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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寶紀行(25) - 國寶 제8호 聖住寺 郎慧和尙 白月光塔碑(忠南 ..

야생초요 2006. 7. 3. 13:06
國寶紀行(25) - 國寶 제8호 聖住寺 郎慧和尙 白月光塔碑(忠南 보령시)
 
新羅의 두 天才 崔致遠이 짓고 최언위가 쓰다
 
88세에 죽은 禪僧을 기린 5120字의 名文

글 : 鄭 淳 台 月刊朝鮮 편집위원〈st-jung@chosun.com〉
사진 : 李 五 峰 月刊朝鮮 사진팀장〈oblee@chosun.com〉

無染國師의 부도탑 碑文
<국보 제8호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이번 국보기행에는 月刊朝鮮 임직원 31명이 단체로 참여했다. 月刊朝鮮의 2004년 봄 MT가 충남 保寧市(보령시) 대천해수욕장 인근 한화리조트에서 열렸는데, 그 이틀째인 4월28일 인근 聖住寺(성주사)와 聖住山을 답사했다.
 
  보령은 유서 깊은 역사의 고을이지만, 충청도 사람들이 아니면 어딘지 잘 모르는 것 같다. 대천해수욕장이 있는 곳이라 해야 대번에 『아, 거기』라는 반응을 보인다. 1986년 대천읍이 보령군에서 떨어져 나와 市가 되었는데, 10년 만인 1995년 보령군과 대천시가 다시 보령시로 통합되었다.
 
  36번 국도를 통해 대천해수욕장을 빠져나와 40번 국도를 타면 곧 명천동 소재 보령시 청사이다. 보령시청과 그 이웃의 보령문화예술회관 앞을 지나 성주터널을 벗어나자마자 부여로 가는 길과 먹방으로 갈리는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부여 가는 길을 버리고 먹방 쪽으로 10분쯤 걸어가면 길 왼쪽으로 돌담을 친 1만여 평의 유적지가 나온다. 이곳이 사적 제307호 聖住寺 터(보령시 성주면 성주리)다.
 
  성주사 터는 그 주위가 고만고만한 산들로 포근히 둘러싸인 분지에 위치해 있다. 성주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계곡물을 발치에 두고 南面한 절터 1만여 평은 신록과 돌탑, 그리고 나지막한 돌담이 어우러져 매우 고즈넉하다. 신록의 연두색이 얼마나 아름다운 색깔인지, 바로 여기서 실감할 수 있다.
 
  국보 제8호 郎慧和尙♥光塔碑(낭혜화상보광탑비)는 성주사 터 서북단에 자리잡고 있다. 그 碑文(비문)은 신라 최고의 문호 崔致遠(최치원)이 지은 四山碑文(4산비문) 중 하나로 유명하다. 글씨는 그의 사촌동생이며 羅末麗初의 최고 지식인으로서 고려 太祖 王建의 사랑을 받은 최언위(初名은 崔仁♥)가 썼다. 郎慧는 신라 下代의 선승 無染國師(무염국사)의 諡號(시호)이며, 白月♥光은 塔號(탑호)이다.
 
  고승대덕의 비문 찬술은 대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 먼저, 고승이 입적하면 문도들이 화장을 한 다음 수습된 사리를 봉안하려고 부도를 세우게 되는데, 이때 국왕에게 諡號 및 塔號를 내려 줄 것과 비석 건립 및 비문 찬술을 요청한다. 국왕은 文翰(문한)을 담당한 관리에게 비문을 찬술토록 명한다. 낭혜화상 부도의 碑文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 찬술된 것이다.
 
 
 
 
  張良보다 뛰어난 인물로 묘사된 郎慧無染
 
  최치원은 四山碑文을 찬술할 때마다 부도 주인공을 그보다 앞선 역사적 인물과 대비하는 문장 서술의 패턴을 보였는데, 낭혜화상 부도의 비문에서는 漢 고조 劉邦(유방)의 軍師(군사)인 張良(장량)과 無染을 대비시켰다. 비문의 총평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이 대목이 나온다.
 
  <(大師의) 先祖(태종무열왕과 문무왕)는 두 적국(백제와 고구려)을 평정하고, (중략) 大師(무염)는 여섯 魔賊(마적)을 항복시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內面의 德을 닦도록 하였다. (중략) 저 文成侯(문성후: 張良)는 漢 高祖의 스승이 되어 萬戶에 封해지고 列侯의 位에 오른 것을 크게 자랑하여 韓나라(戰國七雄의 하나) 재상의 자손으로서 최고의 일로 여겼으니 비루하도다. 그가 仙道를 배움에 있어 (중략) 중도에 그쳤으니 鶴(학)의 등 위에 탄 한낱 幻想의 몸이 되었을 뿐이다. 어찌 우리 大師가 처음에 속세를 벗어나고 중도에 대중을 구제하고 끝에는 자기 몸을 깨끗이 한 것과 같겠는가>
 
  이렇게, 崔致遠은 張良과 無染의 일생을 비교하면서 후자가 더 뛰어났다고 평가했다. 그가 왜 하필이면 無染과 張良을 對比했던 것일까. 두 사람 모두 임금의 스승이었다는 공통점을 지녔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漢제국 창업 제1의 공신 張良은 劉邦이 초패왕 項羽를 敗死시키고 天下를 얻자 神仙術을 배운다는 구실로 몸을 숨겼던 賢者였다. 王朝史를 되돌아보면 創業功臣은 그 功이 높을수록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어렵다. 과연, 자신의 食邑 중 3분의 2를 나라에 도로 바치고 漢 高祖의 곁을 미련없이 떠나버린 張良은 明哲保身에 성공했지만, 戰必勝(전필승)의 명장 韓信은 封爵(봉작)에 연연하다가 결국은 숙청의 회오리 속에서 狡兎死 走狗烹(교토사 주구팽), 즉 사냥철이 지나면 사냥개가 푹 삶겨 보신탕이 된다는 기막힌 유언을 남기고 목이 달아났다.
 
  그렇다면 國師로서 무염의 활동은 무엇일까. 비문에 의하면 무염이 국사가 된 것은 경문왕 11년(871)의 일이지만, 헌안왕 즉위 때(857) 이미 왕에게 다음과 같은 좌우명을 제시했다.
 
  <헌안왕이 왕위를 이어받음에 미쳐 글을 보내 말씀을 구하니 대사가 『周豊이 魯公에게 대답한 말이 깊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禮經에 실려 있으니 청컨대 자리 곁에 새겨 두십시오』라고 하였다>
 
  875년 경문왕이 별세하고 헌강왕이 즉위하여 도움을 청하자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옛 스승으로는 六籍이 있고, 오늘날의 보필로는 三卿이 있습니다. 늙은 山僧이 무엇하는 자인데, 앉아서 계수 같은 땔나무와 옥 같은 쌀밥을 좀먹고 있겠습니까. 다만 세 글자로 써 남겨 드릴 것이 있으니, 「能官人」(사람을 잘 골라서 벼슬을 주는 것) 그것입니다>
 
  위의 인용문을 보면 무염은 禪僧이면서도 유교적 정치이념에 따른 王道政治를 지향할 것을 국왕에게 강조했다. 崔致遠도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하여 정치개혁을 시도했다. 두 사람은 육두품 출신의 入唐 유학파라는 공통점도 지니고 있다.
 
 
  唐나라에서 「東方대보살」로 불린 禪僧
 
  낭혜화상비는 귀부(거북받침돌) 위에 塔身을 세우고 이수(머리돌)를 얹었는데, 신라시대의 비석으로는 가장 크다(높이 3.12m). 碑身은 대리석, 그 나머지는 모두 화강암이다. 碑座의 구름 무늬와 이수의 연꽃 무늬, 용틀임 등은 돌조각 예술의 극치로 손꼽힌다. 거북의 얼굴 부분은 조금 깨어졌지만, 등허리에는 이중의 육각 무늬가 선명하고, S자 모양의 꼬리는 매우 앙증맞으면서도 율동적이다. 거북의 몸체가 흙 속에 묻혀 있었는데, 1974년에 보수 복원되었다.
 
  碑身은 높이 251cm, 너비 148cm인데, 그 앞면에 총 5120字의 長文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다. 우선, 이 탑비는 무염과 성주사에 관한 현존 최고·최대의 자료일 뿐 아니라 찬자인 崔致遠의 사상과 문학을 이해하는 데도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나아가 국왕을 포함한 중앙정치 세력과 禪宗과의 교류라든가, 당시 운용된 僧政 및 신분제의 일면을 파악하는 데도 긴요한 것이다.
 
  無染(800~888)은 당시 대표적 禪僧(선승) 가운데 한 명이었다. 태종무열왕의 9세손으로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불렸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金範淸이 진골에서 육두품으로 族降(족강)되었던 만큼 그도 육두품의 신분이었다. 무염은 열세 살 때(812) 설악산 五色石寺로 출가했고, 부석사의 釋澄(석징)에게 화엄학을 배웠다.
 
  스물세 살이 되던 해인 822년에는 唐나라로 건너가 終南山 至相寺(종남산 지상사)에서 공부하고 이어 麻谷寶澈(마곡보철)의 문하에서 수행하여 인가를 받았다. 長安 남쪽의 至相寺라면 일찍이 義相(의상)대사가 중국 유학 시절에 10년간 머물며 화엄을 깨친 절이다. 무염은 마곡보철에게 法을 전수받은 후 중국 곳곳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펴 「東方대보살」로 회자되었다.
 
  唐에 유학한 지 25년 만인 文聖王 7년(845)에 귀국하여 당시 정계의 實勢였던 金陽의 권고로 烏合寺의 주지가 되었다. 무염은 현실과 유리된 교리에 빠져 있던 당시의 敎宗을 비판, 理論에 의존하지 않는 以心傳心의 修道를 중시하는 無舌吐論(무설토론)을 주창했다. 무염이 가람을 크게 중창하면서 聖住寺라 일컫자 크게 번창하여 그를 따르는 제자가 2000명에 이르렀고, 이들이 뒷날 九山禪門의 하나인 聖住山門을 이루었다.
 
  무염은 88세 때인 888년에 입적했다. 탑비는 입적한 지 두 해 뒤인 진성여왕 4년(890)에 세워졌다. 탑비 옆에 있었을 부도는 멸실되었다.
 
 
  金仁問의 封地에 소재한 願刹
 
  九山禪門의 하나로 이름 높았던 聖住寺. 이곳에선 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조의 유물들이 무더기로 출토되었다. 경내엔 보물 19호 5층석탑, 보물 20호 중앙3층석탑, 보물 47호 西3층석탑, 지방문화재인 東3층석탑, 石燈(석등) 등도 있다.
 
  성주사지는 남쪽을 제외한 3面의 가장자리에 돌담을 쌓은 것을 제외하고는 폐허 그대로의 모습이다. 충남대학교 박물관은 1991년부터 1996년까지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성주사 터의 중심과 주변 부분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발굴조사 결과 이 자리에 백제시대부터 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 내고, 聖住寺가 창건될 당시의 가람배치와 그 이후 가람배치의 변천 양상을 규명했다. 현재, 金堂址(금당지), 三千佛殿址(삼천불전지), 회랑지, 중문지, 강당지 등의 건물터가 모두 드러나 있다.
 
  聖住寺가 창건되기 이전의 遺構(유구)에서는 백제시대의 사찰인 烏合寺의 와당과 기와편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烏合寺는 백제의 法王이 즉위 직전의 왕자 때(599) 초창된 호국사찰이었다. 백제가 멸망한 후에는 신라 태종무열왕의 차남인 金仁問의 원찰이 되었다.
 
  金仁問이라면 신라의 삼국통일에 있어 그 공훈이 金庾信에 버금가는 文武兼全의 인물이다. 羅唐 7년전쟁 기간 중인 674년, 唐 고종은 도전적인 文武王의 관작을 삭탈하는 대신 唐京에 체재 중이던 그를 신라국왕으로 봉하는 사태가 벌어졌을 때 兄王(문무왕)에 대한 그의 처신은 참으로 칭송받을 만했다. 그의 설득으로 唐 고종도 그 非현실성을 깨닫고 책봉을 취소했던 것이다.
 
  金仁問은 전후 20여 차례에 걸쳐 入唐 외교활동을 벌였던 만큼 그 교통로상에 있는 보령 일대는 그와 특별한 관계가 있었던 같다. 낭혜화상탑 비문에도 오합사(聖住寺) 일대가 낭혜화상의 선조 臨海郡公(金仁問)의 食邑이었다는 史實이 적시되어 있다.
 
  신라 下代에 들어서도 오합사는 金仁問의 5세손인 金周元系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金周元은 777년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알천이 범람, 경주에 건너오지 못하는 바람에 즉위하지 못했던 인물이다. 그후 오합사는 화재에 의해 소실되었는데, 847년 그 자리에 선종사찰인 聖住寺가 무염에 의해 중창되었던 것이다. 중창시기에 무염을 도운 후원자가 문성왕대의 實勢 金陽인데, 그도 金周元系이다.
 
  성주사 터 인근 지역엔 성주산 자연휴양림, 심연동 계곡, 석탄박물관 등 관광 명소가 있다. 月刊朝鮮 답사단은 화장골 계곡에서 성주산 자연휴양림을 거쳐 만수산을 넘어 심원동 계곡으로 내려왔다. 1990년대 전반까지 석탄을 채굴했던 곳이어서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곳은 또한 烏石의 명산지이기도 하다. 우리 일행은 오후 1시30분쯤 심원동 계곡에 도착했다.
 
 
  밴댕이 찌개의 맛과 서해 落照의 낭만
 
  이곳에 위치한 동방회관(041-934-8075)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싱싱하고 부드러운 육질의 오리백숙이 일품이었다. 이번 답사에서 충청도 음식이 전라도 음식에 비교하면 뒤쳐진다는 선입견이 깨졌다.
 
  기왕에 음식 얘기가 나온 김에 하나 더 붙이고 싶다. 답사 첫날, 보령의 소문난 조림집인 수정식당(041-936-2341)에서 점심으로 먹은 밴댕이 찌개도 별미였다. 마침 밴댕이가 기름이 올라 맛있는 철이기는 했다. 값은 1인당 6000원. 반찬으로 나온 조개젓갈도 이 지방의 토속적인 맛을 대표할 만했다.
 
  내포지방의 젖줄인 예당저수지와 백제부흥군이 처음 봉기한 곳이자 마지막 거점인 임존성 앞을 거쳐 아산시 도고온천으로 북상했다. 여기서 온천욕을 하고 다시 서해안고속도로 귀경했다. 수평선에 걸려 서해 바다를 벌겋게 물들이는 落照가 황홀했다.●


◆ 崔致遠과 四山碑文

四山碑文이란 성주사 낭혜화상비, 河東 쌍계사 眞鑑선사부도비, 문경 봉암사의 智證대사부도비, 경주 초월산 崇福寺碑를 말한다. 모두 신라 말의 대문호 崔致遠(857~?)이 지었다. 그렇다면 유학자인데도 불구하고 고승들의 비문을 도맡아 지어야 했던 崔致遠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지증대사부도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새겨져 있어 흥미롭다.

<다시 생각컨대 唐나라 유학은 저쪽이나 이쪽이나 다같이 하였는데, 누구는 스승이 되고 누구는 일꾼이 되니, 心學者는 고귀하고 口學者는 고달프단 말입니까. (중략) 그런데 心學者가 德을 세우고 口學者가 말을 세운즉, 저 德은 말(言)에 기대야 일컬을 수 있고, 이 말은 덕에 의지해야 오래 가니, 일컬어져야 마음을 멀리 뒷사람에게 보일 수 있고, 오래 가야 입 또한 옛사람에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할 만한 일을 할 수 있을 때 하게 되었으니, 또다시 어찌 감히 실속없는 글이라 하여 굳게 사양만 하겠습니까>

四山碑文은 오늘날 신라史 연구에 있어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지만, 崔致遠으로선 좀 성가신 일이었던 듯하다. 그는 봉암사비와 숭복사비의 비문 작성을 청탁받은 지 4, 5년이 지나도록 찬술을 마치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또다시 聖住寺 비문 찬술을 명령받자 그는 처음엔 간략하게 지으려고 했다. 그러나 無染 문하의 거듭된 주문과 재촉을 받고 결국은 5000자 넘는 장문을 짓고 말았던 것이다.

경주 사량부의 육두품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2세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17세 때 과거에 급제했다. 879년 黃巢(황소)의 난 때 회남절도사 高騈(고변)의 종사관이 되어 「討황소 檄文」을 써서 이름을 떨쳤다. 29세에 귀국하여 이듬해 진성여왕에게 「時務 10여조」를 올려 아찬(16개 관등 중 제6위)의 벼슬을 받았다. 그의 포부는 내란과 骨品制의 벽에 부딪혀 이뤄질 수 없었다. 이에 절망한 그는 40세의 나이로 지방관직에서 물러나 각지를 유랑했는데, 이후의 행적은 전설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