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찍한 基壇과 長大石이 좋은
분황사 석탑 2002년 꽃前線(전선)의 北上 속도는 예년보다 훨씬 빠르다고 했다.
國寶紀行을 위한 3월27일 아침의 서울發 南行은 바로 봄맞이, 그것이었다. 천년 古都의 봄은 벚꽃과 함께 滿開(만개)하고 있었다. 오후 4시
정각, 慶州시 구황동 소재 芬皇寺(분황사) 석탑 앞에 도착했다. 관람료 1500원, 주차비 무료. 芬皇寺
석탑은 얼핏 보면 벽돌로 쌓은 탑처럼 보인다. 그러나 벽돌이 아니다. 거무스름한 安山岩(안산암)을 쪼개어 벽돌처럼 다듬은 것이다. 이런 탑은
벽돌탑(塼塔)을 흉내낸 돌탑이라 하여 摸塼石塔(모전석탑)이라 불린다. 基壇(기단)은 한 변이 약 13m,
높이 약 1m. 자연석으로 쌓은 단층인데 널찍해서 시원스럽다. 塔身을 받치고 있는 화강암 長大石도 보기에 좋다. 基壇 네 귀퉁이에는 화강암으로
조각한 사자 한 마리씩을 배치했는데, 두 마리는 수컷, 나머지 두 마리는 암컷이다. 암컷에 대해선 물개로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塔身(탑신) 4면에는 입구가 개방된 龕室(감실:神主 등을 모시는 닫집)을 배치하고, 입구 좌우에는
守門將(수문장)인 仁王像(인왕상)을 조각하여 박아넣었다. 지금 감실 안에는 머리 없는 불상을 안치하고 있으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한다. 눈먼 아이의 눈을 뜨게 한 千手觀音
분황사는 善德女王 3년(634)에 건립되었다. 분황사라고 하면 생각나는 인물이 元曉(원효) 스님이다.
그는 분황사에 머물면서 「華嚴經疏」(화엄경소), 「金剛三昧經論疏」(금강삼매경론소) 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원효 스님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불교 대중화에 진력했다. 『나무아미타불이라고만 외워도 西方淨土(서방정토)에 갈 수 있다』고
설법했다. 분황사는 이런 아미타 신앙의 본거지였다. 元曉는 승려이면서도 瑤石公主(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었다. 그 소생이 新羅 3대 문장가의 한 분인 薛聰(설총)이다. 元曉가 죽은 뒤 薛聰은 元曉의 遺骸(유해)로 塑像(소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안치하고, 평생 사모하고 뜻을 다했다. 그러다 언젠가 薛聰이 옆에서 절을 하자 원효의 塑像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아들을
향한 아비의 눈길이 출가한 승려라 해서 다를 수 있겠는가. 一然이 三國遺事를 저술할 때까지 그 塑像은 고개를 돌린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분황사 佛殿(불전) 북쪽 벽에 그려진 千手觀音(천수관음)은 영험이 있기로 유명했다. 三國遺事에는 분황사의
千手觀音이 눈먼 아이 希明(희명)의 눈을 뜨게 한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다. 분황사 석탑은 분황사의 창건과
동시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1669년에 간행된 東京雜記(동경잡기)에 따르면 분황사 석탑은 임진왜란(1592) 때 반쯤 파괴되었는데, 뒤에 몇
차례 보수되었다. 3층으로 되어 있는 지금의 상태는 1915년에 수리한 모습이다. 원래는 9층이었다고 한다.
현재의 높이는 9.3m. 탑신부는 길이 30∼40cm의 거무스름한 安山岩으로 쌓아올렸다. 탑신 4면마다 목탑을 흉내내 감실을
마련했고, 감실 입구 좌우에는 인왕상을 조각하여 배치하였으며, 두 짝의 돌문을 여닫게 하였다. 지금 감실 안에는 머리가 없는 불상을 안치하고
있으나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2층과 3층은 1층에 비해 높이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1915년의 복원 당시 2층과 3층 사이에 장치된 석함 속에서 사리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각종 옥류와 패류, 금은제 바늘과 침통, 가위 등과
함께 숭녕통보, 상평오수 등 옛날 돈도 발견되었다. 이는 고려 숙종∼예종 연간에 改塔된 바 있음을 말해 준다. 지금 분황사 경내에는 이 탑을
수리할 때 남은 석재가 따로 보관되어 있어 지금의 모습이 창건 당시의 형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첨성대는 천문대가 아니라 佛敎祭壇이란 異說 분황사를 나서면 바로
新羅 최대의 사찰이었던 黃龍寺(황룡사)의 폐허가 펼쳐진다. 황룡사지 건너편이 국립경주박물관과 半月城(반월성). 半月城을 끼고 보행 전용의 인왕동
小路를 따라 좀 내려가면 국보 31호 瞻星臺(첨성대)가 눈에 들어온다. 瞻星臺도 분황사처럼 善德女王 때 건립된 것이다.
첨성대는 신라시대에 천문을 관측했다는 석조물이다. 높이는 9.5m. 구조는 바닥의 基壇部, 술병형의 圓筒部(원통부),
井字石의 정상부로 이뤄져 있다. 기단부 아래의 땅 속에는 잡석과 받침돌, 그리고 기단부 서쪽으로는 일렬로 자연석이 놓여 있다. 正南을 향해
밑에서부터 제13단과 제15단 사이에 龕室과 같은 四角門(사각문)이 뚫려 있다. 필자가 처음 첨성대와
만난 것은 1956년 초등학교 6년생으로 경주에 수학여행을 갔을 때였다. 東洋에서 제일 오래된 천문대―이런 기대감은 보고 난 후 대번에
실망감으로 변했다. 천문대로서는 너무 낮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 답사에서 첨성대를 다시
관찰하니 필자의 머리에 각인되어 있던 것보다는 훨씬 크다는 느낌이 다가왔다. 뿐만 아니라 첨성대의 기능은 천문관측이 아니라는 학계의 소수의견이
옳을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학계 일부에서는 첨성대가 불교제단, 기념물,
불교관계 건축물이라는 등의 이견이 속출되었다. 그 이유는 대충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1)첨성대가
평지에 있다는 것, 2)첨성대의 자체 구조상 그 위로 오르내리는 통로가 매우 불편하다는 것, 3)전체적인 외형이 불교의 수미산 모습과 비슷하다는
것. 첨성대도 분황사 석탑과 마찬가지로 해체 보수과정에서 原型이 크게 변질되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첨성대 관람요금 300원. 가장 잘 보존된 淨惠寺址 13층 석탑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淨惠寺址(정혜사지) 13층 석탑은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석탑으로
손꼽힌다. 신라시대의 다층 석탑으로선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모양으로 유명하다. 그런 이유에서 필자는 진작부터 답사를 벼르고 있었다.
좀 무리를 했다. 경주 도심에서 30㎞ 거리인 자옥산 자락 정혜사지까지를 승용차편으로 달려갔더니 오후
6시40분이었다. 큼직한 잡석으로 구축된 탑의 기단은 단층이긴 하나 넓다. 그 위에 13층 탑신이 놓여 있다. 初層(초층)의 탑신만 크고
隅柱(우주) 및 門柱(문주) 그리고 감실이 있다. 목조탑의 구조를 그대로 나타낸 것이다. 2층 이상의
탑신은 身·蓋石이 급격히 작아져서 마치 初層에 얹혀 있는 상륜부와 같아 보인다. 일반적인 遞減比例(체감비례)를 무시한 점이 특징이다. 상륜부에는
露盤(노반)만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도덕산(720m)과 자옥산(563m)이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싸 금세 어두워졌다. 오던 길을 500m쯤 되돌아 나가 1박에 3만원짜리 옥산모텔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3월28일 아침 8시에 정혜사지 13층 석탑을 다시 찾았다. 석탑은 아침 햇살을 듬뿍 받고 그 세련된 기하학적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기단이 특이하다. 다른 탑과는 달리 단단한 평석이 아니라 단단한 흙으로 되어 있다.
13층 석탑 바로 아랫동네엔 사적 154호 玉山書院(옥산서원), 보물 413호 獨樂堂(독락당)이 있다. 玉山書院은 조선 중종 때의 성리학자 晦齋
李彦迪(회재 이언적)을 받드는 賜額書院(사액서원)이며, 獨樂堂은 회재가 1532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있을 때 지은 別墅(별서: 별장)이다.
필자는 도덕산과 자옥산에 둘러싸인 옥산리 계곡을 벗어나 안강읍을 거쳐 경주로 되돌아갔다. 이어 분황사와
첨성대를 건설한 국민화합의 군주 善德女王의 무덤, 善德女王의 父王으로서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眞平王의 무덤, 그리고 元曉 대사의 아들이며
신라 제1의 유학자인 설총의 무덤을 둘러보고 상경길에 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