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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寶紀行(29) - 중앙박물관의 景福宮시대 告別展-金銅彌勒菩薩..

야생초요 2006. 7. 3. 13:09
國寶紀行(29) - 중앙박물관의 景福宮시대 告別展
 
세계미술사의 걸작품, 그 오묘한 미소
 
[국보 제78호]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글 : 鄭淳台 月刊朝鮮 편집위원〈st-jung@chosun.com〉
사진 : 趙明東 寫協홍보분과위원장〈chj011@hanmail.net〉

얼짱과 몸짱의 競艶(경염)
<국립중앙박물관 경복궁시대의 마감 기념으로 열린 특별기획전에 전시된 두 점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오른쪽은 국보 제78호, 왼쪽은 국보 제83호. 세계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절정의 걸작이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이하 「반가사유상」으로 표기)이라는 이름을 共有하고 있는 국보 제78호와 국보 제83호는 세계미술사에 冠絶(관절)하는 걸작품이다. 국보 78호와 83호는 지난 7월20일부터 10월17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지하 1층 불교조각실에 나란히 전시되어 관람객들을 매혹시켰다.
 
  이처럼 두 반가사유상을 함께 공개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중앙박물관 景福宮(경복궁) 시대의 마감을 기념하기 위해 이 특별기획전을 열었다. 전시회가 끝나면 중앙박물관은 서울 龍山의 새 청사로 이전한다. 새 박물관은 1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2005년 10월에 개관될 예정이다.
 
  이번 특별기획전은 우리나라 반가사유상이 지닌 오묘한 깊이와 아름다움을 체험하는 기회였기 때문인 듯 관람객들이 줄을 이었다. 모처럼 「좋은 모델」을 만나 데생에 여념이 없는 미술학도들도 적지 않았다. 전시회장에서 중앙박물관 미술부 불교조각 담당 金惠媛씨를 만났다. 청바지 차림의 新세대 연구자였다.
 
 
  「형언할 수 없는 거룩함」
 
  ─어느 쪽이 더 아름답습니까.
 
  『두 분 다 좋아요. 이쪽이 더 좋다가도 또 저쪽이 더 좋고, 왔다갔다 해요. 둘 다 풍부한 종교적 감성과 수준 높은 조형미를 갖춘 세계적 명작이죠』
 
  ─다 같은 반가사유상이지만, 두 분에 대한 느낌은 사뭇 다르죠.
 
  『제78호가 여성적·繪畵的(회화적)이라면 제83호는 남성적·입체적이에요. 78호는 寶冠(보관), 天衣, 목걸이, 팔찌 등 장식이 모두 화려하죠. 83호는 간결미가 압권이에요』
 
  ─윗옷을 벗은 83호를 보니 대단한 몸짱이군요. 360도, 어느 방향에서 쳐다봐도 완벽하군요.
 
  『78호의 얼굴 표정, 특히 입가에 머금은 미소가 참 오묘해요. 83호가 몸짱이라면 78호는 얼짱이죠』
 
  「金銅」은 구리(銅)로 형상을 만든 후 표면을 도금한 불상임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불상에 값비싼 金을 발라 번쩍거리게 하는 것일까. 그것은 불교 경전에 부처의 몸에서 금빛을 발한다는 표현이 많이 쓰여 있기 때문이다.
 
  「彌勒菩薩(미륵보살)」은 미륵불로 化現(화현)하기 前까지 하늘에서 수도하고 있는 보살을 말한다. 미륵불은 아득히 먼 미래에 이 세상에 내려와 衆生(중생)을 濟度(제도)한다는 불교의 메시아(救世主)이다. 우리나라에선 삼국시대, 특히 신라에 있어서는 미륵 신앙이 크게 유행했다.
 
  그러면 半跏(반가)란 무엇인가. 오른 다리를 왼 다리 허벅지 위에 걸친 책상다리를 말한다. 불상의 자세는 다음 세 가지로 대별된다. 즉, 누워 있는 臥像(와상), 앉아 있는 坐像(좌상), 서 있는 立像(입상)이다. 이 중에서 坐像은 다시 여러 종류로 나뉜다. 우리나라 양반의 앉음새와 비슷한 結跏趺坐(결가부좌), 두 다리를 가지런히 내린 倚坐(의좌), 그리고 앞에서 설명한 半跏 등이다.
 
  반가사유상에서 「思惟」(사유)는 머리를 약간 숙이고 한쪽 손을 뺨 가까이에 댄 모습으로 표현된다. 인도 불교에서 이는 生老病死(생로병사)에 대해 근심하거나 세속과 깨달음의 갈림길에서 고뇌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반가사유상은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이 다수이다.
 
  국보 제78호·제83호 반가사유상의 얼굴은 참으로 微妙(미묘)하다. 일찍이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씨는 이렇게 찬미했다.
 
  『슬픈 얼굴인가 하면 그리 슬픈 것같이 보이지도 않고, 미소짓고 계신가 하고 바라보면 준엄한 기운이 입가에 간신히 흐르는 미소를 누르고 있어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 없는 거룩함을 뼈저리게 해주는 것이 이 부처님의 미덕이다』
 
 
 
 
  국보 제78호의 화려함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은 해와 달 등을 화려하게 장식한 寶冠(보관)을 썼다. 자비심이 느껴지는 넓은 얼굴과 線刻(선각)으로 처리된 옷주름은 중국 東魏(534~550) 계열의 불상과 유사하다.
 
  불상의 두께는 3~8mm로 크기에 비해 매우 얇다. 허리는 앞으로 약간 구부린 상태이며 가늘다. 두 손목에는 팔찌를 끼었다. 왼손은 왼쪽 무릎 위에 올린 오른 다리의 발목을 잡았다. 오른손은 새끼손가락과 약손가락을 살금 구부린 채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으로 볼에 가볍게 대어 깊은 명상에 잠겨 있다.
 
  두 어깨를 덮은 天衣(천의)는 마치 날개 모양으로 아래로 뻗고 있고, 하반신에 걸친 치마는 배 앞에서 매듭을 지었는데, 아래로 내려와서는 도식화된 줄무늬로 마감했다. 몸 좌우에도 허리띠에 연결된 긴 장식띠가 길게 내려왔다. 연꽃 무늬의 발받침 위에 왼발을 놓았는데, 발가락이 손가락처럼 길다(높이 83.2cm).
 
  몸 뒤에는 光背(광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後頭部(후두부)에 광배를 고정시켰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6세기 말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1912년 경상북도 安東에서 발견되었다.
 
  제작지는 분명치 않으나 반가사유상이 많이 발견된 신라 또는 백제 지역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같은 학계의 다수설과는 달리 불상 연구자 강우방 교수는 뛰어난 주조기술과 긴장감 넘치는 인상 등의 이유를 들어 고구려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추론을 세우고 있다.
 
 
 
 
  국보 제83호의 생동감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은 부드러우면서 입체적 느낌을 준다. 이러한 특징은 중국 北齊(550~581) 불상과 맥을 함께한다.
 
  冠은 모티브가 간결하다. 세 개의 山이 솟은 모습이어서 「三山冠(삼산관)」이라 불렸다. 연꽃 잎과 닮았다고 해서 「蓮花冠(연화관)」이라고도 한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손을 뺨에 대고 있다. 얼굴은 달걀형이고 콧날이 섰다.
 
  상반신에는 옷을 걸치지 않았다. 손과 발은 생동감이 넘친다. 아래로 흘러내리는 치맛자락은 육감적인 상반신과 대조를 이룬다. 치마의 측면에는 碧玉(벽옥) 모양의 장식을 늘어뜨렸다.
 
  미륵보살이 앉아 있는 대좌는 연꽃을 뒤집어 놓은 듯한 모습이다. 발을 받치기 위한 연꽃 모양의 足座(족좌)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높이 93.5cm로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중에서 최대급이다. 제작연대는 7세기 전반의 삼국시대. 제작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백제 또는 신라로 추정된다. 일제때 경주 남산에서 발견되었다. 고고학자 황수영씨는 그의 저서 「반가사유상」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 금동상은 일제 초기에 일본에서 건너온 불법자들에 의해 은밀하게 약탈되어 곧 서울로 옮겨져 그 당시 문을 연 李王家 박물관에 매도된 것으로 전하여 왔다. (中略) 그 뒤 국립박물관장을 오래 지낸 오사카(大坂金太郞)씨가 광복 후 일본 마쓰에(松江)市로 건너가 은거 중일 때 필자가 그를 찾아가서 이 불상의 경주에서의 발견 장소에 대해 문의한 바 있다. 그는 (中略) 경주 五陵(오릉) 부근이 아니라 경주 南山 서쪽 산록 근처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하였다>
 
  황수영씨는 이 불상 반출과 관련한 口傳 등에 의거 발견 장소를 탐문했다. 그곳은 경주 남산 서쪽 禪房谷(선방곡)의 삼존석불(보물 제63호)이 서 있는 장소에서 작은 개울을 건너 望月寺(망월사) 경내 住持實(주지실) 터였다고 한다.
 
  <구한말 바로 이 자리에 김씨(남)와 오씨(여) 부부가 살았는데, 하루는 남편 김씨가 뒷산에 올라갔다 불상 하나를 지게에 지고 내려왔다. 그로부터 자기 집 가운뎃방을 법당으로 삼아 불상을 탁자 위에 모시고 공양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인 네댓 명이 이 집을 찾아와 법당을 기웃거리다 물러갔다. 다음날 새벽 공양을 위해 법당에 드니 불상이 사라졌다. 뒤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불상이 서울로 갔다 하였다.
 
  그날 사라진 불상이 과연 반가사유상인지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李王家박물관에서 입수하여 기록했던 당시 반가사유상의 모습은 김씨 부부가 모시던 불상과 비슷하다. 불상의 크기와 얼굴, 다리를 꼰 모습, 온몸을 희게 덧칠한 상태 등이 그러하다>
 
  지난 9월23일 국립박물관 대강당에서 열린 특별강연에서 강우방 교수는 국보 제83호가 백제에서 제작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지만, 여전히 신라 제작설이 유력하다. 그 논거는 다음과 같다.
 
  우선, 높이 80cm가 넘는 대형 반가사유상은 주로 신라지역에서 발견되고, 경북 奉化 北枝里에서 출토된 石造 반가사유상이 국보 제83호와 매우 유사한 모습이다. 또한 국보 제83호와 쌍둥이처럼 닮은 木造 반가사유상이 안치된 일본의 光隆寺(광륭사·코류지)를 「신라계 도래인」인 하타 가와가쓰(秦河勝·진하승)가 창시했다는 사실이다.
 
 
  코류지 思惟像의 제작국은 新羅―일본학계의 多數說
 
  일본 교토(京都)의 코류지가 소장하고 있는 木造 반가사유상은 일본 국보 제1호다. 우리 국보 제83호 金銅 반가사유상과 재료만 다를 뿐 매우 닮은 모습이다(높이 84.2cm). 코류지의 반가사유상은 서기 623년 무렵 신라에서 제작되어 일본에 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코류지 思惟像의 재료는 赤松(적송)이다. 일본의 초기 木造 불상은 대부분 노송나무(檜·히노기)로 만들어졌다. 일본에 적송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재질이 떨어진다. 우리나라, 특히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맞닿는 榮州 등지가 赤松 집산지이며 재질도 뛰어나다.
 
  둘째, 제작 기법이 일본의 방식과는 다르다. 일본 초기의 반가사유상은 나무의 外皮로부터 내부를 향해 조각하였는데, 코류지의 반가사유상은 木心에서 조각을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코류지 반가사유상은 통나무 한 토막을 깎아서 만들었다. 그 당시 일본에서는 이 만한 불상을 조성하려면 신체의 여러 부분을 따로 만들어 조립했다. 불상 조형의 발전사로 보면 통나무로 조각하는 것이 훨씬 발전된 단계이다.
 
  넷째, 「日本書紀」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 신라와 백제에서 일본에 불상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더욱이 코류지의 창건주는 하타 가와가쓰(秦河勝)라는 新羅系 호족으로 당시 왜국의 攝政(섭정) 지위에 있던 쇼도쿠(聖德) 태자와 매우 가까웠다.
 
  국보 제83호와 코류지의 반가사유상은 쌍둥이라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세부 묘사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 우선 코류지 사유상의 臺座(대좌)가 제83호의 대좌보다 폭이 넓다. 대좌를 가리고 있는 옷자락을 보면 코류지의 것이 좀더 무거운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제83호는 생동감 있고 변화가 많으며, 코류지의 반가사유상은 상대적으로 차분하고 정적인 느낌을 준다.
 
  코류지의 반가사유상을 관찰한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다음과 같이 찬미했다.
 
  <일본 코류지의 미륵반가사유상에는 실로 완전히 완성된 인간실존의 최고 이념이 남김없이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지상에 있는 모든 시간적인 것과 어떠한 형태의 속박을 초월해서 도달한 인간존재의 가장 청정한, 가장 원만한, 가장 영원한 모습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다>
 
  코류지의 반가사유상은 20여 년 전에 뜻밖의 수난을 당한 바 있다. 한 젊은 관람객이 갑자기 대좌로 뛰어올라 반가사유상을 꼭 껴안았는데, 이 헤프닝에 의해 불상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사고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부러진 새끼손가락을 주워 잽싸게 도망을 쳐버렸다.
 
  많은 일본 국민들은 그가 하루빨리 손가락을 갖고 나타나기를 기원하는 법회에 참석하거나 신사참배를 했다. 며칠 후 범인이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는 코류지의 반가사유상을 연모한 대학생이었다.
 
  코류지의 반가사유상은 장시간 접합수술을 받은 후 복원되었다. 범인은 선처를 바라는 일본국민들의 진정서가 쇄도하는 등의 정상이 참작되어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이런 과정에서 중대한 사실 하나가 밝혀졌다. 부러진 손가락을 정밀조사해 본 결과 나무의 재질이 한국산 적송이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코류지 반가사유상의 제작국은 新羅라는 것이 일본 학계의 다수설이 되었다.
 
 
 
 
  통일신라 이후 소멸된 「夭折의 美」
 
  반가사유상은 멀리 간다라(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처음 造像(조상)되어, 그 기법이 중국을 거쳐 6세기에 한국에 전해졌다. 상반신을 앞으로 숙인 채 깊은 생각에 빠진 그 優美(우미)한 모습은 불교 전래 초기의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인도나 중국의 반가사유상은 출가 前 싯다르타 太子의 像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반가사유상은 미륵보살의 형상이다. 미륵신앙은 6세기 이후 신라·백제·고구려에서 모두 성행했다. 백제의 옛땅인 충남 서산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관음상과 반가사유상이 三尊의 형태로 배열된 특이한 석불(국보 제84호 서산 마애삼존불상)이 있다.
 
  신라에 있어서 미륵신앙은 花郞(화랑)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발전했다. 화랑은 미륵보살의 化身(화신)으로 숭배되었던 것이다. 화랑을 중심으로 한 집단(花郞徒·화랑도)는 가무음곡·도덕교육·군사훈련 등을 통해 전투집단의 중추가 되었다.
 
  신라의 수도 경주 교외에 솟아 있는 斷石山(단석산: 827m) 정상 부근의 큰 석굴에 불상 10구가 새겨져 있다. 국보 제199호 신선사 마애불상群(군)이다. 불상들 중 반가사유상은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추측컨대 하늘 아득히 먼 저쪽 도솔천에서 수행 중인 미륵보살을 나타낸 것 같다. 약간 떨어진 큰 바위에는 여래상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도솔천에서 下生한 미륵여래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단석산은 17세의 소년 화랑 金庾信의 수련처인 「중악석굴」로 比定되고 있다.
 
  그러면 왜 화랑이 미륵보살의 化身으로 생각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미륵이 下生한 국토야말로 豊樂安寧(풍락안녕)한 일종의 유토피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구려·백제·신라가 치열하게 싸웠던 6세기 후반의 삼국시대에 미륵보살의 下生은 自國의 번영과 安泰를 의미했던 것이다. 특히 화랑들은 전투에서 전사하더라도 미륵보살이 계시는 도솔천으로 上生하여 미륵과 함께 下生할 것을 믿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가 되면 아미타·약사여래 등에 대한 신앙이 성행하면서 미륵사유상은 급격히 소멸한다. 그 이유에 대해 강우방 교수는 특강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세계관·인생관이 바뀌면서 신앙의 대상도 바뀌는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 준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결코 변하지 않은 것은 석가여래와 석가의 자비심이 형상화된 관음보살이에요. 미륵은 56억7000만 년 후에 내려온다는데, 그건 안 온다는 얘기와 마찬가지 아닙니까. 결국 믿을 것은 석가뿐이라는 겁니다. 미륵신앙은 우리나라에서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에 걸치는 한 세기 동안 크게 유행하면서 세계적 걸작품을 남겼지만, 소멸하고 만 것은 絶對와 영원을 지향하는 인간의 마음을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는 점을 증명하는 거죠. 그런 점에서 삼국시대의 반가사유상만이 나타냈던 독특한 美感은 「夭折(요절)의 美」라고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