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濟(백제)의 佛像(불상)은
부드럽다. 그 대표적 작품이 「百濟의 微笑(미소)」로 이름 높은 國寶 제84호 서산 마애삼존불상(충남 瑞山市 雲山面 龍賢里 山 2-20)이다.
지난 5월27일 오전, 사진작가 趙明東씨와 필자가 마애삼존불상을 拜見하고 있는데, 등뒤가 왁자지껄하여 뒤돌아보았다. 서울 송파구에 있는
문정초등학교 6학년1반 아이 30여 명이 교사 인솔로 답사하러 왔다고 했다.
마애삼존불상은 風雨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木造前室 한 채로 덧씌워져 있다. 햇빛의 방향 때문에 前室 내부는
그리 밝지 않았다. 이곳 암자의 스님 한 분이 긴 대나무 장대 끝에 매달린 백열등을 움직여 이곳저곳을 비추더니만 이윽고 本尊佛의 얼굴에
근접시켰다.
『어어!』
아이들의 입에서 일제히 감탄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스님이 물었다.
―왜들 놀라?
『신비해요. 돌이 웃으니까요』
『부처님의 얼굴이 자꾸 변하잖아요』
마애불의 모습은 아침·저녁 다르고, 계절에 따라서도 미묘한 변화를 일으킨다. 무대 위의 배우도 조명의 방향에 따라 千의
얼굴을 연출하는 것이다. 이곳 삼존불의 아침 미소는 화평스럽고, 해 질 무렵의 미소는 西山의 그림자와 어울려 은은하다.
세 분 부처님의 얼굴이나 부처님을 우러러보는 아이들의 얼굴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천진난만함이었다. 부처님의 相好는 아이들 얼굴처럼 두 볼이 터질 듯 도톰하다. 佛像의 얼굴은 그것을 제작한 시대가 가장 理想型으로 삼는 인간의
모습이다. 百濟人은 이렇게 풍만한 얼굴과 몸집의 인간을 上之上의 인물로 생각했던 듯하다.
―부처님은 어떤
분 같아?
『무척 편안해 보여요. 기대고 싶어요』
『우리들 소원,
다 들어주실 것 같아요』
―그럼, 부처님께 각자 소원을 빌어 봐. 그런 다음에 부처님의 미소를 너희들
가슴속에 담아 가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으면 좋겠어. 다들 그렇게 할 거야?
『(일제히) 예』
『산신령님이 본마누라와
작은마누라를…』 磨崖三尊佛(마애삼존불)은 암벽에 새겨 놓은 세 분 부처님을 말한다. 그러면 세 분 부처님이 어떤 모습과
구도로 새겨져 있을까. 이에 관해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누군가의 말을 다음과 같이 옮겨 썼다.
『저 인바위에 가믄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이 한 분 새겨져 있는디유. 양 옆에 본마누라와 작은마누라도 있시유. 근데
작은마누라는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제 볼따구를 찌르고 슬슬 웃으면서 「용용 죽겠지」 하고 놀리니까 본마누라가 장돌을 잡고 집어
던질 채비를 하고 있시유』
「印(인)바위」는 삼존불이 새겨져 있는 수십m 높이의 바위다. 위의 인용문에서
「산신령님」이라고 불린 분은 실은 本尊佛(본존불)인 석가여래,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작은마누라」와 「장돌을 잡은 본마누라」는
挾侍佛(협시불)이다. 협시불은 본존불을 곁에서 모시는 부처님을 말한다.
연꽃잎을 새긴 臺座 위에 서 있는
석가여래 立像은 살찐 얼굴에 半원형의 눈썹, 한껏 크게 뜬 살구씨 모양의 눈, 묵직한 코, 벙긋 웃는 두툼한 입으로 해서 매우 자비로운 인상을
준다. 양 어깨를 가린 法衣가 발목까지 흘러내렸는데, 그 앞쪽에는 U자형 주름이 선명하게 세 겹 겹쳐 있다.
손 모양(手印)은 「施無畏與願印(시무외여원인)」이다. 오른손은 「宣誓」를 하듯 손바닥을 펴 가슴께에 올리고, 왼손은
약손가락과 새끼손가락만 꼬부린 채 허리께에 내린 모습이다. 施無畏印은 중생이 두려움에 떨지 않도록 하고 우환과 고난을 막아 주는 손 모양이며,
與願印은 중생에게 사랑을 베풀고 원하는 바를 성취시켜 주는 손 모양이라고 한다. 이 두 가지 손 모양은 삼국시대의 불상 대부분이 그럴 만큼 크게
유행했다.
光背(광배: 신성한 존재의 背面을 장엄하는 조형물)의 중심에는 연꽃을 새기고 그 둘레엔 불꽃 무늬를 새겼다.
자세히 살펴보면 불꽃 무늬 안에는 부처님 세 분의 坐像이 「숨은그림」처럼 새겨져 있다. 이는 娑婆世界(사바세계: 火焰紋으로 표현)에 살면서 온갖
고통으로 허덕이는 衆生들을 구제하기 위해 苦行하는 부처님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본존불은 光背를 포함하여 2.8m 정도의 높이이다.
오른쪽의 협시불은 三山形 보관을 쓰고 얼굴은 풍만한데, 다문 입술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양손으로
감싸쥔 것은 「장돌」이 아니라 「寶珠」이다. 보주를 들고 있는 보살을 흔히 「奉持보살」이라고 부른다. 상반신에서부터 부드러운 天衣가 두 팔을
타고 내려와 다리 아래까지 늘어져 있다. 발 아래는 두 겹 연꽃 무늬의 臺座가 새겨져 있다. 전체 높이가 1.7m다.
왼쪽의 挾侍佛은 半跏思惟像(반가사유상)인데,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밖으로 돌리고 있는 모습이다.
半跏思惟像이라면 오른쪽 발을 왼쪽 무릎 위에 얹고 앉아서 「어떻게 하면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할 수 있을까」 하고 골똘히 생각하는 부처를
말하는데, 이 挾侍佛도 半跏를 하긴 했지만 그 표정이 밝기만 하다. 높이는 오른쪽 협시불과 비슷하다.
百濟불교의 정수가 깃든
伽倻山 이 삼존불상은 伽倻山(가야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伽倻山이라면 합천 해인사 뒷산의 이름만 그리 불리는 것이
아니다. 부다가야라면 석가여래의 수도처였던 만큼 곳곳에 있는 불교의 名山이 伽倻山이라고 명명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합천 海印寺가 자리 잡은
가야산은 신라불교, 瑞山의 伽倻山은 백제불교의 精髓(정수)가 깃들어 있는 곳이라 해도 좋다.
서해안
고속도로의 개통 후 서산 마애삼존불을 拜見하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서산IC를 빠져나와 32번 국도를 타고 당진 방향으로 수백m쯤 가면 雲山
네거리다. 이곳에서 647번 지방도로를 따라 1km 남짓 가다 보면 두 갈래로 길이 나뉜다. 여기서 海美邑城으로 가는 길을 버리고 왼쪽 길을
따라가다 조그마한 터널을 빠져나오면 고풍저수지를 만난다. 저수지를 왼쪽에 끼고 조금 달려 강당교를 건너자마자 德山 가는 길을 버리고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 용현계곡 쪽으로 들어가면 곧 민박과 식당을 겸하는 「용현집」을 만난다.
「용천집」 앞 빈 터에서
하차하면 왼쪽의 계곡 위로 三佛橋(삼불교)가 걸려 있다. 삼불교에서 가야산으로 500m쯤 올라가면 서산 마애삼존불이 새겨진 印바위와 마주치게
된다. 그러면 왜 이렇게 깊숙한 산골에 삼존불을 새겨 놓았을까.
사비(지금의 부여)백제 시대 백제와
중국을 잇는 항로의 출발점은 지금의 泰安이었다. 당시 王都 사비에서 泰安으로 가는 지름길은 이 계곡을 넘는 길이었다. 중국에 다녀오려고 했던
길손들은 부처님 앞에 엎드려 먼 여행길에서의 안전을 희구했을 것이다. 서산 마애석불은 백제 武王이 즉위한 600년 전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 다섯 점이 모여 있는
普願寺址 마애삼존불을 배견하고 난 뒤 三佛橋로 다시 내려와 普願寺址(보원사지: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119)로
향했다. 보원사지는 계곡 쪽으로 1.5km쯤 더 내려가면 길 오른쪽에 펼쳐져 있다. 3만여 평 규모의 보원사 터에는 보물 다섯 점이 모여 있어
이곳에 들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절터 初入에서 마주치는 것이 보물 제103호 普願寺址
당간지주다. 당간을 받치는 杆臺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다.
당간지주를
지나면 개울이 흐른다. 개울 위의 징검다리를 건너가는데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곧 보물 제104호 보원사지 5층석탑과 만난다. 높이 9m에
이르는 이 5층 석탑은 철제 찰주까지 하늘로 치솟아 늘씬한 자태인데, 지붕돌이 넉넉하게 펼쳐져 안정감을 준다. 상층 기단의 서쪽 면에 선명하게
돋을새김된 아수라상이 매우 정교하다.
수풀이 우거진 절터 오른쪽 한켠에 길이 3.5m, 깊이 90cm
규모의 물 담는 돌 그릇 하나가 숨어 있다. 보물 제102호 보원사지 石槽(석조)이다. 통일신라시대 石槽 모습을 계승한 고려 초기의 유물이다.
안팎에 아무런 장식이 없어 簡潔美(간결미)가 돋보인다.
절터 맨 안쪽에 보물 제105호 法印國師寶乘塔(법인국사보승탑)과 보물 제106호 법인국사보승탑碑가 나란히 서
있다. 法印은 고려 光宗 때 國師를 지낸 坦文(탄문·900∼975)의 諡號(시호`)이며 寶乘은 塔號이다.
坦文은 고려 太祖로부터 別和尙이란 칭호를 받았다. 왕후 劉씨가 임신하자 王命으로 아들을 낳도록 기도를 드려 왕자(후일의 光宗)를 낳게 했다고
더욱 태조의 총애를 받았다.
이어 제2대 惠宗과 제3대 定宗의 재위기간이 짧게 끝나고 이어 光宗이
즉위하자 坦文은 왕사·국사로 존숭되었다. 地方豪族들과의 연합정책에 성공하여 後三國을 통일한 고려 왕조는 光宗이 즉위 이후 호족들을 숙청하고 王權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해 간다. 이에 따라 光宗은 豪族들의 비호를 받아 온 禪宗을 배격하고 王權 강화에 유리한 華嚴宗의 고승인 坦文을
지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光宗 26년(975)에 王師 탄문이 은퇴를 청하자 왕은 그를 國師로 임명하고,
그가 伽倻山 보원사로 떠나자 그를 전송하기 위해 태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開京 교외에까지 행차했다고 한다. 탄문은 그 해 3월 보원사에서
입적했다.
부도탑(이름난 스님의 유골을 안치한 탑) 법인국사보승탑은 978년에 건립된 것인데, 현재
보수공사 중이다. 법인국사보승탑비에는 탄문의 생애와 화엄종이 고려왕실의 정신적 지주라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마음을 여는 절집 開心寺
서산까지 와서 象王山 기슭에 자리 잡은 開心寺에 가 보지 않을 수 없다. 開心寺―이 절집에 가기만 하면
마음을 열 수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절집 이름만 들어도 한번 다녀오고 싶은 곳이다.
서해안고속도로
서산IC를 빠져나오면 만나는 647번 지방도로를 타고 海美邑城 방향으로 7km 남짓 내려가다가 운신초등학교 앞에서 좌회전하면 신창저수지가
보인다. 저수지 건너편 구릉에는 소떼들이 한가하게 풀을 뜯는 이국적인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것이 1969년 金鍾泌씨가 만들었던 삼화목장이다.
삼화목장은 1980년 新군부의 강압에 의해 국가에 몰수되었는데, 이제는 「축협 한우개량사업소 농장」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다. 삼화목장을 지나
1km쯤 더 가면 개심사 입구에 닿는다.
홍송이 울창한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개심사의 강당인 안양루. 가로로 길쭉한 안양루를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解脫門(해탈문)으로 들면 오똑한 5층석탑 뒤로 보물 제143호 개심사 대웅보전이 안방마님처럼 坐定하고 있다.
단아하다. 맞배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좌우보다 전후가 조금 길다. 맞배지붕은 펼친 책을 엎어
놓은 듯한 모습이다. 공포는 多包式이지만, 법당 안쪽에는 柱心包式이다. 柱心包는 기둥 위에만 包(공포)를 올린 架構 방식이고 다포식은 기둥 위의
공포와 공포 사이에도 공포를 짜 넣은 방식이다.
개심사는 백제 의자왕 때 창건되었다. 본래 이름은
開元寺였는데, 고려 충정왕 때 처응대사가 중건하면서 개심사로 불렸다. 1941년 대웅보전 해체 수리 때 발견된 墨書銘에 의해 1484년에
중창되었고, 그후 17세기와 18세기에도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倭寇 막아 내포평야 지켰던
海美邑城 개심사에서 다시 신창리로 나와 좌회전, 647번 지방도로를 타고 5km쯤 내려가면 위풍당당한 石城이
나타난다. 이곳이 사적 제116호 海美邑城이다. 태종 14년(1413) 德山에 있던 충청병마절도사영을 이곳으로 옮겼는데, 성벽은 성종
22년(1491)에 완성되었다. 높이 5m, 두께 2m, 둘레 약 2km 규모의 성곽이다. 여기에 왜 兵使營이 들어서 이런 성곽을 쌓았을까.
예로부터 이곳은 너른 들판에서 생산되는 농산물과 천수만의 해산물로 풍요로운 고장이었다. 또한 그 연안
海路는 서울로 가는 三南지방의 稅穀船(세곡선)이 다니던 길목이었다. 倭寇(왜구)들이 세곡선을 공격하기도 하고, 상륙하여 내포지방을 약탈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해미읍성은 내포지방을 지키는 요새였다. 1578년에는 李舜臣이 이곳 兵使營의 軍官으로 10개월간 근무했다.
왜구의 침탈은 1603년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가 들어서 조선·일본 양국이 선린관계를 이룸으로써
근절되었다. 이에 따라 해미읍성에 있던 병마절도사영도 孝宗 2년(1651) 淸州로 옮겨 가게 된다.
해미읍성의 정문인 鎭南門을 통해 城內로 들어가 동헌과 객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중도에 심상치 않게 생긴 고목이 보여 접근했더니 300년
묵은 호야나무다. 호야나무가 서 있는 자리에 湖西左營의 감옥이 있었다고 한다. 1814년, 이 감옥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神父인 金大建의 조부
김진후(세례명: 비오)가 옥사했다. 그때 천주교도들은 호야나무에 머리채가 묶인 채 거꾸로 매달리는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지금도 호야나무 줄기에
머리채를 묶을 때 사용되었던 굵은 철사가 박힌 채 남아 있다.
해미읍성 답사를 마치고 德山온천으로
향했다. 이곳 덕산관광호텔에 들어 온천욕을 하고 하룻밤을 묵어 가기로 했다. 다음날엔 국보 제49호 禮山 修德寺 대웅전, 興宣大院君의 아버지
南延君 묘소, 「님의 침묵」을 지은 韓龍雲 스님의 生家, 靑山里전투의 영웅 金佐鎭 장군의 生家를 답사하기로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