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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寶紀行(30) - 八公山 자락을 돌다(上)-제2 석굴암,인각사

야생초요 2006. 7. 3. 13:10
國寶紀行(30) - 八公山 자락을 돌다(上)
 
慶州 석굴암의 母胎가 된 우리나라 석굴사원의 효시
 
[國寶 제109호] 軍威 삼존석굴

글 : 鄭淳台 月刊朝鮮 편집위원〈st-jung@chosun.com〉
사진 : 趙明東 寫協홍보분과위원장〈chj011@hanmail.net〉

그냥 지나칠 수 없는 多富洞
<밤 8시경 군위 삼존석굴(국보 제109호). 500W짜리 전구로 天然석굴의 내부를 밝혔다.>

  만추의 금요일인 지난 10월25일 아침, 사진작가 조명동씨와 필자는 八公山(팔공산)을 향해 東서울 IC(인터체인지)를 통해 중부고속도에 진입했다. 이천까지 남행한 승용차는 호법IC를 통해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동진한 데 이어, 南원주 IC를 거쳐 중앙고속도로를 남진하는 코스를 거쳐 경북 칠곡군의 多富洞(다부동) IC를 빠져나왔다. 다부동 IC 바로 건너편 언덕 위에 다부동 전적기념관이 서 있다.
 
  여기서 국도와 지방도를 50리만 더 달리면 국보기행의 첫 목적지인 경북 군위군 부계면의 제2석굴암이지만, 다부동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대구 북방 22km에 위치한 다부동은 6·25 전쟁 때 낙동강 방어선의 최대 격전지였다. 이 마을 앞으로는 상주와 안동에서 대구로 통하는 5번 국도와 25번 국도가 한 가닥으로 합쳐져 지나고, 낙동강변의 고을인 왜관에 이르는 908번 지방도로의 시발점이 되는 곳이다.
 
  해발 837m의 유학산이 다부동의 북방을 가로막고 있고, 동쪽으로는 해발 902m의 架山(가산)이 버티고 있어 방어전에 매우 유리한 지형이다. 다부동 방어전은 멸망 직전의 대한민국을 지켜낸 결전이었다. 먼저, 다부동전투에 참전한 전몰장병 이름을 새긴 비(名刻碑)를 참배했다. 다부초등학교 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다부전승비」가 서있다. 여기서 북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협곡 사이로 한 가닥 도로가 이어져 있다. 이 도로를 15리쯤 북상하면 천평리 삼거리가 나오는데, 천평삼거리에서 상주로 이어지는 25번 국도와 군위로 이어지는 5번 국도가 갈라진다.
 
  천평리 삼거리에서 남쪽의 다부초등학교 옆으로 이어지는 길(5번 국도 및 25번 국도가 합쳐져 있음)이 다부동전투 때 국군 제1사단에 배속된 美 제27연대와 북한군이 최대의 기갑전과 포격전을 벌였던 「볼링 엘리(좁은 길)」이다.
 
  다부초등학교에서 25번 국도를 8km 남진하면 동명초등학교가 보인다. 다부동 방어전에서 승리한 국군 제1사단(사단장 白善燁 준장)의 사령부가 위치했던 곳이다. 동명초등학교 앞을 지나면 바로 동명삼거리, 여기서 좌회전하여 79번 지방도로로 들어서 10여 리를 달리면 팔공산도립공원 경내로 들어선다.
 
 
 
 
 
 
 
 
 
 
 
 
  天然석굴 속에 펼쳐진 투박한 간결미
 
  만추의 팔공산 순환도로는 단풍으로 절경을 이룬다. 도립공원 초입에서 30여 리를 달리니 「제2석굴암」이라는 푯말이 나타난다. 벌써 오후 5시에 가까웠다. 절 입구에서 계곡 위에 걸린 극락교를 건너면 石造(석조) 비로자나불 좌상(유형문화재 258호)이 마주보인다. 비로자나불 좌상에서 발길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비로전, 그곳을 지나면 다시 계곡 위로 석불교가 걸려 있다.
 
  석불교를 건너면 「鶴巢臺(학소대)」라는 이름의 절벽과 마주친다. 이 거대한 절벽 중턱 화강암 동굴 안에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바로 국보 제109호 軍威(군위) 삼존석굴이다. 경주 석굴암은 人工 석굴이지만, 군위 삼존석굴은 天然(천연)이다.
 
  석굴로 오르는 계단 앞의 철문은 잠겨 있었다. 참배객들은 비로전 앞 마당에서 멀찍감치 떨어진 채로 삼존불을 배견해야 한다. 종무소로 찾아가 문을 두드렸더니 노지심(水滸志의 108 두령 중 1인)처럼 체격은 우람하지만 얼굴은 아직 소년티가 완연한 동자승이 얼굴을 쑥 내밀었다. 동자승에게 주지스님의 행방을 물었더니 선뜻 앞장을 섰다. 동자승의 안내로 마침 저녁 공양 중이던 주지 法燈(법등) 스님을 만나 취재 협조를 요청했더니 스님은 쾌하게 허락했다. 동자승이 열쇠를 들고 우리 일행을 뒤따라와 철문을 열어 주었다.
 
  절벽 옆구리에 가설된 층층다리를 잠시 오르면 암벽의 중간지점인 지상 약 22m 지점에 석굴이 남향하고 있다. 석굴 입구의 높이는 4.3m, 천장은 아치형이다. 이 석굴 안에 봉안된 삼존불은 본존인 아미타불과 그 좌우의 관세음보살과 大勢至(대세지)보살이다. 삼존불의 투박한 간결미가 돋보인다.
 
  이 석굴은 경주 토함산 석굴암보다 조성시기가 1세기 앞선 것으로 신라 석굴사원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입구에서 약 1m 안쪽에 설치된 높이 50cm의 좌대 위에 아미타불이 좌정하고 있다. 이 본존불의 높이는 2.88m.
 
  굳이 불교신자가 아니라도 「나무아미타불」 정도는 누구나 외고 있는 염불이다. 「나무」를 우리말로 풀이하면 「귀의한다」는 뜻이다. 「아미타불」은 西方淨土(서방정토), 즉 극락세계를 다스리는 부처님의 이름이다. 그러니까 「나무아미타불」은 극락의 주인에게 극락行을 청원하는 염불인 것이다.
 
  아미타불의 얼굴은 둥굴고 풍만하지만 입을 굳게 다문 엄숙한 모습이다. 육계(상투)는 별 꾸밈이 없이 큼직하다. 커다란 두 귀는 양 어깨까지 내려졌다. 어깨는 넓게 벌어져 장대한 느낌이다. 짧고 곧은 목의 처리로 더욱 엄숙하게 보인다.
 
  법의는 섬세하게 온몸을 휘감았다. 발과 발목을 표현하지 않고 법의로 가렸다. 뒷벽에는 光背(광배)가 조각되었는데, 頭光(두광)과 身侊(신광)으로 구분하고 둘레에 火焰文(화염문)을 새겼다. 좌우의 挾侍佛(협시불)은 본존불 쪽을 향해 허리를 약간 비튼 立像(입상)이다.
 
  본존 왼쪽(向우측)의 협시불은 觀世音(관세음)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를 根本誓願(근본서원)으로 하여, 고통받은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보살이다. 왼손은 자연스레 내린 채 감로병을 들었고,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있다. 목에는 세 가닥 주름(三道)이 뚜렷하고, 두 겹 목걸이를 걸었다. 통통한 팔과 도톰한 손등이 여성스럽다. 손목에는 팔찌를 끼었다.
 
  흘러내리는 천의는 발목을 덮었다. 소박한 대좌 위에 놓인 두발은 모나고 투박하다. 머리 뒤로 연결된 寶珠形(보주형) 頭光에는 연잎 무늬와 당초무늬를 표현했고, 다시 그 바깥으로는 타오르는 불꽃무늬를 돋을새김했다.
 
  관세음보살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지극한 사랑은 이곳에서도 확인된다. 사람들의 손길이 무수하게 닿은 양볼과 두다리 등에는 까맣게 손때가 묻어 반질거린다.
 
  본존 오른쪽(向좌측)의 협시불은 지혜의 광명을 모든 중생에게 두루 비추어 해탈에 이르는 힘을 북돋워 주는 大勢至보살이다. 왼쪽의 협시불과 매우 닮은 모습이지만, 오른발 대신 왼발을 가볍게 구부린 점, 왼손을 불룩 내민 배 위에 올려 놓은 점에서 차이가 있다.
 
 
  팔공산 자락의 찬란한 아침
 
  삼존불을 관찰하고 있는데, 法燈 스님이 다가왔다. 스님은 이런저런 필자의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스님에 따르면 이곳은 신라에서 아직 불교가 공인되지 않았던 제19대 눌지왕 때(417~457) 阿道(아도) 화상이 숨어서 수도·전법하던 「아도굴」이라고 했다.
 
  아도화상이라면 고구려에 불교를 처음 전한 北魏(북위)의 승려이다. 「三國遺事(삼국유사)」 등의 문헌에 따르면, 그는 신라 왕가에도 불교를 전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一善縣(일선현: 지금의 경북 선산)에 있던 毛禮(모례)의 집에 기거하면서 3년간 포교활동을 하다가 입적했다고 한다.
 
  法燈 스님은 『그후 원효 대사가 미타삼존을 조성·봉안하여 해동 제1의 석굴사원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법등 스님의 설명은 寺蹟記(사적기)로 뒷받침되지 않는 전언인 만큼 확인할 수 있는 史實(사실)은 아니다.
 
  학계에서는 이 삼존불을 신라의 삼국통일 직후인 7세기 말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불상의 모습이 삼국시대 말기에 새로 수용된 隋(수)·初唐(초당)의 양식이 가미된 것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양식으로 미루어 보아 약 1세기 후에 조성된 경주 석굴암의 모태가 된 것은 확실하다.
 
  만추의 산골에는 해가 빨리 진다. 오후 6시, 벌써 주위가 캄캄했다. 석굴 안에 조명을 하고 사진 촬영을 하면 주위의 어두움과 어울려 삼존불의 모습이 더욱 두드러질 터이다. 사진작가 조명동씨는 500W 짜리 전구를 미리 준비해 왔지만, 석굴 안에는 전원이 없었다. 法燈 스님의 도움으로 100m쯤 떨어진 비로전에 설치된 전원을 전깃줄로 연결하여 석굴 안까지 전기를 끌어들였다.
 
  휘황한 조명 아래 야간촬영에 들어갔다. 참으로 환상적인 작업이었다. 밤 8시쯤 촬영작업을 끝내고 동자승을 앞세워 절 아래 창녕식당에 가서 토속주로 언 몸을 녹이며 저녁을 먹었다. 스무 살 안쪽일 듯한 동자승은 「노지심」다운 대식가였다. 그의 우람한 덩치와 앳된 얼굴, 그리고 천진스런 말투에서 초등학교 시절의 옛 동무를 연상했다. 저녁을 먹은 후 절 가까이에 있는 여관에 들어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날 아침, 또 창녕식당에 들러 아침을 먹었다. 안주인의 음식솜씨가 매우 짭잘하다. 열무김치를 한 사발 더 청해 먹었다. 후식으로 사과 하나를 깎아 주기에 깨물었더니 달고 시원했다. 軍威 사과는 일교차가 심한 토양에서 자라기 때문에 맛이 뛰어나다고 한다.
 
  아침식사를 끝낸 후 다시 삼존석굴로 올라갔다. 오전의 태양을 담뿍 받은 미타삼존불은 더욱 청정한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석굴은 둥근 입구와는 달리 바닥이 평면 2단으로 되어 있고, 천장은 입구의 높이보다 더 파고 들어간 유선형이다. 깊이 4.3m, 폭 3.8m. 석굴 전면에는 간단한 석축을 쌓아 예불의 공간을 마련했다.
 
  예불대에서 뒤돌아서면 팔공산의 최고봉인 비로봉(1193m)을 마주볼 수 있다. 팔공산은 경북 영천시·경산시·군위군·칠곡군과 대구광역시 동구·북구에 걸쳐 있는 거대한 산악이다. 주봉 비로봉을 중심으로 동서 16km에 걸쳐 장대한 능선을 이루고 있다.
 
 
 
 
 
 
  三國遺事의 산실 인각사
 
  팔공산까지 와서 「三國遺事」의 산실인 麟角寺(인각사)를 답사하지 않을 수 없다. 一然 스님은 國尊(국존)으로 책봉받은 고려 충렬왕 9년(1283)부터 입적하던 1289년까지 6년간 인각사의 주지로 재직하면서 「삼국유사」의 집필을 끝냈다.
 
  몽골의 지배를 받던 시기의 고려에서는 나라 최고의 승려에게 「國師(국사)」 대신에 「國尊(국존)」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國師」라는 칭호는 몽골제국의 최고 승려에게만 부여할 수 있다는 몽골의 간섭 때문이었다.
 
  一然 스님은 開京의 廣明寺(광명사)에 주석하면서 國尊에 책봉되었음에도 인각사로 내려온 것은 90 노모를 모시기 위해서였다. 노모는 당시 격리대상인 심한 옴병을 앓아 그가 아니면 봉양할 이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 인각사에는 一然 스님의 일생과 업적을 새긴 寶覺國師碑(보각국사비) 및 부도탑인 靜照之塔(정조지탑)이 보물 제428호로 보존되어 있다.
 
  「三國遺事」는 우리 민족의 개국신화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문화·사상·불교 등 「三國史記」에 누락된 민족의 귀중한 유산을 기록한 寶庫(보고)이다. 종래엔 고대인의 신화·전승을 허구적인 것으로 보고, 그 非역사성을 강조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 핵심에 중요한 史實을 담고 있다는 것이 고고학·민속학의 조사 결과, 차츰 확인되어 가고 있다.
 
  신화·전승이 없는 민족사는 오히려 삭막하고 허전하다. 만일 「삼국유사」가 없었다면 민족사에서 단군신화를 삭제해야 한다. 민족의 정서가 배인 향가 14수도 잃어버렸을 터이다. 고승들의 사상과 철학, 선조들의 정서와 생활사도 놓쳐버릴 뻔했다.
 
  삼존석굴에서 내려와 승용차를 타고 79번 지방도로로 진입, 북진하다가 부계초등학교에서 좌회전하여 달리면 백학제1교를 만난다. 여기서 908번 지방도로로 접어들면 갑령재에 이르게 되고, 거기서 28번 국도로 길을 바꿔 5.3km를 달리면 고로교. 고로교 삼거리에서 오른쪽 908번 지방도로로 접어들어 10리쯤 들어가면 인각사(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612번지)가 있다.
 
  인각사는 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銀海寺(은해사)의 末寺(말사)이지만, 신라 선덕여왕 11년(642)에 창건되었다는 유서깊은 사찰이다. 화산을 등지고 있는 사찰 앞으로는 큰 개천이 흐르고 그 너머로 깎아지른 듯한 바위산이 펼쳐져 있는데, 기린(麟)이 뿔(角)을 바위 위에 얹은 형상이라 하여 寺名(사명)을 「인각사」라고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一然 스님의 부도와 보각국사비는 원래 마을 뒷산 부도골 주변에 있던 것을 면사무소에서 보존하다가 다시 인각사 경내에 옮겼다고 한다. 경내의 국사전 앞에 서 있는 부도는 지대석 위에 8각 하대석을 놓고 8각의 탑신을 올린 형상이다.
 
  보각국사비는 석재의 손상이 심하다. 현재 남아 있는 비신의 높이는 1.8m, 너비 1m 남짓하다. 원래 모습의 3분의 1 정도로 추정된다. 비문은 행서로 쓰여 있는데, 중국의 명필 王羲之(왕희지)의 글자를 集字(집자)하여 새겼다. 비문은 충렬왕대의 문장가 閔漬(민지)가 지었다. 비를 세운 시기는 충렬왕 21년(1295년) 전후로 추정된다.
 
 
 
 
  『인각사를 한국정서의 메카로 만들겠다』
 
  종무소로 찾아가 주지이며 一然연구원장인 常人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필자 일행에게 차와 떡 한 사발을 대접했다. 마침 점심을 걸렀던 터여서 맛있게 먹었다. 필자의 요청에 스님은 보각국사비의 탁본을 보여주었다. 보각국사비는 깨어지고 마모되어 전문을 알 수 없으나 지난 3년여간에 걸쳐 韓·中·日 등지에 흩어져 있는 여러 탁본들을 찾아내 서로 대조하여 원래의 모습과 비슷한 4600여 자의 비문을 조합해낸 것이다.
 
  常人 스님은 이것을 토대로 하여 一然 스님의 탄생 800돌인 2006년 음력 6월1일 보각국사비의 모조품을 제작하여 진품 옆에 세우고 再現 기념식을 개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삼국유사야말로 한국인의 아이덴티티(정체성)를 담은 보물』이라면서 『삼국유사가 완성된 인각사를 한국정서의 메카로 만들어가겠다』고 덧붙였다.
 
  인각사를 나와 국보 제14호 소재지인 영천시 청통면 신원리 거조암으로 출발했다. 팔공산 기행(下)는 다음호에 실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