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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기행(9) 新羅人의 理想世界를 形象化한 佛國寺

야생초요 2006. 7. 3. 12:52
국보기행(9) 新羅人의 理想世界를 形象化한 佛國寺
 
각 2개의 탑·다리·불상이 국보
 
佛國土 사상을 건축물로
佛國寺는 하나의 사상이고, 세계다.


글·李淸 소설가
사진·金大璧 사진작가

 佛國土 사상을 건축물로
  佛國寺는 하나의 사상이고, 세계다.
 
  대륙에서 불어오는 불교문화의 바람을 한반도 내에 있던 고대국가들 중 맨 마지막으로 맞은 신라는 기존 신앙(무속신앙)의 저항과 이질적 문화에 대한 배척심을 누그러뜨리고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신라인들은 신라 땅이 곧 석가불 탄생 이전의 아득한 옛날부터 부처님의 땅(佛國)이었으며, 불교가 마지막으로 완성되는 이상향임을 믿었다. 주로 義湘(의상), 慈藏(자장) 등의 求法僧(구법승)들에 의하여 과거, 현세, 미래를 통하여 신라가 곧 부처님의 땅이라는 사상이 정립되었고, 그렇지 못한 현실을 개조하여 이상향에 가깝게 만들어 가야 한다는 이론이 정립되었다. 그 기초가 된 경전이 「화엄경」, 「법화경」, 그리고 「아미타경」이었다.
 
  그같은 佛國土 사상이 절이라는 구체적인 건축, 조형물을 통하여 형상화된 것이 佛國寺다. 따라서 佛國寺에는 신라인이 파악하고 이해한 불교의 모습이 재현돼 있고, 동시에 신라인이 불교를 통하여 이르고자 했던 彼岸(피안)의 세계, 이상향의 모습이 형상화되어 있다. 그러므로 『불국사를 이해하면 불교를 이해한다』는 말은 과장도 虛辭(허사)도 아닌 진실이다.
 
 
  3개 권역으로 나눈 부처님 세계
 
 
  佛國土를 향한 신라인들의 염원, 그들이 이해하고 그리고 있던 이상향, 곧 부처님 나라는 세 가지 구역으로 나뉘어 佛國寺라는 전체 구도를 이루고 있다.
 
  첫째 영역은 「법화경」을 근거로 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바세계, 부처님 나라인데 이는 靑雲橋(청운교), 白雲橋(백운교)를 지나 자하문을 들어서면 동쪽에 다보탑, 서쪽에 석가탑을 세우고 웅장한 모습으로 버티고 서 있는 대웅전, 그 뒤에 떨어져 있는 설법 강당 무설전, 그리고 자하문으로부터 무설전까지 東西 양편으로 에워싸듯 이어져 있는 회랑들로 이루어진 영역이 그것이다. 누가 봐도 여기가 곧 佛國土의 중심임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영역은 「아미타경」에 근거를 둔 아미타 부처님의 극락세계이다. 그것은 청운교, 백운교의 왼편에 있는 七寶橋(칠보교), 蓮華橋(연화교)를 지나 안양문을 들어서면 드넓은 마당 가운데 서 있는 극락전으로 상징된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구역은 「화엄경」에 근거를 둔 비로자나 부처님의 蓮華藏世界(연화장세계) 불국이다. 이는 무설전 뒤편에 관음전과 나란히 서 있는 비로전으로 상징된다. 이렇게 하여 불국사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현실세계의 부처님 나라, 극락전을 중심으로 한 死後세계의 부처님 나라, 그리고 비로전을 중심으로 한 法身佛世界(법신불세계)의 부처님 나라로 나뉘면서 그 세 구역의 부처님 세계가 佛國寺라는 하나의 울타리에 통합되고 있다. 法身(법신) 佛身(불신)이 따로 없으며 궁극적으로 하나라는 통합적 불교 교리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불교 교리를 이보다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살아 있는 경전은 달리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불국사를 한번 휘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불교 공부 절반은 하는 셈이 된다.
 
  필자가 불국사를 찾은 것은 이번이 네 번째. 첫 번째는 1956년 초등학교 6학년 때 수학여행을 간 것이고, 두 번째는 1975년 朴正熙 대통령의 발원과 지시에 의하여 불국사가 重創(1970~1973년)된 모습을 확인(얼마나 못쓰게 만들어 놓았는가 하고)하기 위해서였다. 세 번째는 1983년 불국사 뒤편 선원의 조실 月山스님을 찾아 법을 묻기 위해 방문했고, 다시 20년 만에 이번이 네 번째의 방문이다.
 
  올 때마다 느끼는 한결같은 감흥은 「우리에게 불국사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런 마음인가. 수많은 국내외의 선남선녀들이 찌는 듯한 8월 초순의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단아하고도 완벽한 부처님 나라를 마음속에 담느라 여념이 없다.
 
  해발 745m의 경주 토함산 서쪽 자락. 신라인들이 그 특유의 신앙심과 상상력으로 구축해 놓은 부처님 세계는 그러나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佛國寺古今創記(불국사고금창기)」에는 異次頓(이차돈)의 순교 다음해인 528년(법흥왕 15년)에 창건되었다고도 하고, 670년(문무왕 10년)에 강당인 무설전을 짓고 義湘, 表訓의 제자들을 머물게 했다고 하며, 「三國遺事(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金大成이 개인적 발원으로 751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774년(혜공왕 10년) 그가 죽을 때까지 완공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면 불국사는 신라에 불교가 수입된 초기에 이미 소규모 사찰로 존재했고, 그로부터 200년 후 金大成에 의해 대규모 사찰로 확장되었으며, 거국적인 공사 끝에 완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후 아홉 번의 重創을 거쳤으나 임진왜란 때 2000여 칸의 건물이 소실되고 문루와 석대 등 석조물만 남는 참혹한 재앙을 맞았다. 임란 후 조금씩 복구되었으나 옛 모습에는 턱도 없이 모자라는 규모에 퇴락한 모습이었다.
 
  1969년 문화재위원들의 발굴 조사가 시행되고 1970년 2월 공사에 착공하여 당시까지 遺址(유지)로만 남아 있던 비로전, 경루, 회랑, 무설전, 관음전 등을 복원하고 대웅전, 극락전, 범영루, 자하문 등을 새롭게 단청하였다. 그러나 옛 기록에 남아 있는 오백성중전, 천불전, 시왕전, 십육응진전, 문수전, 동당과 서당, 청풍료, 명월료, 객실, 영빈료 등 45종의 건물들은 오늘날 그 위치조차 알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고 위치가 확인된 건물들 중 일부(예: 향로전, 나한전, 시왕전 등)도 복원에서 제외되어 아쉬움을 남긴다.
 
  세 개의 구역으로 나뉘고 다시 이를 통합시키고 있는 불국사는 어느 부분을 따로 떼어 가치를 따지기 어려울 정도로 그 전체가 國寶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특별히 옛 사람들의 정신과 솜씨가 묻어 있는 것을 더 높이 사서 나라의 보배로 정한 것이 國寶라면 아무래도 전란과 세월의 무자비한 파괴와 침식에도 견디어 낸 부분들일 것이다.
 
  불국사에는 여섯 개의 국보급 문화재가 있다. 그 위대한 유산들은 절의 초입에서 만나는 석조 다리에서부터 시작하여 대웅전 앞뜰의 석가탑과 다보탑에서 절정을 이루고 맨 뒤편 비로전의 불상에서 장중한 대단원을 맺는다.
 
 
  여섯 개의 國寶들
 
 
  불국사는 다른 국내의 사찰들과는 달리 一柱門(일주문)과 天王門(천왕문)이 없다. 그 대신 석단을 쌓아 그 아래쪽의 사바 세계와 석단 위의 부처님 세계를 구분해 놓았다. 사바 세계에서 佛國土로 들어가는 문이 바로 자하문과 안양문이고 자하문으로 들어가는 돌다리가 靑雲橋, 白雲橋이며, 안양문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蓮華橋, 七寶橋이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국보 제22호, 청운교와 백운교는 국보 제23호이다. 1000년 또는 1500년 전에 만들어진 이 다리를 건너 극락세계로 들어간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고통과 비애의 세계에서 환희의 세계로 건너다 주었을까. 무심한 돌다리이지만 앞으로도 몇천 년 더 인간세상의 고통의 무게를 견디기에 손색없는 모습이다.
 
  안양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석가 세존의 전당인 대웅전을 옹립하듯 낯익은 탑 두 기가 집 떠났다 돌아온 가족을 환영하듯 반갑게 나그네를 맞는다. 동편의 多寶塔(다보탑)과 서편의 佛國寺 三層石塔(불국사 삼층석탑:일명 釋迦塔, 속명 無影塔)이 그것이다. 다보탑과 석가탑은 높이는 각각 10.4m로 꼭 같으나 모습은 너무나 판이하고 요즘 표현대로 하면 개성적이다.
 
 
  다보탑은 「법화경」에 나오는 다보여래를 형상화한 것으로 다보여래는 영원히 살아 있는 법신불의 화신이다. 다보탑의 구조물 중 어느 것 하나도 佛法의 표현 아닌 것이 없다. 다보탑의 갑석 위에는 네 마리의 돌사자가 안치되어 있었으나 그 중 한 마리는 옛날에 없어지고 두 마리는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반출되었으며, 나머지 한 마리만 외로이 세월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데 1980년대 10원짜리 동전에 새겨진 다보탑에 이 마지막 돌사자가 들어가 있는 것을 두고 별의별 정치적 루머가 나돈 적도 있었던 바로 그 돌사자다. 국보 제20호다.
 
  석가탑은 이름 그대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형상화한 탑신으로 국보 제21호. 다보여래와 석가여래가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은 한 부처가 설법하고 다른 한 부처가 이를 증명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석가탑은 석가모니 부처가 설법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장중하고도 균형미를 갖춘 신라 석탑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무설전을 지나 비로전에 이르면 법당의 정면에 높이 177cm의 통일신라시대 金銅毘盧舍那佛坐像(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호)이 중생을 맞는다. 같은 불국사 경내에 있는 극락전의 아미타여래좌상, 그리고 栢栗寺金銅藥師如來立像(백률사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과 함께 신라 3大 불상으로 꼽히는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말하자면 신라 불상의 대표격이다. 다소 길어 보이는 얼굴에 볼과 눈두덩에 군살이 붙은 것처럼 보이는 모습과 힘찬 근육은 남성적인 강한 인상을 풍긴다.
 
  또 하나의 신라 불상인 佛國寺金銅阿彌陀如來坐像(불국사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높이 166㎝)은 회랑 서편 극락전에 앉아 있다. 비로전의 毘盧舍那佛坐像과 양식적으로 비슷한 인상을 주는 9세기 불상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떡 벌어진 어깨에 무수한 중생의 고통을 모두 짊어지고도 남을 만한 기백이 넘쳐난다.
 
  부처님 세계로 가는 교량과 佛身(불신)을 상징하는 석탑과 佛身 자체를 조형한 불상 등 중요한 핵심의 대부분이 전란과 화재 속에서도 온존하여 이 땅이 바로 佛國土임을 웅변하고 있는 불국사는 찾을 때마다 다른 모습과 다른 설법을 들려주는 조사 스님 같은 모습이다. 중생의 근기와 심경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비치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