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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기행(21) - 亂中日記의 현장을 가다 (下)

야생초요 2006. 7. 3. 13:02
국보기행(21) - 亂中日記의 현장을 가다 (下)
 
李舜臣의 死生觀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
 
● 國寶 제76호 亂中日記
● 國寶 제304호 鎭南館


李舜臣을 死地로 몰아넣은 小西行長의 計略, 패망한 水軍을 白衣從軍 후 再建한 李舜臣의 시간과의 싸움. 鳴梁해전, 倭橋城, 露梁해전의 現場

글 : 鄭 淳 台 月刊朝鮮 편집위원
사진 : 韓 相 一 자유기고가
鄭淳台 月刊朝鮮 편집위원 (st-jung@chosun.com
多重性格의 선봉장 小西行長
<한산도 忠武祠에 봉안되어 있는 이순신의 影幀.>
 전남 順天의 曳橋城(예교성)에 오르면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생각난다. 고니시는 宣祖(선조) 조정에 절묘한 離間策(이간책)를 구사하여 李舜臣(이순신)을 獄死(옥사) 직전의 상황에 빠뜨렸었다. 죽을 위기를 거쳐 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은 이제 고니시를 예교성에 몰아넣고 그의 목을 겨냥하고 있었다.
 
  이순신과 不俱戴天(불구대천)의 惡緣(악연)을 쌓은 고니시의 動線(동선)이야말로 東洋3국의 무수한 生靈(생령)들의 피로써 지옥도를 만든 壬辰倭亂(임진왜란)의 핵심 현장이었다. 그렇다면 그를 歷史의 法廷(법정)에라도 세워야 할 것 아니겠는가.
 
 
  <被告(피고) 고니시, 너의 아비는 일찍이 약장수를 하다가 임진왜란의 主犯(주범) 히데요시(豊臣秀吉)에 눈에 들어 그 밑에서 財政(재정)을 담당했다. 너도 무역업을 하면서 때로는 유명짜한 해적 두목 구루시마(來島通之) 형제 등과 결탁했으니 적어도 해적의 동업자라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무튼 너는 바다를 통해 닦은 기반으로 히데요시의 家臣(가신)이 되었고, 점차 신임받는 직속의 다이묘(大名)로 성장했다.
 
  또한 너는 이른바 戰國武士(전국무사)로선 색다르게 문자께나 익혔고, 「어거스틴」이란 세례명을 가진 천주교 신자였다. 1592년 4월13일(음력: 이하 임란 관련 일자 同一) 오후, 너는 침략군(15만 병)의 先鋒將(선봉장)인 제1군의 대장으로서 부산포에 상륙하면서 「프로이스」라는 이름의 포르투갈 神父(신부)까지 종군시켰다. 너는 참으로 多重性格(다중성격)의 武將이었다.
 
  너의 딸 「마리아」는 너의 副將(부장)이며 對馬島主 소오 요시토모(宗義智)의 아내였다. 요시토모 역시 세례명 「다리오」란 천주교 신자였으며, 왜란 직전에 弱冠(약관) 20세의 正使(정사) 자격으로 漢城에 들어와 너를 접대한 예조판서 李德馨(이덕형) 등에게 과대망상가 히데요시의 「침략 의도」를 귀띔해 주기도 했다. 물론, 너와 네 사위는 對馬島의 對조선 무역의 독점권을 계속 누리기 위해 그랬을 터이지만, 어떻든 네가 利文이 남지 않는 무익한 전쟁만은 가능한 한 회피하려 했음은 굳이 부인하지 않겠다.
 
 
 
 
 
 
 
 
  死易假道難
 
 
 
  1592년 4월14일 오전, 너는 제1군(선봉부대) 1만8700명으로 釜山鎭城(부산진성)을 에워싼 다음에 첨사 鄭撥(정발)에게 다음 내용의 서찰을 보냈다.
 
  「우리는 北京(북경)으로 통하는 하나 밖에 없는 이 길을 통과하게 해주길 바랄 뿐이다. 그리하면 우리들은 스스로의 규율을 지켜 곡식 한 톨이라도 건드리지 않고 통과할 것이다」
 
  명분 없는 전쟁을 도발한 데 대한 자기 합리화의 수단이라고 할지라도 참으로 치졸한 문투였다. 너도 애시당초 정발이 너의 요구를 들어줄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4월14일 오전, 너는 반나절의 공격으로 釜山鎭城을 함락시켰다. 이어 너는 東萊城(동래성)으로 진격, 동래부사 宋象賢(송상현)을 상대로 또다시 흥정을 벌이려 했다. 너의 수하 騎兵(기병) 하나가 성문 앞으로 다가와 깃발을 땅 위에 꽂았다.
 
  戰則戰不戰則假我道(전즉전부전즉가아도)
 
  「싸우려면 싸우자,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달라」는 뜻이 아니더냐. 송상현은 즉시 깃발에다 다음 다섯 글자를 적어 네 앞으로 내던졌다.
 
  死易假道難(사이가도난)
 
  「죽는 것은 쉬우나 길을 빌려주는 것은 어렵다」
 
  너는 4월15일 하루 만에 동래성을 함락시켰다. 송상현은 文官이었지만, 최후까지 항전하다가 네 부하의 칼을 맞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래도 너는 용감한 城主에 대한 예우로 송상현의 시신을 거두어 땅에 묻고 墓表(묘표)를 세워 주기는 했다.
 
  확실히 너, 고니시는 상인 출신답게 흥정을 좋아했다. 너는 이 날 싸움에서 포로로 붙잡은 울산군수 李彦誠(이언성)을 풀어 주면서 일본군이 조선 조정과 교섭할 의향이 있다는 내용의 서한을 지참토록 했다. 그러나 이언성은 뒤탈이 두려워 너의 서찰을 조정에 전하지 않았다.
 
  고니시, 너는 4월24일 尙州(상주)전투에서 조선 조정에서 급파한 순변사 李鎰(이일)의 부대를 일격에 궤멸시키고 一路北上했다. 4월26일, 충주 彈琴臺(탄금대)에서는 背水陣(배수진)을 친 都巡邊使(도순변사) 申砬(신립)의 부대마저 궤멸시켰다. 신립은 그때까지 조선 제1의 장수로 알려진 인물이 아니더냐.
 
 
  『大王의 수레는 어디로 가시려는지』
 
  너는 히데요시의 侍童(시동) 출신인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淸正)와 애시당초 앙숙이었다. 탄금대 전투 다음 날, 너와 제2군 대장 가토오는 漢城 공략을 위한 진로를 놓고 협의했다. 그 자리에서 가토오는 네가 약장수 가문 출신인 것에 빚대어 너를 능멸했다. 지도에 「藥店」(약점)이란 지명이 보이자 일부러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당신은 이 길로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소』라고 했다. 너는 『무사에게 있어 家風(가풍)은 문제되지 않는다』고 차갑게 맞받기는 했다.
 
  忠州에서 漢城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였다. 죽산-용인-서울 남대문에 이르는 左路, 그리고 여주-楊根(양근: 오늘의 양주)-서울 동대문의 右路였다.
 
  너는 가토오에게 제비뽑기로 공격로를 결정하자고 제의했다. 가토오는 『아하! 과연 장사꾼다운 방법』이라고 다시 빈정거렸다. 발끈한 너는 가토오를 치려고 칼까지 뽑으려 했다. 副將들의 만류로 너는 분함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너는 右路, 가토오는 左路로 진격하면서 漢城 제1번 入城(입성)을 다투었다. 5월3일, 네가 먼저 漢城에 입성했다. 참으로 임란의 初戰(초전)은 너의 독무대였다.
 
  너는 평양성 공략에 앞서서도 또다시 너의 습관적 행태를 되풀이했다. 너는 李德馨(이덕형)을 협상상대로 指名(지명)하여 회담을 제의했다. 이덕형과 너의 부장 겐소(玄蘇)·야나기가와(柳川調信)가 대동강 한복판에 띄운 배 안에서 만났지만, 애시당초 타협이 無望한 회담이 아니었더냐.
 
  6월18일, 평양성이 너에게 함락되고, 조선 국왕 宣祖는 압록강변 義州(의주)로 몽진했다. 너는 宣祖에게 교만과 조롱으로 가득찬 다음 내용의 서찰을 보냈다.
 
  「일본 水軍 10만이 또한 西海로 북상하여 오는 길이니 이제 大王의 수레는 어디로 가시려는지?」
 
  그러나 너는 조선에 李舜臣이 있음을 아직 몰랐다. 너도 알게되다시피 일본 水軍은 한산해전(1592년 7월8일)에서 이순신 함대에게 대패한 후 대마도-부산 항로만 겨우 유지했다.
 
  이순신의 활약에 놀란 히데요시는 대번에 水軍에 대해 海戰 금지령을 내렸지 않았더냐. 더욱이 이순신은 9월1일 일본 함대 450척이 집결한 부산포를 공격하여 일본 함선 130여 척을 격파했다. 히데요시의 水陸竝進戰略(수륙병진전략)이 빚나가고 만 것 아닌가.
 
  겨울이 닥쳐오는데, 평양성에 入城한 너는 이제 군량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너도 들에 곡식 한 톨 남기지 않는 조선 傳來(전래)의 淸野(청야)전술이 얼마나 매운 것인지, 그제야 깨달았을 터이다. 군량의 현지조달은 불가능한데, 너를 위한 보급선이 西海-大東江의 물길로 올라올 가능성은 全無하지 않았더냐.
 
  육상 兵站路(병참로)도 의병장들이 起兵하여 부산포- 漢城 간의 곳곳을 틀어막고 있었으니, 고니시 너는 이제 배고픈 거지부대의 대장이 될 수밖에 없지 않았느냐.
 
  그래도 너는 한동안 善戰(선전)했다. 明 구원군의 선발대로 祖承訓(조승훈)의 騎兵 5000명을 너는 평양성 전투에서 대파했다. 하지만 너는 군량 부족으로 더 이상 北上할 수 없었다. 너는 明의 병부상서 石星(석성)의 심복으로서 遊擊將軍(유격장군)이란 벼슬을 달고 조선에 파견된 책사 沈惟敬(심유경)과의 휴전협상에 잔뜩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다가 너 고니시는 李如松(이여송)이 지휘한 明의 지원군(4만5000명)이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에 접근하고 있음을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朝-明 연합군의 기습을 받은 너는 평양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그때 만약 柳成龍(류성룡)의 건의대로 황해도의 조선군이 퇴로를 차단했다면 너는 속절없이 포로가 되었을 터이다. 그러나 황해도의 육군은 너의 武名에 겁먹고 伏兵(복병)전술을 회피했다. 너의 敗軍은 배를 곯아 길가에 쓰러져 죽은 병사를 유기한 채 겨우 漢城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너는 이순신의 제해권 장악에 의한 병참선 차단으로 병력 피해가 가장 큰 장수로 기록되었다. 1924년 일본 참모본부가 발간한 「日本戰史 朝鮮役」(일본전사 조선역)에 의하면 1592년 4월13일 부산포 상륙 당시 1만8700명이던 너의 제1군 병력은 1593년 3월 현재 6626명으로 줄어들어 감소율 64.6%를 기록했다. 함경도 국경까지 침범했던 가토오 제2군(2만800명)도 의병봉기와 寒波(한파)로 고전하여 병력감소율이 40%에 달했지만, 너보다는 훨씬 적었다.
 
  明·日 양군은 전쟁 계속이 불가능함을 알고, 1593년 초부터 講和(강화) 국면에 들어갔다. 양측 협상의 주역은 沈惟敬(심유경)과 너였다. 히데요시는 이 해 3월10일 서울 철수를 허락했다. 4월 중순까지 너와 심유경은 龍山에서 몇 차례 만나 강화회담을 벌였다.
 
  5월1일, 히데요시는 너희 장수들에게 강화조건을 지시하는 동시에 진주성을 再공격하여 기어이 함락시키고 곧 복귀해서 남해안 연안에 축성할 것을 명했다. 제2차 진주성 전투(1593년 6월20∼29일)에서 너와 가토오, 구로다(黑田長政)가 거느린 왜병 10만 명은 농성했던 조선의 軍·官·民 6만여 명을 도륙했다.
 
  제1차 진주성 전투(1592년 10월5∼11일)의 패배를 복수하여 휴전협상에서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라고 다그친 히데요시의 發狂(발광)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피의 광란은 너무나 참혹했다. 그런 네가 설사 告解聖事(고해성사)를 한다고 해서 너의 神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 어떻든, 이후 너희 침략군은 남해안 지역에 성을 쌓고 장기전에 돌입했다.
 
  심유경과 너는 히데요시의 강화조건을 조선은 물론 明의 조정에서도 받지 않을 것임을 잘 알았다. 그것은 漢江 이남 4道를 일본에 할양할 것, 明의 황녀를 일본으로 시집보낼 것, 對明무역의 再開를 허락할 것,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할 것 등이 아니더냐.
 
  심유경과 너는 각각 본국의 지휘부를 기만하고 협상을 진전시켰다. 심유경은 히데요시가 원하는 것은 단지 일본 국왕으로 책봉받는 것이라고 본국 조정에 허위 보고했다. 그러나 너희 둘의 사기극은 어찌 들통나지 않을 리 있었겠느냐.
 
  1596년 9월, 明의 정사 楊方亨(양방형)과 부사 심유경이 오오사카성에 가서 히데요시에게 「너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勅書(칙서)를 내렸을 때 고니시 너의 가슴은 콩알만 했을 터이다. 너는 글을 모르는 히데요시를 기만하기 위해 통역을 맡은 승려에게 허위 번역을 부탁했으나 거절당하고 말았지 않았더냐.
 
  칙서의 내용을 뒤늦게 안 히데요시는 불같이 화를 냈다. 그때 만약 히데요시가 총애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의 도움이 없었다면 너의 목은 대번에 달아났을 터이다. 1597년 초부터 시작된 정유재란은 이런 과정을 거쳐 발발했으니 너는 반드시 공을 세워 히데요시의 신임을 회복해야만 했다.
 
 
  李舜臣 제거하기 위한 離間策
 
  1596년 12월, 너는 다시 바다를 건너 조선에 들어와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한 절묘한 離間策(이간책)을 연출했다. 경상우병사 金應瑞(김응서)의 軍門에는 네가 파견한 이중첩자 요시라(要時羅)가 들락거리고 있었다. 要時羅는 너와 가토오의 갈등 상황과 그의 渡海(도해) 일자에 대한 엉터리 정보를 흘리면서 함대를 출동시켜 가토오를 해상에서 잡으라고 권했다.
 
  너의 허위첩보에 속은 김응서는 이를 곧이곧대로 宣祖에게 복명했다. 이순신에겐 왕명이 떨어졌다. 그러나 이순신은 고니시가 판 함정이라 판단, 가토오에 대한 요격을 포기했다. 이에 宣祖는 어리석게도 『지금, 가토오(淸正)의 목을 베어 오더더라도 이순신의 죄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격노했다.
 
  1597년 1월21일, 宣祖는 備忘記(비망기)를 내려 이순신을 붙들어 국문하고 元均(원균)을 통제사로 삼을 것을 備邊司(비변사)에 논의하도록 명했다.
 
  이순신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것은 2월25일 전후로 추정된다. 그 시기에 신임 통제사 원균과 이순신이 인수인계 절차를 마쳤기 때문이다. 서울로 압송된 이순신은 1차 문초에서 고문까지 받으며 1개월 넘게 옥살이를 했다. 이순신의 목숨은 위태로웠다. 만약 곧은 大臣 鄭琢(정탁)의 강직한 반대 상소가 없었다면 이순신은 너의 계교대로 2차 문초에서 고문으로 치명상을 입었거나 처형되었을 것이다.
 
  그 무렵에 이미 宣祖는 영의정 柳成龍을 중심으로 한 南人 세력을 견제하려 했다. 宣祖의 속뜻을 받들어 西人의 영수 尹根壽(윤근수) 등은 이순신의 처형을 주장하지 않았더냐.
 
  4월1일, 이순신은 감옥에서 풀려나와 白衣從軍(백의종군)의 길에 올랐다. 南下하던 중 모친상을 당했지만, 상례도 치르지 못했다. 너, 고니시는 이순신에게 不俱戴天(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의 모략전을 탓할 생각은 없다. 전쟁에 나선 장수라면 敵을 속이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것 아니더냐. 실은 조선 조정에서도 『明조정이 가토오를 곧 일본 국왕에 책봉할 것』라는 허위첩보를 흘리고 있었다. 너와 가토오, 그리고 히데요시와 가토오가 반목케 하는 反間之計(반간지계)였다.
 
  한심한 것은 너에게 逆이용당한 宣祖 조정이었다. 그렇다고 네가 免罪符(면죄부)를 받은 건 아니었다. 너, 고니시는 임란 종전 후 2년도 못 돼 내란의 와중에서 치욕스런 참수형을 당했다. 그것이 바로 天罰(천벌)인 까닭에 내가 여기서 主犯 히데요시의 하수인인 너를 더 이상 질책해야 무엇하겠는가.>
 
 
  조선 水軍의 몰락
 
  『소수의 수군 함대가 가덕도에만 진출해도 가토오를 잡을 수 있다』고 장담하며 이순신을 모략했던 元均이 후임 통제사가 되었다. 그러나 통제사가 된 후 원균의 생각은 달라졌다. 원균은 갑자기 水陸竝進論(수륙병진론)을 들먹이면서 조정과 도원수 權慄(권율)에게 安骨浦(안골포)의 敵을 육상에서 먼저 공격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宣祖는 원균에게 敵의 집결지인 부산포 공격을 재촉했다.
 
  원균은 6월18일 이후 안골포와 가덕도 해역 등에서 몇 차례 소규모 해전을 벌여 사소한 전과를 거두었지만, 그의 함대도 적지 않은 손실을 입고 있었다. 조선의 劣勢(열세)함대가 물길이 험한 낙동강 하구의 海路를 횡단하여 부산포를 직격한다는 것은 거의 무모했다. 그러나 宣祖는 수군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漆川梁(칠천량) 해전 직전에 도원수 권율이 출전을 머뭇거리는 통제사 원균을 불러 곤장을 치면서까지 부산포 공격을 재촉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무리 도원수라지만, 오늘날의 해군참모총장 겸 작전사령관인 통제사를 부하들 앞에서 매질한다는 것은 조선왕조의 군사문화가 저급했음을 드러낸 일이었다.
 
  7월14일, 원균은 이순신이 육성해 놓은 全함대 180여 척을 이끌고 출전했다가 일본 함대의 유인전술에 말려들고 말았다. 부산 앞바다의 물마루(水宗)까지 추격했지만, 거센 풍랑을 만나 일부 함선이 흩어졌던 것이었다. 원균 함대는 회항 중 식수를 구하러 가덕도에 상륙했다가 일본의 복병에게 걸려들어 일시에 400여 명이 살해되고 식수도 얻지 못했다. 지친 원균 함대는 7월16일에 이르러 칠천량에 매복 중이던 일본 함대의 포위공격을 받고 궤멸했다.
 
  元均은 도주하여 고성땅 秋元浦(추원포)에 상륙했으나 매복 중인 왜병의 칼을 받고 죽었다. 칠천량 해전에서 전라우수사 李億祺(이억기), 충청수사 崔湖(최호) 등 지휘부도 거의 전사했다. 경상우수사 裵楔(배설)만 10여 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敵前 도주했다.
 
 
  국보 제304호 鎭南館
 
  曳橋城(예교성)을 뒤로 하고 순천시농산물공판장이 소재한 월전 삼거리로 되돌아 나왔다. 순천까지 내려와서 여수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壬亂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의 중심기지 鎭南館(진남관)까지는 불과 30km다. 여수 시내 끝에서 돌산도를 연결하는 돌산대교 앞에서 좌회전하면 곧 언덕배기 위로 국보 제304호 鎭南館(여수시 군자동 472번지)이 보인다.
 
  진남관은 선조 32년(1599) 삼도통제사 李時彦(이시언)이 건립한 客舍(객사)인데, 원래 그 자리엔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본영인 鎭海樓(진해루)가 있었다. 진남관은 1718년(숙종 44년) 이제면 수사가 재건했고, 그후 여러 번 중수되었다.
 
  진남관은 현존하는 지방관아 건물로서는 최대의 규모인 데다 건축미가 뛰어나 1963년 보물 제324호로 지정되었고, 2001년에 다시 국보로 승격되었다.
 
  석축 계단을 올라 前門인 望海樓(망해루)에 들어서면 진남관의 웅자가 펼쳐진다. 정면 15칸(53.6m), 측면 5칸(12m), 높이 40척, 넓이 240평, 기둥 68본으로 단층 팔작지붕이다. 통영의 洗兵館(세병관)보다 1.5배쯤 크다.
 
  평면의 양측에서는 移住法(이주법: 건물 양측의 기둥인 高柱를 뒤로 옮기는 수법)을 사용하여 내부공간의 효율성을 살렸다. 架構(가구)의 짜임은 간결하면서도 건실한 部材(부재)를 사용하여 웅장함을 더해 준다. 양측면에는 2개의 衝樑(충량: 측면보)을 걸어 구조적으로 안정된 기법을 구사했다 각 部材에 남아 있는 단청 문양도 우아하다.
 
  진남관의 임란 유물전시관에 들러 직원 金淑씨에게 자료를 요청했다. 그녀는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관계자료를 복사해 주고, 길 건너 언덕 위(여수시 고소동 620번지)에 있는 보물 제571호 좌수영대첩비와 보물 제1288호 墮淚碑(타루비)까지 동행하며 안내해 주었다.
 
  대첩비는 李충무공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광해군 12년(1620)에 건립한 비석이다. 비문은 白沙 李恒福(백사 이항복)이 지었는데, 대첩비로서는 국내 최대 규모로 높이 약 3m이다. 타루비는 李충무공 막하에서 복무했던 수졸들이 장군의 덕을 흠모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세운 비석이라 하여 그렇게 명명되었다.
 
 
  임진왜란 최후의 決戰 노량해전
 
  필자 일행은 17번 국도를 통해 여수에서 北上, 남해고속도로에 진입하여 달리다가 河東IC 를 빠져나와 南海섬으로 가는 19번 국도를 타고 남해대교 중간에 이르러 하차했다. 남해대교 밑 협수로가 바로 임란 최후의 전투가 벌어진 露梁(노량)이다. 협수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 포구 모두 「노량」이라는 지명을 사용하는데, 이곳 사람들은 하동 쪽을 舊노량, 남해 쪽을 新노량이라고 구분한다.
 
  순천 예교성에 四面 포위된 고니시는 철군 기한인 1598년 11월 중순이 다가오자 11월13일, 10여 척의 선발대를 부산 쪽으로 출발시켰으나 앞바다의 柚島(유도: 지금은 주변 해역이 매립되어 육지와 이어짐) 뒤에서 포진 중인 이순신 함대에게 격퇴당해 되돌아오고 말았다. 고니시는 다시 흥정을 시작했다.
 
  그 수법은 明의 西路軍 대장 劉綎(유정)에게 썼던 방법대로 명의 水路軍 대장 陳璘(진린)과 이순신에게 뇌물을 써서 퇴로를 열어주도록 간청하는 것이었다. 진린은 퇴로를 열어주는 代價를 요구했는데, 고니시는 그 알려지지 않은 요구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었다. 이순신은 고니시의 요청을 一言之下에 거절했다.
 
  궁지에 빠진 고니시는 진린의 묵인下에 빠른 배를 보내 泗川(사천)에 주둔 중인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시마즈라면 침략군의 제4군 대장으로 사천의 선진성 전투에서 董一元(동일원)이 지휘하는 明의 中路軍을 대파한 맹장이었다.
 
  이 사실은 곧 이순신에게 알려졌다. 그는 여러 장수들을 모아 대책을 협의했다. 시마즈의 구원군이 오면 앞뒤에서 협격을 받게 되므로 예교성에 포위된 고니시軍보다 시마즈軍을 먼저 공격하기로 하고, 이순신은 함대를 노량해협 근처로 이동시켰다.
 
  진린도 고니시와의 협상에서 타협점을 찾지 못해 이순신 함대를 따라 노량해전에 나섰다. 이순신 함대는 해협 우측인 남해 觀音浦(관음포) 위쪽에 포진하고, 진린 함대는 노량해협 좌측에 대기했다.
 
  일본 함대는 사천의 시마즈, 昌善島(창선도)의 소오(宗義智), 그리고 부산에 주둔했던 데라자와(寺澤正成) 등이 연합한 500여 척의 대규모 세력이었다.
 
  노량해전은 피아간에 500여 척의 大함대가 맞붙은 壬亂 최후의 결전이었다. 전투는 11월19일 새벽 2시경에 양측 함대가 노량해협에서 조우하면서 시작되었다. 서로 전력을 다해 싸우는 양상이 한동안 지속되었는데, 朝-明 연합함대가 火攻(화공)을 펴면서 전황이 급전했다. 이 날 火攻은 겨울철에 부는 북서풍을 이용한 것이었다. 風上(풍상)에 위치한 朝-明 연합함대가 風下에 위치한 일본 함대를 압도했다.
 
  일본 함대는 퇴로를 찾아 관음포 쪽으로 도주했다. 그쪽으로 가면 바닷길이 뚫리는 것으로 오판했다. 하지만 그곳은 바다의 막다른 골목(灣)이었다.
 
  여기서 임란 史上 가장 처절한 접근전이 전개되었다. 격전 중에 이순신이 왼쪽 가슴에 敵의 총탄을 맞았다. 죽음의 순간에도 그는 名言을 남겼다.
 
  『전투가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전투는 11월19일 낮 12경에 끝났다. 朝-明 연합함대의 대승이었다. 예교성에 포위되었던 고니시는 전투가 한창일 때 묘도 서쪽 水路를 통과, 남해섬의 남쪽을 우회하여 부산 방면으로 도주했다. 이로써 임란 7년 전쟁이 끝났다.
 
  좌의정 李德馨(이덕형)은 노량해전 직후에 현지를 돌아보고 일본 軍船 200여 척이 격침했고, 왜군의 사상자가 수천 명이라고 조정에 보고했다. 朝-明 연합함대의 손실도 적지 않았다. 이순신 휘하에선 副將級 10여 명, 진린 휘하에선 부장급 3명이 전사했다.
 
 
  露梁 협수로의 처절한 夕陽
 
  왜, 이순신은 고니시에게 退路(퇴로)를 열어주는 척하면서 그의 뒤통수를 치지 않았던가? 원래, 戰場(전장)에 나선 장수는 속임수를 싫어하지 않는다(兵不厭詐: 병불염사). 또한 「궁한 쥐는 쫓지 말라(窮鼠勿迫: 궁서물박)」는 戰訓(전훈)도 있지 않은가. 이순신도 길을 열어달라는 고니시의 간청을 받아들이는 체하면서 철수하는 고니시軍의 꼬리를 때렸다면 오히려 그를 잡았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이순신이 생리적으로 속임수를 싫어하는 儒將(유장)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든지, 戰後에 예상되는 숙청을 당하기보다는 깨끗한 이름만이라도 남기려고 죽을 자리를 스스로 선택해서 그랬을 것이라는 등의 臆斷(억단)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필자는 바로 이 대목에서 인간 이순신을 짙게 느낀다.
 
  이순신은 왜군, 특히 고니시만은 기어이 잡으려 했던 같다. 그런 증오감은 그가 가장 사랑했던 셋째아들 이면의 戰死 이후 더욱 응결되었던 것으로 느껴진다. 이후 그는 戰場의 장수로선 너무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1597년 10월14일 그의 일기엔 이렇게 쓰여 있다.
 
  <저녁에 사람이 天安으로부터 와서 집안의 편지를 전하는데, 봉한 것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혼란하다. 겨우 겉봉을 뜯고 차남 열의 편지를 보니 겉에 「痛哭」(통곡) 두 자가 쓰여 있어 면이 전사한 줄 알겠다. (中略)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의 마땅함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사니 이런 어그러진 이치가 어디 있느뇨! 천지가 캄캄하고 햇빛이 안 보이네. (中略)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 울부짖는다. 통곡, 통곡하노라>
 
  관음포의 언덕배기 위에 있는 李충무공의 사당 李落祠(이낙사: 남해군 설천면)에 올라 셋째 아들의 부음을 듣고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았다』고 통곡한 인간 이순신을 다시 생각했다. 그는 모함을 당해 감옥살이를 하다 풀려나던 날의 일기(1597년 4월1일)에서조차 所懷(소회) 한 마디 기록하지 않을 만큼 喜怒哀樂(희로애락)의 표현을 냉엄하게 절제한 인간이었다. 그런 그도 자식의 죽음 앞에서는 평소 그렇게 굳세게 누르고 눌러오던 인간 원초적 감정을 폭발시키고 있지 않은가!
 
  저녁 7시가 가까웠다. 한상일 기자는 다른 일로 이 날 저녁 8시 대구行 고속버스 막차를 타야 했다. 19번 국도로 북상하여 河東 노량에서 우회전하여 1002번 지방도로로 접어들었다. 붉게 물든 석양의 노량 협수로가 필자에겐 사무치도록 처절했다. 진교IC에서 남해고속도로로 진입하여 晉州까지 가서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한상일 기자와 헤어져 필자는 진주시 주약동 숙소 앞에서 개인택시에서 내렸다. 미터기에 표시된 택시요금은 17만7400원이었다.
 
  8월26일 아침 西門을 통해 진주성에 올랐다. 진주성 內에는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을 표방하는 국립진주박물관이 있다. 여기서 오는 10월 「李舜臣 특별전」을 개최할 예정이라고 한다.
 
  진주박물관은 임란 당시에 사용되었던 銃筒(총통)을 구색대로 거의 다 소장하고 있다. 특히 국내에 두 개밖에 없는 대형 天字총통(明宗 때 제작) 한 개를 비롯해 地字총통·玄字총통·黃字총통을 한 개씩, 그리고 소형 勝字(승자)총통은 여러 개를 전시하고 있다.
 
  조선의 총통은 특히 일본 수군이 매우 두려워했던 重화기였다. 천자총통은 砲身(포신)의 길이가 130cm로서 鐵羽(철우)가 달린 길이 113cm의 大將軍箭(대장군전)을 발사했다. 地字총통은 포신의 길이 89.5cm로서 100.9cm의 將軍箭 1발 또는 새알탄(鳥卵彈) 200발을 한꺼번에 발사할 수 있다.
 
 
  統制使 재임명 후 조선 수군 再建
 
  권율의 元帥府(원수부)에서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통제사 再임명의 敎書(교서)를 받은 곳은 진주시 수곡면 원계리에 있는 鼎蓋山城(정개산성) 건너편 孫景禮(손경례)의 집이었다. 그는 수하의 10여명을 데리고 「즉시」 길을 떠났다. 그 行步의 속도에 國運(국운)이 걸려 있다는 사실은 곧 밝혀진다. 그 날이 1597년 8월3일이었다.
 
  元均의 칠천량 패전으로 3道 수군이 궤멸한 이후 한산도 本營(본영)이 불타고 南海의 제해권도 일본군이 장악했던 만큼 이순신에게는 定處(정처)가 없었다. 그 무렵은 그가 머무는 곳이 바로 통제사의 行營(행영)인 것이었다. 그에겐 戰船도 部隊도 없었다. 亂中日記 8월3일자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곧바로 출발하여 豆峙(두치)로 가는 길로 직행하다. 초저녁에 行步驛(행보역)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자정에 출발하여 두치에 도착하니 날이 새려 한다. (中略) 雙磎洞(쌍계동)에 이르러 길에 돌이 어지러이 솟아 있고, 비가 와서 물이 불었다. 간신히 건너 石柱關(석주관)에 이르니 李元春과 柳海守가 엎드려 인사하고 敵을 토벌할 일에 대해 말을 많이 한다. 저물어 求禮縣(구례현)에 이르니 근처가 온통 적막하다(後略)>
 
  8월26일 오후 2시, 晉州의 친구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통제사로 再임명된 후 노량해전에 이르기까지의 행로를 답사하기로 했다. 왜 이순신은 밤잠도 자지 않고 강행군을 했을까. 그것은 水軍 재건을 위해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지금의 경남 하동군 橫川面(횡천면) 여의리 삼거리가 이순신이 말을 쉬게 한 행보역이다. 여의리 삼거리 옆으로 이순신이 말에게 물을 먹였을 횡계천이 흐르고 있다. 이곳 촌로에 의하면 日帝 때 횡계천 바로 건너 돌산 위에 호랑이 한 마리가 출몰했다고 한다. 이순신은 지금의 58번 국도를 따라 지금의 河東邑 두곡리에 닿았다. 하동읍의 뱃머리가 있던 두곡을 당시엔 豆峙라 불렀다.
 
  참으로 운명적이었다. 이순신이 두치를 출발한 후 불과 한나절 만에 南原城을 치러가던 일본군이 두치에 상륙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左軍과 水軍이 전라도의 요충지 南原城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일본 水軍은 조선 水軍이 완전히 궤멸된 것으로 보고 陸戰에 참전하는 전략상의 잘못을 범했다.
 
  이순신은 흔히 알려진 것처럼 두치에서 배를 타고 섬진강을 건너 전라도로 들어간 것이 아니다. 섬진강변의 육로 80리를 따라 하동군 화개면 花開장터에 이르렀다. 그가 물이 불어 간신히 건넜다는 雙磎洞은 쌍계사 계곡 쪽에서 내려오는 花開川이다. 지금은 그 위로 花開다리가 놓여 있는데, 그 일대의 覆蓋(복개)로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화개천은 화개장터 바로 밑에서 섬진강 본류에 합수된다.
 
  화개장터에서 섬진강변을 따라 19번 국도를 20여 리 달리면 천험의 요새 石柱關(석주관: 전남 구례군 파도리)이 있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 재임 때부터 의병과 인근 燕谷寺(연곡사)의 승병을 파견하여 석주관을 지키게 했었다. 석주관에 당도한 이순신에게 『적을 토벌할 일에 대해 말』한 柳海守(바다 「해」 지킬 「수」―이름이 근사하다) 등은 혹시 그런 의병들이 아니었겠는가.
 
  이후 이순신의 행로 석주관-구례읍-압록강원-곡성읍-옥과-순천-낙안-보성-해남읍-전라우수영(해남군)으로 이어지지만 필자는 개인적인 일로 일단 석주관에서 승용차를 돌렸다. 토요일인 이 날 오후 5시 지리산 七佛庵 寺下村(칠불암 사하촌) 민박집에서 옛친구들과 만날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鹿島 만호 鄭運을 생각하며
 
  8월28일 월요일 오전 9시, 친구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다음 날 개통식을 갖는 「南道大橋」(남도대교)를 통해 섬진강을 건너 전라도 쪽 강변길을 따라 남진, 광양을 거쳐 筏橋(벌교)로 달렸다. 교통요지인 벌교 시외버스 정류소에만 가면 전남 지역 어디든 갈 수 있는 버스편이 있다.
 
  그러나 벌교에 오니 생각이 달라졌다. 여기까지 와서 고흥을 지나쳐 갈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고흥은 당시의 興陽(흥양)으로서 전라좌수사 재임 당시 이순신 관할의 5官5浦 중에 1官4浦이 밀집했던 海防(해방)의 요충지였다.
 
  5官은 순천부(도호부사 종3품), 낙안군(군수 종4품), 보성군(군수 종4품), 광양현(현감 종6품), 흥양현(현감 종6품)이다. 5浦는 종3품이 지휘관인 방답진(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사도진(고흥군 영남면 금사리), 종4품이 지휘관인 여도진(고흥군 점암면 여호리)·발포진(고흥군 도화면)·녹도진(고흥군 도양읍 녹동)이다.
 
  亂中日記를 보면 鹿島(녹도) 만호 鄭運(정운)의 용맹이 두드러진다. 녹도는 지금의 고흥반도 끝에 있는 鹿洞(녹동)이다. 임란 발발 직후 경상우수사 원균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순신은 勝算(승산)도 없이 출전부터 하고 보는 장수가 절대 아니다.
 
  이순신은 여러 鎭浦의 장수들을 水營을 모이게 하여 작전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諸將들은 『倭勢(왜세)가 심히 날카로우니 경솔하게 출전하는 것은 불가하오』, 『임금께서 이미 西行을 했으니 배를 서쪽으로 몰아 임금을 호위해야 하오』, 『후퇴하여 병사를 보호하다가 정세를 보아 출전함이 타당하오』 등의 避戰論(피전론) 일색이었다.
 
  이때 鄭運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영남도 우리 땅이요, 호남도 우리 땅인데, 넘어다보기만 하고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소? 급히 군사를 동원 반격하여 호남도 방어하고 영남도 구원하는 것이 옳을 것이오』라고 외쳤다.
 
  이순신 함대는 5월4일 새벽에 출전했다. 임란 初年, 鄭運은 이순신 함대의 10회 海戰에 모두 참가하여 武名을 떨친 勇將이었다. 그 해의 부산해전에서 그는 앞장서 돌격하다가 적탄을 맞고 전사했다.
 
  녹동에만 가면 해남이나 진도에 가는 배편을 잡을 수 있을 것으로 지레 짐작했다. 도중에 도덕면 우체국 앞에서 잠시 하차하여 그동안 자료 등으로 잔뜩 불어난 여행가방을 서울집에 택배로 부쳤다. 택배요금 6000원에 이렇게 몸과 마음이 홀가분할 수가 없다.
 
 
  녹동-사동-도장-마량 航路
 
  녹동新港에 가보니 진도나 해남으로 가는 배편은 요즘엔 없다. 오후 1시에 출항하는 金日島(금일도)行과 오후 4시30분에 출항하는 莞島(완도)行 선편만 남아 있었다. 어느 곳이든 이순신 함대의 기동로였던 多島海(다도해)가 아닌 것인가? 금일도行 배표(4000원)를 사놓고 뱃머리의 횟집에 갔다. 2만원짜리 매운탕 한 냄비를 주문했다. 출항시간이 임박한 바람에 맛깔스러운 매운탕을 몇 숟가락 대어 보지도 못하고 평화페리호에 승선했다.
 
  평화페리호는 나환자촌이 있는 소록도를 돌아 남행하여 출항 1시간 30분 만인 오후 2시45분 금일도 남단의 사동리 부두에 입항했다. 다시마 재배가 主수입원인 금일도는 제법 큰 섬이다. 완도 가는 배는 섬의 동북단에 있는 도장항에서 타야만 했다. 지프형 택시 편으로 도장항으로 달렸다(요금 7000원).
 
  도장항에 도착하니 완도行 배는 오후 4시30분에 출항 예정이고, 강진군 남단의 마량항으로 가는 배는 오후 3시20분 출항 예정이었다. 마량 부두 바로 건너편 섬이 임란의 마지막 해인 1598년 이순신의 통제영과 明의 水路軍 대장 진린의 본영이 설치된 고금도이다. 마량항으로 가는 배를 탔다(선임 4000원).
 
  협승페리호는 생일도와 조약도의 포구에 잠시 기항했다가 고금도 해역으로 접어들었다. 조약도-고금도-마량 간의 연육교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조약도의 우두리와 연결하는 교각 공사가 진행 중인 고금도의 忠武里가 보인다. 이곳이 바로 이순신의 통제영이 설치되었던 자리다. 협승페리호는 10분 늦게 출항하여 1시간 10분 만인 오후 4시40분 마량항에 닿았다.
 
 
  「Only one Point」 鳴梁해협
 
  하선 즉시 마량 버스정류소에 나가 강진읍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강진만은 깊어 마량에서 강진읍까지 50리, 버스요금 3000원이다. 오후 5시40분 강진읍 터미널에 도착했다.
 
  차질이 생겼다. 해남 가는 버스가 10분 전에 출발해 버렸다는 것이다. 다음 버스는 저녁 7시30분에 출발 예정이었다. 개인택시(전남 25바 1006호)를 탔다. 운전기사 김인중씨는 『얼마가 나올지 몰라도 미터기 요금보다 할인해 주겠다』고 했다.
 
  개인택시는 18번 국도를 따라 西進했다. 도중에 강진군 도암면 茶山草堂(다산초당) 앞을 지난다. 大실학자 다산 丁若鏞(정약용)은 천주교 신자로 찍혀 1801년 이후 강진에서 18년간 귀양살이를 하면서 이곳에다 草堂을 짓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편으로 牧民心書(목민심서) 등을 썼다.
 
  1597년 8월3일, 통제사 再임명의 교서를 받은 이순신 빠른 行步로 전남 일대를 돌아가며 右水營(우수영)에 도달한 것은 다 까닭이 있었다. 그것은 조선 水軍 재건을 위한 필사적인 行步였다.
 
  8월6일, 그는 玉果에 머물면서 일본군을 정탐하고 돌아온 휘하의 宋大立으로부터 敵情(적정)을 보고받았다. 7일에는 順天으로 향하던 중 흩어져 후퇴하는 전라병사의 군사들로부터 말 세 필과 활·화살 약간을 탈취했다. 8일에는 順天府에 들어가 버려졌던 총통 등을 땅에 묻고, 가벼운 長箭(장전)과 片箭(편전)은 수행 군관들이 나눠 가지게 했다. 낙안을 거쳐 보성에 이르는 동안 순천부사 禹致績(우치적) 등이 합류했다. 장병들을 취합해서 그 수가 60명에서 120명으로 늘어났는데, 대부분 자원병이었다.
 
  亂中日記에 따르면 8월11일에는 임란 초기부터 이순신을 수행했던 宋希立이 崔大晟(최대성)과 함께 달려왔다. 12일에는 거제현령 安衛(안위)와 발포만호 蘇季男(소계남) 등이 왔고, 13일에는 칠천량 패전 직후 가족만 싣고 도망쳤던 李夢龜(이몽구)도 나타났다. 15일엔 보성의 軍器를 검열했다. 16일엔 보성군수 등을 보내 피란갔던 관리들을 찾아오게 했다. 弓匠(궁장)인 智伊와 太貴生도 이 날 들어왔고, 金希邦(김희방)·金鵬萬(김붕만) 등도 합류했다.
 
  8월19일에는 會寧浦(회령포: 전남 長興郡 會鎭面 회진리)에서 경상우수사 裵楔(배설)로부터 10여 척의 軍船을 인수했다. 전선을 인계한 배설은 9월2일 밤, 이순신의 앞날에 전혀 희망이 없다고 보고 도주했다. 그는 종전 후 고향 善山에서 체포되어 참형을 당한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海戰을 포기하고 陸戰을 도와도 좋다는 왕명이 내려왔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상주했다.
 
  『臣에게는 아직도 12척의 戰船이 있습니다』
 
  그는 신념의 인간이었다. 각처에 흩어져 있던 水軍 장병들이 이순신의 휘하로 속속 모여들었다. 특기해야 할 것은 명량해전 때 이순신 휘하 세력으로 참전했거나 전장 해역에서 함대를 도운 피란민 세력의 존재다. 특히 피란민 선단은 군량을 지원하면서 명량해전 때 배후의 함대세력으로 위장하는 역할을 했다.
 
  해남은 전남의 郡 가운데 가장 큰 郡이다. 右水營은 해남의 서쪽 끝 花源半島(화원반도)에서 진도로 가는 길목에 있다. 우수영(지금의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 아래가 울돌목, 한문으론 鳴梁(명량)이다. 여기서 이순신은 13척의 戰船을 거느리고 西海로 진출하려는 일본 함대를 저지했다. 이것이 칠천량 패전 후 꼭 2개월 만인 1597년 9월16일에 전개된 명량해전이다.
 
  진도대교의 한가운데서 하차하여 명량해전의 현장을 촬영했다. 진도 쪽으로 들어가 망금산 아래 전주횟집 마당의 평상 위에 앉으니 古戰場의 모습은 더욱 一目瞭然(일목요연)하다. 명량 수로의 길이는 약 2km, 가장 좁은 곳은 300m, 최저 수심은 1.9m, 조류의 속도는 11.5노트 이다. 마침 밀물 때라 조류가 東에서 西로 빠르고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이곳은 『20리 밖에서도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해서 「울돌목」이라 이름하지 않았겠는가. 더구나 수심이 얕아 항해하기 어려운 狹水路(협수로)다. 그런데 묘하게도 협수로 곳곳에서 물이 동심원을 그리며 소용돌이를 치고 있었다. 해남 쪽 명량을 보니 급한 물살이 해저의 바윗돌에 부딪친 듯 맥주거품처럼 부풀어 흐르고 있다.
 
  그렇다. 이곳이야 말로 서해 진출을 노리는 일본 함대를 막아야 했던 이순신에겐 오직 원 포인트(One Point)일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이순신의 戰場 선택에 경의를 표했다.
 
 
  名將의 조건
 
  명량해전 직전까지 이순신이 확보한 세력은 전선 13척과 哨探船(초탐선) 32척이 전부였다. 이순신 함대가 碧波津(벽파진 진도군 군내면 벽파리)에 머물고 있던 9월14일 任俊英(임준영)이 일본 함대 200여 척 중 55척이 어란포에 도착했다는 첩보를 전했다. 이순신은 명량 협수로를 등지고 싸울 수 없다고 판단, 진영을 벽파진에서 우수영으로 옮겼다.
 
  8월16일, 이른 아침에 일본 함선 300여 척이 명량 협수로로 접근했다. 名將은 名言을 말한다. 이순신은 휘하 장병들의 戰意를 이렇게 북돋우었다.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
 
  일본 함대 지휘부는 대형 군선인 安宅船이 협수로를 통과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따라서 중형 軍船인 關船만 133척으로 진용을 짜고 협수로를 통과, 이순신 함대를 향해 진격했다.
 
  전단은 오전 11시경에 열렸다. 일본의 關船 여러 척이 이순신의 大將船(대장선)을 여러 겹으로 포위 공격했다. 大將船만 각종 포와 화살을 난사하며 응전했고, 휘하의 戰船들은 일본 수군의 척수와 기세에 눌려 뒤로 물러났다. 이순신은 몸소 최선봉에 나서 일본 함대에 포위당한 채 상당 시간 홀로 버텼다.
 
  大將船이 위험해지자 거제 현령 安衛(안위)의 배가 다가왔다. 이순신은 이 대목에서도 名言을 했다.
 
  『安衛야, 네가 軍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해서 어디 가서 살 것 같으냐?』
 
  안위의 판옥선이 황급하게 일본 함대 속으로 돌진해 갔다. 中軍將인 미조항 첨사 金應♥(김응함)의 배도 가까이 다가왔다. 이순신은 김응함을 불러 이렇게 독전했다.
 
  『네가 中軍으로 멀리 피하여 대장을 구하지 아니한 죄, 마땅히 참형에 처할 것이나 戰勢(전세)가 급하니 공을 세울 것을 기다린다』
 
  안위와 김응함의 군선이 좌충우돌하자 나머지 전선 10척도 돌진하여 본격적인 접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일본 함선은 수적으로 10배여서 먼저 돌격한 安衛의 전선이 적선의 포위 공격을 받았다.
 
  돌연, 高潮(고조)에서 잠시 멈추었던 조류가 바뀌었다. 이번에는 이순신 함대에게 유리한 흐름인 南東流(남동류)였다. 대장선을 비롯한 모든 전선이 집중공격을 펼쳐 안위의 전선을 구출하면서 잠깐 사이에 일본 군선 31척을 격파했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은 유명한 해적 출신 장수로서 선봉에 섰던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를 사살하고 그 시체를 바다에서 갈고리로 낚아 올려 토막토막 자르게 했다. 이에 일본군의 기세가 꺾여 버렸다.
 
  이순신 함대의 강력한 반격으로 31척의 군선을 상실한 일본 함대는 일단 해전을 중지하고 퇴각했다. 이순신은 1597년 9월16일 일기 끝부분에 「此實天幸」(이것은 실로 천행이다)이라고 썼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天幸만이겠는가? 미리 고민하지 않은 장수, 목숨을 걸지 않은 장수라면 어떻게 이같은 天幸을 바랄 수 있었겠는가.
 
  이제 취재를 끝내기로 했다. 날도 어둑어둑하다. 다시 개인택시에 올라 목포로 달렸다. 저녁 8시30분, 목포 고속버스 터미널에 있는 택시정류소에서 개인택시 기사 김인중씨와 헤어졌다. 택시 미터기의 요금은 11만3300원이었는데, 그는 『뜻있는 답사에 참여하게 되어 기쁘다』면서 굳이 8만원만 받았다. 목포는 항구다. 여기서 낭만의 하룻밤을 「정박」하고 싶었다. 고속버스터미널 인근 용꿈여관(숙박료 3만원)에서 묵고 8월29일 아침 일찍 서울行 고속버스를 탔다.
 
 
  壬亂에 참전한 三國 장수들의 그후 行路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순신에게 잡힐 뻔했다가 겨우 血路(혈로)를 뚫고 귀국은 했지만, 그로부터 2년 후인 1600년 7월1일 세키가하라(關ケ原) 전투에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가 주도한 西軍에 가담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東軍과 싸우다 패전·도주·은신하다가 붙잡혀 참수되었다.
 
  웬만하면 할복하는 사무라이답지 않게 수치스럽게 참형을 당한 그에 대한 日本 전통사회의 평판이 낮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를 위한 역사의 변호사가 있다면 그가 자살을 금하는 천주교의 신자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지 않았겠는가? 그야 아무튼 그는 이순신에게 목을 내놓았다면 훨씬 나을 뻔했다.
 
  일본에서 「天下 판갈이 싸움」이라고 일컫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리로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幕府(막부)시대를 열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모리 테루모도(毛利輝元) 등 조선에 출전했던 장수들의 다수가 西軍에 가담하여 戰後 이에야스에 의해 領地(영지) 감봉처분을 받았다. 반면 고니시의 라이벌이었던 가토오 기요마사는 히데요시의 侍童 출신임에도 東軍에 붙어 다이묘(大名)의 지위를 유지했다.
 
  침략의 원흉 히데요시는 죽음에 임박하여 그의 어린 외아들 히데요리(秀賴)의 장래가 걱정되어 이에야스 등 5大老, 이시다 등 5奉行에게 충성의 서약서까지 받아냈지만, 그의 死後 그것은 하나의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히데요리의 영지를 삭감하는 등 핍박을 계속 가했던 이에야스는 실로 공연한 트집을 잡아 히데요리의 居城 오사카성을 공격했다. 오사카성이 함락되자 히데요리와 그의 生母 요도기미(淀君: 히데요시의 愛妾)는 동반자살했다. 불교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業報(업보)가 아닌 것인가.
 
  고니시의 협상 상대로서 明 조정에 허위보고를 했던 沈惟敬의 행로도 기구했다. 처음에 그는 고니시에게 일본으로의 망명을 간청했으나 고니시는 「살아 있는 공범」을 받아들이기 난처하여 은근한 거부의 뜻을 비쳤다. 결국 그는 가토오에게 몸을 기대기 위해 울산으로 가던 도중에 경남 의령에서 붙들려 본국으로 끌려가 참수당했다.
 
  임란 때 조선을 도운 明의 관료나 장수들도 대체로 불운했다. 조선에 원병을 보내는 국론 조성에 앞장섰던 병부상서 石星(석성)과 요동경략 宋應昌(송응창)은 전쟁지도상 실책 등의 이유로 투옥되었는데, 석성은 獄死했다. 초기 원군의 최고지휘관이었던 李如松은 1597년 요동총병관으로서 土蕃(토번)과 싸우다 전사했다.
 
  東路軍 대장이었던 楊鎬(양호)는 울산 島山城(도산성) 전투에서 가토오에게 패전한 후 파면되었다가 1618년 3월 20만 병의 총수가 되어 누르하치가 지휘하는 後金(후금: 후일의 淸)軍과의 사르후(薩爾滸) 전투에서 전사했다. 西路軍의 대장이었던 劉綎(유정) 역시 사르후 전투에서 전사했다. 사르후 전투를 계기로 明은 몰락, 淸은 정복 왕조의 길로 들어선다.
 
  사르후 전투에는 1만2000명의 조선군도 참전했으나 光海君의 密命을 받은 도원수 姜弘立이 후금軍에 항복했다. 丁酉再亂(정유재란) 직전, 이순신 타도를 위한 고니시의 술책에 넘어가 宣祖에게 허위 첩보를 그대로 아룀으로써 결과적으로 이순신을 생사의 위기에 빠뜨린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金應瑞는 사르후 전투에 副元帥로 참전했는데, 도원수 강홍립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김응서는 敵情(적정)을 기록하여 본국으로 보내려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결국 임란은 明이 멸망하고, 淸이 흥기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또한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정권이 망하고,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서는 단초가 되었다. 이에야스는 자신은 임진왜란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며 조선과의 國交再開를 요청, 이후 200여 년간 양국은 대체로 평화관계를 유지했다.
 
  이순신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갈수록 높아졌다. 국외에서도 그는 세계 제1의 제독으로 존경받고 있다. 예컨대 1905년 東海해전에서 帝政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격멸하여 帝國일본의 軍神으로 추앙받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는 그의 위업을 찬양하는 사람들에게 『英國의 넬슨과는 어깨를 겨룰 수 있으나 이순신에 비교하면 나는 下士官 정도』라고 밝혔다. 이순신은 시대를 초월하여 나라 사랑의 길과 死生觀(사생관)을 제시한 武人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