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은 朝鮮왕조의
正宮이었던 景福宮(경복궁) 안에서 아직도 「더부살이」를 하고 있지만, 國寶와 寶物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이다. 특히 그
뜰(야외전시장)에는 國寶 7종 8점을 비롯한 정상급 石造 유물들이 저마다의 아름다움과 존재이유를 뽐내고 있다. 중앙박물관의 전시실에 들지 않고
뜰 한 바퀴만 돌아도 우리나라 石造예술의 眞髓(진수)에 흠뻑 젖을 수 있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려면 지하철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정부청사역)에 내리면 지하통로와 중앙박물관 앞뜰이 바로 연결된다.
지난 10월2일 오전 10시30분 정각, 국립중앙박물관 유물관리부장 申光燮(신광섭)씨를 그의 사무실로
찾아가 만났다. 그 많은 국보들 중에 어느 것부터 어떤 요령으로 소개하면 좋을지 申부장에게 자문을 했다. 申부장은 『우선 (중앙박물관의)
야외전시장부터 답사하면 좋을 것 같다』면서 『石造遺物(석조유물) 담당 학예관 蘇在龜(소재구)씨에게 인터뷰 약속을 하도록 미리 얘기해 놓겠다』고
말했다. 申부장과 차 한잔 하면서 약간의 문답을 나누었다.
―儒敎(유교)를 國敎로 삼았던 조선왕조의 正宮(경복궁) 안에 불교의 石塔이 많다는 것은 그 경위야 어쨌든 좀
어색하지 않습니까.
『뜰에 있는 탑들은 언젠가 도둑을 맞았다가 되찾은 것들이거나 폐허화한 절터에 쓰러져
있었던 것들로서 관리하기도 어렵고 망실의 우려도 있어서 옮겨다 놓은 것이죠』
―龍山 가족공원에
중앙박물관의 신축 청사가 완공되면 여기 石塔들도 모두 그곳으로 옮겨지겠군요. 새 중앙박물관은 언제 개관합니까.
『새 청사는 2005년 10월에 개관 예정입니다』
―景福宮에 오기만 하면 王宮의
殿閣(전각)들과 불교의 石塔들을 한꺼번에 구경하면서 산책하는 재미가 여간 쏠쏠하지 않았는데, 앞으로 2년 후엔 서로 떼어 놓는다니 왠지
섭섭하군요. 그러면 지금의 중앙박물관 청사는 헐립니까.
『아닙니다. 이곳엔 지금 德壽宮(덕수궁) 안에
있는 宮中遺物展示館(궁중유물전시관)이 옮겨 올 예정입니다. 그렇게 되면 景福宮은 더욱 王宮다워지고 중앙박물관은 더욱 박물관다워지는 거죠』
「돌의 나라」 그리고 「石塔의
天國」 이날 오후 3시, 필자는 국립중앙박물관 앞뜰에서 학예관 蘇在龜씨와 만났다. 그는 2002년에 논문
「新羅下代와 高麗시대 僧塔(승탑) 연구」로 정신문화연구원의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신예학자이다.
그와 함께 야외전시장을 돌면서 그의 해설을 듣기로 했다. 蘇박사에게 석탑에 대한 門外漢(문외한)도 그 예술적 향취를 즐길 수 있도록 쉽게 가르쳐
달라고 재삼 요청했다.
탑은 그것을 만든 재료에 따라 木塔(목탑)·塼塔(전탑: 벽돌탑)·石塔(석탑)으로
나뉜다. 외국인들은 한국을 「石塔의 나라」라고 한다. 그만큼 석탑이 많다는 뜻이다. 이런 우리나라에서도 국립중앙박물관 앞뜰은 국보급·보물급
석탑이 가장 密度(밀도) 높게 林立(임립)한 곳이다. 「石塔의 天國」이라 불릴 만하다.
탑은 그 안에
무엇을 넣었느냐에 따라 佛塔(불탑)과 僧塔(승탑)으로 대별된다. 불탑은 석가모니의 사리나 불상·불경이 모셔진 탑이고, 僧塔은 고승의
靈骨(영골)이 안장된 탑이다. 僧塔은 흔히 浮屠(부도)라고도 불린다.
◆ 국보 제101호 法泉寺 智光國師 玄妙塔
龍이 塔 모서리를 꽉
물었다 蘇박사는 맨 먼저 국보 제101호 智光國師玄妙塔(지광국사 현묘탑)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玄妙塔―필자도
경복궁에 들를 때마다 한 번씩은 이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려 왔다. 「이건 도대체 무엇을 표현한 것인가, 이거 진짜 우리나라 탑 맞어?」
自然美(자연미)를 重視하는 우리 전통적 藝術觀(예술관)에 비춰 보면 그 장식의 디테일 하나하나가 너무 異國的(이국적)이다.
이 탑은 11세기 후반에 조영된 僧塔으로 고려시대 석조예술의 최고 걸작품으로 손꼽힌다. 높이 6.1m, 우리나라 僧塔 중
가장 크다. 뿐만 아니라 平面을 方形으로 하여 독특한 多段式(다단식) 구조를 이룬 基壇部(기단부)와 寶宮形(보궁형) 탑신부가 매우 異色的이다.
多段式 구성인 基壇部는 크게 나누면 2층이다. 필자는 그 상층基壇이 華麗無比(화려무비)하여 한동안 僧塔의
핵심부분인 塔身(탑신)으로 오해했다.
넓은 地臺石(지대석) 네 모서리에는 꼬리를 우렁이처럼 휘감은 龍이
엎드린 자세로 장식되어 있다. 하층基壇의 下臺 底石(하대 저석)은 3단으로 턱을 내어 下段에는 4칸 8면의 네모곽 안에 立花形 眼象(입화형
안상)이 마련되었다. 바로 이 下壇部(하단부)의 네 귀에는 지대석에서 기어오르는 龍이 머리를 쳐들고 입으로는 탑의 모서리를 꽉 물어 삼키는
형상을 하고 있다.
『얼마나 기막힌 디자인입니까. 밋밋하게 마련인 탑의 하단부에 강렬한 악센트를 주면서
안정감을 더하고 있는 것입니다』
中段은 三葉花文(삼엽화문)의 꽃띠 연속무늬도 둘렀으며, 上段은 옆면에
3칸 6면의 네모곽 안에 국화 무늬가 채워지고, 윗면에는 둘레 턱을 살짝 돋우어 下臺 中石(하대 중석)을 받도록 했다. 하대 중석은 각 면
2칸으로 구획되어 內面에 雲龍(운룡)과 如意珠(여의주)가 장식되고, 각 기둥에는 겹세로줄무늬가 線刻(선각)되어 있다. 그 위에 하대 甲石(갑석:
덮개돌)은 옆면에 두 줄로 드림새 장식이 표현되고, 윗면에는 연꽃 무늬가 새겨졌다.
상층기단의 面石은 각
면 2칸의 네모곽 안에 舍利莊嚴具(사리장엄구), 그것이 안치된 寶輦(보련)을 어깨에 멘 인물, 須彌山(수미산), 龍, 神仙 등이 표현되었으며,
그 위의 하대 갑석은 하단부에 묶음 장식의 장막(커튼)이 드리워지고 上段에는 연꽃잎 무늬가 장식되었다.
페르시아風 가마가
모델 ―玄妙塔은 매우 異色的·異國的인데, 도대체 무엇을 모델로 삼아 만든 僧塔입니까.
『처음엔 저도 그게 몹시 궁금했는데 좀처럼 답이 안 나와요. 외람되게 한 10년 여기(국립중앙박물관)에 와서(근무하면서)
매일 玄妙塔을 쳐다본 끝에 드디어 답을 찾아냈어요. 이건 임금, 적어도 왕비·왕자 등 王家에서 타던 外製(외제) 가마를 모델로 삼아 만든
僧塔입니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塔身을 보면 지붕
처마의 바깥으로 커튼(주렴)이 달려 있죠? 만약 집을 모델로 삼았다면 지붕 바깥으로 커튼이 튀어나올 수 없는 거죠. 그럼 무어냐? 건물 모양을
한 運搬具(운반구)를 모델로 삼은 것으로 생각되거든요. 건물 모양의 운반구라면 당시의 寶輿(보여), 즉 왕이 타던 가마가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塔身의 모서리 기둥 부분이 세 가닥의 대나무를 잇댄 형상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아요? 가마꾼이 어깨에 지고 운반해야 하는 가마는 우선 가벼워야
하죠. 그래서 그 재료의 일부가 대나무인 겁니다』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문헌 기록은 있습니까.
『거란이 고려에 두
번이나 침략했지만, 결국엔 和議(화의)가 이뤄지거든요. 그때가 顯宗(현종) 때인데, 그로부터 양국 간에 화평시대가 전개되죠. 高麗史를 뒤져
보니까 화친외교가 시작된 이래 거란 임금은 고려에 여러 차례에 걸쳐 왕과 태자가 탈 寶輿를 보냈습니다』
거란 임금은 고려 靖宗(정종) 9년에 王輿(왕여)를 보낸 것을 시초로 하여 文宗 3·9·11년, 宣宗 2년 등 잇달아 寶輿를 선물했다. 당시
거란은 中原의 覇權(패권)을 놓고 漢族의 왕조 北宋과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와 동맹관계를 이루기 위해 매우 우호적인 외교정책을 구사하고
있었다.
騎馬民族(기마민족)인 거란족이 세운 정복국가 遼(요)는 同시대 東아시아의 군사 최강국으로서
실크로드 너머 西方과 활발하게 교류했다. 그들이 「아라비안 나이트」에 표현되고 있는 페르시아風의 문화에 익숙했다고 해도 전혀 어색할 것은 없다.
國師는 대체로 王師가 입적하면 추증되는 尊稱(존칭)이며, 玄妙塔은 13대 宣宗(선종)이 내린
塔號(탑호)이다. 「지극히 오묘하다」는 뜻의 「玄妙」는 승려의 法力에 대한 최상급의 표현이다. 따라서 국가의 예술적 기량이 총동원되어 거대한
규모의 새로운 모델을 설계하고 섬세하고 화려하게 장식을 구성함으로써 고려 제일의 승탑이 조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高麗 僧塔의 絶頂 技法
―예술적 극치를 이룩했던 지광국사탑 造營(조영) 이후 고려시대의 승탑은 왜 한동안 그 이상의 발전을 멈추고
맙니까.
『12세기에 들어서자마자 天台宗(천태종)의 宗主인 大覺國師 義天(대각국사 의천)의 입적과 함께
火葬墓(화장묘)를 선호하는 새로운 고승의 葬法(장법)이 크게 유행하여 고려의 승탑은 쇠퇴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강원도 원주시 富論面 법천리 法泉寺의 폐허에 가면 지금도 국보 제59호 지광국사 玄妙塔碑(현묘탑비)만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탑비에 따르면 지광국사는 1067년 10월23일에 입적했으며, 11월9일 법천사 동쪽 勝地에서 茶毘(다비)하고 탑비는 1085년에
세워졌다.
지광국사 현묘탑만 짝(탑비)과 헤어져 중앙박물관 뜰에 옮겨지게 된 데는 기막힌 사연이 있다.
탑은 1912년 일본인에 의해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다가 1915년 총독부가 수사에 나서 압수해 왔다. 왜 그랬을까?
『일본땅의 돌은 질이 좋지 않아요. 그래서 일본인들은 원래 石造예술엔 별로 관심이 없었죠. 그 대신에 목조·칠기 공예품을
발달시켰거든요. 일제 식민지시대의 얘기지만, 일본인 골동상들은 朝鮮에 와서 石造物만 보면 환장을 했어요』
◆ 국보 제104호 傳 興法寺
염거화상탑 우리나라 僧塔의 기본틀
제시 지광국사 현묘탑 바로 오른쪽에 국보 제104호 傳 興法寺 廉居和尙塔(전 흥법사
염거화상탑)이 오똑하게 서 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높이 1.7m의 「자그마한」 탑―이 염거화상탑이야말로 우리나라 승탑의 기본적인 틀을 제시한
작품이다. 相輪部(상륜부)는 사라지고 탑신도 조금 망가지긴 했지만, 매우 알뜰하고 야무진 모습이다.
염거화상탑의 기본형식인 八角堂形(8각당형)이다. 이 승탑은 그 塔誌(탑지)에 의해 신라 46대 임금인 文聖王 6년(884)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왜 하필이면 八角堂形입니까.
『원래 石造物 조영에서
八角은 圓形(원형)과 마찬가지입니다. 角을 지어야 浮彫(부조)하기가 좋잖아요. 그렇다고 더 나눠 16角으로 하면 「캔버스」가 너무 좁고,
6角으로 하면 이상하고…』
지붕은 목조건물의 지붕같이 기와지붕을 아주 사실적으로 다듬어 몹시 앙증맞을
정도로 예쁘다. 지붕의 밑면은 두터운 밑불림형 받침 구조로 되어 있으며, 이곳에 4개의 飛天像(비천상)이 한 面 건너 하나씩 장식되었다. 처마
밑에는 서까래가, 지붕 위에는 기왓골과 우동마루가 표현되었다.
『이와 같은 八角堂形 승탑의 구조적 특징은
이후에 조영된 대부분의 新羅 승탑에서도 규범처럼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염거화상탑은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는 우리나라 승탑 최초의 모델입니다』
―지붕돌이 왜 이렇게 허옇게 變色해 버린 부분이 많습니까.
『보존과학을 한 분이 답변해야 할 대목이지만…, 원래 석질이 썩 좋은 것 같진 않아요. 오랜 세월 風雨(풍우)를 맞다 보니 돌 속의 철분이
酸化(산화)해서 이렇게 됐겠지요』
廉居和尙의 系譜
그렇다면 염거화상은 누구인가. 그는 9세기 초반 통일신라에서 활동한 禪僧(선승)이다. 그를 이해하려면 우선 그의 스승이며
迦智山門(가지산문)의 제1祖 道義禪師(도의선사)의 행적부터 조금 짚고 넘어야 할 것 같다. 도의선사는 入唐遊學僧(입당유학승) 출신이다. 그는
당시 중국에서 크게 유행하던 禪宗(선종)불교를 배워 821년에 귀국했다.
禪宗불교는 기존의 敎宗(교종)과
달리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經典(경전)에 통달하는 것을 필요충분조건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直指人心 見性成佛」(직지인심 견성성불)이
중요했다. 「直指…成佛」이란 교리를 캐거나 戒行(계행)을 닦지 아니하고 자기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天性(천성: 진리)을 스스로 깨달음으로써
부처가 된다는 수행법이다. 禪宗은 이렇게 單刀直入的(단도직입적)이고 勇猛精進的(용맹정진적)인 마음공부를 중요시했다.
『道義선사는 선진국에서 禪宗이란 최신 사상체계를 배워 왔지만, 요즘에도 그렇듯 新羅사회가 아직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王京 서라벌에선 「괴이하다」고 해서 배척을 받았거든요. 道義선사도 아직 때가 아니라고 느낀 듯 설악산 陳田寺(진전사)에 들어가 수행을
했어요』
禪宗불교가 僧塔을 重視한
까닭 ―염거화상의 행적은 어떠했습니까.
『염거화상은 진전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禪林寺에서 머물면서 禪法道場(선법도량)을 만들어 정진하다가 거기서 입적했습니다. 염거화상은 그의 법제자인 體澄(체징: 제3祖)이
전남 장흥 땅에 가서 九山禪門(구산선문)의 하나인 迦智山門(가지산문)을 열면서 그 제2祖로 추앙되었습니다』
―景福宮에 이전작업 중 탑 안에서 발견된 塔誌에 의하면 염거화상의 행적이 뚜렷한데, 이 승탑의 이름에 왜 「傳」 字가 붙게
되었습니까.
『日帝 때 염거화상탑을 국외로 밀반출하려다 검거된 범인이 조사를 받으면서 「原州 흥법사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자백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건 原州 지역 石造미술 양식이 아니에요. 승탑은 원래 그 제자들이 세워 주는 것 아닙니까.
전라도 땅에서 山門을 열었던 제자 體澄이 스승의 행적과는 무관한 原州에 가서 스승의 승탑을 세울 리 만무한 것이죠. 아무튼 수수께끼입니다』
―「三國遺事」 기록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처음 승탑이 세워진 시기는 삼국시대 말기인데, 그때
造營(조영)되었다는 신라의 圓光法師(원광법사)나 백제의 惠現 스님의 승탑은 現存하지 않지요. 승탑의 본격적인 造營은 통일신라기 禪宗불교 도입
이후의 일입니다. 왜 禪宗불교에선 승탑을 세우는 일에 그처럼 열성적이었습니까.
『禪家에서는 특히
師資相承(사자상승: 스승의 道를 제자에게 이어 전함)을 강조하여 人脈(인맥)에 따른 法脈이 중시되었는데, 이런 관습에선 가르침을 직접 전수하는
스승을 높이 받들게 마련이에요. 신라 下代에서 처음 시작된 禪門祖師(선문조사)를 위한 僧塔의 造營이 새로운 기운과 각별한 관심 속에서 전개된
까닭입니다. 염거화상탑을 다시 한 번 살펴보십시오. 그 基壇部가 佛像의 臺座(대좌) 형식이 아닙니까. 이런 臺座 형식의 基壇 위에다 僧塔의
塔身을 올린다는 것은 그 주인공이 부처님과 거의 對等하다는 발상인 것입니다』
僧塔의 造營은 신라 下代로
내려가면서 더욱 활발해진다. 禪宗불교가 지방에 활거했던 豪族(호족)들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將軍」 또는 「城主」로 불렸지만 대체로
무식했던 豪族들은 신라 왕실이 옹호해 왔던 敎宗불교가 너무 어려워 民心 끌기에 藥效(약효)가 없다고 보았다. 그들의 정서에는
不立文字(불립문자), 불교의 깨달음은 문자로써 설명하지 않는다는 禪宗의 논리가 마음에 쏙 들었을 것이다.
『승탑은 고려 왕조 개창 이후 최고의 걸작 현묘탑의 造營 무렵까지 계속 발전했습니다. 승탑 하나 잘 만들면 스승을 높이고, 사찰의 위신을
세우고, 제자들도 빛나는 세 가지 이익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승탑 하나 잘못 세우면 스승과 소속 사찰은 도대체 무엇을 가르쳤으며, 또 제자들은
무엇을 배웠느냐는 비판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禪門들 사이에 승탑 잘 만들기 경쟁이 벌어졌던 거죠. 어찌나 경쟁이 치열했던지 고려 4대
임금 光宗(광종·재위 949∼975)은 승탑의 주인공을 王師·國師로 제한하기도 했어요』
◆ 국보 제100호 南溪院
7층석탑 銀가루로 쓴 法華經 발견
南溪院 7층석탑은 염거화상탑에서 북동쪽으로 100m쯤 떨어진 민족문화연구원 건물 바로 옆에 서 있다. 이
7층석탑은 원래 開城市 德岩洞 남계원 터에 있던 것을 1915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고, 1990년 다시 現 위치에 세워졌다.
경복궁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쪽물을 들인 종이에 銀泥(은니: 은가루를 괸 물)로 쓴 「妙法蓮華經(묘법연화경)」 두루마리 7축이
발견되었다. 사리구 등은 없었다.
줄여서 法華經이라고 하는 묘법연화경은 부처님의 가장 기본적인 말씀을
옮겨놓은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寫經(사경)된 佛經(불경)이다. 여기에 쓰인 發願文(발원문)에 이 寫經된 불경은 고려 충렬왕
9년(1283) 이 탑이 수리될 때 廉承益(염승익)이라는 인물에 의해 봉안되었음이 밝혀졌다.
三國遺事에
따르면 신라의 慈藏律師(자장율사)는 중국에서 부처님의 眞身舍利(진신사리)를 귀국할 때 불경도 法身舍利(법신사리)라 존숭하여 가져왔다.
자장율사는 왕가(慶州 金氏) 출신의 入唐遊學僧으로서 우리나라에서 사리신앙을 대중화시킨 고승이다. 따라서
불탑 안에는 진신사리만 아니라 佛經도 法身舍利로 취급하여 모셔졌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불교가 전파된
여러 나라들에 가 보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다는 불탑이 대단히 많습니다. 부처님의 몸 전체가 사리였다고 해도 물리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수량 아닙니까.
『그거야 수학적·계량적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신앙의 차원에서 봐야 하지 않을까요.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그만큼 귀한 것이니까 그 대신에 불경이나 불상을 봉안한 불탑이 나온 것이겠죠』
남계원
7층석탑은 좀 떨어져서 바라보면 TV를 밑에서 위로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올려 놓은 듯한 모습이다. 塔身의 몸돌을 TV 브라운管의 표면처럼
볼록하게 깎았기 때문이다. 相輪部는 대부분 없어지고, 露盤(노반)과 그 위에 얹힌 覆鉢(복발: 대접을 엎어 놓은 듯한 돌)만 겹쳐져 있을
뿐이다.
『상륜부는 탑에서 가장 연약한 부분이라 가장 먼저 망실되죠. 우리나라에 1000여 개의 탑이
현존하고 있지만, 원형을 보존한 것은 5개뿐입니다. 남원 실상사의 2기, 장흥 보림사의 2기, 완벽하지 않지만 봉암사의 1기가 그것들이죠.
불국사의 석가탑을 보수할 때 실상사 탑의 상륜부를 본떠 만들어 붙였습니다』
高麗石塔이 하늘로 치솟은
이유 남계원 7층석탑은 높이가 10.0m로 홀쭉한 반면에 탑신은 작은데, 왠지 날렵하기보다는 좀 묵직하다. 탑신의
단면을 두툼하게 깎았기 때문인 듯하다.
탑신부의 각층 몸돌과 屋蓋石(옥개석: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다듬어졌는데, 각 몸돌(塔身) 모서리에는 隅柱(우주: 갓기둥)가 模刻(모각)되었다. 몸돌 위에 놓인 지붕돌은 추녀가 두꺼워지고,
轉角部(전각부)는 上面에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반전되듯이 내려왔으며, 그 下部도 이 線에 맞춰 反轉하고 있다.
―통일신라의 석탑은 거의 3층석탑입니다. 고려시대의 석탑은 왜 자꾸 높아집니까.
『신라 석탑은 95%가 3층이지요. 신라의 석탑이 2층 기단 위에 탄탄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탑이라면 고려의 석탑은 하늘로 치솟는 탑이지요.
5층석탑이 제일 많고, 7층, 9층, 11층, 13층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신라 석탑과 고려 석탑의
예술적 수준을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통일신라 경덕왕 때 세운 불국사의 석가탑, 다보탑은 그 예술적
수준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절정기의 석탑입니다. 그 후 造塔 기술은 사양기로 접어듭니다. 신라 下代에 풍미한 禪宗불교에서는 불탑보다
승탑이나 법당 조영에 오히려 관심이 더 많았거든요. 그러다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가 일어났어요.
고려 개국
후 신라 전성기의 양식을 재생하려고 했지만, 그게 갑자기 되는 일입니까? 신라탑의 모양새가 안 나오는 겁니다. 그래도 高麗的 특색을 보여야
하니까 탑의 층수를 높이게 되었죠. 고려탑은 거대하지만 좀 투박하죠. 造塔에 대한 열정도 통일신라 절정기에 비해 식었고, 고려 중기 이후엔
몽골의 침략 등 외침이 잦아 국가 경제력도 약했거든요. 그래도 남계원 7층석탑은 균형·비례·다듬새, 어디에 내놔도 흠잡을 데 없는 걸작입니다』
―기단부의 일부 돌들이 시커멓게 변색되어 있습니다. 불탄 자리입니까.
『불을 맞은 것 같은데, 보존과학을 한 분에게 들으니 나쁜 대기에 노출되어 오염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디다』
◆ 국보 제99호 葛項寺
3층석탑 美人은 화장을 안 해도
美人 지난 10월2일에 이어 10월4일 오전 10시 학예관 蘇在龜씨를 다시 만나 그와 함께 갈항사 3층석탑을
찾아갔다. 최근 복원된 興禮門(흥례문)과 勤政門(근정문)을 지나면 경복궁의 正殿인 勤政殿(근정전)을 마주한다. 근정전 보수공사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근정전을 오른쪽으로 돌아 회랑의 옆문을 빠져나가면 곧 갈항사 3층석탑이 나타난다.
갈항사
3층석탑은 원래 경북 금릉군(지금의 김천시) 南面 梧鳳里 갈항사 金堂 남쪽에 東·西로 세워졌던 쌍탑으로 통일신라의 대표적 석탑 양식을 지니고
있다. 1916년 경복궁으로 옮겨 놓았는데, 현재 민속박물관의 남쪽 300m 지점에 서 있다.
『최소한의
石材로 가장 짜임새가 완벽하고 정리가 잘된 탑입니다. 이 탑 造營 이후 신라 석탑은 최절정기를 향해 달려갑니다. 진짜 美人은 이 탑처럼 화장을
안 해도 美人인 것입니다』
높이는 東塔 4.3m, 西塔 4m. 相輪部만 망실되었을 뿐 비교적 완전한데,
東塔의 보존 상태가 더 좋다. 이 탑이 중요한 것은 건립연대가 확실하다는 점이다. 東塔의 기단부에 경덕왕 17년(758)에 零妙寺(영묘사)의
言寂法師(언적법사)와 두 누이, 이렇게 3남매의 發願(발원)으로 이 쌍탑을 세웠다는 銘文(명문)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8세기 중엽 통일신라 때의 석탑이 어떤 양식과 특색을 지녔는지, 또 그 후 석탑은 어떻게 진전되어 가는 것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겁니다. 갈항사 3층석탑은 귀중한 編年作品(편년작품)이에요』
기단부의
지대석, 하층기단, 面石을 한 개의 돌로 조성했으며 하층갑석, 상층 기단면석과 갑석은 각기 여러 개의 돌로 되어 있다. 위·아래 基壇, 塔身部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기 單一石으로 만들어졌다.
―아! (제일 밑바닥에 있어야 할) 西塔의 地臺石은 어디로
갔습니까.
『쓰러져 있던 이 탑을 옮겨 오던 1916년에 뭘 알았겠어요. 원래 자리에 그냥 두고 온
거죠. 콘크리트에 자갈을 배합하여 지대석 代用으로 삼고 있는 겁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새 청사가
완공되기 전에 지대석을 (갈항사지에서) 찾아내야 하겠군요.
『거기 어딘가에 묻혀 있다고 보고 몇 년
전부터 기초조사하고 있습니다만, 토지를 매입 또는 임차해야 하니까 아직 본격적인 발굴작업에 들어가지 못했어요. 기회가 좋은데… 못 찾으면
추정해서라도 새로 만들어야지요』
지붕 밑의 층단 받침이 5段인데 이것이 바로 신라탑의 전형적 양식이다.
탑신을 받치는 괴임턱은 2段씩 직각으로 놓였다.
―3개 층의 몸돌 모두에 조그마한 구멍이 질서정연하게
뚫려 있는데요.
『아, 그것은 못질한 흔적입니다. 三國遺事의 기록에 의하면 이 탑은 조성 당시 금으로
싸바른 金塔(금탑)이었어요. 金版(금판)을 붙이면서 생긴 구멍입니다. 큰 금판을 붙였던 1층 몸돌엔 촘촘히, 몸돌이 작은 2층과 3층엔
듬성듬성하게 못질한 거예요. 이건 보통 시주로 조성된 것이 아닙니다』
―돈도 많았나 봐요.
『言寂대사는 慶州 金氏로서 왕족이었어요. 그런 3남매가 최대의 호사, 좋게 말하면 최고의 정성을 들여
조영한 겁니다. 르네상스도 동방무역으로 떼돈을 번 이탈리아 도시국가 영주들의 후원에 의해 발흥하지 않았습니까. 이 탑이 조성되던
景德王代(742∼765)는 唐(당)나라의 제반 문화를 수입하여 신라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루지 않았습니까. 불상의 王者인 불국사 釋迦塔(석가탑)의
건립연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이 없지만, 경덕왕 말기 작품으로 보는데, 갈항사 3층석탑은 그 본보기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전통 석조예술의 르네상스는 어떻게 하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국민적 성원이 필요하죠. 자식이 전통예술을 하고 싶어 해도 부모가 「그것을 하면 밥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고 하면 발전은
커녕 代가 끊기고 맙니다. 돌을 깎겠다고 하면 「돌가루 마시고 손 다치는 石手쟁이 왜 하려느냐」고 하면 안 되는 거죠. 그래도 저는 비관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민족의 DNA 속에는 돌을 다루는 특별한 재능이 內在되어 있는 것 같아요. 어느 날이라도 마음만 제대로 먹으면 되는 겁니다』
蘇在龜 학예관은 개천절 하루를 거른 이틀 동안 약 4시간에 걸쳐 필자와 인터뷰하면서 엉뚱한 질문도 잘
받아 주었다. 둘은 경복궁 옆 골목 식당에서 비빔밥 한 그릇씩을 먹고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