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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寶紀行(24) - 國寶 제223호 景福宮 勤政殿

야생초요 2006. 7. 3. 13:05
國寶紀行(24) - 國寶 제223호 景福宮 勤政殿
 
景福宮 복원하니 나라의 얼굴이 번듯해졌다
 
글 : 鄭 淳 台 月刊朝鮮 편집위원〈st-jung@chosun.com〉
사진 : 太 昶 植 프리랜서 사진가 〈photo109@naver.com〉

복원된 景福宮 중심 殿閣
<景福宮의 正殿인 勤政殿.>

  2003년 연말부터 우리나라의 얼굴이 번듯해졌다. 光化門(광화문) 네거리의 李舜臣(이순신) 장군 동상 앞을 지나 世宗路(세종로)로 접어들기만 해도 벌써 기분이 좋다. 勤政殿(근정전) 등 중심 殿閣(전각)들의 복원 또는 보수공사에 의해 景福宮(경복궁)이 점차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던 日帝(일제)시대의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 청사가 사라짐으로써 그 뒤편의 名山 北漢山(북한산)과 서쪽의 仁旺山(인왕산)도 더욱 선명해졌다.
 
  1996년 朝鮮總督府 청사를 철거하던 당시 말들이 많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을 새로 짓지도 않고 「파괴」부터 서두른다는 지적이었다. 1926년 준공된 朝鮮總督府 청사는 1948년 정부수립 이후에 中央廳(중앙청) 청사로 전용되었다. 果川에 새 정부종합청사를 지어 이전할 때(1982)까지 中央廳 청사는 韓國現代史(한국현대사)의 중심무대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朝鮮總督府 청사는 애시당초 태어나지 않았어야 했을 「惡(악)의 씨앗」이었다. 그것이 제 아무리 건축적으로 拔群(발군)의 작품이라고 한들 「나라의 얼굴」을 가로막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朝鮮王朝(조선왕조)의 正宮인 景福宮의 正殿은 勤政殿이다. 勤政殿의 보수공사는 2001년 11월에 착공한 지 2년여 만인 2003년 12월에 완공되었다.
 
  국보 제223호 勤政殿에 이르려면 光化門, 興禮門(흥례문), 勤政門(근정문)의 三門을 통과해야 한다. 매표소는 광화문 안쪽 옛 朝鮮總督府 청사를 헐어 낸 자리에 있다(요금 1000원). 흥례문을 지나면 곧 금천이다. 일부러 물길을 내어 서쪽에서 동쪽으로 明堂水(명당수)가 흐르게 했다. 금천에는 永濟橋(영제교)가 걸려 있다. 영제교를 건너기 전까지는 백성들의 구역, 건너기만 하면 바로 至尊(지존)의 구역이다.
 
 
 
 
 
 
  세 방면에 대한 삼엄한 경계
 
 
 
 
 
  영제교를 중심으로 東西에 모두 네 마리의 돌짐승(天麓)이 石築(석축)에다 몸뚱이를 잔뜩 밀착시킨 臨戰無退(임전무퇴)의 자세로 금천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있다. 혹시 물길을 통해 王宮으로 침투할지 모르는 邪惡(사악)한 무리를 감시하고 있다.
 
  영제교 돌난간에도 잡된 무리가 감히 접근하지 못하도록 네 마리의 돌짐승이 버티고 있다. 흥례문 추녀 끝에서는 一群의 雜像들이 하늘을 향해 陣(진)을 치고 있다. 이렇게 王宮은 初入부터 뭍·물·공중, 세 방면에서 경계하고 있다.
 
  영제교를 건너서부터의 진입로는 모두 세 가닥으로 확연히 구분되어 있다. 동쪽 길은 文臣, 서쪽 길은 武臣의 통로다. 중간의 길은 임금이 寶輦(보련)을 타고 행차하는 御道(어도)로서 신하들이 다니는 東·西의 통로보다 넓다.
 
  이제 곧 勤政殿의 제1문인 勤政門(근정문)이다. 정면에서 보면 3칸인데, 아래층에는 문짝을 달아 여닫게 하고, 위층은 사방에 널문을 달았다. 층층다리 한가운데엔 鳳(봉: 수컷)과 凰(황: 암컷)이 아로새겨 있다. 鳳凰은 太平聖代(태평성대)에만 출현한다는 상상 속의 새다. 임금이란 오로지 백성들이 잘 살도록 太平聖代를 열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근정문을 지나면 南向하는 근정전을 마주본다. 근정전을 사이에 두고 동·서·남·북으로 行閣(행각)이 둘러쌌다. 남쪽과 북쪽 행각은 15칸, 동쪽과 서쪽 행각은 42칸이다.
 
  넓은 마당에 우둘두둘한 모습의 넓적한 薄石(박석)들이 자연스레 깔려 있다. 왜 매끈매끈하게 다듬지 않은 것일까. 종종걸음을 치지 말고 조신조신 걸으라는 의미도 있었을 것 같다.
 
  근정전 앞마당 통로 좌우에는 品階石(품계석)이 세워져 있다. 공식행사 때 9品부터 1品까지의 관료가 品階의 순위에 따라 도열하도록 구획한 것이다. 동쪽은 文官, 서쪽은 武官의 구역이다.
 
 
 
 
  鳳凰과 넝쿨 무늬의 意味
 
  勤政殿의 月臺(월대)는 압권이다. 月臺는 집을 높여 짓기 위해 만든 石壇(석단)이다. 보통의 건물에는 댓돌이라는 받침대가 있다. 댓돌만 놓아도 건물이 훤칠하게 보인다. 그런데 勤政殿은 댓돌 아래로 다시 上·下 두 段의 月臺를 쌓아 위용을 더하고 있다.
 
  月臺 정면 중앙의 층층다리는 세 구역으로 구성되었다. 소맷돌을 머리에 뿔 하나를 곧추세운 해태가 허리를 쭉 펴고 길게 엎드린 형상으로 조각했다. 해태라면 是非·善惡을 분명하게 가려 주는 상상의 동물로서 나쁜 짓을 범한 자에 대해선 날카로운 뿔로 받아 버리는 正義(정의)의 化身(화신)이다.
 
  층층다리의 가운데에는 구름 속에서 날개를 활짝 편 봉황을 돋을새김한 陛石(폐석)이 있고, 그 좌우로는 넝쿨무늬를 새긴 층계석이 있다. 넝쿨인 신하가 봉황인 임금을 받들어 왕조를 영원히 번영케 하라는 뜻이 담긴 것으로 보인다.
 
  上月臺 문로주의 돌짐승은 아래가 12支 중 正南을 표시하는 말(馬)이고, 위는 南方의 神인 朱雀(주작)이다. 十二支像은 통일신라 이래 왕릉의 護石(호석)에 새겨진 守護(수호)의 상징인데, 유일하게 근정전에서만 사용되었다.
 
  月臺를 오르면 우리나라 현존 木造 건물 중 가장 큰 근정전과 마주한다. 정면 5칸, 측면 5칸의 장중한 팔작집이다. 팔작집은 집의 네 귀에 추녀를 설치하고 지붕 위까지 박공(「八」 자 모양으로 붙인 두꺼운 널)이 달려 용마루 부분이 삼각형의 벽을 이루어 팔작지붕을 구성하는 집이다. 힘차게 뻗어 올라간 처마의 곡선과 처마 아래 ♥包(공포)의 정교함을 자랑한다. 공포는 육중한 지붕의 무게를 받치게 하려고 기둥머리에 짜맞추어 댄 나무쪽들을 말한다.
 
  근정전 처마 밑에는 기둥머리 위뿐만 아니라 기둥머리와 기둥머리의 사이사이에도 각각 네 개씩의 공포가 더 버티고 있다. 이런 구조의 목조건물을 다포집이라고 한다.
 
  「勤政殿」은 『근면하게 나랏일을 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뜻에서 명명된 이름이다. 임금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던 곳이자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사신을 접견하는 곳이어서 正殿이라고 불린다.
 
  겉보기엔 2층이지만, 안에 들어가서 보면 1층이다. 이런 구조를 重層(중층)이라고 하며 전체가 한 공간으로 구성되었다고 해서 通層(통충)이라 부르기도 한다.
 
  건물 내부에는 열두 개의 높은 기둥이 정면에 네 개, 측면에 세 개씩 배치되어 천장을 받들고 있다. 천장은 꽃 무늬를 그린 널조각들을 우물 井(정) 자 모양으로 잇댄 小欄(소란)반자로 꾸며져 있다.
 
  보수공사를 마친 이후 근정전의 御座(어좌)에는 진홍색 곤룡포를 입은 임금님의 모형이 좌정하고 있다. 관광객들을 위한 배려인 것 같지만 至嚴한 正殿의 분위기를 만화처럼 戱畵化한 느낌이 든다.
 
  御座 위로는 오색찬란한 닷집(寶蓋), 御座 뒤로는 日月五嶽屛(일월오악병)이라 불리는 그림으로 莊嚴(장엄)되어 있다. 닷집이야 부처님을 모신 절에 가기만 하면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일월오악병은 朝鮮王朝 브랜드의 名品이다.
 
  이 대형 그림엔 해와 달, 다섯 봉우리 5악, 힘찬 폭포, 잘 생긴 소나무, 파도치는 바다가 가득 차 있다. 단순하면서도 대담한 그림이다. 5嶽은 우리나라 동서남북과 중앙의 名山, 즉 금강산·묘향산·지리산·백두산·삼각산(북한산)으로서 全국토를 상징한다.
 
  御座 아래엔 史官 등이 배석하는 앉은뱅이 책상 몇 개가 놓여 있다. 조선왕조의 임금은 史官이 배석하지 않는 자리에서 신하들과 만날 수 없었다. 獨對(독대)를 통해 임금이 임금답지 못한 言行을 할 수 없도록 원천봉쇄를 했던 것이다.
 
  앉은뱅이 책상들 뒤에도 방석 하나씩을 깔았다. 그러고 보니 근정전의 바닥은 돌바닥이다. 난방시설도 없다.
 
 
 
 
  南北 일직선상에 배치된 중심 殿閣
 
  근정전의 月臺는 흘긋 보고 지나치기에는 상징성이 너무 많은 곳이다. 月臺는 돌난간으로 둘렀고, 귀퉁이에는 귀기둥이 섰으며, 귀기둥 앞으로는 앞부리가 돌출되어 있다. 그 돌출된 부분에 해태 한 쌍이 배를 바닥에 깔고 엎드려 있다. 삼가하며 임금님의 敎化(교화)를 기다리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부부 해태의 가슴과 등에는 귀여운 새끼 해태가 어리광을 부리며 기어오르고 있다. 해태 가족은 人本主義의 표현이라고 한다.
 
  난간의 기둥머리 위에는 四神과 12支의 석상이 배치되었다. 다만 12支 중 개와 돼지는 보이지 않는다. 존엄한 왕궁인 만큼 욕질을 할 때 흔히 구사되는 「개」와 「돼지」는 배제된 것 같다는 풀이가 있기는 하다.
 
  下月臺의 동쪽과 서쪽에는 물을 가득 채운 무쇠솥 모양의 드무가 놓여 있다. 火魔(화마)가 습격하고 싶어도 물 위로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 놀라 도망을 치도록 배치된 것이라고 한다.
 
  근정전 다음 전각이 思政殿(사정전)이다. 평상시 임금이 머물며 정사를 보는 便殿(편전)이다. 便殿의 명칭을 「思政」이라고 정한 까닭은 무엇일까. 왕명에 따라 경복궁의 殿閣 이름을 지어바친 三峰 鄭道傳(삼봉 정도전)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지 않으면 모르는 법이다. 임금은 홀로 숭고한 위치에서 백성들을 바라본다. (중략) 이곳에서 임금은 만 가지를 살펴 가면서 결론을 내리고 지휘해야 한다. 불가불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정전 바로 뒤편의 향오문을 들어서면 內殿이 시작된다. 內殿에는 외부사람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다. 거기엔 임금의 침전인 康寧殿(강녕전) 등이 일곽을 이루고 있다. 이렇게 景福宮의 중심 殿閣은 南北 일직선상에 배치되었다.
 
 
  경복궁의 受難史
 
  景福宮은 太祖 4년(1395)에 건립되었다. 明宗 (1554)에 중건되었는데, 임진왜란 때(1592) 불타 폐허화했다. 그후 重建(중건)으로 제 모습을 찾자는 논의는 잇따랐지만, 財政上의 이유 등으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27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엔 주로 昌德宮(창덕궁)이 正宮의 노릇을 代行했다.
 
  경복궁의 重建은 「王權회복」을 역설한 대원군 李昰應(이하응)의 주도로 高宗 2년(1865)에 착공, 고종9년(1872)에 준공되었다. 대원군은 공사비 염출을 위해 세금을 올리고 當百錢(당백전)을 발행하는 등의 失政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샀는데, 이것이 그가 몰락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韓日合倂 이래 景福宮은 민족의 운명처럼 悲運의 세월을 겪었다. 1910년 경복궁 내 350여 동에 달하던 殿閣이 대부분 헐리고 근정전과 慶會樓(경회루) 등 10여 동 정도만 남게 되었다 더욱이 근정전 남쪽 정면에 朝鮮總督府 청사를 지음으로써 景福宮은 본래의 모습을 잃고 말았다.
 
  日帝는 또한 그때 헐어 낸 전각의 재목을 민간인에게 팔기도 하고 좋은 것은 일본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특히 1919년 純宗이 거주하던 昌德宮에 불이 나자 또 경복궁 전각을 헐어 창덕궁의 內殿을 보수했다.
 
  1991년부터 경복궁의 복원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寢殿(침전)지역, 東宮지역 등이 복원되고 1996년엔 조선총독부 청사가 철거되고 흥례문 복원공사, 慶會樓와 수정전의 보수공사, 근정문과 근정전의 보수공사가 잇달아 완공되었다.
 
  2010년까지 경복궁은 40% 정도 복원될 것이라고 한다. 한번 파괴된 문화유산의 복원이 얼마나 어렵고 돈 드는 일인지를 말해 주는 대목이다(경복궁 답사에선 국립민속박물관 奇亮 학예연구사가 동행하며 도움말을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