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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淳台의 국보 기행(7)-민족사의 로마 新羅를 다시 본다(1)

야생초요 2006. 7. 3. 12:51
年中기획 - 「민족사의 로마」 新羅를 다시 본다(1)
 
좌담 - 경주 고분의 주인공들(신라통일 주체세력의 직계 선조)은 누구인가?
 
1500년 전 新羅김씨는 시베리아 자작나무 모양의 독창적 金冠을 쓰고, 트라키아王이 선물한 黃金칼을 찼으며, 하얀 西域産 天馬로 달리며 하늘을 나는 새들을 숭배했다. 地中海 연안에서 제작한 예술적 유리병에 담긴 포도주를 마시면서 페르시아 음악에 심취하기도 했던 그들. 東아시아 세계에서 유일하게 로마세계와 國交 수준으로 교류, 지구 반대편 문물과 사유체계를 받아들인 新羅人은 어떤 사상적 고향을 가진 種族인가. 우리 민족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할 수 있었던 노하우의 비밀을 추적한다

일시: 2002년 1월31일 오후
장소: 月刊朝鮮 대표실

[좌담 참석자]
權寧弼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金秉模 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 / 申瀅植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 / 李仁淑 前 경기도 박물관 관장 / 사회·鄭淳台 月刊朝鮮 편집위원

 新羅에 대한 無知와 모략
 
 
  사회 북한은 1970년대 이후 노골적으로 고구려 중심주의와 정통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삼국시대의 주역이고 백제와 신라는 조역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조선전사」나 「조선통사」에는 4세기 말 이후 고구려의 南進(남진)정책은 삼국통일을 위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평가하는 반면에 백제와 신라의 北進(북진)정책은 그 지배층의 탐욕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북한학계는 7세기의 신라가 唐과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을 민족적 배신행위로 규정합니다.
 
  李仁淑 신라의 삼국통일이 「민족적 배신행위」라는 북한 역사 이데올로그들(理論陣)의 주장은 객관적 진실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의 시초부터 이미 민족이 형성되어 있었고, 또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는 낡은 생각이 아직도 나돌아다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역사상의 삼국시대는 원래 하나의 국가가 셋으로 분열된 것이 아닙니다. 청동기시대 이후 수백 개의 城邑國家(성읍국가)가 나타났고, 그것들이 다시 전쟁과 동맹을 통해 광역의 영토국가인 신라, 고구려, 백제로 정리된 것입니다.
 
  權寧弼 북한의 역사책에서 고구려는 선진문화의 창조자와 전파자로서 기록하는 반면 신라는 후진사회이고 그 지배층은 삼국 간의 경제·문화적 교류를 방해하고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정복전쟁을 벌여 동족에 대한 더 많은 억압과 착취를 꾀했다는 것입니다. 신라가 한반도의 동남쪽에 갇혀 있던 「후진사회」라는 주장은 뭘 모르고 하는 소리이거나 모략입니다. 당시 고구려나 백제는 東아시아의 선진사회인 중국 쪽의 문화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중국과 국교를 맺기 전까지의 신라는 북방 스텝 루트(초원의 길)를 통해 서방세계의 문화를 수용했습니다. 최근, 흥미롭게도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문화 수용시대에 축적된 에너지 때문이라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平壤을 민족사의 중심에 두려는 억지 攻勢
 
 
  사회 북한의 역사 조작은 갈수록 강화되고 있습니다. 10년 전부터 북한은 평양 근교에서 檀君陵(단군릉)과 檀君 뼈를 발견했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리고는 단군 뼈를 전자상자성공명연대(ESR)에 의해 수십 번 측정한 결과 1994년 현재 5011±267년 전의 뼈였다고 발표했습니다.
 
  서울대 이선복 교수는 그런 주장에 대해 기본적인 논리구성에 있어서도, 개별적인 증거의 제시에 있어서도 전혀 아무런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李仁淑 그 무덤 안에서 발견된 金銅冠(금동관)의 파편이 檀君시대의 것이라는 주장은 황당한 것입니다. 그것은 기원전 3000년 무렵 평양 일대에서 청동기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도금술이란 놀라운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억지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BC 12∼10세기에 개막됩니다. 소위 「단군릉」은 고고학적 증거로 보아 5∼6세기 고구려의 어느 유력자 부부의 합장 무덤일 것입니다.
 
  權寧弼 그것은 민족사의 중심을 평양으로 설정하려는 소위 주체사학의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지나지 않습니다. 학문적 관점에서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일방적인 정치선전에 불과한 것입니다. 다만 단군조선에 대한 북한의 그런 주장을 남한의 일부 재야사학자들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문제가 심각합니다.
 
  사회 금년 들어 KBS TV가 檀君陵(단군릉)뿐만 아니라 東明聖王陵(동명성왕릉)에 관한 대형 특집 프로그램을 잇달아 방영했습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非학문적인 북한의 이데올로기 공세는 무시해야 마땅한 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공영방송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단군릉뿐만 아니라 동명성왕릉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三國史記에 의하면 고구려의 시조 東明聖王의 무덤은 平壤 천도 이후에도 옮겨지지 않고 舊都인 集安(집안)에 그대로 존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북한을 방문한 남한의 지식인들 중 일부가 소위 「단군릉」과 「동명성왕릉」을 참배하면서 五體(오체)를 땅바닥에 납작 붙이는 큰절까지 올리고 있습니다. 절(寺) 모르고 시주하는 格이죠.
 
  申瀅植 신라의 삼국통일은 우리 민족사 최초의 통일입니다. 신라의 삼국통일로 민족형성의 틀이 거의 완성된 것입니다. 하나의 민족으로서 기반이 확고해진 것이죠. 삼국시대는 우리 역사상 최장의 전국시대였습니다. 피를 피로 씻는 수백년 간의 亂世(난세)를 治世(치세)로 바꾸었다는 것만으로 삼국통일은 역사의 큰 발전입니다.
 
  權寧弼 통일신라는 당시의 슈퍼파워 唐제국과 함께 선진문화권을 형성, 민족문화를 한 단계 높인 역할을 했습니다. 통일신라는 우리 민족사에서 처음 맞은 황금기였습니다.
 
 
  신라 積石木槨墳은 스키타이 양식
 
 
  사회 경주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경주시내로 진입하면 옛 무덤들이 숱하게 눈에 띕니다. 이 무덤들이 호화무비의 세계적 명품인 금관과 황금칼, 로만 글라스가 쏟아져 나온 積石木槨墳(적석목곽분=돌무지 덧널무덤)인데, 그것들이 만들어진 시기는 언제입니까.
 
  金秉模 積石木槨墳은 신라왕이 麻立干(마립간)으로 불리던 시기(4∼6세기)의 무덤들입니다. 원래 북방 초원(스텝) 지역에서는 유력자가 죽으면 그가 생전에 살던 통나무 집을 돌과 흙으로 그대로 덮어버립니다. 그래서 스텝지역의 적석목곽분을 파보면 난방시설의 흔적도 남아 있고 심지어 창문도 발견됩니다. 신라 金씨들은 그런 옛 전통에 따라 지상에 시신을 넣을 집을 일부러 만들고 그 위에다 냇돌을 쌓은 다음 흙으로 半球形(반구형) 봉분을 한 겁니다.
 
  사회 金선생님은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의 스키타이 추장 묘역인 이씩(Iccyk) 지역의 쿠르간(Kurgan=적석목곽분)群을 둘러보셨죠? 경주의 대릉원과 비교하면 어떻습디까.
 
  金秉模 積石木槨墳은 세월이 지나면 목곽 부분이 썩어 주저 앉기 때문에 적석 중앙 부분이 함몰되게 마련입니다. 그 모양은 경주의 고분들과 같았지만 규모면에서 훨씬 크더군요.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스키타이족의 쿠르간들은 비 온 다음날의 개미굴처럼 수백 개가 솟아올라 있었습니다.
 
  權寧弼 스키타이族은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 黑海(흑해) 지역에서부터 천산산맥 사이에 위치한 넓은 초원지대에서 농업과 유목을 경제수단으로 삼아 생활했습니다. 스키타이는 유별나게 황금을 사랑했습니다. 「스키타이」라는 이름은 그리스의 헤로도투스가 붙인 것이고, 그 후손들인 유목민들은 자신들을 사카(Saka)족이라 불렀습니다.
 
 
  그들은 黑海를 통해 그리스인들과 교역하면서 그리스 제품인 황금물품을 많이 수입하기도 했습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쥐 박물관에는 그 당시 만들어진 물품이 많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1991년 한국에서 열린 「스키타이 황금展」에서 전시된 것은 바로 이 유물들입니다. 이것들 중에 戰士 두 명이 角杯(각배) 하나로 술을 나눠 마시는 작품 등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카자흐스탄의 이씩 쿠르간(적석목곽분)에서 발굴된 黃金人間은 금을 사랑하던 스키타이人들의 풍속을 잘 보여 주었습니다.
 
 
  신라 金문화의 한 뿌리는 헬레니즘
 
 
  李仁淑 스키타이人들은 황금을 사랑했지만 황금을 다루는 기술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용맹했던 스키타이人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동물 무늬와 풍습이 조각된 황금제품을 그리스人들에게 주문하기도 했거든요. 현대 비즈니스 용어로 말하면 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방식입니다. 그리스人들은 무역을 잘하기도 했지만 金세공에 있어서도 천재였습니다.
 
  사회 경주의 積石木槨墳에 누워 있는 墓主들이 바로 삼국통일의 기반을 만들었던 사람들입니다. 최근 「로마문화왕국-신라」라는 책을 써 크게 주목받은 古代유리 전문가 요시미즈 츠네오(由水常雄)씨는 『4∼6세기 북방 초원의 길을 통해 들어온 로마세계의 문화가 삼국통일의 원동력』이라고 강조했더군요.
 
  李仁淑 신라의 金문화나 유리제품에 영향을 준 것은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화입니다. 헬레니즘 문화는 로마문화의 원류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신라문화의 뿌리는 그레코 로만 문화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봅니다.
 
  權寧弼 신라왕의 칭호는 4세기 중엽의 내물왕 때부터 麻立干으로 바뀌었죠. 신라는 대체로 이 시기부터 국가의 체제가 정비되고 국력이 강화되었습니다.
 
  사회 적석목곽분은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중국, 일본에는 없는 무덤이죠.
 
  權寧弼 적석목곽분은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에서 발원하여 흉노에게로 이어진 墓制(묘제)입니다.
 
 
  신라金씨는 匈奴의 후예
 
 
  사회 경주국립박물관에 보관중인 文武王의 陵碑文(능비문)을 보면 侯(투후)의 후예라는 기록이 적혀 있습니다. 투후라면 匈奴(흉노)의 休屠王(휴도왕)의 아들인 金日(김일제: 기원전 134∼86)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신라김씨는 흉노 출신이라는 얘기 아닙니까. 흉노는 중국의 전국시대부터 中原에 압력을 가하던 북방의 기마민족입니다. 당시 초원에는 묵특(冒頓)이라는 흉노의 영걸이 나타나 초원의 패자인 單于(선우)가 되어 있었습니다.
 
  楚漢(초한) 쟁패전에서 승리하여 中原을 통일한 漢高祖 劉邦(한고조 유방)이 흉노를 치기 위해 40만 대군을 동원, 親征을 했다가 白登(백등)이라는 곳에서 흉노군 30만에게 오히려 포위당하고 말았죠. 묵특의 포위작전은 매우 집요했어요. 아무리 포위망은 뚫으려 해도 뚫을 수가 없었습니다. 漢兵은 10인 가운데 두세 명이 동상에 걸려 고통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에 비해 흉노병은 추위에 익숙하여 아무런 피해가 없었습니다. 결국 漢나라가 묵특에게 美人과 금을 바치겠다고 약조하고 겨우 포위에서 풀려났습니다. 이후 한나라는 흉노에게 사실상의 조공을 하게 됩니다. 교훈을 주려 했다가 되레 교훈을 받은 셈입니다.
 
  申瀅植 漢과 흉노의 힘 관계는 漢武帝(한무제) 때에 가서야 역전됩니다. 漢의 장수 곽거병(곽거병)은 기원전 122년 甘肅(감숙)지방에 있던 흉노를 쳤습니다. 흉노의 계속되는 패전에 당시의 單于 이치는 그 책임을 물어 휘하의 혼야왕과 휴도왕을 죽이려 했습니다. 이에 두 왕은 이치 선우의 문책이 두려워 漢나라에 항복하려 했는데, 도중에 휴도왕이 항복을 망설였기 때문에 혼야왕이 휴도왕을 죽이고 그 무리를 빼앗았지요. 휴도왕의 아들 日 (일제)가 그의 어머니와 함께 포로가 되어 漢나라에 잡혀온 것은 바로 이때였습니다. 그후 큰 戰功을 세운 日에 대해 漢武帝는 祭天金人(제천금인), 즉 「하늘에 제사 지내는 알타이 맨」이라고 해서 金씨 성을 하사했습니다.
 
  金秉模 日는 카자흐스탄語의 「삐디」를 한자로 옮긴 것인데, 그 뜻은 학식이 있는 사람, 선각자, 샤만 등입니다. 漢武帝 이후 南흉노는 漢나라에 복속했지만, 北흉노는 서쪽으로 옮겨갔습니다. 北흉노가 바로 게르만族을 서쪽으로 밀어내 유럽의 민족 대이동을 촉발한 훈族입니다.
 
  權寧弼 東로마제국을 전율케 했던 훈族의 지도자가 아틸라王(재위 434∼453)입니다. 아틸라王이 이끄는 훈族은 천산산맥 서쪽 일리(Illi) 지역에서 서진하여 단숨에 볼가江을 건너 東로마 경내로 침입했습니다. 보병을 주축으로 했던 東로마軍은 훈族 기마병의 활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여러 도시가 폐허화했어요. 훈族은 오늘날의 불가리아, 그리스, 유고슬라비아를 지나 프랑스의 골 지역까지 진출했습니다.
 
  東로마제국은 속수무책이어서 아틸라王에게 평화를 애걸했습니다. 그 결과 불평등 강화조약이 체결되었어요. 조약의 내용은 매년 950㎏의 금을 훈族에게 헌납한다는 것입니다. 東로마의 역사가 프리쿠스는 강화회담중에 아틸라를 직접 목격하고 그의 용모를 「키가 작고 뚱뚱하며 머리통이 크지만 얕은 코에 수염이 성긴 모습이다」고 기록해 놓았어요. 전형적인 몽골로이드(황색인)의 특징입니다.
 
  申瀅植 로마세계의 금을 약탈했던 아틸라王의 大攻勢 직후에 신라에서는 세계적 명품인 금관을 정형화했던 慈悲마립간(458∼479)의 시대가 펼쳐졌습니다. 또한 慈悲마립간은 100여 척의 배에 타고 신라에 침범한 왜군에게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과 서쪽에서 거의 동시대에 알타이系 영웅의 캠페인이 화려하게 펼쳐진 셈입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김씨의 始祖는 金閼智(김알지)입니다. 그렇다면 흉노 왕족 김일제와 김알지는 어떻게 연결됩니까.
 
  사회 김일제는 임종시의 漢武帝로부터 어린 昭帝(소제)를 보필하라는 유촉을 받았습니다. 김일제의 후손들은 대대로 侯(투후)를 계승하는 영예를 누렸지만, 王莽(왕망)의 찬탈 때 협조했던 모양입니다. 光武帝 劉秀(광무제 유수)가 일어나 왕망의 新나라를 멸망시키고 漢나라를 부흥시킨 후에 김일제의 후손들은 피의 숙청을 당했습니다.
 
  金秉模 그때 김일제의 후손들은 休屠國(휴도국)으로 도주하여 성을 王씨로 바꾸고 살았습니다. 이 사실은 제가 휴도국 故地에 있는 비석에서 확인했습니다. 그런 중국의 왕조 교체기에 김일제의 후손 중 한 갈래가 신라로 들어오고, 그 내력이 文武王의 陵碑(능비)에 새겨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申瀅植 어찌 되었든 김알지는 탄생 후 昔脫解王(석탈해왕)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김알지의 후손인 仇道(구도)는 백제와의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어 공신이 되었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仇道의 아들 味鄒(미추)가 왕위에 올라 김씨계의 첫번째 왕이 되었습니다. 초기의 김씨 왕들은 尼師今(이사금)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다가 17대 왕 訥祗(눌지)부터 麻立干이라는 칭호를 사용합니다. 그 후 智證(지증)을 끝으로 마립간이란 칭호는 더 사용하지 않고 그 다음 대인 法興(법흥)부터 왕이란 칭호를 씁니다.
 
  사회 이사금이나 麻立干의 뜻은 무엇입니까.
 
  金秉模 李基文(서울대 명예교수·언어학) 선생과 李基東(동국대·한국고대사) 교수와 함께 헝가리에 간 적이 있는데, 그곳 학자가 바로 그런 질문을 합디다. 실은 지금도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한국 대학교수가 세 사람이나 가서 답변을 못 한다고 해서야 체면이 서겠습니까. 그때 했던 저의 답변을 여기서 다시 한 번 되풀이하겠습니다. 이사금은 원래 북방 초원지대의 어느 지역 이름인데, 나중에 그곳 출신 사람들이 이름으로 사용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 지역은 아마 카자흐스탄의 이씩 지방인 것 같습니다. 신라의 장군인 異斯夫(이사부), 일본의 전설시대 영웅인 이사오, 흉노와의 전쟁으로 이름을 남긴 漢의 장군 貳師(이사) 등은 모두 이씩 지방과 연결되는 알타이 계통 인물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東歐에 가면 「말릭」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더군요. 그렇다면 신라의 마립간은 말릭+칸, 즉 말릭 출신의 大영웅이 아니겠습니까. 칸은 「칭기즈칸」의 예에서 보듯 북방 초원지대에서 여러 왕들까지 지배하는 지상 최고의 존재, 중국 같으면 황제에 해당하는 인물이거든요. 영웅에도 계급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마립간은 이사금보다 한 단계 높은 칭호로 보입니다. 이런 얘기를 제가 했더니 가만히 듣고 있던 그 헝가리 학자가 『헝가리 말로 말릭이 바로 영웅이다』라고 감탄을 하더군요.
 
 
  金閼智=금(Gold)+금(Gold)
 
 
  金秉模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알지가 발견된 곳은 始林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무가 많은 곳이죠. 김알지가 들어있던 궤짝도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던 겁니다. 따라서 김알지의 출생과 관련된 토템으로 첫번째 꼽을 수 있는 것은 나무(木)입니다. 북방 초원지대에서 하얀 색깔의 자작나무(白樺樹:백화수)는 바로 生命(생명)을 의미하는 神樹(신수)입니다. 일본사람들이 신라를 시라기(白木)라고 불러온 데는 다 그만한 까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三國遺事에는 昔脫解(석탈해) 이사금이 김알지를 안고 대궐로 가는 길에 「새들이 모두 따라오면서 춤추고 뛰놀았다」고 쓰여 있습니다. 아시아 기마민족 간에 새는 인간과 절대자를 연결하는 媒介者(매개자)입니다. 북방 유목민들 중에는 鳥葬(조장)을 치르는 풍속이 있습니다. 새가 죽은 사람을 하늘나라에 운반해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록들은 김알지의 사상적 고향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김알지의 姓(성)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알지의 姓인 김은 금(Gold)을 뜻합니다. 이름인 閼智(알지)도 알타이 언어에 속하는 모든 종류의 언어에서 금을 의미합니다. 즉 알타이 언어의 알트, 알튼, 알타이가 아르치, 알지로 변한 겁니다. 그러니까 김알지는 금+금(Gold+Gold)인 것입니다.
 
  사회 그러니까 김알지의 후손인 김씨계 왕들의 무덤에 금제 유물이 많이 매장된 것이군요.
 
  權寧弼 신라와 가야 사람 이름과 지명 중에 알타이 문화권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것이 여러 개 있습니다. 몽골 쪽에는 Altay, 중국 쪽에는 아르타이(阿勒泰), 러시아 쪽에는 Altai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알타이 산맥의 최고봉인 우의봉에서 흘러내리는 강 이름도 아르치사江이에요. 이 강은 沙金(사금)이 많이 나기로 유명하지요. 그래서 그 산의 이름도 金山(알타이山)입니다.
 
  사회 신라의 지배층을 구성한 朴, 昔, 金씨들은 탄생과정이나 성씨의 유래, 角杯 사용과 같은 풍속을 살펴보면 모두 기마민족 문화의 배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김씨족들만 유별나게 금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금관은 김씨계 묘역인 적석목곽분에서만 나왔거든요. 금관은 누가 썼다고 보십니까.
 
 
  신라 금관은 한국 고대사의 비밀을 밝혀 주는 暗號
 
 
  金秉模 금관은 聖骨(성골)만 썼는데, 그 중에서도 왕이 된 사람과 그 형제 자매들이 사용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금동관은 왕이 되지 못한 인물들이 사용한 것 같고, 은관은 금동관을 쓰지 못한 계층에서 사용한 것 같습니다.
 
  사회 신라의 금관은 先行형식이 있는 것입니까.
 
  權寧弼 옛날부터 있었던 것을 더욱 크게 하거나 더욱 아름답게 한 것이 아닙니다. 鹿角樹枝形(녹각수지형; 사슴뿔 모양의) 입식은 스키타이 문화에도 나타나지만, 直角樹枝形(직각수지형) 입식은 신라인의 독창적 창안입니다.
 
  사회 금관을 살펴보면 直角樹枝形 立飾(직각수지형 입식)이 3단인 것과 4단인 것들이 주로 발견되었는데,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金秉模 종래까지 山字形 또는 出子形이라고 불렸던 立飾은 북방 초원지대의 자작나무를 형상화한 것이니만큼 樹枝形(수지형)이라고 불러야 옳을 것 같습니다. 금관을 세밀하게 관찰하면 한국 고대사의 비밀이 풀립니다. 현재까지 발견된 금관의 樹枝를 보면 1단, 2단, 3단, 4단형이 있습니다. 樹枝의 段(단)은 어느 왕계의 1대·2대·3대·4대 王인지를 표시한 것입니다. 몽골의 고고학자 노브고르도바 박사를 그의 생전에 만나 물어보았더니 『樹枝의 段은 원래 여자 샤먼의 제너레이션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단언합디다.
 
  사회 금관 스스로 갖고 있는 암호를 풀어보면 경주 大陵園(대릉원)의 적석목곽분 안에 누워 있는 墓主들이 누구인지 대충 드러나겠군요.
 
  金秉模 가장 화려한 4단짜리 금관이 나온 天馬塚(천마총=155호 고분)은 걸출했던 왕인 지증마립간의 무덤입니다. 曲玉(곡옥)이 달려 있지 않은 4단짜리 금관이 나온 金鈴塚(금령총)은 후계자를 두지 못했던 소지마립간의 무덤이지요. 胎兒(태아)의 모습인 曲玉은 多産을 의미합니다. 세 마리의 새가 장식된 3단짜리 금관이 나온 瑞鳳塚(서봉총) 북분은 鳥生夫人(조생부인)의 무덤입니다. 3단짜리지만 가장 장중한 금관이 출토된 금관총은 김씨 왕계의 王中王이라 할 만한 자비마립간의 무덤, 3단짜리 금관이 출토된 황남대총(98호 고분) 北墳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자비마립간의 여동생 무덤으로 추정됩니다.
 
  李仁淑 鳥生夫人이라면 「새가 낳은 부인」이라는 뜻인데, 그녀의 금관에만 유일하게 새가 장식되었다는 것이 흥미롭군요. 그런데 서봉총 금관을 조생부인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金秉模 지증왕의 어머니인 鳥生은 눌지마립간의 딸이자 자비마립간의 동생이며 소지왕의 고모입니다. 그러니까 聖骨 중의 聖骨입니다. 그녀의 탄생 과정에도 새와 관련된 얘기가 있었지만, 失傳(실전)된 것 같습니다. 신라 瓢形墳(표형분; 표주박형의 무덤)의 경우 북분은 여자의 무덤이고 남분은 남자의 무덤입니다. 서봉총 북분의 주인공도 여자일 것입니다. 이 북분에서 서봉총 금관의 임자가 누구인가를 풀 수 있는 유물 하나가 나왔습니다.
 
  銀으로 만든 盒(합)인데, 거기에 「辛卯年」이란 銘文이 적혀 있어요. 그 辛卯年은 지증마립간 4년(511)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王中王으로 일컬어지는 지증왕마립간은 鳥生부인의 아들입니다. 따라서 문제의 銀盒(은합)은 지증마립간이 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으로 호화로운 유물을 내장하고 「신묘년」이라는 명문까지 써 넣어진 것으로 해석됩니다.
 
 
  클레오파트라의 금 귀고리
 
 
  李仁淑 신라금관에는 수목과 녹각, 그리고 새 등이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수목과 새 숭배사상은 神의 메신저로서 영원한 생명을 기원하는 시베리아 샤먼의 오랜 전통입니다. 사슴 숭배사상 또한 사슴의 뿔이 나뭇가지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결국은 수목숭배에서 나온 모티브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대부분의 금관에는 생명과 多産의 상징인 曲玉이 무수히 장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신라금관들의 장식 모티브와 제작 아이디어는 그것이 출토된 신라 고분의 墓制인 적석목곽분과 더불어 시베리아 대륙 유목문화의 소산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權寧弼 금관은 결국 신라인의 창안품이지만, 그 조형의 바탕을 보면 기본적으로 사슴뿔과 나무 등의 소재를 디자인화한 것인데, 이것은 시베리아의 은제관(알렉산드로플 출토)과 수목형 금관(돈江의 노보체르카스트 출토)과 강하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금관에 부착된 둥근 잎새형의 瓔珞(영락; 구슬 꿴 장식)도 동아시아에는 유례가 없는 외래 요소입니다. 금관과 장신구에 부착된 曲玉도 알타이의 파지리크 지역에서 그 사용례가 발견되며 금제 허리띠 또한 오르도스의 흉노 지배층의 무덤에서 발굴된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사회 신라의 금문화는 양에 있어서 엄청나게 풍부하며 주로 장신구류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것은 同시대 東아시아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양상입니다.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되는 금제품은 금관, 금귀고리, 금목걸이, 금팔찌, 금반지, 금요패와 패식, 금제 신발 등입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금장식으로 멋을 부린 셈입니다.
 
  李仁淑 고신라 무덤에서는 거의 빠짐없이 금제 귀고리가 무수하게 출토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太環式(태환식) 귀고리는 동아시아에서 우리나라를 제외하고는 중국을 포함한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 예가 없습니다. 신라의 태환식 귀고리와 똑같은 태환식 귀고리의 실물이 확인된 유일한 지역은 이집트입니다. 이집트의 그레코 로만시대, 즉 클레오파트라가 등장하는 프톨레마이오스王朝의 귀고리 중에서 신라의 그것과 거의 동일한 형태와 제작기법의 유물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점입니다. 이렇게 신라 금제 귀고리에 표현된 기술을 살펴보면 그 맥이 그레코 로만 시대의 금공예품에 닿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權寧弼 신라는 당시 이집트 수학의 8進法을 수용한 것 같습니다. 한양대 김용운(수학) 교수에 따르면 아직도 우리 언어생활에서 사용되는 「이팔(2×8)청춘」 같은 것이 그 흔적입니다.
 
  李仁淑 순금의 가공에 필요한 모든 기술이 총동원되어 있는 듯한 다양한 기법과 표현양식은 모두 찬란한 그리스人들의 金工品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토록 똑같은 장식 모티브(의장)가 유라시아 대륙의 동과 서에서 출현할 수 있을까 의아하지만, 이는 확실히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 없습니다.
 
 
  鷄林路 고분서 출토된 寶劍은 트라키아王의 선물
 
 
  사회 중국의 사서 三國志 東夷傳(동이전)을 보면 원래 삼한 사람들은 금보다 구슬을 훨씬 귀하게 여겼다는데, 왜 신라김씨만 금을 사랑했을까요.
 
  金秉模 유목민들은 항상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과 富의 수단인 금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장신구로 만들어 직접 착용하여 과시한 것입니다. 반면 定住농경민족은 기물이나 가옥을 꾸미는 데 금을 이용했지요. 신라왕족들의 몸 속에는 북방 기마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신라 金문화의 주인공은 4세기 이후 6세기 초까지의 김씨 왕족입니다. 金씨왕계가 金이라는 성을 붙이게 된 것도 실상 금과 관련이 있고, 수도를 金城이라고 한 것도 그들이 애호하던 금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權寧弼 신라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된 금제품에서는 스키타이-흉노 문화와의 연결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1973년 계림로 14호분에서 출토된 길이 30cm의 황금 장식 보검은 칼과 칼집을 모두 금테로 장식하고 칼자루에 紅瑪瑙(홍마노)를 嵌入(감입)한 세계적 명품입니다. 이런 모양의 보검은 훈族의 아틸라王이 활약하던 5세기에 그리스, 로마, 이집트, 西아시아에서 유행했다고 합니다. 東아시아에서는 경주에서만 발견되었는데,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근처의 보로워에 지방에서 몇 점의 발굴 사례를 보이고, 그밖에는 실크로드上의 키질 벽화에 묘사되어 있을 뿐입니다.
 
  사회 계림로 14호분의 주인공은 어떻게 세계적으로도 이런 희귀한 황금보검을 입수했을까요. 「로마문화왕국-신라」의 저자 요시미즈 츠네오(由水常雄)씨는 지금의 불가리아에 있던 트라키아의 켈트族 왕이 주문생산을 하여 신라 왕가에 선물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런 귀중품을 무역상 수준에서 취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트라키아 王의 사절이 황금보검을 휴대하고 직접 신라에 왔든지, 신라 사신이 트라키아에 가서 하사받았든지 둘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李仁淑 요시미즈씨는 트라키아 王이 금세공기술자를 신라에 보내면서 호위병으로서 흉노족을 썼을지 모른다고 추리했습니다. 만약 그러했다면 그 금세공기술자는 그리스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금세공에 관한 한 그리스인들이 탁월했으니까요. 그리크 골드(Greek Gold)로 유명한 그리스에는 원래 금이 많이 산출되지 않아서 그리스인들은 실제로 금을 풍부하게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카자흐스탄 지역인 알타이 산맥의 금産地까지 와서 금을 구해 갔음은 헤로도투스가 저술한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도 금의 공급처를 구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신라에서는 개·고양이에게도 금목걸이를 해준다」
 
 
  사회 신라는 어떻게 금을 확보했습니까.
 
  權寧弼 고대 신라인들은 경주 인근의 태화강·형산강 유역에서 풍부하게 나오던 사금을 사용하여 자유자재로 금제품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당시 아시아는 물론이고 서방에까지 널리 알려졌습니다. 아랍인들의 기록을 보면 「신라는 개나 고양이에게도 금목걸이를 해주는 부유한 나라」라고 했고, 가까운 왜국에서도 신라로부터 금을 수입해 간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李仁淑 적석목곽분에서는 금제품과 함께 서양의 유리그릇들도 출토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東아시아 세계에서는 유일하게 신라 고분에서만 발견되는 로만 글라스입니다. 동부 지중해 연안 팔레스타인에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로만 글라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황남대총(제98호 고분) 남분에서 출토된 鳳首形 유리병(사진 참조)입니다. 지중해 지역에서 유행한 형태로서 손잡이가 하나 달렸는데, 포도주를 담는 병으로 쓰였습니다. 그곳에서는 봉수형 유리병을 오이노코에(Oinocoe)라고 하죠. 타원형 몸체에 나팔꽃처럼 벌어진 끝을 둥글게 말아서 처리한 口緣(구연·아가리), 따로 붙인 굽, 목에 가는 선을 돌리는 등 유리공의 유창한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습니다. 담록색의 투명도가 높은 유리질에 器形이 안정되고 우아합니다.
 
  金秉模 오이노코에는 그리스語로 포도주를 따르는 주전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신라왕족들은 地中海風의 오이노코에를 기울여 포도주를 마시고 페르시아 노래를 불렀다 해도 하나도 놀랄 일이 아닙니다. 신라 고분에는 서역의 악기도 출토되고 있습니다.
 
  申瀅植 신라에는 적지 않은 서역사람이 들어와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 증거가 고고학적으로는 신라 괘릉의 서역인 모습의 石像(석상)이고, 문학적으로는 處容歌(처용가)가 아닙니까.
 
  權寧弼 오이노코에는 聖書(성서)시대의 지중해 연안에서 聖水(성수)를 담는 용기로 쓰였죠.
 
  사회 신라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을까요.
 
  申瀅植 唐太宗 때 중국에서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트리우스敎(景敎)가 들어와 있었으니까 통일신라 시대의 사람들도 기독교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겠지요.
 
  李仁淑 로만 글라스는 신라와 지중해 세계의 교류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증거물입니다. 경주의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천마총, 황남대총에서 30점 가량 출토되었습니다. 특히 황남대총에서는 鳳首形 유리병과 함께 지그재그 무늬 장식의 비커 컵도 출토되었습니다.
 
  權寧弼 신라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된 유리그릇들은 後期 로만 글라스입니다. 그 중요 산지는 오늘날의 이스라엘, 레바논, 시리아 지역 등을 중심으로 한 동부 지중해 연안 지역이죠. 지중해 연안에서 제작된 로만 글라스는 서역계 상인들에 의해 스텝 루트(초원의 길) 또는 海路(해로)를 통해 신라로 공급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신라와 가야 지역에서만 출토되는 角杯
 
 
  사회 신라와 가야의 고분에서는 금제품과 유리 제품 이외에도 角杯가 많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角杯는 이상하게도 부여, 고구려, 백제의 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금관, 금동관이 신라·가야 지역에서만 유행했다는 사실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角杯는 신라·가야 사회에서 금관이 사용되던 어떤 의식에서 반드시 있었을 음주가무에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각배를 사용하게 된 사회적 분위기나 전통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또한 신라, 가야 이전 시대인 청동기·철기 시대 유적에서 왜 금관과 각배가 발견되지 않았을까요? 이것은 바로 고인돌(支石墓)을 만들었던 토착민 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각배가 갑자기 신라, 가야에 등장하게 된 문화현상을 풀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각배의 최초 사용자 昔脫解는 어디로부터 온 인물일까요.
 
  申瀅植 三國遺事 가락국기에 의하면 석탈해는 왜국 동북천리에 있는 다파니국 사람인데 배를 타고 남하하여 먼저 가락국에 도착했습니다. 그 당시 가락국의 왕은 김수로였습니다. 석탈해는 왕권을 놓고 김수로와 다투다가 패해 신라 땅 阿珍浦(아진포)에 도착했습니다. 김수로와 석탈해의 재주 겨루기에 얽힌 다음과 같은 설화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탈해가 매로 변하자 수로는 독수리가 되고, 또 탈해가 참새가 되니 수로는 어느새 매가 되었다. 이 사이에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잠시 후 탈해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자 수로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탈해는 마침내 엎드려 항복했다>
 
  金秉模 인간은 새가 될 수 없죠. 그러나 인간이 동물로 변신하는 설화는 야쿠트족 북방 기마민족 샤먼들 간에는 우열을 매기는 데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昔脫解와 金首露의 변신 경쟁과 시베리아 샤먼의 설화가 똑같은 것을 보면 석탈해와 김수로의 정신적·문화적 고향이 시베리아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申瀅植 어떻든 각배는 1세기경에 이미 사용되었고, 부정한 일을 알아내는 힘,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닌 물건으로 취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외국인 昔脫解는 지혜가 뛰어나 신라 제2대 왕인 南海 次次雄(남해 차차웅)이 공주를 주어 사위가 된 인물입니다. 脫解는 제3대 왕인 유리왕이 죽고 나서 신라 제4대 왕이 되었습니다. 그처럼 비범하여 왕위에 오른 사람이 각배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각배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즉, 각배는 왕-지혜-超자연성과 연관된 물건입니다.
 
 
  「폭탄주」는 유목민족의 飮酒문화
 
 
  權寧弼 角杯의 특징을 살펴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됩니다. 첫째 지도층 인물과 연관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지역에서는 대관식 때 왕의 머리에 붓는 기름을 각배에 담았습니다. 신라, 가야의 왕족 무덤에서 각배가 발견되고 있다는 걸 봐도 각배와 지도자의 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둘째, 각배와 물과의 관계입니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는 각배에 샘물이 나오게 하는 마력을 지닌 페가수스를 조각했으며 신라에서는 昔脫解가 東岳에서 샘물을 찾을 때 각배를 사용했습니다.
 
  金秉模 각배는 유목민족이 「폭탄주」를 만드는 데도 사용된 것 같습니다. 몽골에 가니까 馬乳酒(마유주)를 담은 양푼에다 알코올 도수 100%의 독한 蒸溜酒(증류주)인 「사밍」을 채운 작은 은잔을 던져 넣어 그것을 돌려가며 마시는 풍속이 남아 있더군요. 옛날에는 은잔이 아니라 각배에 「사밍」을 담아 馬乳酒가 든 가죽 포대에 집어넣었고 합디다. 어떻든 우리의 「폭탄주」 제조 방식과 매우 비슷합니다.
 
  權寧弼 각배는 세계적으로 지중해, 근동, 중앙아시아, 북중국, 신라, 가야, 일본에 분포되어 있습니다. 각배를 사용하는 풍습은 중앙아시아와 동북아시아의 스키타이족, 흉노족으로 연결되는 스텝지역의 기마민족 간의 접촉과 민족이동 과정에서 전파된 것 같습니다.
 
  사회 신라·가야 지역에선 角杯를 사용했는데, 고구려·백제 지역에선 角杯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金秉模 그것은 아마도 고구려·백제 왕족과 신라·가야 왕족의 고향이 달랐기 때문이겠지요. 고구려와 백제의 지배층은 대흥안령산맥 동쪽에 살던 夫餘系(부여계)이고, 신라와 가야의 지배층은 대흥안령산맥 서쪽에서 알타이산맥에 이르는 지역의 출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잡한 辰韓- 新羅의 주민 형성
 
 
  사회 신라는 辰韓(진한) 12개국 중 하나인 斯盧(사로) 6촌이 합쳐 생긴 나라입니다. 따라서 신라인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辰韓人이 누구인지를 알아보면 됩니다.
 
  權寧弼 三國志 東夷傳에는 辰韓 사람들이 중국 秦나라 땅에서 이주해 왔으며 馬韓 사람과 말이 달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秦은 戰國時代 7雄의 하나로 나머지 여섯 나라를 멸망시키고 기원전 221년에 中原을 통일했습니다.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 秦의 始皇帝(시황제)는 북방 흉노족의 남침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고 咸陽(함양)에다 阿房宮(아방궁)을 지었습니다. 三國志에 기록된 「괴로운 부역」이란 바로 토목, 건축에 동원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신라의 주민 형성 과정은 4중, 5중으로 복잡한 것 같습니다.
 
  申瀅植 우리 史書에도 신라의 인구 구성에 대해 좀더 자세한 기록이 있습니다. 三國史記 신라본기 赫居世 條에 보면 「이곳(서라벌)에는 오래 전부터 朝鮮의 유민들이 산 계곡에 나누어 살아서 여섯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또 유리왕 14년(서기 37년) 條에는 「고구려 無恤王(무휼왕=大武神王)이 낙랑을 쳐서 멸망시켰다. 그 나라(낙랑) 사람들 5000명이 (신라에) 투항해 와서 6부에 나누어 살게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金秉模 여러 문헌 기록과 고고학적 증거들을 종합해 보면 신라인의 구성 과정은 여러 민족이 여러 시기에 걸쳐 혼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한-신라 지역에는 先史時代부터 살면서 수많은 고인돌을 남겨 놓은 토착 농경인들, 기원전 3세기중에 秦나라의 학정을 피해 이민해 온 사람들, 기원전 2세기에 이주해 온 古朝鮮의 유민들, 고구려에게 멸망당한 樂浪(낙랑)에서 내려온 사람 등입니다.
 
  사회 고구려의 시조 朱蒙(주몽)은 東夫餘에서 망명한 인물이고, 百濟의 시조 溫祚(온조)는 朱蒙의 아들임을 자처했던 만큼 고구려와 백제의 왕족은 한 집안인 夫餘系(부여계)입니다. 반면에 신라의 왕족인 朴, 昔, 金의 3姓으로 그 出自는 다양합니다.
 
  金秉模 신라 5대 왕인 婆娑(파사) 이사금은 페르시아와 無關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페르시아를 한자로 적으면 波斯(파사)입니다. 이 정도면 親緣性(친연성)이 매우 깊은 것입니다. 또 8대 왕인 阿達羅(아달라) 이사금은 흉노계로 보입니다. 東로마제국을 침략하여 엄청난 양의 금을 조공품으로 받아낸 훈族(흉노족)의 정복왕 아틸라와 이름이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아틸라는 阿達羅의 후손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것을 무시하면 古代史 못 합니다.
 
 
  古신라는 中國문화에 기댈 필요가 없었다
 
 
  權寧弼 신라의 적석목곽분으로부터 출토되고 있는 유물들은 西方세계로부터 수입된 것도 있는가 하면 西方문화 속에서 생겨난 디자인 및 기술기법을 신라에 도입해서 신라에서 만든 것이 있습니다. 중국문화를 반영시킨 유물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고분의 축조는 그 민족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민족의 전통문화인 만큼 그 형태는 민족 고유의 전통을 반영시킵니다. 적석목곽분이라는 형식은 유라시아 북방민족, 특히 스텝 루트 지방으로부터 南러시아에 정착한 스키타이人과 그 후예들의 墓制로서 신라에 도입된 것입니다. 이러한 물질문화는 實在의 증거물로서 오늘날 그 누구의 눈에도 명확히 인식할 수 있지만, 정신문화의 면에서는 시각적으로 그것을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통상 기록된 사료에 의해 그 개략을 아는 것이 가능하지만, 신라 독자의 기록사료가 없습니다. 三國史記만 해도 신라가 망한 지 200여 년이나 지난 12세기에 쓰여진 것입니다.
 
  金秉模 三國史記에선 왜 이런 사실들을 기록하지 않았을까요. 저자가 중국 史書를 그대로 베낀 것 아닙니까.
 
  申瀅植 신라가 중국에 소개된 것은 7세기 이후여서 신라에 관한 중국의 사료도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중국 사료는 너무 중국 중심주의, 즉 中華思想(중화사상)에 물들어 있습니다. 漢族은 中國 것이 아니면 전부 오랑캐라고 거들떠보지도 않던 민족입니다.
 
  金秉模 저처럼 고고학을 하는 사람의 얘기는 文獻史學(문헌사학)을 하시는 申선배님에겐 좀 급진적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申瀅植 저는 우리 고고학계의 성과를 우리 역사에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이 新羅史에 관한 책을 몇 권 썼지만, 오늘 좌담회에서 말씀들을 들어보니 다시 고쳐 써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문헌사학계가 폐쇄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權寧弼 麻立干 시대의 신라는 중국과의 국교를 맺지 않았습니다. 초원의 길을 통해 서쪽 세계와 교류하고 있었고, 이 길을 통해 선진문물을 수입하고 있었으므로 굳이 中國에 기댈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申瀅植 신라가 6세기 초까지는 중앙아시아, 중동, 흑해·지중해 연안의 로마문명을 수용했던 것은 분명해졌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루트를 통해 로마의 문명이 신라에 들어올 수 있었을까요.
 
  李仁淑 4세기 이후 북부 중국을 제패하고 있었던 鮮卑族(선비족)의 왕조 北魏(북위)는 수도를 大同에 두고서 로마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1970년에 발굴된 일련의 비잔틴(東로마제국) 銀器 및 人物浮彫(인물부조) 무늬의 컵 등은 그런 관계를 나타내는 훌륭한 유물입니다. 또한 北魏의 高官 무덤들에서도 전형적인 로만 글라스類가 나와 신라의 출토품과 공통적인 요소가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위가 華北(화북)을 통일하고 수도를 洛陽(낙양)으로 옮긴 후에는 로마系 유물의 수용을 끊었던 듯합니다.
 
 
  東海岸 루트와 연결된 草原의 길
 
 
  權寧弼 초원의 길로 東傳(동전)해 온 로마문화는 오늘날의 바이칼湖畔의 이르쿠츠크로부터 울란우데를 돌아서 몽골사막을 거쳐 大同에 이르고 거기서 동향하여 龍城을 거쳐 신라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시베리아 구간은 대체로 오늘날 시베리아 철도가 깔려 있는 길입니다.
 
  申瀅植 신라로 들어오려면 고구려를 거쳐야 했을 터인데, 어려움은 없었을까요.
 
  李仁淑 麻立干 시대의 신라는 고구려와 대체로 우호관계를 유지한 것 같습니다. 三國史記를 보아도 양국간에 전쟁 혹은 분쟁의 기록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廣開土王(광개토왕)의 陵碑文(능비문)을 보면 신라를 침공한 백제, 가야, 왜의 연합군이 고구려군에게 격퇴되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시기에 신라의 17대 왕 奈勿(내물) 이사금은 이찬 大西知의 아들 實聖(실성)을 인질로 고구려에 보내는 등 우호관계를 맺습니다. 그리고 인질로부터 돌아온 實聖이 奈勿 이사금의 뒤를 이어 18대 신라왕이 되면 역시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奈勿 이사금의 셋째 아들 卜好(복호)를 인질로 고구려에 보냅니다. 이렇게 해서 신라는 고구려의 영토를 경유하여 西方문화를 수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申瀅植 그렇다면 고구려는 왜 자국 영토를 통해 뛰어난 로마문화가 통과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수용하지도 않고 간섭하지도 않았을까요.
 
  權寧弼 신라는 동해안 루트로 서방문화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초원의 길이 몽골 지역과 滿洲의 吉林을 거쳐 동해안 루트와 연결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해안 루트는 아무래도 고구려 중앙정부의 힘이 강렬하게 미치지는 않았겠지요.
 
  사회 동해안 루트가 오늘날의 휴전선처럼 틀어막혀 있었겠습니까. 또 그 시절 고구려와 신라는 사이가 나쁘지도 않았지요.
 
  李仁淑 저도 초원의 길이 동해안 루트와 연결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동해안 루트는 후일 渤海(발해)의 新羅道가 되었으리라고 짐작합니다. 또 저는 초원의 길이나 그 남방의 오아시스 루트 못지 않게 海路(해로)를 통해 西方의 문화가 신라로 들어왔다고 봅니다. 예컨대 味鄒王陵(미추왕릉) 지구에서 출토된 코발트 블루의 「잠자리 눈 구슬」은 인도네시아 지역에서 배를 타고 건너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회 그 작은 「잠자리 눈 구슬」에는 네 인물이 새겨져 있는데, 양 눈썹이 옆으로 붙어 있고 콧날이 날카롭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아무래도 인도네시아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서양 사람 얼굴인 것 같습니다.
 
  李仁淑 얼굴을 보면 서역 사람인 것은 확실합니다. 「잠자리 눈 구슬」의 본래 생산지는 중앙아시아, 제조 센터는 인도였습니다. 그러나 5세기를 전후해서 인도네시아에서도 「잠자리 눈 구슬」을 많이 생산했습니다.
 
  사회 6세기 이후 신라와 서방의 교류가 소원해지다가 드디어 단절되고 맙니다. 왜 그랬습니까.
 
  權寧弼 그 이유는 5세기에 훈族의 침략과 게르만族의 대이동으로 유럽과 小아시아에 걸쳐 있던 로마의 식민지가 황폐화했기 때문입니다. 463년에 東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대화재가 발생하고, 476년에는 西로마제국이 멸망했습니다. 이어 반달人과 불가르人들이 東로마 영내로 침공합니다. 이처럼 南러시아로부터 흑해·지중해 지대, 발칸반도, 이탈리아, 중부 유럽이 대혼란에 빠졌습니다. 특히 신라와 관계가 깊었던 흑해 西岸의 다키아 및 트라키아는 침입해 온 이민족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궤멸적 타격을 받은 로마세계는 대외관계를 상실해 갑니다. 신라로선 문화교류의 상대방을 잃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라는 法興王(법흥왕) 이후 중국과의 접촉을 적극화하여 중국문화를 흡수합니다.
 
 
  넓은 세계를 알았던 新羅人의 국제감각이 統一의 에너지
 
 
  사회 신라의 삼국통일이 남북통일을 지향하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어떤 상상력을 줄 수 있습니까.
 
  權寧弼 유목민족의 특성은 개방적이고 정보를 잘 이용하며 성격적으로는 간단명료하고 명랑한 것인데, 북방 초원지대의 기마민족에 뿌리를 둔 신라인들이 바로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세계화·정보화 시대인 21세기에 우리 민족이 남북통일을 이룩하고 제2의 민족전성기를 실현시킬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산이 되는 것입니다. 다만 정보와 지식의 축적에 약한 북방 기마민족의 후예가 현대에 이르러 정보와 지식의 축적에 강한 민족에게 패배한 사실에서는 반드시 교훈을 찾아야 할 것으로 봅니다.
 
  金秉模 東아시아 세계만 알고 있었던 고구려인과 백제인에 비해 신라는 지구 반대편의 정보까지 가지고 있었던 만큼 유연하고 균형감각도 탁월했다고 봅니다. 그것이 바로 당시 東아시아의 최강 唐과의 동맹에 성공한 비결이었다고 봅니다. 삼국 모두가 경쟁적으로 對中외교를 벌였는데, 뒤늦게 뛰어든 신라가 同盟을 성사시킨 배경에는 신라인의 국제감각을 느낄 수 있습니다.
 
  李仁淑 신라는 내부 단결도 삼국통일의 중요한 動因(동인)이었습니다. 그것은 朴, 昔, 金의 세 姓씨가 차례로 王이 되었지만, 피바다를 이룬 경우가 별로 없었습니다. 昔씨 왕은 金씨를 보호했고, 金씨 왕은 朴씨를 왕비로 삼은 사례가 적지 않았습니다. 삼국통일 제1의 元勳(원훈)인 金庾信(김유신)도 가야김씨가 아닙니까. 신라가 엄격한 골품사회이긴 했지만, 지배층과 피지배층 간의 관계가 비교적 좋았습니다. 착취관계라기보다는 공존관계였습니다. 이런 모습은 귀족 자제인 화랑과 평민 자제인 낭도 간의 관계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런지 삼국 가운데 신라의 유사시 동원력이 가장 우수했던 것 같습니다.
 
  申瀅植 신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개방적이었던 唐제국과 相生관계를 이뤄 민족문화를 발흥시켰을 뿐만 아니라 東아시아 세계를 세계 제1의 문명권으로 끌어올린 공헌을 했습니다.
 
  사회 오랜 시간, 좋은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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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金씨의 시조 金閼智의 탄생설화
 
  탈해왕 9년 봄 3월, 왕이 금성 서쪽 숲(始林)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닭이 우는 곳으로 瓠公(호공)을 보냈다. 숲 사이에서는 황금빛의 작은 궤짝(櫃)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그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 궤짝을 가져오게 했다. 왕이 두껑을 열어 보니 그 속에는 작은 사내 아이가 있었는데 용모가 기이하고 위엄이 있었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조신들에게 이르기를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보낸 아들이니라』 하고 거두어 길렀다. 아이는 점점 자라며 더욱 총명하고 지략이 많아 이름을 閼智라 했고, 금빛 궤짝에서 나왔다고 해서 성을 金씨라 했다. 또 始林(시림)을 鷄林(계림)으로 고쳐 국호로 정했다.<三國史記 脫解 이사금 9년(AD 65) 條>
 
 
  ◈문무왕릉비
 
  삼국통일을 완수한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陵碑(능비)로, 그 파편 하나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비는 일찍이 무너져 파괴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 正祖 20년(1796)에 이르러 두 개의 비편이 발견되었다. 당시의 문인 洪良浩(홍양호)의 「耳溪集」(이계집)에 의하면 경주지방 사람이 이 비를 발견했다. 이 비편은 그후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그 탁본 넉 장이 淸나라의 학자 劉喜海에게 입수되어 「海東金石苑」(해동금석원)에 실렸다.
 
  1961년 경주시 동부동 주택에서 비편 하나가 다시 발견되었다. 1796년에 발견된 비편 중 碑身(비신) 하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비의 석질은 火成岩이며, 남아 있는 비편의 최고 높이는 52㎝, 너비 64㎝, 두께 24㎝이다. 전문가들은 이 비의 건립연대를 비문 중의 「國學少卿」이라는 관직명과 삼국사기의 國學 설치 기사 등과 관련, 신문왕 2년(682)으로 보고 있다.
 
  비문의 전체는 비 자체의 파손된 부분이 많아 파악하기 어렵지만, 대체로 앞면에는 신라에 대한 찬미, 신라김씨의 내력, 태종무열왕의 사적, 문무왕의 사적, 백제 평정 사실 등이 적혀 있고, 뒷면에는 문무왕의 장례 사실, 碑銘(비명) 등이 적혀 있다. 비문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부분이 신라김씨의 出自에 관한 것으로 「侯祭天之胤傳七葉…星漢王」(투후제천지륜전칠엽…성한왕)이라고 쓰여 있는 부분이다. 이것은 「투후의 후손이 7대를 전승하여…하였는데, 성한왕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시고」라고 풀이된다. 투후 金日는 흉노 休屠王의 태자였으며 성한왕은 신라김씨의 시조 김알지 또는 신라김씨 중 최초로 왕위에 오른 味鄒王(미추왕)이라는 등의 견해로 엇갈려 있다.
 
 
  ◈天馬塚과 가장 화려한 금관
 
  경주 황남동에서 발굴된 고분 중 유일하게 공개되고 있는 것이 제155호 고분인 천마총이다. 1973년 발굴과정에서 부장품 가운데 말다래(障泥)가 출토되었는데, 말다래에 날개가 달린 말이 구름을 뚫고 달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서 천마총으로 명명되었다. 말의 갈기와 꼬리가 뒤로 휘날리는 모습이 매우 역동적이다. 말다래란 말을 탄 사람의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말안장 양쪽에 늘어뜨려 놓은 馬具를 말한다. 天馬圖가 그려진 말다래는 자작나무(白樺) 껍질을 여러 겹으로 겹쳐 누벼 만든 것이다.
 
  천마총은 바닥의 지름이 47m, 높이가 12.7m의 원형 봉토분으로 내부 구조는 積石木槨墳이다. 전형적인 적석목곽분인 천마총의 축조양식은 다음과 같다.
 
  먼저 땅을 잘 고른 다음 바닥 위에 진흙을 깔고 진흙층 위해 다시 냇돌을 깔았다. 그리고 냇돌층 위에 다시 목곽을 설치했다. 목곽 내부에 부장품을 넣은 궤와 시체를 넣은 棺을 수직으로 안치했다. 목곽 위를 다시 냇돌로 쌓아 덮었으며, 냇돌층은 다시 진흙으로 발라 다졌다. 마지막으로 그 위에 흙을 쌓아 半球形(반구형)으로 封墳(봉분)했다.
 
  천마총은 비교적 작은 규모의 적석목곽분이지만 신라 고분 중에서 다양한 종류의 호화로운 유물이 가장 많이 발견되었다. 천마총 출토 금관은 지금까지 출토된 금관 가운데 가장 크고 화려한 것이다. 다른 금관에 비해 금판도 두껍다. 높이 32.7㎝, 직경 20㎝. 정면에 4단 直角 樹枝形 立飾이 세 개 있고, 뒷면에는 鹿角形 立飾이 두 개 있다. 귀 앞쪽으로 두 개의 垂飾이 늘어져 있고 曲玉과 樹葉이 많이 달려 있다. 立飾의 꼭대기는 寶珠形이다.
 
  천마총에서는 금관, 금모자, 새날개 모양의 冠飾(관식), 金허리띠, 金銅으로 된 신발 등이 피장자가 착용한 그대로 출토되었다. 로만 글라스도 열한 점이나 나왔다.
 
 
  ◈金冠塚 금관
 
  금관총 금관은 한국에서 최초로 발굴된 금관이다. 관테(帶輪)의 직경이 19㎝로 성인용이며 3단 直角 수지형 立飾(입식)이 세 개, 鹿角形(녹각형) 입식이 두 개 있다. 귀 앞쪽으로는 垂飾(수식) 두 개를 늘어뜨렸고, 曲玉 57개와 樹葉 130개가 매달려 있다. 입식 꼭대기는 寶珠形(보주형) 장식으로 마감되었다.
 
  1921년 집터를 파던 중 봉분이 파괴되어 유물층이 노출되었기 때문에 발견된 것이다. 금관총에서는 금제 관모 세 개 분, 금동제 관의 立飾 두 개 분, 銀製관식 한 개 분, 그리고 금제 귀고리, 금제 팔찌와 반지, 금제 허리띠와 요패 등 피장자가 착용하던 여러 가지 금제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瑞鳳塚 금관
 
  瑞鳳塚 금관의 특징은 가지 위에 새(鳥) 세 마리가 앉아 있는 점이다. 이 새는 몸집이 무거워 보이고 머리에는 冠 모양의 깃털이 나 있다. 높이 30.7㎝, 직경 18.4㎝이다. 直角 樹枝形 3단 立飾 세 개가 있으며, 뒷면에도 鹿角形 입식이 세 개 있다.
 
  瑞鳳塚은 적석목곽묘로 표주박 모양의 雙墳(쌍분)인데, 그 중 北墳(북분)에서 금관이 나왔다. 1926년 발굴 당시 스웨덴(瑞典)의 구스타프 왕자가 참관한 것과 세 마리의 새(鳳)가 장식된 금관이 나왔다는 점을 참작하여 瑞鳳塚이라고 명명되었다. 여기서 함께 출토된 銀盒(은합)에는 연대를 알 수 없는 延壽元年(연수원년)이라는 연호와 辛卯年(신묘년)의 干支(간지)가 든 銘文(명문)이 새겨져 있다.
 
 
  ◈角杯의 유래와 三國遺事의 관련 기록
 
  角杯는 그리스어로 리톤(Rhyton)이라고 하는데, 원래 동물의 뿔을 잘라 만든 잔이다. 그러나 동물의 뿔로 만든 것 이외에 土製(토제)나 銅製(동제)로도 동물의 뿔 모양을 본떠 만든 것도 있다. 삼국유사 탈해왕 條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각배를 맨 처음 사용한 사람은 昔脫解(석탈해)다. 어느날 昔脫解가 토함산에 오르다가 목이 말라 하인에게 물을 떠오라고 했는데, 하인이 脫解 몰래 먼저 물을 마셨다. 그 순간에 물을 담은 각배가 하인의 입에 붙어버렸다. 脫解가 이를 보고 하인에게 추궁했더니 잘못을 뉘우쳤다. 그러자 角杯가 입에서 떨어졌다.
 
 
  ◈權寧弼 교수.
 
  1941년 서울 출신. 서울大 美學科 졸업. 독일 쾰른大 미술사학 철학박사. 고려大 교수, 중앙아시아 학회장(現),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학과장(現).
 
  ◈金秉模 총장.
 
  1940년 서울 출신. 서울大 고고인류학과 졸업. 영국 옥스포드大 문학박사. 한양大 박물관 관장, 한양大 문과대 학장, 한국고고학회장, 국제박물관협의회 한국委 위원장(現), 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現).
 
  ◈申瀅植 교수.
 
  1939년 충북 충주 출신. 서울大 사범대 역사학과 졸업. 문학박사. 이화여大 사학과 교수(現), 한국고대학회장(現), 국사편찬위원회 위원(現).
 
  ◈李仁淑 교수.
 
  1949년 서울 출신. 서울大 고고인류학과 졸업. 고고학 미술사 박물관 박사. 문화재청 전문위원(現), 경기도 박물관 관장, 서울大 고고미술사학과 강사(現).

 

 

년중 기획 「민족사의 로마」 新羅를 다시 본다(2)
 
天馬塚(천마총)은 陰莖(음경: 陽物)의 길이가 30cm에 달했다는 신라 智證王(지증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여기서는 세계적 문화재인 新羅金冠(신라금관)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4단짜리 金冠을 비롯하여 1만15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토 유물들을 보면 금관을 쓴 신라왕족은 金製(금제) 허리띠를 두르고 하얀 天馬를 탔으며 페르시아 음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로만 글라스에 담긴 포도주를 마셨던 것으로 짐작된다. 天馬塚에 가면 신라의 왕족은 유별나게 금을 사랑했던 북방 기마민족의 후예로서 스텝 루트를 통해 로마문화권과 깊은 교류관계를 가졌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鄭淳台 月刊朝鮮 편집위원 (st-jung@chosun.com
 경주의 積石木槨墳은 스키타이와 흉노의 墓制
 
 
  경부고속도로 慶州(경주) 톨게이트를 벗어나 서라벌 大路로 접어들면 곧 蘿井橋(나정교), 나정교를 건넌 다음 五陵(오릉)을 끼고 좌회전하면 경주시청에 이르는 金城路(금성로)로 접어들게 된다. 금성로에서 경주 중심가 쪽으로 북진하면 바로 눈앞에 크고 작은 古墳(고분)들이 펼쳐져 있다. 이 古墳群이 바로 4∼6세기의 麻立干(마립간: 당시의 王號) 시대에 축조된 新羅(신라) 특유의 積石木槨墳(적석목곽분: 돌무지 덧널무덤)들이다.
 
  여기가 바로 우리나라에서 국보급 유물이 가장 많이 출토된 皇南洞(황남동)의 大陵園(대릉원) 지구다. 大陵園에는 제155호 고분, 제98호 雙墳(쌍분), 味鄒王陵(미추왕릉) 등 大小 20여 基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다. 필자는 우리 역사상 최고 최대의 출토품들이 쏟아져 나온 제155호 고분을 답사하기 위해 2월26일 오전 9시 정각 대릉원 정문 앞에 섰다. 승용차 주차요금 2000원, 입장료 1500원. 평일(화요일) 오전의 대릉원은 매우 아늑했다. 제155호 고분은 대릉원의 정문에서 가장 멀고, 후문에서는 가장 가까운 서쪽 끝에 위치해 있다.
 
  제155호 고분은 天馬塚(천마총)이라고 불린다. 그 이유는 1973년 발굴 당시 副葬品(부장품: 껴묻거리) 가운데 障泥(장니: 말다래)가 출토되었는데, 이 말다래에 하늘을 나는 말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말다래는 말이 질주할 때 튀어오르게 마련인 진흙 같은 것이 말의 배나 허벅지에 묻지 않도록 차단하는 馬具다. 天馬塚의 말다래는 자작나무 껍질을 여러 장 겹쳐서 만든 것이다.
 
  天馬塚은 신라의 고분 가운데 유일하게 내부구조와 유물의 출토상황을 그대로 복원하여 발굴 당시의 모습을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천마총 안에 들어가 보면 積石木槨墳이 어떤 것인지 대번에 이해할 수 있는데, 그 축조양식은 다음과 같다.
 
  먼저 땅을 잘 고른 다음 바닥 위에 진흙을 깔고 진흙층 위에 다시 냇돌(川石)을 깔았다. 그리고 냇돌층 위에 다시 木槨(목곽: 통나무집)을 설치했다. 목곽 내부에는 副葬品을 넣은 櫃(궤)와 시신을 넣은 관을 수직이 되게 안치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목곽 위를 냇돌로 쌓아 덮었으며, 냇돌층은 다시 진흙층으로 발라 다졌다. 마지막으로는 그 위에 흙을 쌓아 봉분을 했다. 이런 봉분 때문에 積石木槨墳이 외형적으로는 圓形土墳(원형토분)으로 보이는 것이다.
 
  天馬塚으로부터 출토된 유물은 무려 1만1526점에 달했다. 封土(봉토)의 정상부에 매장되어 있던 馬具類(마구류) 등은 너무 심하게 썩어 출토품 숫자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출토품 리스트를 보면 고구려나 백제, 그리고 중국의 고분 출토품과는 사뭇 다르다. 예컨대 靑銅(청동)거울이나 墓地銘(묘지명) 같은 것은 全無한 반면 금관, 가락지, 팔찌, 귀고리, 목걸이 등 호화찬란한 金製 장신구가 수두룩하고, 철제 무기, 武具와 工具도 많다.
 
  天馬塚의 내부 벽면엔 이곳에서 발굴된 국보급 유물의 모조품들을 진열해 두었다. 진품은 모두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국보 제188호 天馬塚 금관의 위용
 
 
  金冠은 발굴되기만 하면 모두 國寶로 대접받는다. 세계적으로도 신라금관만 한 수준의 왕관을 찾아볼 수 없는데다 매우 독창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天馬塚 금관은 지금까지 출토된 금관 가운데 가장 크고 화려한 것이다. 다른 금관에 비해 금판도 두껍다. 금관의 높이는 32.5㎝, 테두리(다이아뎀)의 직경은 20㎝.
 
  금관의 앞면에 4段으로 된 「出」字 모양의 장식(直角樹枝形立飾)이 세 개, 뒷면에는 사슴뿔 모양의 장식(鹿角樹枝形立飾) 두 개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出字 모양의 立飾(입식)에는 曲玉이 13개씩, 사슴뿔 모양의 立飾에는 曲玉이 5개씩 달려 있다. 금관의 테 앞쪽으로는 2개의 垂飾(수식)이 늘어져 있고, 많은 曲玉과 금제의 樹葉(수엽)이 달려 있는 立飾의 꼭대기는 寶珠形(보주형)이다.
 
  그러면 天馬塚 금관을 썼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고고학계에서는 신라 21대 임금인 炤知王(소지왕: 재위 479∼500년) 또는 22대 임금인 智證王(지증왕: 재위 500∼514년)일 것으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立飾의 段數(단수)는 북방 기마민족인 스키타이와 흉노 집단에서는 셔먼(제사장)의 제너레이션을 뜻하는 것이었는데, 麻立干 시대의 신라에서는 그것이 어느 王系의 초대 임금인지, 2·3·4代를 계속해서 등극한 임금인지를 나타내는 표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소지왕과 지증왕은 모두 奈勿王(내물왕) 이후 4代에 걸쳐 계속 등극한 가계의 임금들이다(내물왕계표 참조).
 
  그런데 고고학자 金秉模씨(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는 한 발 더 나아가 天馬塚의 금관을 썼던 임금은 지증왕이라고 단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지왕의 금관에는 曲玉이 달려 있을 수 없다. 曲玉은 「생명의 열매」를 뜻하는데, 소지왕의 경우 왕통을 계승할 아들을 두지 못했다. 그런 만큼 소지왕의 무덤은 4단짜리 立飾이긴 하되 曲玉이 하나도 달려 있지 않은 금관이 출토된 金鈴塚(금령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마총의 墓主(묘주: 피장자)는 지증왕일 수밖에 없다. 이제는 天馬塚의 주인공 지증왕이 도대체 어떤 임금이었는지를 알아볼 차례다.
 
  三國史記에는 「지증왕은 몸집이 몹시 크고 담력이 남보다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三國遺事의 기록은 더욱 노골적이어서 「지증왕은 陰莖(음경)의 길이가 1자5치가 되어 배필을 얻기 어려웠다」고 되어 있다. 당시 1척은 약 20㎝이었으니까 陽物(양물)의 길이가 자그마치 30㎝에 달할 만큼 위풍당당했다는 얘기다. 지증왕은 陽物뿐만 아니라 治績(치적)으로도 王中王이었다.
 
  지증마립간은 내물왕의 증손이다. 서기 500년 초겨울에 소지왕이 죽었는데, 그에게 아들이 없어 지증은 王弟로서 64세에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斯羅(사라), 斯盧(사로) 등으로 불리던 국호가 新羅로 확정된 시기는 지증왕 4년(503년)이었다. 新羅라는 국호에는 德業(덕업)을 一新하고 사방을 網羅(망라)하겠다는 國策(국책)의 방향이 담겨 있었다. 이때 임금의 존호도 麻立干에서 大王으로 바뀌었다. 울릉도가 신라에 항복한 것도 지증왕 13년(512년)의 일이다.
 
 
  金細工의 압권, 국보 제189호 천마총 金帽
 
 
  金帽(금모)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금제 冠帽로서 內冠(내관)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金細工(금세공) 솜씨의 압권이다. 이 內冠 위에 金冠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천마총 金帽는 T자 모양, 마름모꼴, 山 모양, 당초 무늬로 전면을 透刻(투각)한 금판 여러 장을 잘 마름하여 연결했다. 상하로 연결하는 부분의 가장자리는 금테를 두르고 이를 금실로 엮어서 꼭대기를 弧形(호형: 활 모양)으로 만들었다. 꼭대기 부분과 맨 아랫부분에도 넓은 금테를 대어 보강했다.
 
  투각된 금판의 여백에는 직선 또는 곡선으로 오톨도톨 튀어나게 했고, 맨 밑부분에 댄 넓적한 금판에는 못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다. 높이와 폭이 모두 19㎝. 天馬塚 현장에 전시되어 있는 것은 모조품이고, 실물은 국립 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天馬塚에서는 금관, 금모와 함께 鳥翼形冠飾(조익형관식)도 출토되었는데, 폭 59㎝의 크기로서 큰 새가 날개를 활짝 편 것처럼 생겼다.
 
  신라 무덤에서 金製 새 날개가 출토된 것은 天馬塚이 유일하다. 이것은 신라인에게 神鳥(신조) 사상이 있었음을 말해 주는 증거이다. 神鳥 사상은 사람이 죽더라도 그 육신과 영혼을 흰 새가 하늘나라로 데려가 준다는 믿음인 것이다.
 
  신라왕족의 조상인 북방 기마민족들 사이에는 死者의 肉身을 새가 뜯어먹게 함으로써 하늘로 올려보낸다는 鳥葬(조장) 풍속이 있었다. 또한 古代 한국인들은 북쪽에서 날아오는 새들이 吉凶禍福(길흉화복)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솟대(蘇塗) 위에 새 모형을 올려 놓기도 했다. 이런 사상은 알타이 문화권인 몽골, 바이칼湖 부근 지역, 야쿠트族 거주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유행했다.
 
 
  국보 제190호 金製 허리띠 및 腰佩
 
 
  신라의 麻立干들은 의식 때 허리에 순금으로 된 허리띠(♥帶: 과대)를 차고 그 아래에 각종 패물이 주렁주렁 달린 장식줄(腰佩: 요패)을 달았다.
 
  天馬塚에서 발견된 허리띠는 透刻(투각: 옆으로 뚫어지게 새기는 조각의 한 방법) 무늬가 있는 4각형 금판 44개를 연결했는데, 주변에 9개 구멍이 있어 가죽에 고정시키게 되어 있다. 이 밑에는 안으로 돌기가 있는 透刻 하트형(心葉形) 수식을 경첩으로 연결하였고, 끝에는 버클(具: 교구)을 달았다.
 
  腰佩는 열세 줄로서 모두 타원형 금판과 그 사이에 사각형 금판을 교대로 연결했고, 끝에는 숫돌, 칼, 고리구슬, 물고기 등의 장식을 달았다. 이와 같은 요패의 장식이 무엇을 상징하는지에 대한 定說은 없으나 고고학자 金秉模 교수에 따르면 금관의 수지형 입식은 신라金씨의 토템, 녹각형 입식은 왕비족의 토템, 요패의 장식들은 신라에 복속한 부족들의 토템이다.
 
 
  국보 제207호 天馬圖 障泥
 
 
  제155호 고분이 天馬塚으로 명명된 것은 障泥(장니: 말다래)에 그려진 天馬圖 때문인 것은 앞에서 이미 썼다. 직사각형의 자작나무(白樺樹: 백화수) 껍질에 그려진 천마도는 白色의 天馬를 가운데 두고 그 사방을 忍冬唐草文(인동당초문)으로 테를 두른 구도다.
 
  白馬는 갈기와 꼬리를 곧추세워 하늘을 훨훨 나는데, 입에서는 혀를 내밀며 瑞氣(서기)를 내뿜는 듯한 모습이다. 특히 천마의 네 발은 구름과 같이 圖形化(도형화)되어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神獸(신수)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天馬圖를 보고 있으면 신라인의 말에 대한 존경, 사랑뿐만 아니라 신라인의 말(馬) 토템 사상의 실상을 느낄 수 있다. 신라金씨의 정신적 고향인 알타이 지역에선 白馬를 숭배했다. 알타이 지역에 들어선 지금의 카자흐스탄은 백마(카자흐)와 스탄(나라)의 합성어이다.
 
  三國遺事에 따르면 신라의 시조 赫居世(혁거세)는 白馬가 놓고 간 알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 白馬는 흰 구름을 헤치고 하늘로 날아갔다. 즉 天馬야말로 최고통치자의 탄생에 媒介者(매개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자작나무 껍질의 말다래는 우리나라에선 최초의 것이다. 자작나무 껍질 細工(세공)은 시베리아로부터 南러시아에 이르는 지역의 전통적 기술이다. 중요한 것은 스텝(초원) 지역 사람들에게 神樹(신수)로 숭배되는 자작나무가 신라에 들어와 騎馬의 말다래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이것이야말로 신라인과 북방 스텝 지역과의 깊은 인연을 말해 주는 것이다.
 
  자작나무 껍질에 묘사된 天馬와 忍冬唐草文을 세밀하게 관찰하면 의외의 현상이 드러난다. 우선 天馬塚의 그림에는 天馬(페가수스)라면 으레 달고 있는 날개가 없다. 날개 대신에 앞다리 사이의 가슴 아래와 앞다리 뒤 복부, 뒷다리 뒤의 복부, 뒷다리의 중간 부분, 背後(배후)에 고사리 모양의 圓弧(원호)를 그린 구름 무늬가 묘사되어 있다. 아마도 이것은 질주하는 말의 다리 밑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흙먼지의 소용돌이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입으로부터는 기염을 토하고 갈기와 꽁무니의 긴 털은 질주하는 말의 속도감을 표현하려는 듯 뒤쪽으로 기세 좋게 휩쓸려 있다. 특히 白馬의 목, 다리, 몸체에는 초승달 모습의 얼룩무늬가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런 표현은 민족적인 意匠(의장)심리가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데, 원래 스키타이를 비롯한 북방 기마민족의 대표적인 문양이다.
 
  신라왕족은 금관을 쓰고 하얀 天馬를 탔다. 天馬塚에 가면 신라인의 의식세계과 문화현상을 엿볼 수 있다. 신라는 그 특유의 국제성·융통성·창조성으로 우리 민족사상 최초의 통일을 완성하여 최고의 전성기를 실현한 나라였다. ●
 
 
 
  ◈麻立干 시대의 왕족 무덤 大陵園
 
  大陵園은 경주 황남동에 밀집해 있는 大小 20여 基의 고분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한 史蹟公園(사적공원)이다. 그 규모는 직경 10m 미만에서 120m까지, 높이 1m 미만에서 25m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외형상으로는 圓形土墳 또는 瓢形墳(표형분:표주박 모습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부부 合葬(합장)의 雙墳(쌍분)이지만, 내부구조는 모두 적석목곽분이다.
 
  적석목곽분은 평지 위에 나무 관과 껴묻거리(副葬品) 상자를 놓고 그 바깥에 나무로 짠 덧널(木槨)을 설치한 다음 돌덩이를 쌓고 흙으로 덮은 스키타이·흉노의 墓制(묘제)다.
 
  경내에 위치한 대표적 고분은 味鄒王陵(미추왕릉)과 제98호 雙墳(皇南大塚:황남대총), 그리고 本文에서 다루고 있는 天馬塚(제155호 고분)이다.
 
  味鄒王(재위 262∼284년)은 신라金씨의 始祖인 閼智(알지)의 7세손으로 신라의 첫번째 金씨왕이 되어 22년 간 재위했다. 천마총과 황남대총은 발굴조사 결과 적석목곽분 중에서도 가장 특색 있는 내부구조를 보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금관 등 각종 금제 장신구와 무기, 마구 등 호화찬란한 유물이 출토되어 신라문화의 우수성과 국제성을 세계에 과시했다.

年中기획·「민족사의 로마」 新羅를 다시 본다(3)
 
좌담 - 삼국 統一 준비 시기
 
참석자
金炯孝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철학과 교수
朱甫暾 경북대학교 사학과 교수
許文道 前 국토통일원 장관

사회·鄭淳台 月刊朝鮮 편집위원

 新羅의 의지로 형성된 東아시아의 기본틀
 
 
  사회 오늘 좌담에서 토론할 주제는 新羅의 中古期, 즉 法興王(법흥왕)부터 眞德女王(진덕여왕)까지 140년 간(서기 514∼654)입니다. 이 시기야말로 新羅가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실력을 기른 준비기간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사상 세 번째 통일을 앞둔 오늘의 한국인에게 신라의 삼국통일은 대단히 교훈적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더욱이 북한의 「조선전사」와 「조선통사」는 高句麗 중심주의를 교조화하여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고 있는데, KBS TV가 토요일 오후 8시부터 한 시간 동안 방영하는 프로그램 「역사스페셜」에서도 최근 「민족사상 최초의 통일은 고려의 후삼국통일」이라는 북한 측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許文道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 일각에서도 高句麗가 통일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얘기가 유령처럼 떠돌고 있지만, 그것은 당시 高句麗의 실력이나 東아시아 세계의 정세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소치라고 생각합니다. 따지고 보면 東아시아 질서는 新羅의 삼국통일에 의해 그후 1300년을 지배하는 기본틀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唐(당)이 원한 것도, 倭(왜)가 원한 것도 아닌, 新羅의 의지로 이룩된 것입니다. 全세계적으로 이처럼 장기간에 걸쳐 안정된 국제질서의 틀을 만든 것은 그 유례가 없는 것입니다. 통일전쟁은 660년의 백제 의자왕의 항복과 668년의 평양성 함락으로 끝났던 것이 아니라 676년까지 계속된 羅唐(나당)전쟁의 승전에 의해 종결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16년 간에 걸쳐 국운을 걸고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신라의 체력, 그것이 과연 어디서 나왔는지 규명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金炯孝 우리 민족사 최초의 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발전사적 의미를 과소평가한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스스로 허무는 자해행위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 그러면 신라 中古期를 개막시킨 임금인 法興王(514~540)부터 얘기를 풀어 가기로 하죠. 524년에 건립된 울진 鳳坪里 新羅碑(봉평리 신라비)에서는 法興王을 牟卽智寐錦王(모즉지매금왕)이라고 했고, 울주 川前里 書石(천전리 서석)의 乙卯銘(을묘명: 535)에는 聖法興大王(성법흥대왕), 같은 書石의 己未銘(기미명: 539)에는 卽智太王(모즉지태왕)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法興王에 대한 칭호가 시기에 따라 달라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삼국통일로 나아가는 영토적·경제적 기반 마련
 
 
  朱甫暾 鳳坪 신라비에 기록된 모즉지는 法興王의 이름이고, 매금은 麻立干(마립간) 또는 이사금+마립간을 뜻합니다. 이 碑에서는 法興王의 출신 部名도 기술했는데, 이것은 그 당시까지만 해도 그가 斯盧6部(사로6부) 출신 귀족의 대표자라는 위상에서 완전히 탈각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울주 川前里 書石에서 法興王은 大王 또는 太王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이것은 法興王이 초월자의 위상으로 급격히 높아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許文道 法興王에서 眞興王(진흥왕: 540∼575)까지의 정치과정은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체제 성립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신라는 法興·眞興王대에 정비한 中古期의 핵심적인 군사조직인 6停(정) 군단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정복전쟁을 수행함으로써 삼국통일로 나아가는 영토적·경제적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朱甫暾 中古期의 신라는 汎내물왕(356∼402)系 귀족세력에게 집중되어 있던 정치권력을 중앙행정관부 단위로 분산시킴으로써 왕권 강화를 유도했습니다. 法興王 3년(516)에 兵部令, 法興王 4년(517)에 兵部, 法興王 18년(531)에 上大等을 설치하거나 임명한 것 모두가 그러한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上大等은 法興王 14년(527)에 왕실 중심으로 불교를 공인한 데 대한 귀족세력의 반발을 제도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설치한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습니다.
 
 
  佛敎王名 時代의 전개
 
 
  사회 신라는 法興王 때부터 커다란 변화가 나타나죠. 불교 公認, 국가체제 정비, 영토확장 등이 그런 것들입니다.
 
  朱甫暾 병부의 설치, 公服(공복)의 제정, 律令(율령)의 반포, 독자적 연호의 사용 등 일련의 새로운 정치행위는 울진 봉평비의 내용에서도 확인됩니다. 신라는 불교 公認을 통해 사상을 통일하고, 정복전쟁을 합리화해 나갑니다.
 
  사회 신라 사람들은 너무 화끈했던 것 아닙니까. 法興王과 眞興王은 모두 출가하여 각각 法空과 法雲이란 僧名을 가졌으며, 진평왕과 그 부인은 석가의 부모 이름인 白淨(백정)과 摩耶(마야)라고 일컬었거든요.
 
  朱甫暾 그래서 신라의 中古期를 佛敎王名 時代(불교왕명 시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 불교 공인은 신라보다 무려 150년이나 빨랐으나 그것이 밑바닥 백성들에게 확산되는 덴 오랜 세월이 걸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신라에서는 불교가 수용되자마자 그 확산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으며 기념비적인 불교 건축물이나 예술품 등을 가장 많이 창출했습니다.
 
  金炯孝 신라 불교의 護國性(호국성)은 매우 특이합니다. 고구려 승려의 경우 道敎를 중시하고 불교를 푸대접하는 등의 종교정책 때문에 그런지 모르지만, 나라 밖으로 나돌며 국제적 활동에 전념한 승려들이 많습니다. 예컨대 불교를 篤信(독신)한 梁武帝(양무제)와 깊게 교류하면서 불교철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僧朗(승랑), 일본으로 건너가 쇼도쿠(聖德) 태자의 스승이 되었던 惠慈(혜자), 일본에 먹과 벼루를 전하면서 法隆寺(법륭사)의 금당벽화를 그린 曇徵(담징), 일본 三論宗의 시조가 된 惠灌(혜관) 등은 모두 국제적으로 활동한 고구려 고승들입니다. 고구려 승려 惠亮(혜량)은 眞興王 때 신라의 國師로 초빙되기까지 했습니다.
 
  朱甫暾 거기엔 사연이 좀 있었죠. 신라의 居柒夫(거칠부)가 소시적에 고구려를 정탐하기 위해 머리를 깎고 고구려에 잠입했다가 惠亮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때 惠亮은 居柒夫가 신라 사람인 것을 눈치채고 급히 귀국하게 함으로써 체포를 모면케 했습니다. 귀국 후 환속한 居柒夫는 신라의 장군으로 출세하여 한강 이북으로 북진하다가 마침 고구려의 내분을 피해 남하하던 惠亮과 재회했습니다. 惠亮은 곧 신라 불교의 최고 지도자인 僧統(승통)의 지위에 올라 신라의 百座講會·八關會를 주재했습니다.
 
 
  종교를 국가에 종속시킨 先進性
 
 
  金炯孝 고구려 승려는 국가의식보다 불교의 보편주의를 더욱 중시했던 것 같습니다. 반면 慈藏(자장), 圓光(원광), 元曉(원효), 義相(의상) 등 신라 승려들은 자기 나라를 신성시하는 상징조작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신라의 승려들이 양양 낙산에서 관세음보살,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했다는 등의 佛國土 사상과 관련한 설화가 그런 것들입니다. 물론 불교 자체는 중생을 제도하는 고등종교이지만, 신라인들은 그런 불교의 보편성에다 고유의 국가의식을 결합시키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신라의 정신문화는 고구려나 백제에서 볼 수 없는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신라가 왜 삼국통일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종교를 특수한 가치의 국가에 종속시키는 선진적 의식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거기엔 지도층의 분골쇄신, 위국헌신, 솔선수범과 같은 행동윤리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점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朱甫暾 신라인들의 국가의식이 강하고 불교가 호국적이라는 사실은 여러 기록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만, 고구려인들에겐 그런 모습이 상대적으로 약합니다. 저는 그 이유를 고구려가 너무 다양한 종족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고구려의 지배층은 貊族(맥족)이며 그 바탕을 이루는 종족으로서 濊族(예족)이 있고, 그 변방지대에 靺鞨族(말갈족) 등이 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엔 국가 중심 의식보다 자기 종족 의식이 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百濟의 경우 다수의 피지배층은 馬韓族(마한족)인데, 지배집단은 북쪽에서 남하한 맥족이었습니다. 이처럼 고구려와 백제는 종족구성이 복잡했던 만큼 지배층과 피지배층 간의 결속력이 굳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許文道 신라의 경우도 결코 단일 종족국가라고 할 수는 없지요. 신석기시대에 숱한 고인돌을 남긴 토착 농경민, 중국 秦(진)나라의 혹정을 피해 망명해 온 사람들, 고조선 유민, 낙랑 유민 등의 후예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朱甫暾 그런 것들은 중국 쪽 기록에 의한 것입니다. 저는 신라인의 주류가 고조선 유민 계통으로 그 구성이 그렇게 이질적인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같은 집단에서 신분적 분화가 이뤄진 만큼 공동체적 결속력이 강력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新羅 金씨가 북방 기마민족 출신임은 문무왕의 陵碑文(능비문)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까. 신라 上古期에 8人의 임금을 배출한 昔(석)씨 가계도 鐵(철)을 다뤘던 북방 출신이었습니다. 신라 역시 다종족국가라 생각됩니다.
 
  金炯孝 高句麗는 원심력이 강한 반면, 구심력이 약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잘 나갈 때는 원심력의 작용으로 國運 상승의 속도가 빨랐지만, 위기 때는 안에서 당겨 주는 구심력의 부족으로 급격히 붕괴했던 것입니다.
 
  朱甫暾 원심력과 구심력이 균형을 이룬 시기가 廣開土王(광개토왕)과 長壽王(장수왕)代였습니다. 이런 전성기가 지나면 고구려는 몇 개의 그룹, 즉 국내성파·평양성파 등의 파벌로 나눠졌고, 왕위계승 문제와 관련하여 상습적인 내분 또는 내란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벼랑 끝 외교와 강성대국 지향하면 망해
 
 
  許文道 나중에 다시 거론하겠지만, 고구려는 淵蓋蘇文(연개소문)의 무단독재로 인한 민심 이반과 그 아들들 사이의 권력투쟁에 의해 사실상 자멸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실력을 헤아리지 못하고 强盛大國을 지향하면서 융통성 없는 벼랑 끝 외교를 되풀이하면 망하지 않을 나라가 없는 것입니다.
 
  사회 경주 국립박물관에 가서 壬申誓記石(임신서기석)을 보면 신라 화랑들의 의식세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유교적 교양도 상당했던 것 같습니다.
 
  金炯孝 한자로 적힌 불경을 읽고 이해한다는 것은 유교적 기초지식을 갖추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당시 신라에선 유교 이데올로기가 별개로 기능한 것이라기보다는 불교 속의 유교로 혼합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許文道 한반도 동남쪽에 위치했던 신라가 조령과 죽령을 넘어 북진한 시기는 眞興王 11년(550)이었습니다. 551년 신라는 고구려의 남진세를 꺾고 한강 상류 10개 군을 획득했습니다. 이때 신라와 동맹관계였던 百濟는 고구려로부터 한강 하류 6개 군을 회복했습니다. 그러나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관계를 깨고 553년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 6개 군을 횡탈했습니다. 이와 같은 신라의 배신행위로 인해 고구려를 主敵으로 삼았던 羅濟 동맹은 120년 만에 깨지고 말았습니다. 554년 백제 聖王(성왕)은 백제-가야-왜국 연합군을 형성하고 왕자 餘昌(여창)을 장수로 삼아 對신라 복수전에 나섭니다. 그러나 왕자 餘昌이 진중에서 갑자기 병을 얻자 이를 걱정한 聖王은 불과 50기를 거느리고 전선사령부가 설치된 管山城(관산성: 충북 옥천)으로 달려가던 중 대전 동남쪽의 식장산에서 신라의 복병에 걸려 생포되어 참수당했습니다. 日本書紀에 따르면 이어 신라군은 관산성을 공격하여 백제-가야-왜 연합군 2만9600명을 참살했습니다. 신라는 여세를 몰아 562년에는 대가야를 정복했습니다. 이로써 신라는 한반도의 곡창지역인 한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신라의 군사적 성공은 어떻게 가능했다고 보십니까.
 
 
  국토를 세 배 이상 확장한 정복군주
 
 
  朱甫暾 眞興王은 法興王의 동생인 立宗 갈문왕의 아들로 이름이 三麥宗(삼맥종)인데, 일곱 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모후가 섭정을 했습니다. 태후는 병부령 異斯夫(이사부) 등 能臣의 보좌를 받아 先王인 法興王 때부터 추진해 온 제도적 정비를 지속하는 한편 화랑제도를 개선하여 국가와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를 양성했습니다. 眞興王은 특히 대외팽창 노선을 추진, 신라의 영토를 즉위 초년에 비해 세 배 이상 넓힌 정복군주가 되었습니다.
 
  사회 신라는 法興王 19년(532)에 金官伽倻를 병합한 데 이어 眞興王 23년(562)에는 대가야를 병합했습니다. 가야연맹국과 왜국은 일찍부터 鐵 무역 등으로 깊은 관계를 맺어 왔습니다. 신라가 가야연맹국의 全판도를 병합한 데 대해 왜국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許文道 日本書紀에 따르면 왜국은 527년 오미 노오미케누(近江臣毛野)를 장수로 삼아 6만의 병력을 동원, 신라 정벌을 기도합니다. 그같은 6만 병력 동원 운운은 당시 왜국의 실력으로는 불가능했던 만큼 과장되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중앙정부의 무리한 동원에 불만을 품은 쓰쿠시(筑紫: 지금의 후쿠오카)의 親신라系 호족 이와이(磐井)가 北규슈의 여러 호족들과 민중들의 지지를 받고 반란을 일으켜 원정군을 가로막았습니다. 반란이 평정된 529년, 近江臣은 가야로 건너갔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와 이후 신라의 가야 침입이 격화되었다는 것입니다. 554년 관산성 전투 때 백제 측에 가담한 왜병의 숫자는 1000명 정도였습니다.
 
  사회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는 그의 저서 「騎馬民族國家」(기마민족국가)에서 夫餘系(부여계)의 기마민족이 한반도의 駕洛(가락: 김해)지방을 거쳐 北규슈로 진출하여 倭를 정복하고, 본래의 근거지인 가락지방과 서부 일본을 합친 倭韓(왜한)연합 왕국을 세웠다가 4세기 말 5세기 초에 한반도에서 작전을 하는 한편 일본 畿內(기내)를 정복하여 통일왕국을 이루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許文道 일제시대 일본 학자들이 伽倻에 세웠다는 이른바 任那日本府(임나일본부)의 흔적을 찾으려고 수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벌였으나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한편 騎馬民族說과는 달리 日本열도에 백제, 신라, 임나의 分國이 산재해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습니다. 이른바 日本列島 分國說(일본열도 분국설)입니다. 어떻든 일본 지배층들은 그 先祖들이 한반도에서 건너갔던지라 그 출발지인 伽倻 지역에 어떤 향수를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朱甫暾 가야는 신라와 친연성이 깊은 나라였습니다. 흔히 가야가 弁韓(변한), 신라가 辰韓(진한)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두 곳을 합쳐 弁辰(변진)이라고도 했습니다. 伽倻諸國이라고 하면 대충 3개의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前期 伽倻聯盟을 주도했던 金官國 그룹, 후기 가야연맹을 주도했던 대가야 그룹, 지금의 咸安을 중심으로 했던 安羅國(안라국) 그룹 등입니다.
 
  사회 그런 세 그룹에 대한 신라의 합병 정책도 다소 차이가 있었죠.
 
  朱甫暾 金官國 그룹은 532년 합병 당시 저항다운 저항 없이 항복하여 신라로부터 대접을 받은 셈입니다. 신라는 가야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金官國의 왕족을 진골로 우대했습니다. 安羅國 그룹은 백제-왜국과 가까웠던 만큼 합병 후 그 유민들은 인정을 받지 못하고 흔적도 없어졌습니다. 대가야 그룹의 유민들은 멸망 전에 이미 다수가 이탈하여 신라에 흡수되었습니다. 신라는 이들을 忠州 지역에 모여 살게 했는데, 大伽倻系의 대표적 인물이 음악가 于勒(우륵), 문장가 强首(강수) 등입니다. 그들은 신라 문화와 학문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으며, 그들이 거주했던 忠州는 신라 5小京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화 세력과 귀족 중심 연합세력의 각축
 
 
  사회 法興·眞興王대에 추진된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화 경향은 귀족세력의 일정한 양보 또는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眞興王을 이은 眞智王(진지왕) 때는 귀족세력의 반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金炯孝 역사기록에 의하면 眞智王은 眞興王의 차자인 舍輪(사륜)인데, 태자였던 銅輪(동륜)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왕위를 계승했던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당시 신라에는 장자상속의 원칙이 확립되었던 만큼 眞興王 이후의 왕위는 당연히 銅輪의 적자인 白淨에 의해 계승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舍輪이 白淨을 배제하고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귀족세력을 대표하던 居柒夫의 지원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眞智王대를 전후한 시기에 신라의 귀족사회는 두 집단으로 나눠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하나는 法興王 이후 왕권 중앙집권 체제에 적응하려는 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智證王(지증왕) 이전 귀족 중심의 연합정치 체제로 복귀하려는 세력이었습니다. 眞智王을 즉위시킨 세력은 후자로 보여집니다.
 
  사회 眞智王은 재위 4년 만에 폐위당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朱甫暾 眞智王은 왕위계승 원칙에서 벗어나 非정상적인 방법으로 즉위했기 때문에 왕권 강화를 위한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었고, 결국은 귀족회의인 國人에 의해 政亂荒淫(정란황음)을 이유로 폐위당한 것입니다.
 
  사회 眞智王 때 일시 표출되었던 中古 왕권의 강화에 대한 귀족세력의 반발은 동륜계의 백정이 즉위함으로써 극복되었습니다.
 
 
  眞平王은 善防의 군주
 
 
  朱甫暾 眞平王은 즉위와 동시에 同母弟(동모제)인 伯飯(백반)과 國飯(국반)을 각각 眞正 갈문왕과 眞安 갈문왕에 책봉함으로써 왕위의 장자 계승 원칙을 천명한 다음에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 구축을 위한 관제 정비를 적극적으로 추진했습니다. 진평왕 3년(581)에 설치된 位和府는 인사행정을 전담하는 관부로서 眞平王의 인사권 장악을 통한 관제정비의 기본방향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眞平王 8년(586)에 임명한 禮部令은 문교적 기능도 없지 않았겠지만, 외교행정의 책임자로 보여집니다. 이런 조치 등에 의해 행정권을 총괄하던 상대등의 권한이 축소되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한편 군사권을 총괄하던 병부에서 車乘관계의 업무를 분리하여 乘府令에게 이관하고, 艦船(함선)관계의 업무는 신설된 船府署에서 담당토록 합니다. 그리고 국가의 재정권을 총괄하던 稟主(품주)의 典大等은 貢納(공납)의 수납에 관한 권한을 調府令에게 이관함에 따라 국가재정에서 지출하는 권한만 행사하게 합니다. 이런 조치 역시 귀족세력의 권력을 再분산시켜 왕에게 권력이 집중되도록 유도한 것입니다.
 
  金炯孝 眞平王은 法興·眞興王대 이래 추진되었던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를 완성한 임금이었으며, 이러한 기반 위에 天賜玉帶(천사옥대)로 상징되는 고대적 전제왕권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회 眞平王 시대의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상대로 한 2正面 작전을 강요당하고 있었습니다. 600년에 즉위한 백제 무왕은 554년 성왕 敗死(패사) 이래 거의 반세기 만에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여 신라를 위기로 몰아갑니다. 고구려는 신라에게 탈취당한 한강 유역을 회복시키기 위해 명장 溫達(온달)을 출전시킵니다. 온달은 590년 阿且山城(아차산성) 전투에서 전사하지만, 7세기에 들면 고구려의 공세는 더욱 치열해집니다. 고구려군은 603년 북한산성, 608년 우명산성, 636년 칠중성(경기도 적성)을 공격했습니다. 신라는 확대된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고전을 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진평왕은 善防(선방)의 군주였다고 생각합니다.
 
  許文道 삼국의 쟁패전은 589년 중국 대륙에서 통일제국 隋(수)가 대두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듭니다.
 
  金炯孝 608년 고구려군이 침범하자 眞平王은 圓光法師에게 隋나라에 고구려 공격을 요청하는 외교문서를 쓰게 했습니다. 이때 圓光은 『자기가 살려고 남을 멸하는 것은 승려의 할 바가 아니나, 빈도가 대왕의 나라에서 그 水草를 먹으면서 어찌 감히 왕명을 좇지 않겠느냐』면서 乞師表(걸사표)를 작성했습니다.
 
  사회 원광법사는 화랑도의 근본사상인 世俗五戒(세속오계)를 지은 고승입니다. 신라 호국불교의 원조라고 할 수 있겠군요.
 
  金炯孝 원광은 南朝의 나라 陳에 유학을 갔는데, 隋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 攝論宗(섭론종)을 연구하고 般若經(반야경)을 강의했습니다. 귀국 후인 진평왕 22년(600) 대승경전을 강의하면서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를 일러준 것입니다.
 
  사회 세속오계 중 「殺生有擇」의 의미는 싸움터에서 적군을 죽이더라도 가려서 죽이라는 것으로 알았는데, 가축을 마구 죽이지 말라는 것으로 풀이하는 분들도 있습디다.
 
  朱甫暾 사람이든 짐승이든 생명이 있는 것이면 가려서 죽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金炯孝 사람을 죽이든 가축을 죽이든 殺生인 만큼 불교의 금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가피할 때 죽이되 가려서 죽이라는 데 신라불교의 특이성이 있는 것입니다. 弗國土인 신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승려가) 殺生도 할 수 있다는 뜻이거든요.
 
  許文道 612년 隋煬帝(수양제)는 130만 대군을 고구려 원정에 투입했지만 패전했습니다. 이 해에 훗날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는 金庾信이 18세의 나이로 신라 화랑도의 제1인자인 國仙에 올랐습니다. 隋나라는 그후에도 고구려 정벌을 계속 추진하지만, 내란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618년 隋의 江山은 唐의 天下가 되고 말았습니다.
 
 
  廢王의 후손과 金官國 왕족 출신의 同盟
 
 
  사회 폐왕 眞智王의 아들 龍樹와 龍春이 眞平王대 후기에 크게 활약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됩니다. 진평왕 44년(622)에 이찬 龍樹(용수)는 內省의 私臣에 올랐습니다. 內省의 私臣은 왕실에 대한 업무를 관장하는 궁내부 대신과 같은 존재로서 왕과 왕가의 신변 보호, 3宮의 수호 등을 담당하는 기관의 책임자인 것입니다. 또 眞平王 51년(629)에 파진찬 龍春은 대장군이 되어 金官伽倻 왕족 출신 김서현 및 그의 아들 金庾信(김유신)과 함께 출전하여 고구려의 娘臂城(낭비성)을 함락시키는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龍樹와 龍春을 동일인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龍樹와 龍春이 동일인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622년에 제2위의 官等인 이찬의 지위에 있었던 인물이 7년 후인 629년 제4위의 관등인 파진찬으로 강등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1989년 부산에서 발견된 필사본 花郞世記(화랑세기)에는 龍樹가 형, 龍春은 동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金炯孝 그러면 나중에 태종무열왕이 되는 金春秋의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사회 필사본 花郞世記에 따르면 金春秋의 생부는 龍樹, 의부는 龍春입니다.
 
  朱甫暾 저는 필사본 화랑세기를 진본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許文道 필사본 화랑세기에 대한 진위문제를 놓고 학계에서는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500명에 달하는 인간 군상이 등장, 실로 복잡다단한 인간관계를 전개하고 있는데, 그 전후가 매우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저는 어떤 천재일지라도 그렇게 전후가 척척 맞아가는 책을 쓰기 어렵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필사본 화랑세기가 원본을 필사한 책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 이제는 金龍春과 더불어 新귀족세력을 형성하는 金官伽倻계의 김서현에 대해 검토할 차례입니다. 金官伽倻系는 法興王 19년(532)에 신라로 항복해 온 金官伽倻의 마지막 임금 金仇亥(김구해)의 家系집단입니다. 이들은 신라에서 上等에 해당하는 진골 신분으로 편입되었으며, 본국을 食邑으로 보유함으로써 경제적 기반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朱甫暾 金仇亥의 아들인 金武力은 眞興王 초기에 이사부와 함께 북진작전에 참여했으며, 서북변경의 전략적 요충인 新州의 군주로 임명되었습니다. 신주 군주 재임시 金武力은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잡는 등 결정적인 전공을 세웠습니다만, 그의 관등은 제3위인 소판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金官伽倻계는 신라 귀족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토착 귀족세력으로부터 여전히 경원시되는 집단이었습니다.
 
  許文道 그러한 사실은 金武力의 아들인 金舒玄과 肅訖宗(숙흘종: 眞興王의 동생)의 딸인 萬明(만명)의 결혼이 숙흘종의 반대로 파란을 겪었습니다. 결국 金龍春이 萬明을 납치하여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는 약탈혼에 의해 결혼이 성립되기는 했지만, 金官伽倻계로선 생존을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해진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金舒玄은 쿠데타로 인해 폐위당한 眞智王의 아들로서 갈등집단으로서의 속성을 공유한 金龍春과 연합합니다. 두 가계집단은 626년 그 자녀들인 金春秋와 文姬(金庾信의 여동생)의 결혼에 의해 재확인되었으며, 629년 낭비성 전투의 승리에 의해 정치적 기반을 확보하게 되는 것입니다.
 
 
  文武兼全의 엘리트 양성 제도
 
 
  金炯孝 삼국통일을 거론하면서 신라의 화랑제도를 빠트릴 수 없습니다. 삼국사기에는 화랑도와 관련, 「그들은 도의로써 서로 연마하고(相磨以道義) 산수를 찾아 노닐어(遊娛山水) 먼 곳이라도 그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無遠不至)」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경주 국립박물관에 가서 壬申誓記石(임신서기석) 앞에 서기만 하면 「도의로써 서로 연마했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대번에 가슴에 와닿습니다.
 
  許文道 壬申誓記石은 임신년에 화랑 둘이서 하늘에 굳게 맹세하는 글을 새겨 놓은 냇돌입니다. 이 냇돌에 담긴 문자를 풀이하면 충도를 굳게 지키겠다는 맹세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詩經(시경), 尙書(상서), 禮記(예기), 左傳(좌전)을 3년 안에 모두 익힐 것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수련은 신라 사회가 화랑에게 臨戰無退의 용맹한 장교뿐만 아니라 한 시대를 짊어지고 나갈 장수와 경륜가로 성장할 것을 기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朱甫暾 화랑제도의 특징은 문무의 균형적 배합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무관양성 학교가 아니라 국가와 시대가 요구하는 文武兼全의 엘리트를 양성하는 全人교육기관이었다고 해야 합니다.
 
  사회 진평왕은 왕권 중심체제를 구축하여 전제 왕권을 확립한 임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왕권 안정도 진평왕대의 후반에 이르러서는 왕위계승 문제로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차녀인 善德이 632년 여왕으로 등극하게 되었습니다. 眞平王의 이름은 석가의 아버지인 백정, 그 왕비는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 부인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진평왕의 동생들은 석가의 삼촌들의 이름을 따서 「백반」과 「국반」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남자 아이만 태어나면 「석가」라는 이름이 붙을 판이었습니다만, 끝내 진평왕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金炯孝 왕권 강치에 대한 舊귀족세력의 반발이 眞平王 말기에 柒宿(칠숙)과 石品(석품)을 주모자로 하는 舊귀족세력의 모반사건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모반의 실패는 新귀족세력의 성장을 초래하였고, 신·구 귀족세력의 균형 위에 善德女王이 즉위하게 된 것입니다.
 
 
  밑바닥 人生의 마음까지 어루만진 女王
 
 
  사회 제가 지난 3월 말, 경주에 가서 사천왕사 뒤편 야산 정상부에 위치한 善德女王의 능을 둘러보았는데, 누가 그랬는지 상석 위에 커다란 꽃다발 하나가 놓여 있더군요. 참배객도 많은 편이라고 합디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인 善德女王은 어떤 임금이라고 해야 할까요.
 
  金炯孝 善德女王은 황룡사와 그 9층탑을 완성하고, 분황사와 첨성대를 세운 임금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佛事를 통해 일종의 국민통합을 도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회 三國遺事(삼국유사)를 보면 善德女王은 先見之明(선견지명)이 있는 매우 영특한 임금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필사본 花郞世記에 따르면 善德女王은 龍鳳의 자질을 가진데다 색정적이며, 상당한 글래머였다는 것입니다. 또 善德女王은 三壻制(삼서제)를 취했다는데, 이는 남편을 셋 두었다는 것으로 풀이됩니다. 이번에 善德女王陵을 답사한 이유 중 하나는 여왕릉 바로 밑에 그녀가 생전에 사랑했던 총신의 무덤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확인해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善德女王은 한국의 엘리자베스 1세라고 해야 할까요.
 
  金炯孝 총신의 무덤이 있습디까.
 
  사회 善德女王陵 밑에 작은 고분 여러 기가 산재되어 있습디다만, 어느 시대의 무덤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許文道 善德女王은 생존 당시에도 대단한 인기를 누린 여성 통치자였습니다. 삼국유사는 다음과 같은 설화를 전하고 있습니다. 어느 거지 하나가 善德女王을 사모한다는 소문이 온 서라벌 바닥에 짜하게 퍼졌습니다. 善德女王이 그가 누구인지 한번 만나보려고 찾아가니까 걸인은 양지 바른쪽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습니다. 여왕을 수행한 신하가 『깨울까요』하고 아뢰니 善德女王은 『그러지 말라』면서 그녀의 팔찌를 벗어 거지의 가슴께 놔두고 갑니다. 여왕은 이렇게 거지의 마음까지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또한 본처가 있는 金春秋와 金庾信의 막내 여동생 文姬가 정을 통해 임신을 하게 되자 金庾信은 文姬를 불태워 죽이겠다고 소동을 벌입니다. 이런 文姬를 구출, 아내로 맞도록 권유한 사람이 바로 즉위 전의 善德女王이었습니다. 그렇다면 善德女王은 金春秋-金庾信의 결혼동맹을 성립시켜 삼국통일을 추동한 역할을 한 셈입니다. 저는 善德女王이 나중에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는 金春秋와 金庾信을 어머니처럼 키워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朱甫暾 善德女王은 50代에 왕위에 올라 5∼6년 후에는 병약해진 나머지 백약이 무효인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은 善德女王의 수명이 길지 못해 후계문제가 불안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백제 의자왕의 대공세가 시작됩니다. 의자왕은 신라의 낙동강 이서지역을 공략, 40여 개 성을 빼앗고 신라-唐 항로의 요충인 黨項城(당항성: 경기도 남양)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킵니다.
 
 
  신라의 국가적 위기
 
 
  사회 백제 장군 允忠(윤충)에 의한 대야성 함락은 신라를 위기상황으로 몰아넣게 되죠. 대야성의 성주는 바로 金春秋의 사위 아닙니까. 성이 무너지면서 성주 부부는 자결하게 됩니다.
 
  朱甫暾 대야성 함락은 金春秋-金庾信 동맹에겐 위기였습니다. 대야성을 잃은 성주 品釋(품석)이 자결하기 직전,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정신과는 정반대의 행적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하의 부인을 넘본데다 부하 竹竹(죽죽)의 간언을 듣지 않고 항복하려다 백제군으로부터 배신당하는 실책까지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金春秋-金庾信의 新귀족그룹으로선 뭔가 돌파구를 찾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許文道 金春秋는 淵蓋蘇文(연개소문)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고구려의 평양으로 들어갔습니다. 당시의 국제관계로 미루어 보면 범의 아가리로 들어간 셈입니다. 金春秋의 모험외교는 고구려 영토의 반환문제로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金炯孝 대야성 함락 직후 金庾信은 수도권 방어의 요충인 押梁州(압량주: 경산) 군주를 역임한 이래 여러 차례에 걸친 백제와의 전투에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습니다.
 
 
  신라 지도부를 분열시킨 唐太宗의 발언
 
 
  朱甫暾 한편 舊귀족세력은 곧바로 백제-고구려 連兵說을 명분으로 삼아 唐에 대해 청병외교를 추진했습니다. 이때 당태종은 신라에 대한 여-제의 침략을 방어하는 세 가지 방안을 제시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첫째, 당이 거란·말갈병을 동원하여 요동을 침입하면 1년쯤 여-제 공격과 에움을 풀 수 있다. 둘째, 여-제 양군이 물러가도록 당나라의 군복과 깃발을 신라군에 제공하겠다. 셋째, 신라는 여왕이 다스리는 까닭에 이웃 나라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는 만큼 당의 왕족으로 신라왕을 삼아 보호한다. 이것이 바로 女主不能善理(여주불능선리), 즉 여왕은 좋은 정치를 할 수 없다는 말을 만들어 내 신라 조야를 흔드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사회 당태종은 3지선다형 방안을 제시한 셈이지만, 그런 문제에 배짱 좋게 답할 만한 사신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당태종은 신라 사신에 대해 乞師告急(걸사고급)의 인재가 아니라고 핀잔을 주었다고 합니다. 역시 당이 신라 구원을 위한 적극적인 군사지원을 약속하지 않은 채 실현 불가능한 외교적 레토릭만 구사했던 셈입니다.
 
  許文道 당시 신라의 舊귀족세력은 당의 후원을 얻어 백제의 침입으로부터 신라를 보존함으로써 新귀족세력에 대해 상대적 우위를 확보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반면 唐은 중국 중심적 東아시아 질서의 구축을 위한 고구려 정복에 우선적 관심을 두었던 것입니다. 그런 만큼 신라-당 양국의 군사동맹에 필요한 조건이 아직 성숙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朱甫暾 당태종은 고구려 정벌을 위해 644년 11월 장안을 출발해서 645년 2월 副都(부도)인 洛陽(낙양)에 도착하여 병력을 집결시킵니다. 이어 相里玄奬(상리현장)이란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 개전외교를 전개합니다. 신하(연개소문)가 마음대로 임금(영류왕)을 시해한 고구려의 쿠데타에 참을 수 없다는 등의 명분을 내세워 고구려를 위협합니다. 이어 相里玄奬은 백제로 가서 병력을 지원하라고 요구합니다. 신라에 대해서는 5만 병력을 동원하여 제2전선을 형성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백제에 대한 병력 지원 요구는 신라에 대해 전쟁을 걸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계략으로 보입니다. 신라에선 병력을 동원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논란이 빚어집니다.
 
  고구려-당의 1차 전쟁은 645년 4월에 개전했지만, 6개월 만인 10월, 추위에 시달리던 당군이 철수함으로써 일단락되었습니다. 당태종은 당초 고구려의 왕성 평양을 바로 공격하는 방안과 평양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고구려군의 성곽을 하나하나 제압하는 방안을 놓고 저울질하다가 결국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唐軍은 遼河(요하)를 건너 白巖城(백암성)·遼東城(요동성) 등 10개 성을 함락시켰으나 安市城(안시성) 공격에 실패, 전진을 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회 高句麗의 남부 국경으로 진군한 신라군도 아무런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회군하고 말았습니다.
 
  朱甫暾 당연히 신라 내부에선 아무런 성과 없는 병력동원에 대한 책임문제가 거론되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舊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 毗曇(비담)이 포스트 善德女王을 겨냥하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 신라 조정의 실권은 金春秋-金庾信 동맹이 장악하고 있었던 만큼 毗曇의 왕위계승이나 舊귀족집단의 세력만회는 무망하게 됩니다.
 
  사회 善德女王은 647년 1월에 일어난 비담의 반란과 진압과정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 반란의 주체와 원인에 대해서는 우리 학계의 견해가 엇갈리고 있습니다.
 
  朱甫暾 善德女王이 병으로 죽어가는 중 金春秋-金庾信 그룹에선 勝曼(승만: 후의 眞德女王)을 미는 데 대해 비담은 자기가 왕위에 오르려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許文道 반란의 주체를 金庾信으로 보는 견해도 없지 않습니다. 金庾信은 칼싸움이나 잘하는 단순한 武夫(무부)가 아니라 지략을 종횡무진 구사하는 전략가입니다. 善德女王의 死後에 金春秋가 곧장 후계왕이 될 수 없는 처지라면 왕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로 善德女王의 4촌인 승만을 옹립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당태종이 던진 女主不能善理라는 미끼를 덥석 물은 大國追隨主義者(대국추수주의자)들의 숨통을 끊어 놓아야 했던 것입니다. 金春秋-金庾信 그룹으로선 비담 등의 舊귀족세력을 숙청할 수 있는 찬스만 생긴다면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입장이었죠.
 
  사회 비담의 亂 당시에 金春秋가 국내에 있었는지, 왜국에 체재했는지 좀 헷갈립니다.
 
 
  羅唐의 비밀 영토분할 협약
 
 
  朱甫暾 645년 왜국에서는 大化改新이라는 쿠데타가 일어나 백제 일변도의 정책을 구사하던 소가(蘇我)정권이 몰락했습니다. 金春秋는 646년 12월 왜국의 새 집권세력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왜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비담은 金春秋가 부재중이던 647년 1월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비담의 쿠데타군은 처음엔 유리했으나 金庾信에 의해 보름 만에 제압되었습니다.
 
  許文道 결국 金春秋-金庾信 동맹의 계획대로 善德女王의 死後에 眞德女王이 승계합니다. 이것은 女主不能善理를 구실로 앞세운 당태종의 구상을 완전히 무시하는 일이었습니다. 眞德女王 2년(648) 金春秋는 당으로 건너가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하는 비밀협약을 성립시켰습니다. 新귀족세력은 眞德女王의 즉위 초부터 내정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강화해 갑니다. 이것은 眞德女王을 위한 것이 아니라 中代王權의 성립을 전망하는 金春秋-金庾信 동맹의 집권 정지작업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정지작업을 마친 654년 眞德女王이 병사하자 金春秋는 제29대 왕(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金庾信은 상대등 閼川(알천)을 섭정으로 추대함으로써 귀족연합체제로 복귀하려는 舊귀족세력의 기도를 실력으로 무산시켰습니다. 이로써 초기의 中代 왕권에 부과된 정치적 과제는 왕권을 전제화하여 삼국통일전쟁을 수행하여 대내외적 모순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집약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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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圓光法師의 世俗五戒
 
  7세기의 東아시아 세계는 불교가 번영했음에도 불구하고 피가 강물을 이룬 격동의 시대였다. 특히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에 의해 국가 존망의 위기에 몰리게 된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화랑에게 정신적·윤리적 기반을 마련해 준 것이 世俗五戒였다. 다음은 三國史記 列傳(열전)에 기록된 관련 기사의 요약이다.
 
  <이때(600년) 원광법사가 수나라에서 공부하고 嘉瑟寺(가실사:경북 청도 소재)에 있었는데, 귀산과 추항은 그 문하로 나아가서 공손하게 아뢰었다.
 
  『속세에 사는 선비가 우매하여 아무것도 아는 바 없으니 부디 한 말씀 내리셔서 평생의 계명을 삼도록 하소서』
 
  법사가 말했다.
 
  『불가의 계율에는 菩薩戒(보살계)라는 것이 있는데, 그대들은 남의 신하로서 아마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世俗五戒가 있으니, 그 첫째는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는 일(事君以忠)이요, 둘째는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기는 일(事親以孝)이요, 셋째는 신의로써 벗을 사귀는 일(交友以信)이요, 넷째는 싸움터에서 물러서지 않는 일(臨戰無退)이요, 다섯째는 생명을 죽이되 가려서 죽이는 일(殺生有擇)이니, 그대들은 이들을 실행하여 소홀히 하지 말라』
 
  원광법사로부터 세속오계를 받은 귀산과 추항은 진평왕 24년(602) 阿莫城(아막성: 남원시 운봉읍) 전투에서 臨戰無退가 과연 어떤 것인지 시범을 보인다.
 
  신라군이 백제군의 복병에 걸려 패퇴하자, 귀산은 『내 일찍이 스승에게 들으니 군사는 적군을 만나서 물러가지 않는다고 했다. 어찌 감히 패하여 달아날 수 있으랴』고 외치고 추항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힘껏 싸우니 적군 수십 명이 죽었다. 여러 군사들이 이를 보고 분발하여 진격하니 쓰러진 백제군의 시체가 벌판을 메웠다. 귀산과 추항은 온몸이 창날로 찔려 회군 도중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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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大化改新과 金春秋의 日本行
 
  왜국의 여자 천황 교고쿠(皇極)가 즉위한 익년 10월, 병을 얻은 집권자 소가 에미시(蘇我蝦夷)가 대신의 지위를 아들 소가 이루카(蘇我入鹿)에 넘겼는데, 이루카의 전횡이 그의 아비보다 심했다. 蘇我씨는 백제의 木씨 출신이었다. 이때 蘇我씨를 타도하려는 계획이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그 중심인물은 나카노 오에(中大兄) 황자, 나카노미노 가마다리(中臣鎌足) 등이었다.
 
  645년 6월12일 외교사절을 영접하던 大極殿(대극전)에서 이루카는 불의의 공격을 받고 참살되었다. 다음날 에미시도 자기 집에 불을 지르고 자결함으로써 蘇我씨는 몰락했다. 쿠데타 직후 皇極천황은 물러나고 輕황자가 추대되어 孝德천황이 되었다. 이것이 大化改新이다. 이 정변에 의해 여러 대립되는 강대 세력 중 天皇族(천황족)의 優勢(우세)가 확립되었다. 646년 金春秋가 왜국으로 건너간 것은 왜국의 새 집권세력과 관계를 개선, 백제를 고립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의 金春秋에 대해 日本書紀에는 「용모가 출중하고 담소를 잘했다(美姿顔善談笑)」는 등 호의적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