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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기행(11) - 晩秋의 智異山 자락 800리 一周

야생초요 2006. 7. 3. 12:54
국보 기행(11) - 晩秋의 智異山 자락 800리 一周
 
文明 해체기의 고뇌하는 지식인 孤雲 崔致遠의 숨결
 
鄭淳台 月刊朝鮮 편집위원 (st-jung@chosun.com
훨씬 가까워진 智異山
<보물 제500호 쌍계사 대웅전. 그리 크지 않은 대신 소박한 멋을 지녔다. 층층다리 아래의 것이 국보 제47호 眞鑑禪師大空塔碑>
 지난 10월30일 수요일 오전 7시 정각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에서 李五峰 사진부장과 만났다. 李부장은 7시20분에 출발하는 晉州(진주)行 승차권(우등요금 2만1300원)을 벌써 끊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더운 국물의 국수 한 그릇으로 요기를 하고 고속버스에 오르니 이내 發車(발차)한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德이 넉넉한 德裕山(덕유산)을 끼고 茂鎭長(무진장:무주-진안-장수)을 지나는 37번과 19번 국도 주변의 가을을 은근히 사랑했다. 전북 장수郡의 교통요지 장계邑 사거리에서 東進, 26번 국도를 타고 60령 굽이굽이를 넘어 경상도 땅 咸陽(함양)으로 진입하는 아기자기한 맛. 이어 3번 국도로 길을 바꿔 어머니의 품 속 같은 智異山(지리산)에 안기면서 晉州로 드는 코스는 꿈에도 가끔 펼쳐지는 마음의 行路였다. 문제는 엄청난 소요시간. 좀처럼 기회를 잡기 어려웠다.
 
  꿈★은 이루어졌다. 이제 晉州는 훨씬 가깝다. 올해 大田-晉州 간의 35번 고속도로가 완공되었기 때문이다. 요즘 大田 시민들 사이엔 晉州圈의 외항 三千浦(삼천포) 해안 어시장에서 펄펄 뛰는 雜魚(잡어)의 물회를 실컷 즐기고 당일로 귀가하는 것이 하나의 행락으로 꼽히고 있다. 승용차로 두 시간 거리.
 
  大田 남방 비룡분기점에서 경부고속도로에서 갈라지는 35번 고속도로는 德裕山의 서쪽 자락과 智異山의 동쪽 자락을 스쳐 간다. 智異山의 주봉 天王峰(천왕봉)의 雄姿(웅자)도 완벽하게 드러난다. 晉州 南江에 合水되는 山淸의 경호강도 絶景(절경)을 보탠다. 仁者는 산을 좋아하고 知者는 물을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한 번 旅程(여정)으로 둘 다 兼全(겸전)하게 되는 셈이다.
 
  중앙고속버스는 당초의 약속대로 출발 3시간50분 만인 오전 11시10분에 晉州터미널에 도착했다. 짐을 메고 걸어서 터미널 부근의 대한통운 렌터카 晉州영업소(전화 055-762-2835)에 들러 소형승용차 하나를 빌렸다. 72시간 빌리는 데 15만원(하루 5만원). 여기에 보험료(선택사항)가 2만1000원(하루 7000원). 모두 합쳐서 17만1000원.
 
  아직 점심을 들려면 이른 시간. 晉州 IC(인터체인지)를 벗어나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니까 20여 분 만에 河東 IC. 河東 IC로 빠져나와 蟾津江(섬진강) 절경을 끼고 19번 국도를 北上한다. 도중에 河東邑 강변에서 그 유명한 河東재첩국 한 그릇에 밥 한 그릇을 말아 中火(중화)하고 잠시 강변 둑에 올라 쪽빛보다 푸른 섬진강의 맑음을 즐긴다.
 
  「河東浦口(하동포구) 80리」의 종착점이 섬진강과 雙磎(쌍계)의 合水 지점. 여기가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그 소문난 花開(화개)장터다. 필자에게 花開는 조금 유별난 곳이다. 1980년 新軍部가 등장하여 記者들의 목을 대거 칠 때(强制解職事件) 어쩌다 언필칭 「解職기자 그룹」의 末席(말석)에 끼게 되었다. 그로 인해 失業者가 되었던 필자는 아내와 여섯 살, 세 살짜리의 두 아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들어와 그 해 8월 마지막 週日을 묵고 갔다.
 
 
  花開장터 마을의 변화
 
  花開장터가 22년 전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때 필자 가족은 花開보건지소장이던 친지의 사택 방 한 칸에 「베이스 캠프」를 치고 「어머니의 山」인 지리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 품속이 아늑했던 탓이었든지, 서른여섯의 젊음 탓이었든지 喪心(상심)하지는 않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냇가로 나가 세수를 하면 바로 눈앞에 銀魚(은어) 떼가 몰려와 공중 점프를 했다. 은어의 하얀 뱃살이 아침 햇살을 맞받아 번쩍거렸다. 그때는 참으로 행복했다.
 
  필자가 은어를 잡았던 花開장터 일대의 개울은 이제 온통 시멘트로 덮여(覆蓋) 큰 마을로 둔갑해 버렸다. 그때 섬진강 건너편인 전남 光陽郡(지금은 광양市)의 白雲山(백운산) 동쪽마을 나루와 花開나루는 굵은 동아줄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荒天時(황천시) 이곳 나룻배의 사공들은 섬진강의 사나운 急물살을 제어하기 위해 생명의 동아줄을 단단히 붙들고 배를 부렸다. 光陽 쪽 주민들과 학동들은 그런 나룻배를 타고 화개장을 보고, 화개초등학교로 통학했다.
 
  아, 그런데 이제는 바로 그 자리에 폭이 20m나 되어 보이는 鐵(철) 구조의 큰 다리가 들어서 완공을 수週日 앞두고 있다. 편리함을 얻은 대신에 멋을 잃었다. 생명의 동아줄도 사라져 버렸다. 이제 花開장터는 「뽄새」가 없다.
 
  그러나 안심했다. 花開장터 마을을 벗어나 雙磎寺(쌍계사)로 가는 「십리벚꽃길」(실제는 5㎞)의 山川은 依舊(의구)하다. 벚꽃이 開花(개화) 滿開(만개)하는 이곳의 봄은 화사하기로 소문났지만, 가을의 이곳은 고향길처럼 아늑해 더욱 좋다.
 
  길 양쪽 산자락 군데군데에 빼곡히 들어선 차밭의 냄새가 향긋하다. 雙磎에 걸린 다리를 건너면서 내려다보면 왜 돌 「石」 변의 「磎」 자를 쓰는지 알 수 있다. 집채만 한 바위가 개울 곳곳에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梵唄의 요람
 
  寺下村(사하촌) 동구에다 차를 세워 놓았다. 쌍계교 初入 바로 건너편에 공용주차장이 있지만, 주차료(4000원)를 아꼈다. 여름 휴가철의 북새통을 훌쩍 넘은 평일의 三神山(삼신산·쌍계사의 뒷봉우리) 밑자락엔 빈 터가 얼마든지 있다.
 
  사하촌에서 조금 오르면 길 좌우에 큰 바위 두 개와 나무 장승 두 基가 門과 문지기처럼 버티고 있다. 두 바위에는 각각 「雙磎」와 「石門」이라고 새겨져 있다. 孤雲 崔致遠(고운 최치원)이 지팡이 끝으로 썼다고 전한다. 전문가들은 孤雲의 書體(서체)가 분명하다고 말한다. 나무를 뿌리째 뽑아 거꾸로 세운 장승도 색다른 운치를 풍긴다.
 
  여기서 걸어서 5분 거리에 매표소가 있다. 1인당 입장료 2600원(공원 입장료 1300원+문화재 관람료 1300원). 곧 「三神山 雙磎寺」 현판이 걸린 一柱門(일주문). 기둥이 두 개인데 왜 기둥이 하나뿐이란 의미의 「一柱」란 단어를 썼느냐고 의아해 하기도 한다. 두 기둥을 일직선상에 세웠다는 뜻이다.
 
  이로부터 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208번지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本寺 쌍계사의 경내다. 이어 절집의 中門에 해당하는 金剛門(금강문)과 天王門(천왕문)을 통과하면 八詠樓(팔영루)와 마주한다.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2층 누마루다. 팔영루라면 쌍계사의 開山祖(개산조) 眞鑑禪師(진감선사) 이래 우리나라 梵唄(범패:불교 성악곡)의 名人들을 배출한 요람이다.
 
  八詠樓 옆 계단을 밟고 오르면 쌍계사 대웅전(보물 제500호)의 앞마당. 그리 크지 않지만(정면 다섯 칸, 측면 네 칸) 소박한 멋을 지녔다. 대웅전으로 오르는 층층다리 바로 앞에 이번 기행의 하이라이트인 國寶 제47호 眞鑑禪師大空塔碑(진감선사대공탑비)가 세워져 있지만, 일단 지나쳤다. 절에 오면 부처님부터 먼저 拜觀(배관)하는 것이 예의일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국보 47호 眞鑑禪師大空塔碑_한국 金石文의 대표적 존재
 
  잠시 부처님께 三拜(삼배)를 드리고 계단을 내려와 眞鑑禪師大空塔碑를 관찰했다. 塔碑는 오후 2시의 햇빛을 되받아내고 있었다.
 
  塔碑의 동쪽 면에는 약 2500字의 漢字(한자)가 빽빽하게 적혀 있다. 글자는 한 字가 2.3㎝ 크기의 楷書體(해서체). 뒷면에는 글자가 없다.
 
  碑文은 孤雲이 지어 아직도 남아 있는 四山碑銘(사산비명) 중에서 가장 간결한 글이다. 孤雲이 唐(당)나라에서 귀국한 직후에 碑銘을 지었다. 이것은 四山碑銘 중에서도 유일하게 글씨 또한 孤雲이 직접 썼는데, 소위 歐陽詢(구양순)의 骨(뼈)에 顔眞卿(안진경)의 肉(살)을 붙인 필법이다. 통일신라 정강왕 2년(887년)에 세운 것이다.
 
  전체 높이 3.63m, 碑身(비신) 높이 2.02m, 너비 1m. 몸체는 黑대리석이고, 거북받침(귀부)과 지붕(이수)은 화강암이다. 앞뒷면엔 모두 총알 자국으로 곰보투성이다. 크고 작은 총알 구멍이 100군데나 된다. 특히 앞면 왼쪽 상단부와 오른쪽 중단은 심하게 파손되어 있다.
 
  碑身의 가장자리는 현재 철판으로 단단히 조여 있다. 智異山은 1948년 여순반란사건 이래 빨치산이 소멸되었던 1953년까지 처절한 교전지역이었다. 교전 중에 생긴 손상인지, 물정 모르는 피아 병사들의 장난질 혹은 사격연습에 의한 훼손인지 알 수가 없다. 어떻든 우리나라의 대표적 金石文이 사라질 뻔했다.
 
  碑文은 夫道不遠人(무릇 道란 사람에게서 멀지 않고) 人無異國(사람은 나라를 달리함이 없음이라) 是以(이런 까닭에) 東人之子(우리나라 사람이) 爲釋爲儒(불교를 배우고 유교를 배우는 것은) 必也(필연이다)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이렇게 첫 구절부터 孤雲의 三敎理通思想이 잘 나타난다. 儒·佛·仙의 3道를 따로 구별하지 않고 그 근본 이치는 서로 다를 게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碑文은 이어 眞鑑 스님의 행적을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 내용을 현대문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禪師는 통일신라 혜공왕 10년(774년)에 태어나 문성왕 12년(850년)에 77세(법랍 41세)로 입적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求法의 길에 들었다. 哀莊王(애장왕) 5년(804년) 唐나라에 들어가 神鑑(신감)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수도 중 道義를 만나 함께 중국 각지를 편력했고 道義가 귀국한 뒤 終南山에 들어가 다시 3년을 수행하고, 또 길거리에서 3년간 짚신을 삼아 行人들에게 布施(보시)했다.
 
  흥덕왕 5년(830년)에 귀국하여 尙州 長栢寺(장백사)에서 머물렀다가 곧 智異山 花開谷으로 들어와 三法화상이 세웠던 玉泉寺 터에 禪堂을 지었다. 평소 梵唄를 잘 불렀는데, 그 목소리가 金玉 같았다. 그의 門下에는 제자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閔哀王(민애왕) 원년(838년)에 왕이 만나기를 청했으나 응하지 아니하니 왕이 慧昭(혜소)라는 法諱(법휘:승려의 號)를 내리고 王都로 나와줄 것을 다시 청했지만, 끝내 응하지 않았다. 입적하니 憲康王(헌강왕)은 眞鑑이라는 시호와 大空靈(대공령)이라는 塔號를 내렸다>
 
 
  3년 동안 짚신을 삼아 行人들에게 布施
 
  眞鑑선사의 속성은 崔씨다. 그의 선조는 668년 고구려가 羅唐(나당)연합군에게 패망한 뒤 南下해 金馬 사람이 되었다. 金馬는 지금의 전북 益山市(익산시). 고구려 寶藏王(보장왕)의 庶子인 安勝(안승)이 4000여 호를 끌고 이곳으로 내려와 신라에 투항하여 신라의 附庸國(부용국)인 報德國(보덕국)을 세웠다. 文武王(문무왕) 10년(670년)의 일이다.
 
  그의 아버지 이름은 昌元으로 在家신도였다. 청년기의 眞鑑선사는 생선 장사를 해서 부모를 봉양했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출가했다가 신라 歲貢船(세공선)의 노꾼이 되어 唐나라에 건너갔다. 그는 唐의 고승인 神鑑선사로부터 法을 받았다. 眞鑑선사는 얼굴이 검어서 黑頭陀(흑두타)라고 불렸다. 그와 道伴(도반)인 道義선사는 귀국 후 전남 長興(장흥) 소재 九山禪門(구산선문)의 하나인 迦智山(가지산) 寶林寺(보림사)의 開山祖가 되었다.
 
  반면 眞鑑선사는 終南山(종남산)에 들어가 높은 봉우리에 올라 소나무 열매를 따 먹으며 3년 동안 禪定(선정)을 했다. 長安(지금의 西安) 남쪽의 鎭山인 종남산은 중국 불교의 聖地(성지)다.
 
  필자는 수년 전 답사를 통해 종남산에서 신라의 求法僧(구법승)들인 慈藏(자장)율사·圓測(원측)대사·義相대사 등의 修道현장을 모두 확인한 바 있다. 世俗五戒(세속오계)를 지은 圓光(원광)법사도 이곳에서 수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3년간 짚신을 삼아 行人들에서 布施했다」는 대목을 보면 眞鑑선사가 당시 종남산을 중심으로 크게 번창했던 三階宗(삼계종)의 영향도 받은 것으로 보인다. 三階宗 형제들은 길을 가다가 사람을 만나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부처님 뵙듯 발부리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고 한다.
 
  眞鑑선사는 중국에 26년간 머물다가 귀국했다. 귀국 후 眞鑑선사는 그 法脈(법맥)이 九山禪門과 같은 독자적인 門戶(문호)로는 발전되지 못했으나, 우리나라에 전래된 이후 기성교파인 敎宗에 의해 배척받아 오던 禪宗의 세력을 크게 扶植(부식)시킨 中興祖(중흥조)임에는 틀림없다.
 
  宗務所(종무소)로 내려와 종무실장을 만나 眞鑑선사 碑銘의 影印本(영인본)과 필사본의 사본 「雙磎寺略史」 등의 자료를 얻었다.
 
  이어 聖寶(성보)박물관에 들렀는데, 여기서 李부장은 眞鑑선사의 眞影(진영)을 촬영했다. 박물관 여직원의 친절한 안내를 잊을 수 없다.
 
 
  羅末 최고의 知性, 우리 漢文學의 祖宗
 
  孤雲이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지는 佛日(불일)폭포도 외면할 수 없었다. 쌍계사에서 산길로 2.3㎞. 왕복 1시간30분 거리다. 중도에는 喚鶴臺(환학대)라고 쓰인 널찍한 바위가 있는데, 바로 孤雲이 학을 불러 노닐던 곳이라고 한다.
 
  조선조의 「文廟(문묘) 배향 5賢」 중 1人인 鄭汝昌(정여창)과 함께 智異山를 둘러본 金馹孫(김일손:연산군 4년 戊午士禍 때 처형됨)은 「續頭流錄」(속두류록)을 썼다. 이 여행기에는 雲中興(운중흥) 등 두 스님을 만나 『孤雲 선생이 죽지 않고 신선이 되어 靑鶴洞(청학동)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는 傳言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佛日폭포에선 봉우리 하나만 넘어가면 이른바 「靑鶴洞 도인마을」이다. 靑鶴洞이 취락을 이룬 지는 불과 50년 전이다. 智異山 일대에서 「진짜 靑鶴洞」을 자처하는 마을은 이밖에도 서너 군데에 이른다.
 
  22년 전에는 여섯 살짜리 아들까지 업고 갔는데, 어느덧 중늙은이가 되어선지 몹시 헉헉거렸다. 필자보다 세 살 위인 李부장은 무거운 촬영장비 가방을 메고도 평지를 걷는 듯한 체력을 보였다. 마침 가을 가뭄이라 폭포수가 22년 전 여름처럼 세차게 떨어지지는 않았다. 늦가을의 해는 짧다. 서둘러 下山했다.
 
  신라 下代의 대표적 知性이며 우리나라 한문학의 祖宗인 孤雲 崔致遠이 眞鑑선사의 碑銘을 짓고 쓴 까닭은 무엇일까. 孤雲은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眞鑑선사 이외에도 여러 禪師의 碑銘을 지었다.
 
 
  先行문명과 後行문명을 이어 준 橋梁人
 
  그는 儒學者(유학자)이면서도 불교에 심취했다. 스님들을 벗으로 삼았는데 그의 家兄도 승려였다. 眞鑑국사 碑銘에 적혀 있는 다음의 구절이 그의 사상적 경향을 말해 주고 있다.
 
  『公子는 그 端(단)을 發하고 釋迦(석가)는 그 致(치)를 窮(궁)했다고 했는데, 진실로 大를 안 者라고 할 수 있으니, 비로소 더불어 至道를 말할 만하다』
 
  그렇다면 孤雲은 親佛的인 유학자다. 이에 대해 사학자 李基白 선생은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이러한 경향은 일반적으로 당시의 大勢가 眞骨귀족들의 骨品制 전통의 固守(고수)와 反정부적 행동에 의하여 순수한 유교적인 정치이념을 펴 나갈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빚어진 것이라 생각한다. 말하자면 이같은 사상적 혼돈은 崔致遠을 대표로 하는 당시의 유학자들이 공통으로 느끼고 있던 일종의 좌절감의 소산이라고 본다. 崔致遠의 경우 그의 방랑생활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조장시켰을 것임에 틀림없다. 요컨대 신라 下代에 와서 유교는 골품제의 질서에 적응한다기보다는 이 낡은 질서를 깨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려는 의욕을 표면화하였던 것이다』
 
  崔致遠은 당시의 세계제국 唐에서 文名을 크게 떨치고 관리로서도 능력을 발휘했다. 熙宗(희종) 황제로부터 紫金魚袋(자금어대)도 하사받는 영예를 누리고 17년 만에 귀국했지만, 骨品制下의 신라조정에선 17官等 중 제 6위인 阿(아찬)이 승진 상한선인 六頭品(6두품)의 신분 때문에 고위 요직을 담임할 수 없었다.
 
  귀국 이듬해 憲康王(헌강왕)이 돌아가고 定康王(정강왕)이 즉위했으나 한 해 만에 별세하고 眞聖女王(진성여왕)이 즉위했다. 곳곳에서 豪族(호족)·群盜(군도)의 반란이 일어나고, 조정에는 群小輩(군소배)가 난무했다. 그는 外職을 자청, 여러 지방의 태수로 나돌았다.
 
  진성여왕 8년(896년) 2월에는 時務策(시무책)을 올려 당시의 체제를 비판하고 정치개혁의 구상을 개진했다. 그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왕권강화를 통한 王道政治의 방안을 개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라는 이미 기울어져 국운을 바로잡기에 그 한 사람만의 힘으론 너무나 미약했다. 親豪族的(친호족적) 노선으로의 전환은 그의 知性이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끝내 그는 고결한 절개를 지키는 野人 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사학자 申瀅植(신형식) 교수의 평가다.
 
  『그는 좌절의 학자였지만, 단순히 방황하던 周邊人(주변인·marginal man)이 아니었다. 羅末의 모순을 지적하여 새로운 시대의 방향을 제시한 문화중계자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토인비의 표현으로 본다면 羅末麗初(나말여초)라는 문명의 해체기에 있어서 창조적 소수(creative minority)의 하나로서 도덕적인 儒敎政治理想이라는 고등종교를 통해 先行문명(신라)에서 後行문명(고려)으로의 이행을 父子관계로 가능케 하여 재생시킨 橋梁人(교량인)이었다』
 
  崔致遠의 정치사상은 高麗 왕조에 들어와서 신라 6두품 출신 崔承老(최승로)에 계승되었다. 儒臣(유신) 崔承老가 고려 成宗에게 올린 時務28條는 崔致遠의 정치사상이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光宗 때의 중앙집권체제 강화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科擧制(과거제) 실시 등은 崔致遠의 사상이 그 초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그는 시대를 앞서 살아간 知性이었다.
 
 
  『거기가 바로 極樂이오』
 
  쌍계사로 내려오니 오후 6시. 벌써 어둑어둑하다. 一柱門을 빠져나오니 구수한 냄새가 은근하다. 고개를 돌리니 새댁이 부침개를 부치고 있다. 새댁의 자태도 얌전하고 「靑雲식당」이란 상호도 어울린다.
 
  식당에 들러 부침개 한 접시에 동동주 한 사발로 목을 축였다. 정갈한 맛에 끌려 거기서 산채 비빔밥(5000원)까지 더 주문하여 저녁으로 삼았다. 허기를 채우니 그제야 3년 전부터 智異山으로 들어와 차밭을 일구고 있다는 후배 李昌洙씨가 생각났다. 1960년 경기도 용인 태생으로 서울서 성장한 그는 月刊中央 등의 사진기자로 일했다. 필자와는 취재여행을 함께 하면서 숱한 사연을 쌓아 온 사이다.
 
  이럴 때는 휴대폰이 보물이다. 전화를 넣으니 서울에 일 보러 갔다가 내려오고 있는 중인데, 현재 35번 고속도로 인삼랜드(금산휴게소) 부근을 달리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는 『오늘 밤 어디서 묵을 예정이우』라고 물었다. 『花開로 내려가 여관을 정할 작정』이라고 답했더니 대번에 『아이, 거기가 진짠데, 어딜 가우. 개울물 흐르는 소리를 자장가 삼으면 거기가 바로 極樂(극락)이오. 그 집에서 민박하소. 나, 그리로 가우』라고 되받는다.
 
  오후 8시 정각, 그가 왔다. 생활한복 차림에 수염이 길어 道士 같은 모습이다. 부인 安京姬씨와 동반했다. 서울시내 초등학교 교사였던 부인도 필자와 구면이다. 어느 해 겨울방학 때 부인은 鄭淳台-李昌洙 답사팀에 끼어들어 5박6일의 여행을 함께 했다. 安선생은 2년 전에 쌍계초등학교로의 전근을 자청, 현재 4학년 학동 11명의 담임을 맡고 있다. 유치원생 12명을 포함하여 전교생이 80명인 학교라고 한다.
 
  安선생에게 청운식당은 바로 학부형의 집. 알고보니 청운식당 여주인은 「새댁」이 아니라 중학교 2학년 아들과 초등학교 5학년 딸의 어머니다.
 
  李昌洙씨는 水滸志(수호지) 호걸들이 오랜만에 동지를 만났을 때의 作風(작풍)처럼 지난 3년간의 과거사를 털어 놓았다. 구지뽕 약주 한 항아리가 바닥 나고 산수유 약주 한 항아리가 더 들어왔다. 셋이 나눠 마셨지만 酒興(주흥)이 도도했다.
 
  3년 전 나이 마흔에 智異山에 들어온 그는 『아직 세 살짜리 농꾼』임을 자처했다. 『오래 전부터 산과 강과 바다를 고루 갖춘 데다 우리나라 茶문화의 시원지인 智異山 자락을 憧憬(동경), 정년퇴직을 기다릴 게 아니라 힘있을 때 나와야 한다는 판단에서 서울을 탈출했다』고 말했다.
 
  河東이라면 우리나라에서 최고급 茶의 생산지일 뿐만 아니라 질 좋은 고령토가 가장 많이 나오는 곳이다. 이곳 民窯(민요)에서 구워낸 소박한 막사발은 日本으로 건너가 日本茶道에서 제일의 名器(명기)로 숭배되는 이도차완(井戶茶碗)이 되었다.
 
  밤 11시경 술판이 끝났다. 그는 安선생이 운전하는 지프를 타고 귀가했다. 서울서 감기몸살을 앓았지만, 기분좋게 노곤했다. 李부장과 함께 기와집 방 한 칸에 들어 이불을 깔고 눕자마자 잠들어 버렸다.
 
  10월31일 오전 5시에 눈을 떴다. 창호지 바른 온돌방에서의 하룻밤은 참으로 포근했다. 걱정했던 외풍은 전혀 없었다. 그런 덕분인지 감기몸살은 씻은 듯 물러갔다. 세수하러 방을 나서다가 바로 앞 계곡 쪽에서 올라오는 사나이와 조우했다. 웃통을 벗어젖혀 살갗이 시뻘겋다. 마치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은 武松과 같은 기세다. 수인사를 나누고 보니 바로 이 집 바깥양반이다. 茶 한잔을 대접하겠다고 했다.
 
  세수 후 李부장과 함께 차실로 오르니 穀前(곡전:穀雨 前에 딴 새순으로 만든 茶) 작설차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향기가 맑고 맛도 은은하다.
 
 
  智異山은 女性의 山
 
  어제 佛日폭포에 가면서 지나쳤던 眞鑑선사 浮屠(부도:보물 제380호, 高僧의 사리나 유골을 넣고 쌓은 둥근 돌탑)와 國師庵(국사암)을 아침식사 전에 다녀오기로 했다. 쌍계사 뒷산 등산길을 350m쯤 따라가다 삼거리를 조금 지나 왼쪽으로 난 가파른 오솔길로 오르면 곧 산등성이에 자리잡은 浮屠가 모습을 드러낸다.
 
  상·중·하대로 구분된 基壇(기단) 위에 塔身部(탑신부)와 相輪部(상륜부)를 놓았다. 전체 평면이 8각으로 되어 있는, 이른바 팔각원당형의 기본에 충실한 아담한 浮屠이다. 연화받침대와 지붕의 귀꽃이 깨지고 탑신부가 본래의 것이 아니고 후에 끼워 넣은 것이 확실하다. 언젠가 도굴을 당해 사리함도 사라졌다. 이런 흠에도 불구하고 통일신라시대 浮屠의 아름다움은 완연하다.
 
  眞鑑선사 부도를 관찰한 뒤 삼거리로 돌아와 왼편으로 난 내리막길을 200m쯤 내려가니 國師庵이다. 굳이 이곳을 찾은 것은 그 특이한 山神閣(산신각)을 보기 위해서였다. 산신각은 한국 불교가 우리 고유의 仙道와 습합한 증거다.
 
  二重 계단을 올라야 산신각인데, 그 중간의 잠시 쉬어가는 평평한 시멘트 바닥에는 화분에 담긴 난초가 새겨져 있다. 無名(무명)의 미장공이 바닥을 마감질하면서 흙손으로 그냥 찍찍 그어 陰刻(음각)한 것이다. 매우 民畵的(민화적)이어서 정겹다. 불과 20~30년 전에 조성한 계단이지만, 미장공의 정성스런 마음이 보인다.
 
  산신각의 문을 열어 보니 과연 산신령의 그림이 이색적이다. 그 그림 속의 산신령은 허연 수염을 기른 할배가 아니라 「♥姑(마고)할매」였다. 그 할매가 호랑이를 타고 神兵을 거느리고 있다. 智異山이 女性의 山임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리산은 여성의 품속이다. 여기만 들어오면 아늑해질 수밖에 없다. 확실히 智異山은 마실 것과 먹을 것이 많은 肉山(육산)이다.
 
  下山하여 아침식사를 했다. 하루 2인1실 숙박요금 3만원, 항아리 두 개 분의 약주값 3만원(안주 무료), 2인 두 끼 밥값 2만원, 합계 8만원이었다. 아무래도 安京姬 선생의 얼굴을 보고 할인해 준 듯하다.
 
 
  駕洛國의 일곱 王子가 成佛한 七佛庵
 
  李昌洙씨가 또 보러 왔다. 셋이서 亞字房(아자방)으로 유명한 七佛庵(칠불암)으로 향했다. 쌍계교에서 10㎞ 거리다. 도중에 만나는 삼거리에서 義信마을로 가는 오른쪽 길을 버리고 왼편 길로 계속 올라가면 길이 끊기는 막다른 곳에 칠불암이 있다.
 
  칠불암은 한국 불교의 海洋傳來說(해양전래설)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三國遺事에는 駕洛國(가락국)의 金首露王(김수로왕)과 印度 아유타 왕국에서 배를 타고 시집을 온 許黃玉(허황옥) 사이에 10명의 왕자가 태어났다고 쓰여 있다. 그런데 전설에 의하면 넷째에서 막내까지 일곱 왕자가 許黃玉의 오빠인 長遊(장유)화상을 따라 출가했다. 일곱 왕자는 智異山에 들어와 현재 칠불암 자리에 雲上院을 짓고 정진하여 출가 6년 만인 서기 103년에 成佛했다. 이런 까닭으로 칠불암으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근자에 칠불암은 불사를 일으켜 번듯한 절집을 짓고 칠불사로 격을 높였다. 亞字房은 신라 孝恭王(혜공왕) 때 지은 것인데, 한 번 불을 때면 두 달간 따뜻한, 길이 약 8m의 二重온돌방이었다고 한다. 6·25 때 소실되어 복원되었다. 2㎞ 아래의 마을 이름이 凡旺里(범왕리)인데, 金首露王과 許黃玉이 다녀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李昌洙씨가 그의 집에서 차 한잔이라도 하고 가라고 청했다. 花開장터에서 승용차로 15분 거리라고 했다. 형제봉 아래 악양면 평사리로 달렸다. 평사리는 박경리의 대하소설 「土地」의 무대가 되는 崔參判(최참판)의 古宅이 있는 동네다. 나지막한 언덕 마을에 오르니 그 아래로 「무딤이 들」이 널찍하게 펼쳐져 있다.
 
  그는 2년 전에 대지 300평짜리 농가를 8000만원에 매입, 마당에다 감나무 등 과실수를 더 심고 한켠에는 장난감 같은 茶室까지 지어 놓았다. 다실의 上樑文(상량문)을 쳐다보니 大木 역할을 한 李昌洙와 그의 친구 이름이 붓글씨로 나란히 쓰여 있다. 차 한잔을 나눈 뒤 갈 길이 바빠 이내 일어섰다. 이날 오후에 華嚴寺(화엄사)를 방문하겠다고 사전에 통보해 두었기 때문이다.
 
 
  國寶 4개를 가진 華嚴寺
 
  華嚴寺까지 60여 리를 냅다 달렸다. 燕谷寺(연곡사)는 일단 지나쳤다. 약속시간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부처님도 식후경이다. 馬山面 청천초등학교 부근 「욕쟁이할매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산채를 중심으로 한 반찬만 20여 가지(산채정식 1인 식대 8000원)가 나왔다.
 
  점심 후 절 입구에 이르니 예전의 고즈넉한 寺下村이 아니었다. 산중에 물색없는 상가가 형성되어 요란한 간판이 빽빽하다. 곧 매표소에 이르렀다. 입장료(공원입장료+문화재 관람료) 3000원. 一柱門안쪽에까지 「智異山 프라자호텔」이 들어와 있다. 宗務所로 직행했다.
 
  그런데도 종무실장은 『약속날짜가 내일』이라며 오히려 딴전이다. 사전에 팩스도 보내고 전화통화로 확인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랬다. 그러나 최근에 國寶로 지정된 靈山會掛佛幀(영산회괘불탱)을 촬영하려면 사찰 측의 협조가 필요한 만큼 맞받지는 않았다. 우선 접근하기 쉬운 다른 국보들부터 취재하기로 했다.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소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 本寺 화엄사.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년)에 緣起祖師(연기조사)가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 후 신라 화엄의 祖宗인 義相대사가 화엄10찰의 하나로 삼으면서 重修(중수)했다. 또한 풍수지리설의 鼻祖(비조)인 道詵(도선)국사는 羅末에 이곳을 총림대도량으로 열고 개창 이래 최대 규모로 寺勢(사세)를 확장했다.
 
  임진왜란 때의 화엄사 주지 雪泓(설홍) 대사는 승병 300명과 함께 求禮의 요충지 石柱關(석주관)에서 왜군과 싸우다 모두 전사했다고 한다. 왜군은 그 보복으로 화엄사를 방화했다. 堂宇(당우)와 보물이 일시에 소진되었다.
 
  화엄사의 중창주는 碧巖(벽암) 스님. 그는 19세 때(1593년) 승병에 가담해 慈雲(자운) 스님을 따라 전공을 세우고 그 후 승병대장에 올랐다. 仁祖가 즉위하여 南漢山城을 쌓을 때는 팔도도총섭의 직책을 맡아 승병의 축성작업을 지휘했다. 그 공로로 나라로부터 都大禪師의 예우를 받았다. 이어 대사는 인조 8년(1630년)에 화엄사 중건불사를 시작하여 7년 만에 대웅전 중창 등의 대역사를 끝냈다. 이어 「禪宗 대가람」이란 敎旨를 받았다. 현재 화엄사는 국보 네 점과 보물 다섯 점을 보유하고 있다.
 
 
  國寶 67호 覺皇殿의 위풍당당
 
  화엄사에선 대웅전(보물 제299호)보다 국보 제67호 覺皇殿(각황전)이 훨씬 더 웅장하다. 한국 사찰 건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肅宗 28년(1702년)에 淑嬪(숙빈) 崔씨의 시주로 건립되었다. 淑嬪 崔씨의 소생이 재위 기간(1721~1724년)이 짧았던 景宗에 이어 왕위에 올랐던 英祖다. 임금과 그 母后(모후)의 후원을 받았던 불전인 만큼 위풍당당하다.
 
  각황전을 받들고 있는 석축은 통일신라시대에 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그 자리에는 丈六殿(장륙전)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탔다. 현재의 각황전은 정면 일곱 칸, 측면 다섯 칸을 팔작지붕으로 덮은 2층 다포식 건물이다. 복잡한 拱包(공포:처마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 위에 짜 맞추어서 댄 닭벼슬 모양의 나무쪽들)가 처마 밑에 꽉 붙어서 매우 조형적이다. 기둥머리에 昌枋(창방:장여 밑에 다는 넓적한 도리)을 끼고 그 위에 平枋(평방:기둥 위에 수평으로 올려 놓은 나무)을 둘렀다. 조선 목조건물의 精髓(정수)로 꼽힌다. 울긋불긋한 단청이 퇴색되어 오히려 고상한 모습이다.
 
  내부는 2층이 아닌 통층으로 확 트였는데, 천장의 무늬가 아늑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高柱를 끼고 있는 井字(정자) 천장의 주변이 굽어 경사진 것이 특색이다. 중앙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아미타불과 다보여래가 좌정해 있다. 三尊佛 사이와 좌우에는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음보살, 지적보살을 挾侍佛(협시불)로 모셨다.
 
  내부는 보물 제1040호 華嚴石經(화엄석경)으로 莊嚴되어 있었다. 임진왜란 때의 화재로 크게 훼손되어 각황전 내부 중앙에 길게 설치된 불단 밑에 보관되어 왔다. 당초엔 그 파편이 수만 점에 이르렀는데, 현재는 1500여 점만 남아 있다. 이제는 그 전체를 탁본하고 대웅전 옆 靈殿(영전)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이 石經은 엷은 청색의 납석에다 華嚴經을 새긴 것이다. 鳳城誌(봉성지)에는 「義相대사가 화엄10찰을 세우면서 화엄사에 3층으로 된 장륙전을 건립하고 사방 벽을 華嚴經을 새긴 돌판으로 둘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國寶 12호 화엄사 覺皇殿 앞 石燈_견실함과 화려함의 하모니
 
  화엄사의 堂宇로는 覺皇殿 이외에도 圓通殿(원통전)이 아담해서 좋다. 원통전은 觀音殿(관음전)과 같은 말이다. 관음전에는 관음보살을 모신다. 千手千眼(천수천안)을 가진 觀音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이라고 부르기만 해도 중생의 모든 어려움을 구제하고 소원을 성취시켜 주는 大慈大悲(대자대비)한 보살이다. 화엄사의 원통전은 각황전과 대웅전 사이에서 남향하고 있다. 내부에는 조선시대에 그린 飛天像(비천상)의 벽화가 있다.
 
  覺皇殿 앞 石燈(석등·국보 제12호)은 9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인데, 전체 높이 6.4m로서 세계 최대이다. 渤海(발해)의 故土에 남아 있는 石燈도 비슷한 규모이긴 하지만 예술성에서 각황전 앞 石燈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각황전 앞 석등은 전체적으로 신라 石燈의 기본형인 팔각형을 따르고 있으나 火舍石(화사석)을 떠받치는 竿柱石(간주석)만은 장구 모양(鼓腹形)의 異形(이형)으로 섬세한 느낌을 준다. 비교적 투박해 보이는 상대석의 8엽 연꽃잎에도 화려한 무늬를 넣은 반면 팔각의 화사석에는 火窓(화창)을 네 곳에 내었을 뿐 장식이 없어 견실하게 보인다. 지붕돌(屋蓋石) 추녀 위에는 큼직한 귀꽃을 세웠다. 지붕돌은 얇게 만들고 처마 밑은 수평인데 한껏 솟은 귀꽃과 어울려 날아갈 듯하다.
 
  上輪部는 사다리꼴의 露盤(노반), 팔각 仰花(앙화), 寶輪(보륜)과 寶蓋(보개)를 차례로 얹고 정상에 연화가 장식된 寶珠(보주)로 마감했다. 八角 下臺石 각 면에는 짝을 이룬 眼像(안상)이 조각되었다. 묵직한 상층부를 받치는 간주석 이하가 빈약하여 불안한 느낌을 주나 눈에 크게 거슬리지는 않는다. 단단한 화강석에 섬세하게 다듬은 예술성이 돋보인다.
 
  오후 3시경 화엄사 승려 두 명이 각황전 앞 석등에 사다리를 기대어 놓고 이끼 제거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워낙 높이가 높이인지라 지붕돌까지는 빗자루가 닿지도 않았다. 결국 제거 작업을 중도에서 포기하는 것 같았다. 신라시대의 석등 중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이 國寶를 좀 소중하게 다뤄 줬으면 좋겠다는 안타까움을 지워 버릴 수 없었다.
 
 
  기발한 아이디어_國寶 35호 4獅子 3층석탑
 
  覺皇殿을 왼쪽으로 돌아 108계단을 오르면 孝臺(효대)라 불리는 언덕이 있고, 그 위에 4獅子 3층석탑(국보 제35호)이라 불리는 걸작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석탑 가운데 이 석탑만큼 기발한 아이디어를 종횡무진 구사한 것은 없다.
 
  4사자 3층석탑은 상층 기단에 돌사자 네 마리를 각 모서리에 배치했기 때문에 생긴 탑명이다. 통일신라시대 네 사자탑으로는 유일한 것이며 다보탑과 함께 한국 異形석탑의 쌍벽을 이룬다.
 
  불교 조형물에서는 원래 사자를 珍重(진중)하게 대접한다. 사자가 백수의 왕이라는 관념에서 如來의 위상에 비유한 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하층 基壇 각 面石에는 古代양식에 따른 3구씩의 안상을 조각하여 그 안에 天人像(천인상)을 돋을새김(陽刻)했다. 天人像은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 춤을 추고 꽃을 공양하는 모습 등 다양하다.
 
  상층 基壇에는 귀기둥(隅柱)을 대신하여 蓮花臺에 꿇어앉은 암수 두 마리씩의 사자를 배치하고 그 머리 위에도 연화대를 얹어 甲石을 받치게 했다. 네 사자의 중앙에는 擦柱(찰주:가운데 기둥) 대신 합장한 스님의 立像을 세웠고, 甲石 이면 중앙에는 연꽃을 조각하여 天蓋(천개)로 삼는 등 다양성을 갖추게 했다.
 
  1층 塔身의 정면에는 문짝 모양을 새겼고 문짝 좌우에 仁王像 2구를 陽刻했다. 양 측면에는 四天王像 2구씩, 뒷면에는 보살 2구를 양각했는데, 그 모습이 볼수록 장엄하다. 반면 문짝에 달린 조그마한 문고리의 돋을새김은 볼수록 앙증맞아 미소를 짓게 한다.
 
  맨 꼭대기에는 짧은 相輪과 둥근 寶柱(보주)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전체 높이 5.5m.
 
  탑 조성에 있어 착상이 기발하고 조각이 섬세한 점 등은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여러 개의 사자탑 가운데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손꼽게 한다. 造成 연대는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돌을 다루는 솜씨에 있어서는 통일신라시대가 압권이며 그만큼 화려하다. 탑 전체에 석재가 노쇠하여 생기는 白花현상이 번지고 있어 특단의 대책이 시급하다.
 
  흔히 한국을 「석탑의 나라」라고 부른다. 중국에는 塼塔(전탑:벽돌탑), 일본에는 木塔의 수가 압도적이다. 한국에는 품질이 우수한 화강암이 많다. 특히 智異山 계곡에는 지천으로 많다. 오늘날 남아 있는 우리나라 유적 유물 가운데 石造 미술품이 다른 어느 것보다 많은 까닭이다. 4사자 3층석탑의 石材도 화강석이다.
 
  4사자 3층석탑 앞에 있는 石燈 역시 특이한 모습이다. 길쭉한 직사각형 拜禮石(배례석)을 놓고 화사석을 받치는 竿柱石(간주석:3개의 기둥) 안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공양하는 人物像을 배치했다. 이 人物像은 한 손에 供養器(공양기)를 들고 4사자 3층석탑에 세워진 스님像을 정면에서 우러러보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石燈 속의 人物像은 화엄사를 창건한 緣起祖師라 하고, 4사자 3층석탑의 스님像은 祖師의 어머니라고 한다. 효심이 깊은 祖師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이런 작품을 축조했다는 것이다. 孝臺라는 이름도 이런 전설에 따라 후세에 명명된 것이다. 다음은 고려 文宗의 넷째 왕자로서 우리나라 天台宗(천태종)의 宗祖인 大覺國師 義天(대각국사 의천)이 읊은 「孝臺」.
 
  적멸당 앞은 경색도 빼어나고
 
  길상봉 위에는 한 점 티끌도 끊겼네.
 
  온종일 서성이며 지난 일을 생각하니,
 
  저문날 가을바람 효대를 감도네.
 
  (寂滅堂前多勝景, 吉祥峰絶纖埃.
 
  彷徨盡日思前事, 薄暮悲風起孝臺)
 
 
  국보 제301호 靈山會掛佛幀의 세련미
 
  孝臺에서 내려와 다시 宗務所로 향했다. 종무소 건너편에는 大覺國師의 孝臺詩碑(효대시비)와 碧巖國一都大禪師碑(벽암국일도대선사비)가 세워져 있다. 잠시 발길을 멈추고 두 高僧의 행적을 더듬었다. 이어 종무소의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종무실장을 만나 국보 제301호 靈山會掛佛幀(영산회괘불탱)의 拜觀을 요청했다. 원래 覺皇殿을 莊嚴하던 것인데, 국보 지정 이후 깊숙한 곳에 보존 중이라고 한다.
 
  靈山會(영산회)란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야외 법회, 掛佛幀(괘불탱)은 절에서 야외법회를 할 때 내어 거는 걸개그림을 말한다. 종무실장은 국보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일반인에 대한 공개를 사절하고 있다면서 그 대신에 영산회괘불탱이 담긴 佛畵帖(불화첩) 한 권을 내놓았다.
 
  영산회괘불탱에는 석가모니불과 문수보살·보현보살을 중심으로 사천왕과 10大 제자, 2구의 分身佛, 十方諸佛 등이 그려 있다. 설명문에 따르면 조선 孝宗 4년(1653년)에 제작되었고, 가로 7.76m, 세로 11.95m의 크기다.
 
  높다랗게 마련된 연꽃 의자 위의 本尊佛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키 모양의 光背(광배)를 하여 좌우 挾侍佛(협시불)에 옹위되어 있다. 3尊佛 중심이긴 하지만, 하단부에 표현된 사천왕상 2구(동방의 持國天王과 서방의 廣目天王)가 너무 큼직하여 마치 5尊像처럼 구성되었다.
 
  상단부 좌우에 그려진 다른 사천왕 2구(남방의 增長天王과 북방의 多聞天王)도 하단부의 사천왕 2구처럼 예외적으로 크다. 탱화에서는 각 像의 비중에 따라 크기를 달리하고 있는 만큼 이색적이다. 아마 탱화 네 모서리의 허전함을 지켜주려는 안배인 것 같다.
 
  각 像들은 균형 잡힌 모습으로 둥근 얼굴에 어깨 또한 동그스름하게 표현했다. 전체적으로 부드럽다. 섬세하고 치밀한 붓 끝은 세련미를 더하고 있다. 설명문에는 「균형 잡힌 형태, 치밀하게 장식된 꽃무늬, 밝은 색채 등은 17세기 중엽의 佛畵(불화)에서 보이는 양식적 특징이며, 당대를 대표하는 걸작이다」라고 쓰여 있다.
 
  李부장은 영산회괘불탱이 담긴 佛畵帖을 종무소 바깥 마당으로 들고 나가 햇빛 아래에서 촬영했다. 촬영 후 화엄사 경내를 빠져나와 18번 국도와 19번 국도를 타고 구례군 산동면 내산리에 있는 지리산온천지구로 달렸다. 22.4㎞, 승용차로 30분 거리. 숙박업소인 노고단관광온천(061-783-0161)에 짐을 풀었다. 숙박요금 2인 1실 5만원.
 
 
  智異山 자락엔 「仙女」가 많다
 
  좀 비싸다 싶어 흥정을 벌였더니 지하 1층에 있는 게르마늄 온천 대중탕의 이용권 2장(1장에 5000원)을 무료로 서비스했다. 온천물에 몸을 담그니 간밤에 약술에 취해 씻지도 않고 잠든 탓도 있어 몹시 개운했다.
 
  목욕 후 구내 2층 한식당으로 올라가 버섯전골 2인분(2만원)을 주문하면서 예절바른 젊은 여주인을 흘끗 보니 훤칠한 미인이다. 山紫水明(산자수명)한 智異山에 오면 이렇게 仙女(선녀)를 자주 만나는가 보다.
 
  저녁 후 따끈한 온돌방에 드니 TV에선 프로야구 코리안 시리즈가 신나게 방영되고 있었지만, 감기는 눈꺼풀을 뜰 수가 없었다.
 
  11월1일 새벽 4시에 눈을 떴다. 옆에서 숙면 중인 李부장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가만히 욕조에 물을 받아 목욕을 하고 취재자료를 챙겨 메모도 했다. 아침 7시에는 李부장과 구내 한식당에 들러 재첩국에다 밥 한 그릇(1인당 6000원)을 말아 먹고 숙소를 나섰다. 오늘은 피아골 연곡사-천은사-성삼재-달궁-뱀사골-남원 실상사-백장암의 코스를 강행할 터이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