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趙明東씨와 필자는 一然 스님이 「三國遺事(삼국유사)」를 저술한 麟角寺(인각사) 답사를 끝내고 갑령을 넘는 28번 국도를 따라 팔공산 북쪽 기슭의 마을 新寧(신녕)으로 내려왔다. 新寧이라면 6·25 전쟁 당시 국군 제6사단이 敵 8사단과 사투를 벌였던 부산 교두보의 최일선이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북상로로 삼았던 군사·교통의 요충이다.
新寧 네거리에 이르면 신원리로 들어가는 왼쪽으로 마을길이 나온다. 이 좁은 길을 따라 10리 남짓 들어가면 居祖庵(거조암)의 주차장에 도착한다. 영천시 청통면 신원리 622번지 소재 居祖庵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의 本山(본산)인 銀海寺(은해사)의 山內암자에 불과한 위상이지만, 창건연대가 銀海寺보다 오히려 빠르다.
居祖庵은 통일신라 효성왕 2년(738) 元曉(원효) 대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경덕왕(742~764) 때 왕명으로 창건되었다는 설로 엇갈려 있는 절이다. 창건 이후 천년의 세월 동안, 절 이름은 居祖庵이 아니라 居祖寺(거조사)였다.
현재의 본산인 銀海寺의 본래 이름은 海眼寺(해안사)로서 창건연대가 신라 헌덕왕 원년(809)이다. 조선왕조 때 仁宗의 胎室(태실)로 봉해짐으로써 寺格(사격)이 높아지고 이름도 銀海寺로 바뀌었다.
필자 일행이 居祖庵에 도착 직후, 부산지역 여성 불교 신도 수백 명이 10여대의 관광버스를 나눠 타고 뒤따라와 넓지도 않은 경내를 대번에 꽉 메웠다. 일단, 단체 참배객들에게 앞을 양보하고 좀 기다리기로 했다.
居祖庵은 普照國師(보조국사) 知訥(지눌: 1158~1210)이 定慧結社(정혜결사)를 시작한 곳이다. 그렇다면 정혜결사란 무엇일까.
마침, 居祖庵 앞마당에서 현장 답사를 온 불교철학자 姜健基(강건기) 전북大 교수를 우연히 만난 김에 평소의 궁금증을 풀어 보기로 했다.







『고려 말엽, 불교사찰은 山川을 경계로 삼을 만큼 대토지를 소유하는 등의 특권을 누리는 가운데 禪宗(선종)과 敎宗(교종)으로 나뉘어 치열한 세력다툼을 벌였습니다. 정혜결사는 분열과 부패로 추락하던 당시 불교의 위상을 바로 세우기 위한 두 종파의 통합 및 維新(유신)운동이었습니다. 1188년 봄, 居祖寺의 주지 得才(득재)는 지눌을 이곳으로 모셔와 정혜결사 운동의 횃불을 들게 했던 것입니다』
신라 말부터 지방호족들의 비호 아래 전파되기 시작한 禪(선)불교는 기존의 敎學的(교학적) 종파들과 마찰을 일으키는 가운데서도 급성장했다. 그러나 禪敎(선교)의 대립은 고려 불교의 병폐로 떠올랐다. 더욱이 권문세가들은 사찰을 사유화하다시피 하여 토지와 재산의 증식 수단으로 삼았고, 영향력 있는 사원들은 많은 노비를 두고 귀족적인 생활에 탐닉했다.
이런 물질적 번영을 누린 고려 불교는 사상적으로 볼 때 신라불교가 보였던 역동성과 창의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드디어 1182년, 아직 無名의 청년 스님이었던 지눌은 개경 普濟寺(보제사)에서 동료들과 함께 定慧(정혜), 즉 禪定(선정)과 知慧(지혜)를 고르게 닦고 스스로 힘든 노동을 하는 한편으로 동료들과 함께 盟文(맹문)을 지어 타락한 불교의 維新(유신)을 기약했다.

─지눌 스님의 「禪敎一元論(선교일원론)」은 어떤 것입니까.
『지눌 스님은 居祖寺에 오시기 전, 예천 下柯山(하가산) 普門寺(보문사)에서 선종과 교종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근거를 찾기 위해 3년간 대장경을 두루 열람했습니다. 스님은 華嚴經(화엄경)을 읽다가 「敎는 부처님의 말씀이고, 禪은 부처님의 마음」이라는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표현이 말씀(經典)이고, 말씀의 근거가 곧 마음」인 만큼 「마음과 말씀이 둘이 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지눌은 또한 「헛되이 침묵만 지키는 멍청이 선(痴禪·치선)」과 「단지 글만 파고드는 미치광이 지혜(狂慧·광혜)」의 양 극단을 피해야 한다면서 禪과 敎의 균형 있는 공부를 주장했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불교 최대 종단인 조계종에서 지눌 스님을 開祖(개조)로 받들고 있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지눌 스님은 정혜결사운동을 통해 우리 불교를 正法불교로 바로잡으면서, 禪定(선정)과 知慧를 함께 닦는 韓國禪(한국선)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에서는 頓悟(돈오: 불교의 참뜻을 문득 깨달음)와 漸修(점수: 오랜 수행을 거쳐 득도함)를 둘로 보지 않고, 아울러 중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脫중국적인 전통은 지눌 스님의 정혜결사 운동에 의해 비롯된 것입니다』


居祖庵의 정혜결사는 1200년에 順天의 松廣寺(송광사)로 옮겨 갔다. 참여 僧徒(승도)가 운집하여 좀더 넓은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금 居祖庵은 영산전과 요사 두 채, 그리고 작은 3층석탑이 들어서 있는 정도의 단출한 모습인데, 그때도 그런 규모였던 듯하다.
수백 명의 여성 참배객들이 썰물처럼 한꺼번에 빠져나간 居祖庵은 곧 山內암자의 제 모습을 되찾았다. 국보 제14호 居祖庵 영산전은 깨끗한 선비의 집과 같이 그윽한 품격을 느끼게 한다.
영산전이란 석가여래가 靈鷲山(영취산)에서 法華經(법화경)을 講(강)하는 장면을 그린 「靈山會相圖(영산회상도)」를 모시기 위해 지은 법당을 말한다.
居祖庵 영산전은 참으로 정갈하다. 처음부터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집이어서 이런 느낌을 받게 된 것 같다. 얼핏보면 經板(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창고의 모습이다. 초석을 막돌로 허튼층 쌓기를 한 기단 위에 정면 7칸이나 되는 길다란 집이다(측면 3칸). 기둥의 모습은 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배흘림(엔타시스)이다. 맞배지붕(책을 펼쳐 엎어 놓은 듯한 모습)의 주심포(기둥 위에만 공포를 짜 올린 양식) 건물이다.
3층석탑을 지나 간단한 돌계단을 오르면 바로 영산전의 출입문이다. 영산전 내부 천장은 架構(가구)가 전혀 없는 연등천장이다. 여느 법당처럼 석가여래 등의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지만, 영산전에서 유별나게 눈길을 끄는 것은 내부를 꽉 메우고 있는 500 羅漢像(나한상)이다. 그 모두의 표정이나 자세가 제각기 달라 매우 흥미롭다. 이곳 인동의 주민들은 居祖庵을 「오백 나한사」라고 부르고 있다.
羅漢(나한)이란 석가여래가 열반한 후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이 세상의 불법을 수호하는 가섭존자 등 500여 명의 聖者(성자)이다.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시대에는 스님들에 대한 존경심의 자연스런 표출로 羅漢에 대한 신앙이 상당히 유행했다. 이곳 羅漢像의 조각 형태는 일정한 규범 없이 고승들의 개성적인 모습을 자유롭게 표현한 것이다.
현재의 영산전은 해체수리 때 발견된 墨書銘(묵서명)에 의해 고려 말기인 우왕 원년(1375)에 지은 건물로 확인되었다.
팔공산까지 내려온 김에 백흥암 극락전의 수미단(보물 제486호)과 桐華寺(동화사) 입구 마애불상(보물 제243호)을 꼭 들러보고 싶었으나 이미 날이 저물었다. 답사를 하루 더 하기로 작심하고 팔공산 언저리의 여관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嶺南第一關(영남제일관)」인 架山山城(가산산성)의 南門을 둘러보고 곧장 동화사(대구시 동구 도학동 산 124-1)로 직행했다. 팔공산 순환도로에서 갈라져 입구로 접어들면 「八公山 桐華寺 鳳凰門(팔공산 동화사 봉황문)」이란 편액을 건 일주문이 보인다. 수년 전, 절의 서쪽 옆구리에 큰 문을 내는 바람에 이제 봉황문은 「舊山門(구산문)」이라고 불린다.
봉황문 앞쪽의 암벽에 돋을새김한 불상이 보인다. 이것이 보물 제243호 동화사 입구 마애불상이다. 벼랑을 등지고 드높이 앉아 아래로 굽어보는 이 마애불은 매우 은은한 느낌을 준다.
몸체는 높이 106cm로 크지 않다. 복스런 얼굴에 웃음짓는 표정이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에 대고 아래를 가르키고, 왼손은 위로 하여 배꼽 앞에 놓은 降魔觸地印(항마촉지인)이다. 옷은 양쪽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이다. 머리와 몸 뒤의 光背(광배)는 두 줄의 선으로 표현하였고, 그 가장자리를 불꽃무늬로 정교하게 장식했다.
신체비례가 알맞고, 조각기법이 세련되었다. 통일신라 9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동화사 경내를 둘러보고 백흥암으로 향했다. 백흥암은 銀海寺의 山內암자이다. 영천시 청룡면 치일리 네거리에서 팔공산 쪽으로 3km 남짓 들어가면 銀海寺다. 銀海寺 옆으로 난 산길을 따라 2.5km쯤 올라가면 백흥암이다.
백흥암 입구에는 비구니 스님의 수행처임을 밝히고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안내판에는 1년에 4월 초파일과 또 무슨 날에만 공개한다고 쓰여 있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아름다운 수미단을 못 보고 간다면 후회막급일 터이다. 그냥 안으로 들어가 종무소 앞에서 얼쩡거렸더니 여고시절에 규율부장쯤은 지낸 듯한 모습의 비구니 스님 한 분이 쓱 나타나 필자 앞에 버티고 섰다.
「무단 입장」의 사연을 주섬주섬 밝혔지만, 대번에 『月刊朝鮮 같은 大언론사에서 취재를 하려면 계획성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야무지게 다그친다. 사전연락 등은 해야 할 것 아니냐는 뜻이겠지만, 막상 어린 비구니에게 그런 훈계까지 듣고 보니 머쓱해져 그냥 팽 돌아서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사진작가 趙明東씨는 필자보다 참을성이 훨씬 많았다. 그가 어떻게 설득했는지 모르지만, 이내 비구니 스님은 취재를 허락했다. 백흥암은 유서 깊은 암자답게 두 점의 보물을 보유하고 있다. 조선 인조 21년(1643)에 건립된 극락전은 보물 제790호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다포식 건물이다. 보물 제486호 수미단은 바로 극락전 내부의 삼존불(아미타여래, 대세지보살, 관음보살)을 좌정시키려고 만들어 놓은 불단이다.


봉황·공작·학·코끼리·사자 등 온갖 동물을 특이한 구성으로 透刻(투각)하여 조선시대 木조각의 탁월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색감도 매우 좋다.
극락전·尋劒堂(심검당)·보화루·진영각 등 4개의 殿閣(전각)이 이루는 백흥암의 네모진 공간은 참으로 아기자기하다. 좁은 터 안에 4채의 전각을 처마들이 서로 포개지도록 건립한 가람배치는 공간미학의 絶頂(절정)이다. 백흥암 입구 돌담 옆으로 조성된 꽃밭도 비구니 스님의 거처라는 냄새가 물씬할 만큼 아기자기하다.
강당으로 쓰이는 보화루에 올라 어정거리고 있는데, 조금 전 필자에게 「핀잔」을 주었던 비구니 스님이 뚝배기에 담은 「김치국수」를 들고와 먹으라고 권했다. 면발이 쫄깃쫄깃하여 국수라기보다 냉면에 가까웠는데, 절집음식의 정갈한 맛을 느꼈다. 백흥암에 대한 짜릿한 추억거리를 만들고 상큼한 마음으로 上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