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협곡 속에 감추어진
수수천년의 비밀 蔚州郡 斗東面 태화강의 지류인 大谷川(대곡천) 상류 川前里(천전리)의
거대한 암벽에는 先史時代로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사회상, 문화, 미술 등을 생동감 있게 보여 주는 여러 그림과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것이 국보 제147호 川前里 刻石(각석)이다. 답사에 앞서 필자는 미리 전화를 넣고 부산
伽倻洞(가야동)에 소재한 東義대학교의 박물관장 林孝澤 교수를 찾아갔다. 1970년 12월 동국대 文明大 교수에 의해 처음 발견되어, 1973년
5월 國寶로 지정된 이 岩刻畵(암각화)에 관한 학계의 논문을 체크하고, 그것과 관련한 설명을 듣기 위해서였다.
林교수는 1970년대 중반 신예학자로서 유적 발굴 현장에서 뛰던 시절부터 필자와 知面이 있던 사이다. 최근 10여 년 간
林교수가 金海 良洞里 소재 伽倻(가야) 유적 발굴에 전념해 왔다는 소식만 듣고 있었을 뿐, 생활의 무대가 달라서인지 그 동안 재회의 기회는
없었다. 이번 국보기행 때문에 25년 만에 그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林교수는 미리 관계 자료를
한아름이나 준비해 두었다가 이 방면의 門外漢(문외한)인 필자에게 이것저것 설명하더니 필자 혼자서의 답사가 영 미덥지 못했던 듯 현장답사에 선뜻
동행했다. 경부고속도로 釜山 톨게이트에서 100리 거리인 彦陽(언양) 인터체인지. 이곳을 벗어나 35번
국도를 따라 15리쯤 북상하면 도로변에 「川前里 刻石 가는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여기서 우회전하여 1km쯤 동진하면 大谷川을
만난다. 냇가에 승용차를 주차시켜 놓고 大谷川에 걸린 작은 다리 너머의 산길로 접어들어 50m 쯤 오르면
철책이 보인다. 철책 아래편 깊은 협곡에 천전리 刻石이 숨어 있다. 그 앞으로는 기역(ㄱ)자로 급하게 꺾인 大谷川의 맑은 물이 흐르고, 그 바로
앞에는 높이가 300m 쯤 될 듯한 바위산이 大谷川에 바짝 다가서서 시야를 꽉 막고 있다. 이곳 냇가의
바위들에는 뭔가 무거운 것에 잔뜩 눌린 자국으로 패여 있다. 林교수는 이것들이 쥐라기와 백악기에 번성했던 恐龍(공룡)의 발자국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4차원의 여행을 통해 아득한 옛날로 다가가는 듯했다. 이런 수수만년 전의 흔적을 대하면 누구든 자신의 한 평생쯤은 하나의 点으로
표시해도 과분하다는 생각을 들어 자꾸 겸손해진다. 恐龍의 발자국들이 찍힌 냇가 바윗돌들의 바로 위에 너비
9.7m, 높이 2.7m의 직사각형 회색 粘土岩(점토암)이 나타난다. 이 거대한 하나의 암벽에 갖가지 그림과 문양, 그리고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 岩刻畵 중에서 가장 먼저 발견된 것이다. 林孝澤 교수에 따르면 面刻(면각) 동물상은 新石器시대 말기, 각종 문양은 청동기시대,
300여 字의 銘文(명문)은 신라시대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한다. 先史人의
간절한 염원 표현한 그림문자 그림과 글자가 새겨진 岩面은 일부러 좀 깎은 듯하다.
岩面이 윗부분에서 아래쪽을 향해 15도 가량 기울어져 있다. 이런 구조가 수천년 풍우를 견뎌온 비밀이다.
上部의 岩刻畵는 크게 나누면 두 종류다. 그 첫째가 기하학 무늬, 둘째가 인물상과 동물상으로 이루어진 각종 物像들이다. 이들은 모두 쪼으기
기법(彫琢技法·조탁기법)으로 새겨진 것이다. 기하학 무늬는 마름모꼴·둥근·물결·굽은·십자·우렁 무늬 등
다양하다. 이 가운데 가장 눈에 잘 띄는 것은 마름모꼴과 둥근 무늬다. 마름모꼴 무늬는 연속으로 이어지고 홑 또는 겹무늬 안에 갖가지 무늬를
새겨 넣었다. 둥근 무늬도 원, 타원형, 홑, 두 겹, 세 겹 또는 안에 점 또는 선 등을 새기고 있다. 무슨 복잡한 의미를 나타내려고 한
듯하다. 林孝澤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이들 무늬들은 신석기시대 무늬토기(有紋土器)의 기하학 무늬들에까지
연결되는 어떤 의미나 부호 같은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양식의 증산, 생식과 풍요를 기원하는 先史人들의 간절한 기원인 동시에 이를
표현한 그림문자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사슴, 호랑이 그리고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동물들도
보인다. 암·수 동물 두 마리가 마주선 모습도 눈에 띈다. 대상물 전체를 陰刻한 面쪼으기, 윤곽선만 깊게 판 線쪼으기, 가는 線긋기 등 여러
가지 기법이 동원되어 있다. 동물과 사람은 대부분 面쪼으기, 기하학 무늬는 線쪼으기, 기마행렬과 배,
상상 속의 동물 등은 가는 線긋기로 표현했다. 林교수는 일종의 표현주의적 암각기법이라고 설명했다.
下部에는 線刻 그림과 銘文이 새겨져 있다. 이곳을 찾았던 사람들이 기념으로 적은 글과 행렬도 등이다. 새와 龍의 모습도 보인다. 간단
소박하면서도 능숙한 솜씨다. 下部의 핵심부분은 역시 銘文이다. <乙巳年(을사년)에 沙喙部(사탁부)의
葛文王(갈문왕)이 찾아 놀러와 처음으로 골짜기를 보았다. … 이름없는 골짜기인데, 좋은 돌을 얻어 글을 지어 새기고 이름을 書石谷(서석곡)이라고
했다. 함께 놀러온 이는 葛文王과 友妹(사랑하는 누이)와 麗德光妙한 於史鄒安郞, 3인이다…>
여기서의 乙巳年은 法興王 12년, 즉 서기 525년으로 추정된다. 사탁부는 서라벌 6부 가운데 하나다. 葛文王은 왕의 아버지, 왕의 장인, 왕의
동생 등에 대한 존칭이다. 위의 銘文에서 등장하는 갈문왕은 法興王의 동생으로서 法興王을 후계한 眞興王(진흥왕)의 아버지인 徙夫知(사부지:
立宗이라고도 함) 갈문왕이다. 新羅 왕실과 花郞의 修行 장소
川前里 刻石의 銘文은 동일 시기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시기를 달리하는 것들이 혼재하고 있다. 그래서 위의
乙巳銘文(을사명문)을 原銘(원명)이라고 부른다. 原銘의 내용은 사탁부 소속의 갈문왕이 古谷을 찾아 이곳을
書石谷이라 이름지었다는 것인데, 사부지 갈문왕이 사탁부에 소속되었음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冷水里碑(냉수리비) 및 鳳坪碑(봉평비)와
더불어 6세기 신라왕실 세력의 실태를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다. 法興王 26년(539)에 사부지 갈문왕이
이곳을 재차 방문했음은 乙巳銘文에 잇달아 새긴 追銘(추명)에서 확인된다. 이것을 追銘이라 부르는 것은 銘文의 위치와 내용으로 보아 原銘과
연결되는 기록이기 때문이다. <지난 乙巳年 6월18일 昧(매=새벽)에 사탁부의 徙夫知 갈문왕과 妹와
於史鄒安郞, 3인이 놀러온 이후 □년이 지나갔다. …王(徙夫知 갈문왕인 듯함)은 옛 왕비 只沒尸兮妃(지몰시혜비)를 그리워했다. 己未年 7월3일에
王(역시 사부지 갈문왕인 듯함)이 妹와 함께 다시 書石을 보러 계곡으로 왔다. 卽知太王妃 夫乞支妃(모즉지태왕비 부걸지비)와
徙夫知王子郞(사부지왕자랑)과 □□夫知도 함께 왔다…> 내용은 原銘에 보이는 乙巳年의 사실을 과거의
일로 기록하는 등 과거사를 축약하여 먼저 적고, 다시 기미년에 이곳에 행차한 인물들을 열기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法興王妃를
「卽知太王妃」라고 기록한 것이다. 이는 법흥왕을 太王, 그의 왕비를 太王妃라 부를 만큼 신라국왕의 지위가 격상되었음을 시사하는 자료다. 또한
갈문왕의 아들에 대한 존칭이 「王子」였음도 알 수 있다. 原銘과 追銘은 각각 암석의 표면을 약간 파서
곱게 다듬고, 가장자리에 테두리를 둘러 구획을 정한 후 글자를 새겼다. 글자가 오랜 세월의 풍우에 마모되어 그 판독을 둘러싸고 연구자들 간에
견해 차이가 심하다. 이곳에는 徙夫知 갈문왕과 법흥왕비 이외에도 많은 신라인들이 다녀갔다. 書石에 새겨진
이름을 보면 永郞(영랑), 仙郞(선랑), 聖林郞(성림랑), 天郞(천랑), 阿花郞(아화랑), 法民郞(법민랑), 水品(수품), 安藏(안장),
好世(호세) 등 역사적 인물, 특히 화랑들의 이름이 수두룩하다. 이는 서석골이 신라 왕공귀족의 종교적인 의식과 화랑들의 수행처임을 알려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古代史의 일면을 기록한 사료로 중요시된다. 또한 여기엔 고승과 불교의식 등에 관한 기록도 보여 불교사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보존하려면 개발하지 말아야
大谷川 상류에 있는 천전리 刻石을 답사하면서 그 아래쪽 2km 지점에 위치한 국보 제285호 盤龜臺 岩刻畵(반구대 암각화)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124번지 盤龜臺 일대는 1965년 12월 울산 공업지대의 용수 공급을 위한 사연댐 건설에 의해
연중 9개월 이상 수몰되어 있다. 盤龜臺 암각화가 물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시기는 갈수기인 겨울과 3∼4월 무렵.
林교수는 『지금 盤龜臺에 가더라도 물 밑으로 들어간 암각화를 볼 수 없다』고 말했지만, 岩刻畵의 수몰상태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생각에서 현장에 접근해 보기로 했다. 더구나 盤龜臺 일대는 고려 최후의 충신 鄭夢周(정몽주)가 언양에서 귀양을 살면서
자주 찾은 곳으로 그를 모시는 盤溪書院(반계서원)이 세워져 있어 그것만으로도 답사할 만한 곳이다. 盤龜臺
일대는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다만 암각화에 접근해 보려던 당초의 계획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盤溪書院 바로 앞까지
물이 들어와 있어 거기서 반구대 암각화 쪽으로 더 나가려면 배를 타야만 했는데, 배가 보이지 않았고, 뱃사공도 출타중이었다. 반구대 암각화의
답사는 물이 빠져 암각화가 드러나는 시기를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林교수는 『수몰기간 중의 암각화는
훼손될 수밖에 없다』면서 『귀중한 암각화를 물 속에 잠기게 방치해 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울산시 당국은 川前里와 盤龜臺 암각화 지역 일대를 엮어 관광지로 개발할 방침을 세우고 있다. 협곡에 이르는 접근로를 2차선
도로로 확장·포장하고, 주차장과 先史文化館을 세워 수학여행단과 일반관광객들이 찾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곳 주민들도 「오지마을로 만들지
말라」는 플래카드를 마을 어귀에 붙이는 등 울산시의 개발방침에 적극 호응하고 있다. 반면 학계에서는
울산시 당국의 岩刻畵 지역 개발 방침에 강경하게 반대하고 있다. 프랑스와 미국에서는 암각화 유적지의 접근로를 아예 봉쇄하거나 안내인 없이는
접근을 불가능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林교수는 『岩刻畵를 보존하려면 사람들의 접근이 어렵도록 교통이 불편한 그대로 놔두는 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