대한 협공작전을 개시, 함남 나남으로부터 제21사단을 北上시키는 한편 시베리아에 출전했던 제19사단을 南下시켰다. 이 정보를 입수한 북로군정서는 10월16일 金佐鎭을 총사령관, 羅仲昭(나중소)를 참모장, 李範奭(이범석)을 硏成隊長으로 임명하여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10월19일 일본군은 和龍縣(화룡현) 청산리 白雲坪(백운평) 삼림 속에 잠복하고 있던 독립군을 3면으로 포위했다.
 
  10월20일부터 나흘 동안 전개된 청산리 전투는 日帝 강점기에 벌어진 독립군의 전투 가운데 가장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金佐鎭 장군은 피하면서 싸우는 전술을 구사하여 도주하는 척하면서 적을 유인했다. 특히 좌우에서 공격하는 적을 독립군이 매복한 곳으로 끌어들여 사살하는가 하면 자기들끼리 총격전을 벌이게 함으로써 500명이 죽게 하는 전과도 올렸다.
 
  이 전투에서 임시정부와 中國軍의 발표로는 1300명, 일본군 발표로도 900여 명의 일본군인이 사살당했다. 반면 독립군의 피해는 전사 60명, 부상 90여 명에 그쳤다.
 
  金佐鎭 장군은 그 후 부대를 이끌고 黑龍江(흑룡강) 부근으로 이동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고, 부총재로 취임했다. 1921년에는 일본군의 보복작전을 피해 노령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5년 寧安에서 신민부를 조직해 군사집행위원장이 되고, 이어 城東사관학교를 세워 정예 장교를 양성했다. 1929년, 韓族聯合會를 조직하고 주석으로 취임, 독립운동으로서의 무장투쟁뿐만 아니라 在滿 韓族의 自立기반 조성에 힘썼다. 그 일환으로 세운 정미소에서 고장난 발동기를 수리하던 중 고려공산청년회 소속 金一星·朴相實 등이 쏜 흉탄을 맞고 절명했다(1930년 1월24일).
 
  金佐鎭은 1889년 부유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드넓고 번듯한 홍성군 행산리 生家의 모습에서도 그의 출신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벌써 15세 때 家奴를 해방하고 토지를 소작인에게 분배한 선각자였다. 16세 때(1905)에는 고향에 湖明學校를 설립하고 그해 11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上京하여 국권회복운동을 벌였다. 1913년 대한광복단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에도 힘썼다.
 
  행산리 生家 현장에서 참배객들에게 金佐鎭 장군의 생애를 설명해 주는 자원봉사자 鄭선생이 日帝 때 종로의 협객으로 일본인 야쿠자들을 제압한 金斗漢(김두한)의 출생 秘話를 들려 주었다. 칠순에 가까운 鄭선생은 고교에서 우리 역사를 가르치다 정년퇴임하신 분이다.
 
  『金佐鎭 장군이 일경에 쫓기다가 요리집 明月館으로 도피했습니다. 그런 金장군을 한 기생이 벽장 안에 숨겨 주었어요. 그런 인연으로 장군의 셋째 부인이 된 분이 金桂月 여사이며 바로 김두한의 生母입니다』
 
  1915년 金佐鎭은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했다. 1917년 석방되자마자 만주로 망명, 독립군을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여 나갔던 것이다.
 
 
  韓龍雲, 『그것만은 복종할 수 없습니다』
 
  다시 홍성군 갈산면 중심가 네거리로 나와 卍海路(만해로)로 들어섰다. 만해는韓龍雲 스님의 아호이다. 갈산면 무량리의 청룡산 기슭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결성면 성곡리에 이른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산자락에 기대 앉은 초가 한 채가 보인다. 이곳이 韓龍雲 스님의 생가 터이다. 1991년 생가 터에 복원된 草家지만 바자울을 돌리고 사립문을 달아 예스럽다.
 
  만약 韓龍雲이란 존재가 없었다면 광복 이후 우리 불교계는 진짜로 면목이 서지 않을 뻔했다.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를 관통한 그의 생애는 독립운동가·불교개혁가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진다. 1910년 「조선불교유신론」을 쓰고 1919년 3·1 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었다.
 
  3·1 운동으로 3년간 옥살이를 하고 나온 그는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했다. 1927년에는 통합민족단체인 신간회를 세우고 이끌었다. 1937년에는 불교 계통의 항일운동단체인 卍黨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만년에 朝鮮日報社의 方應謨(방응모) 前代 社主의 후원으로 서울 성북동에 거처 尋牛莊(심우장)을 마련하면서 『총독부 건물을 향해 집을 지을 수 없다』며 北向으로 지어 버렸다.
 
  韓龍雲은 「알 수 없어요」, 「님의 침묵」을 쓴 詩人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韓龍雲의 「님」은 조국과 민족이었다. 예컨대 「복종」과 같은 그의 詩에서는 조국과 민족에 대한 絶對 사랑을 「복종」으로 표현했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조아하야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십허요/ (中略)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업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랴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업는 까닭임니다>
 
  만해는 1879년 8월29일 가난한 농가에서 韓應俊(한응준)의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裕天이며 卍海는 호, 龍雲은 法名이다. 서당에서 漢學을 배워 아홉 살 때 벌써 「通鑑(통감)」을 읽었다. 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다가 실패하자 1896년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갔다. 1905년 인제의 백담사에서 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었다.
 
  1908년 일본에 가서 新문명을 둘러보고 당시의 첨단기술인 측량기술을 배워 서울 청진동에다 경성명진측량강습소를 설립, 측량기사를 양성했다. 日帝의 우리나라 토지 침탈에 맞서려는 노력이었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으로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에서 시국강연을 하고 만주·시베리아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일제의 皇民化운동, 創氏改名운동, 한국인 학병 출정 등을 반대하며 투쟁했다. 그는 『청년아! 만지풍설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매화의 貞節(정절)을 본받으라』고 외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