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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寶紀行(32) - 國寶 제290호: 通度寺 대웅전 및 金剛戒壇

야생초요 2006. 7. 3. 13:12
國寶紀行(32) - 國寶 제290호: 通度寺 대웅전 및 金剛戒壇
 
大雄殿에 佛像이 없는 양산 通度寺, 釋迦의 舍利 모셔 佛寶사찰로 군림
 
글 : 鄭淳台 月刊朝鮮 편집위원〈st-jung@chosun.com〉
사진 : 趙明東 前 경향신문 사진부장〈chj011@hanmail.net〉

석가의 사리가 어떻게 新羅에…
<국보 제290호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

  通度寺(통도사)는 「석가모니의 眞身舍利(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는 절」로 유명하다. 그래서 「佛寶(불보)사찰」로 불린다. 기록에 따르면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서기 643년 신라의 慈藏律師(자장율사)가 唐(당)나라로부터 귀국할 때 모셔 왔다고 한다.
 
  자장율사가 어디서 누구로부터 「부처님의 사리」를 얻어 왔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通度寺舍利袈裟事蹟略錄(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자장이 당나라 終南山(종남산) 雲際寺(운제사)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이다. 문수보살이 승려로 화신하여 자장에게 袈裟(가사) 한 벌과 眞身舍利(진신사리) 100개, 그리고 頭骨(두골: 머리뼈)·持節(지절: 손가락뼈)·염주·경전 등을 주면서 말했다.
 
  『이것은 내 스승 釋迦(석가)께서 친히 입으셨던 가사이고, 또 이 사리들은 부처님의 진신사리이며, 이 뼈는 부처님의 머리뼈와 손가락뼈이다』>
 
  종남산이라면 唐나라의 수도였던 長安(지금의 西安)의 남방을 지켜주는 鎭山이며 중국 불교의 聖地(성지)이다. 필자는 10여 년 前 종남산에 가서 운제사의 옛터를 답사한 적이 있다. 운제사가 있던 자리에는 黨고위간부 등 상류층의 자제들이 다니는(당시 1년간의 학비가 韓貨 200만원을 웃돌았다) 「博迪學校(박적학교)」라는 초·중등 9년 과정의 사립학교가 들어서 있었다.
 
  印度(인도)에서 입적한 후 11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석가모니의 사리를 新羅(신라) 승려가 중국땅에서 구해 귀국했다는 기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俗人으로서는 헤아리기 어려운 신앙상의 문제이다. 그런데도 필자는 통도사를 찾을 때마다 진신사리에 얽힌 기록과 관련하여 끝없는 호기심으로 迷妄(미망)에 휩싸이곤 한다.
 
  경부고속도로 통도사 IC를 빠져나오면 통도사를 감싸안은 靈鷲山(영취산)과 마주한다. 여기서 지방도로를 따라 2km 西進하면 바로 통도사 입구이다. 영취산이라면 부처님 在世時 마가다(Magadha)國 王舍城(왕사성) 동북쪽에 있던 기사굴산을 漢譯(한역)한 이름이다. 석가모니께서 후반 생애의 대부분을 기사굴산에서 지내면서 불법을 說(설)했던 만큼 그곳은 당연히 불교 최고의 聖地다.
 
 
 
 
 
 
 
 
  戒壇을 쌓고 사리와 가사 봉안
 
  그렇다면 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에 있는 통도사 뒷산의 이름이 왜 영취산인 것일까.
 
  <그대(자장)는 末世에 계율을 지키는 사문이 될 것이므로 내(문수보살)가 이것들(진신사리 等)을 그대에게 주노라. 그대의 나라 남쪽 鷲捿山(취서산) 기슭에 毒龍(독룡)이 거처하는 神池(신지)가 있는데, 거기에 사는 용들이 毒害(독해)를 품어서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니 그대는 그 용이 사는 연못에 戒壇(계단)을 쌓고 이 佛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면 三災(삼재: 물·불·바람으로 인한 재앙)를 면하게 되어 만대에 이르도록 멸하지 않고 불법이 오랫동안 머물러 天龍(천룡)이 그곳을 옹호하게 되느니라>
 
  위의 기록을 보면 통도사를 품고 있는 영취산의 본래 이름은 취서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양산의 영취산은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포근하고, 피곤한 衆生이면 누구라도 받아줄 듯한 넉넉한 모습이다. 印度의 영취산도 바로 이런 모습이라고 한다.
 
 
 
 
 
 
  대웅전 내부에 佛像이 없는 까닭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는 경내가 전국에서 가장 넓은 절이다. 절 이름을 通度寺라고 지은 까닭은 「전국의 모든 승려가 이곳에서 득도한다(爲僧者通而度之)」, 「만법을 통달하여 중생을 제도한다(通萬法度衆生)」는 뜻이라고 한다.
 
  매표소를 지나면 바로 소나무 숲길, 가파르지 않아 좋다. 그 숲길을 따라 길게 뻗은 계곡. 겨울의 찬 바람소리와 어울린 계곡의 물소리가 상큼하다. 돌다리 삼성반월교를 지나면 「靈鷲山通度寺」라고 쓰인 扁額(편액)이 걸린 一住門(일주문)과 만난다. 書畵(서화)의 大家 흥선대원군(高宗의 生父) 李昰應(이하응)의 글씨다.
 
  얼마쯤 걸었는지 의식하지도 않았는데 이내 제2의 관문인 天王門이다. 불자들을 수호하는 四天王이 동서남북 4방을 지키고 있다. 이제 不二門으로 다가선다.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으로 解脫門(해탈문)이라고도 한다. 不二門에 들어서면 벌써 통도사의 중심건물인 대웅전의 자태가 드러난다.
 
  건물 상부의 형태가 팔작지붕의 복합형인 丁자형의 특이한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정면격인 남쪽에는 金剛戒壇(금강계단), 동쪽은 大雄殿(대웅전), 서쪽은 大方廣殿(대방광전), 북쪽은 寂滅寶宮(적멸보궁)이란 편액을 달고 있다.
 
  건물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5칸으로 오히려 아담하다. 공포(지붕의 무게를 받치게 하려고 기둥머리 같은 데에 짜맞추어 댄 닭벼슬 모양의 나무쪽들)는 다포식(공포를 기둥 위에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꾸며놓은 화려한 양식)이다.
 
  동쪽과 남쪽에 대웅전으로 오르는 돌 층층다리를 냈다. 소맷돌에 새긴 연화문이 優美(우미)하다. 대웅전 내부 천장은 층급을 두어 중심부를 높게 처리했고, 바닥엔 우물마루를 깔았다.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仁祖 23년(1643) 때 友雲 스님에 의해 중건된 것이다. 건물의 基壇(기단)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웅전 내부에는 佛壇(불단)만 있을 뿐 불상은 없다. 건물 바로 북쪽에 있는 금강계단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셔 두었기 때문이다.
 
  佛家에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보다 더 귀중한 것은 있을 수 없다. 석가모니는 스스로의 위상을 「天上天下唯我獨尊(천상천하유아독존)」임을 선언한 바 있지 않았던가.
 
 
 
 
 
 
  金剛戒壇―通度寺의 寺格 높이는 결정적 구조물
 
  금강계단이야말로 통도사의 寺格(사격)을 높여 주는 결정적인 구조물인 것이다.
 
  <자장은 귀국하여 善德女王(선덕여왕)과 함께 취서산을 찾아서 독룡이 산다는 못에 이르러 용들을 위해 설법을 하였다. 그런 뒤 자장은 못을 메우고 그 위에 계단을 쌓았다>
 
  위의 인용문에 기록된 戒壇이 바로 금강계단이다. 「금강」이란 말은 금강석, 곧 다이아몬드다. 금강석은 그 어떤 물건이라도 깨뜨릴 수 있는 강인한 광석이다. 646년 금강계단을 쌓은 자장율사는 이곳에서 승려들을 득도시켰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장은 어떤 인물인가. 여왕과 함께 절터를 보러 다녔다면 결코 평범한 신분의 승려는 아니었을 터이다.
 
  자장은 탄생연대가 명확하지 않지만 元曉(원효)와 義相(의상)보다 약간 앞선 시대의 승려였다. 三國遺事(삼국유사)에 따르면 그는 眞骨(진골) 출신의 소판(신라 16관등 가운데 3위) 金武林(김무림)의 아들로서 속명은 善宗(선종)이다.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불교에 귀의했다. 선덕여왕이 그의 현명함을 듣고 臺輔(대보)로 임명하여 여러 번 불렀으나 그는 거절했다. 드디어 왕이 칙사를 보내 『취임하지 않으면 목을 베리라』고 위협했지만 그의 태도는 단호했다.
 
  『나는 단 하루를 살더라도 戒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破戒(파계)를 하고 100년 동안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수도에만 힘쓰던 자장은 선덕여왕 5년(636) 제자 實(실) 등 10여 명을 데리고 당나라에 들어가 불경을 깊이 연구하고 8년 후에 藏經(장경)과 佛具(불구)를 가지고 귀국, 신라불교의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분황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궁중과 황룡사에 大乘論(대승론)·菩薩戒本(보살계본) 등을 강론했고, 大國統(대국통)이 되어 승려의 규범과 승통의 전부를 주관했다. 그에게 律師(율사)라는 칭호가 붙은 것은 그가 계율의 사범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佛制(불제)에 의해 僧尼(승니)의 잘못을 검찰하는 신라불교의 「교장선생」이었던 것이다.
 
 
 
  금강계단은 위아래의 넓은 2중 네모 基壇으로 조성되어 있다. 基壇의 크기는 아랫단 한 변의 길이가 약 9.8m이고, 윗단은 약 7m이다. 높이는 상하 각각 40cm, 82cm이다. 석단의 네 귀퉁이에는 사천왕 입상을 배치했다.
 
  석단의 외곽에는 한 변이 약 13.7m인 돌 울타리를 둘렀고, 戒壇 정면에는 石門을 두었다. 戒壇의 아랫단 面石에는 총 32구의 불보살상을, 윗단에는 飛天像(비천상)을 새겼다.
 
  戒壇의 상층 중심부에는 직경 150cm 규모의 伏蓮(복련)과 仰蓮(앙련)의 받침대석을 넣고, 그 위에 石鐘(석종) 모습의 부도가 안치되었다. 부도의 표면에는 飛天像(비천상) 등을 새겼고, 정면인 남쪽에는 구름 속에 寶盒(보합)의 향로를 조각했다.
 
 
 
 
  호기심 많은 사람들의 훔쳐보기
 
  금강계단은 처음 축조된 이후 일곱 번에 걸쳐 수리했고, 그때마다 모습이 조금씩 변하여 지금은 원래의 것과 많은 차이가 있다고 한다. 이렇게 수리를 거듭했던 것은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석종부도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들춰보는 일이 잦았던 탓이기도 하다.
 
  三國遺事에 의하면 고려 고종 22년(1235) 상장군 金利生과 시랑 庾碩(유석)에 의해 금강계단의 석종부도가 들려졌다. 문헌상 최초의 기록이다.
 
  <상장군 金公 利生과 庾侍郞 碩이 왕명을 받아 江東을 지휘할 때 符節(부절: 임금이 내린 證票)을 가지고 절에 와서 돌 뚜껑을 들어 禮(예)를 드리고자 하니, 승려가 前例(전례)를 들어 어렵다고 하였다. 金利生과 庾碩이 군사를 시켜 굳이 돌 뚜껑을 들게 하였다…. 서로 돌려보며 禮敬(예경)하였는데, 사리함 속의 유리 통이 조금 상해 금간 곳이 있었다. 이에 庾公이 水晶函(수정함) 하나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마침 기부하여 함께 간수해 두게 하고 그 사실을 기록하였으니 그때는 강화로 천도한 지 4년째인 을미년(1235)이었다>
 
  금강계단은 이 이후에도 倭寇(왜구)나 明나라 칙사 등의 횡포에 의해 여러 차례 수난을 당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도 훼손의 위기를 겪었다. 寺蹟記(사적기)에 따르면 영남지방이 왜병에게 점령되자 의승장 惟政(유정)은 통도사의 진신사리를 大小 두 개의 함에 나누어 담아 금강산에 있던 그의 스승 休靜(휴정)에게 보냈다.
 
  이에 休靜은 『영남이 침해를 당하고 있으니 이곳 역시 안전한 장소는 못 된다. 영취산은 뛰어난 장소이고 문수보살이 점지한 곳이다. 戒(계)를 지키지 않는 자라면 그에게는 오직 금과 보배만이 관심의 대상일 것이고 信寶(신보)가 목적은 아닐 것이니 옛날 戒壇을 수리하여 안치하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함 하나를 통도사로 되돌려 보내고 나머지 함 하나만 태백산 葛盤地(갈반지)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俗界와 仙界의 경계선
 
  대웅전 뒤편에는 통도사의 창건설화와 얽힌 九龍池(구룡지)라는 네댓 평짜리 연못이 있다. 俗傳(속전)에 따르면 자장율사에게 항복한 독룡은 모두 아홉 마리였는데, 그중 한 마리가 굳이 이곳에 남아 戒壇을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자장은 그 청을 받아들여 연못 한 귀퉁이를 메우지 않고 남겨 그 용이 머물도록 허락했다고 한다. 지금의 九龍池가 바로 그것이다. 지금 이 작은 연못 속에는 사람들이 던진 동전들이 많이 가라앉아 있는데, 동전이 부식하면서 내뿜는 독성 때문에 이곳에 사는 물고기들이 수난을 당하고 있다. 아무리 심한 가뭄이 와도 이 연못의 수량은 전혀 줄어들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일대가 원래 습지대였음을 알 수 있다.
 
  오후 6시, 범종각에서 북소리와 종소리가 함께 울러퍼졌다. 이제 俗人들은 절 밖으로 나가야 할 시간이다. 사진작가로서 예총 양산市 지부장을 맡고 있는 김보안 양산여중 교장 등 知人들이 통도사 매표소 앞 경기식당에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기식당은 산채정식을 잘하기로 꽤 이름난 음식점인데, 반찬 가운데 곤달비(취나물의 일종) 장아찌가 별미였다.
 
  통도사의 寺下村(사하촌)도 러브호텔 등이 들어서 꽤 울긋불긋하다. 천리길을 달려와 영취산 자락을 헤집고 다닌데다 저녁밥에 곁들인 반주 몇 잔의 효력으로 나른하여 일찌감치 사하촌의 여관에 들었다.
 
 
 
  숙면의 1박을 하고 이른 아침 상큼하게 일어나 다시 통도사로 올라갔다. 俗界와 仙界는 통도사 정문을 경계로 확연하게 구분된다. 아침안개를 머금은 숲길은 眞景山水畵(진경산수화), 바로 그것이다. 사진작가 趙明東씨가 대웅전 내부의 촬영을 끝내자 통도사 포교국장 선오 스님이 금강계단 石門의 열쇠를 따고 우리 일행을 안내했다. 석종부도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앉은 殿閣의 지붕들도 이제는 아침안개를 조금씩 조금씩 털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