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 찬란한 나뭇가지 모양의
솟은장식(立飾), 永生을 상징하는 비취색 曲玉(곡옥), 작은 속삭임 하나에도 금세 살랑거릴 것만 같은 金葉―그 눈부심과 하모니 속에서 신라
황금문화의 眞髓(진수)를 느낀다. 皇南大塚(황남대총) 金冠(금관)은 新羅(신라)의 純金寶冠(순금보관)을 대표하는 걸작품이다.
이 금관은 높이 27cm, 머리띠(臺輪·diadem)의 직경 17cm. 머리띠의 前面에는 3段式
나뭇가지모양(樹枝形)의 솟은장식(立飾)이 3개 붙어 있고, 左右面에는 사슴뿔모양(鹿角形)의 솟은장식 2개가 마주하고 있다. 나뭇가지의 끝(立飾의
꼭대기)은 거꾸로 된 하트 모양()의 나뭇잎으로 마감했다.
머리띠의 귀 닿는 부분에는 6개의
太環 (태환: 굵은 고리)을 달았으며, 거기서부터 垂飾(수식) 1개씩을 늘어뜨렸다. 수많은 曲玉과 樹葉(수엽: 나뭇잎)들이 황금실로 꿰매어 달려
있어 금관의 신비성을 더하고 있다.
황남대총은 신라의 積石木槨墳(적석목곽분: 돌무지덧널무덤)들 중 가장
큰 무덤으로서, 왕과 왕비의 무덤이 서로 잇대어진 표주박 형태의 雙墳(쌍분)을 이루고 있다. 이 雙墳에서, 男尊女卑(남존여비)의 儒敎的(유교적)
시각에서 보면 어렵쇼, 異變(이변)이 벌어졌다. 왕의 무덤인 南墳(남분)에서는 金銅冠(금동관) 6개와 銀冠(은관) 1개가 나왔고, 왕비의 무덤인
北墳(북분)에서만 金冠(금관) 1개가 주검의 머리 부분에 씌어진 채 발굴되었던 것이다.
기자는 지난
12월9일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관에서 尹炯元(윤형원) 연구관과 함께 황남대총 北墳의 금관을 관람하면서 다음과 같은 문답을 했다.
王이 쓰지 못한 金冠을 王妃만 쓸 수 있었던
까닭 ―황남대총의 北墳이 왕비의 무덤이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北墳에서는 銀製 허리띠(腰帶)도 함께 발굴되었는데, 거기에 「夫人帶」(부인대)라는 銘文(명문)이 새겨져 있어 그 주인공이 여성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왕의 무덤인 南墳에도 금관이 묻혀 있었는데, 혹시 도굴당한 것 아닙니까.
『황남대총에는 도굴의 흔적이 없었습니다. 원래 積石木槨墳은 도둑이 쉽게 파고 들어갈 수 있는 무덤이 아니죠. 웬만한 사전대비
없이 침입했다간 積石이 무너져 내려 깔려 죽기 십상이에요』
積石木槨墳은 屍身(시신)의 棺(관)과 유물을 넣은 통나무집을 짓고, 그 위에 돌을 쌓고 다시 封墳(봉분)을
한 대형 무덤이다. 신라에서는 5세기 초엽으로부터 6세기 초엽의 100여 년에 이르는 麻立干(마립간) 시대에 積石木槨墳을 조성했다. 이 같은
무덤 구조는 시베리아·알타이·몽골 지방의 기마민족 墓制(묘제)와 똑같다. 「干(간)」이나 「汗(칸)」이라면 북방 초원지대의 최고통치자의 칭호가
아니던가. 어떻든 이는 新羅金씨의 出自, 즉 先祖(선조)를 암시하는 중요한 단서이다.
―황남대총 北墳에서
금관이 발견됨으로써 금관은 왕만 쓴 것이 아니라 왕비나 왕족들도 썼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게 되었군요.
『신라의 冠은 재질에 따라 금관·은관·금동관·동관으로 나누어지는데, 물론 금관을 쓰는 사람이 제일 높은 신분이었죠』
―그렇다면 왕이 쓰지 못한 왕관을 왕비만 썼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北墳의 주인공인 왕비가 南墳의 주인공인 왕보다 더 고귀한 家系였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아무튼
新羅사회만큼 우먼파워가 강렬했던 적은 없었다. 일일이 그 사례를 열거하지는 않겠지만, 신라 여성들은 자유분방한 프리섹스도 누렸다. 정치권력의
세계에서도 발언권이 당당했다. 우리 역사상 오직 신라만이 여왕을 셋이나 배출하지 않았던가.
皇南大塚의 주인공은 奈勿 麻立干과 그의
王妃
그렇다면 황남대총의 피장자 부부는 누구일까? 서울시립박물관 李鍾宣(이종선) 관장은 그의 저서 「古新羅王陵硏究」에서 南墳의
주인공은 奈勿王(내물왕), 北墳의 주인공은 왕비 保反夫人(보반부인)이라고 추정했다.
<내물왕은 末九 角干(각간: 신라 16관등 중 제1위)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그의 집안의 서열은
嫡統(적통) 제1가문에는 이르지 못한 것 같다. 그는 味鄒(미추) 尼師今系의 적통가문 출신인 保反夫人과의 결혼을 통하여 최고신분자인 小國연합의
대표자, 즉 麻立干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兩家 연합세력의 힘은 아직 확고한 위치에 이르지 못하였다. 奈勿이 사망하자 保反夫人이 그의 능묘를
거대하게 조영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생전 그의 업적이 거대한 능묘의 조성을 가능하게 하였을 것이다. 奈勿의 아들 訥祗(눌지) 마립간은
實聖(실성) 마립간 族團과의 권력투쟁을 거쳐 어렵게 집권하자마자 바로 모친 保反夫人의 능묘를 高大化하는 작업부터 시작하였다고 생각된다>
내물 마립간은 미추 이사금系 집안 출신으로, 후사가 없이 사망한 昔씨 걸해 이사금의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金씨로서는 미추 이사금에 이어 두 번째로 최고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즉위 후 신라가 본격적인 王國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기틀을
다졌다. 新羅金씨에 있어서 閼智(알지)가 전설상의 始祖라면 味鄒는 실질적 의미에서 始祖王이며, 奈勿은 金씨 單獨왕조를 열었던 인물이다.
그렇다면 눌지 마립간이 부모인 내물 마립간과 保反부인의 능묘 2基를 연접하여 초대형 표주박형 雙墳을
조성한 까닭은 自明하다. 그것은 政敵(정적)집단인 실성 마립간系 金씨와 昔氏族團에 대해 우월적 차별화를 도모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로마 文化 왕국 신라
皇南大塚 남분과 북분은 5세기 초엽에 조성된 신라 최대의 積石木槨墳이다. 북분에서 출토된 왕비의 금관은
지금까지 출토된 「出」자 모양의 솟은장식 金冠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당시는 신라 왕의 칭호가 尼師今에서 麻立干으로 바뀌던
무렵이다. 지금까지 발굴된 6개의 「出」자형 금관 중 황남대총 북분의 금관은 가장 늦게 발견(1975년 10월)되었지만, 제작시기는 가장 빨랐던
금관이다.
황남대총은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 고분공원 안에 있다. 동서 지름 80m, 남북 지름
120m, 남분 높이 23m, 북분 높이 22m에 이르는 신라 최대의 封土墳(봉토분)이다. 이곳에서는 장신구·무기·철기·토기 등 5만70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여기에서 출토된 유리 제품은 로마 유리 계통으로, 신라가 중앙아시아의 스텝로드(草原의 길)를 통해 古代 로마 문화권
국가들과 깊게 교류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황남대총 남분에서 발굴된 로마 유리 제품은 鳳首形(봉수형)
손잡이가 달린 유리병(오이노코에) 등 7점이며, 북분에서 굽다리잔(보물 624호) 등 4점의 로마 유리 제품이 출토되었다. 일본의 古代 유리
전문가 요시미즈 츠네오氏는 그의 저서 「로마문화왕국, 신라」에서 『(麻立干 시대의) 신라는 중국과 교류가 거의 없었으며 로마세계와 교류한
왕국』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흉노계 金氏族의 황금!
내물왕 이후의 金氏 왕들이야말로 한민족의 주체세력이다. 법흥왕, 진흥왕, 진평왕, 태종무열왕, 문무왕 등으로
이어지는 이 金氏族 왕들이 삼국통일을 이뤄 냈다. 이 통일에 의해 최초의 민족통일 국가가 탄생했고, 韓民族이란 공동체는 이 틀 속에서
生成되었다. 한민족을 만들어 낸 신라 金氏族은 북방 흉노계의 기마민족으로서 4세기 초 경주에 나타나 지배층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의 표시 유물인
금관은 金氏의 상징물로서 자연스럽다. 유목 기마민족이 가장 소중히 여겼던 것이 다름아닌 황금이었고, 이 흉노계가 한반도로 들어오기 전에 살았던
곳이 알타이 산맥 부근인데 알타이는 「황금」이란 뜻이다.
알타이 출신 金氏族의 금관, 그것은 한민족의
브랜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