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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마애삼존불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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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종만 |
|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백제의 미소'로 더 많이 알려진 국보
제84호 서산마애삼존불상(瑞山磨崖三尊佛像)이 있다.
용현계곡 산중턱의 속칭 인바위라는 천연의 암벽에 부각되어 있는
서산마애삼존불상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마애불 중 가장 뛰어난 백제후기의 작품이다. 백제의 문화는 그 당시 교류가 빈번하던 중국 남조 귀족문화의
영향을 받아 고구려와 신라의 문화에 비해 우아하고 세련된 멋이 있다고 평가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서산
마애삼존불상이다.
서산마애삼존불상은 처음 발견될 때(1959년)도 남다른 사연이 있다. 마애삼존불에서 계곡 안으로 1km만 들어가면
보물 제102호인 보원사지석조, 보물 제103호인 보원사지당간지주, 보물 제104호인 보원사지5층석탑, 보물 제105호인 보원사지법인국사보승탑,
보물 제106호인 법인국사보승탑비 등 보유문화재가 많아 융성했던 백제 불교문화의 연구대상인 보원사의 옛터 보원자지가
있다.
보원사지에서 조사를 마치고 내려오던 흥사준 부여 박물관장과 황수영 문화재위원 일행이 지나가던 나무꾼을 만나 대화를 한 게
발견된 계기였다. 흥사준 관장이 지나가는 말로 '이 근처에 불상이나 사람이 새겨진 바위가 있는지'를 물었고, 나무꾼으로부터 '저 위의 큰 바위에
세 사람이 있는데 가운데는 남편, 왼쪽은 본부인, 오른쪽은 새부인 같다'는 대답을 듣게 된다.
흥사준 관장이 슬그머니 올라가보니
마애삼존불이 있었지만 비가 오고 있어 사진촬영만하고 조사를 뒤로 미루었다. 며칠 후에 그때 촬영한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란 황수영 박사에 의해
조사가 급박하게 이루어져 백제 최고의 걸작품이 우리들의 눈앞에서 빛을 발하게 되었다. 나무꾼들만 알고 있던 서산마애삼존불상의 발견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역사적으로 큰 사건이었다.
당시로는 대규모 사찰이었던 보원사지와 가까이에 있고, 이곳이 백제 때 중국으로 통하던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해당되므로 중국과의 활발했던 문화교류를 엿보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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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거리지만 가파른 돌계단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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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종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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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삼존불 관리사무소의 담장과 연결된 불이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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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종만 |
| 물이 맑은 용현계곡의 작은 다리를 건너면 짧은 거리지만 경사가 급한
돌계단길이 나타나고 그 끝에 마애삼존불 관리사무소가 있다. 관리사무소에서 삼존불 가는 길의 담장에 절로 들어가는 3문(三門) 중 마지막 문이며
진리는 둘이 아님을 뜻하는 불이문(不二門)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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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존불 가는 길가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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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종만 |
| 서산마애삼존불상 앞에 서면 용현계곡이 깊은 산골짜기인데다가 서산마애불상이
새겨져 있는 절벽마저 사람들이 통행하는 길과 반대방향인 동남쪽을 바라보고 있어 쉽게 발견될 수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중앙에
여래상을 두고 그 좌우에 보살상을 모신 서산마애삼존불상의 높이는 본존상인 여래입상이 2.8m, 보살입상이 1.7m, 반가사유상이 1.6m다.
미애삼존불상의 우수성에 대해 서산시청 문화관광 홈페이지에 소개되어 있는 글을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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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마애삼존불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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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종만 |
| '얼굴 가득히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있어
당시 백제인의 온화하면서도 낭만적인 기질을 엿볼 수 있으며,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웃는 모습이 각기 달라지며 빛과의 조화에 의하여 진가를
보이도록 한 백제인의 슬기가 놀랍습니다. 중앙에 본존인 석가여래입상, 좌측에 보살입상, 우측에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석가여래입상은 머리
뒤의 보주형 광배와 미간의 백호공, 초승달 같은 눈썹, 미소 짓는 그 입술은 매우 친근감을 주고 있으며, 또한 두 어깨에 걸친 옷자락은 양팔에
걸쳐 평행호선으로 길게 주름져 있어 입체감을 느끼게 하며 생동감을 주고 있습니다.'
보면 볼수록 입술을 드러내면서 눈을
크게 뜬 모습이나 뺨을 한껏 부풀린 모습이 백제인의 전형적인 미소를 꼭 빼닮았다. 서산마애삼존불상의 미소 속에 침묵이, 침묵 속에 사랑과 자비가
들어 있다는 것까지 본 사람이라면 왜 '백제의 미소'라고 이름 붙였는지를 되묻지 않는다.
신체의 굴곡이 부드럽고, 온화함과 청순함은
물론 활달하게 보일만큼 낭만적인 얼굴이고,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미소 짓는 모습이 다르게 보여 불자들에게는 자신과 똑같은 심정을 얘기해주는
불상으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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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바위와 보호각 속의 서산마애삼존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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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종만 |
| 서산마애삼존불상은 처음 발견되고 6년 후인 1965년 풍화와 인위적
훼손을 막는다는 이유로 문화재청에서 바위 위에 새겨진 삼존불 앞에 소형 기와집 형태의 보호각을 설치했다. 그러다 40여년 후인 최근에 보호각이
좁아 관람에 방해가 되고, 보호각 때문에 통풍과 자연 채광이 안돼 내부에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피는 등 불상을 훼손시킨다는 학계의 지적에 따라
다시 보호각의 문과 양쪽 벽을 제거했다.
보호각을 제거하기 전 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혀 어두컴컴했을 때는 장대 끝에 매달린 백열등을
해가 떠서 넘어가는 방향에 맞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비춰줌으로써 온화한 미소를 시간에 관계없이 감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보호각의 일부를
제거하면서 '백제의 미소'가 사라졌다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호각 지붕을 남겨둔 채 3면의 벽만 철거함으로써 오히려 채광이
불완전하게 이뤄져 불상의 얼굴 표정이 어색해졌기 때문이다. 내가 찾았던 오후 3시경에도 보호각의 일부가 해를 가려 불상의 얼굴 윤곽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자연 상태에서 '백제의 미소'를 감상하고 싶은 사람들이 실망하는 것도 당연하다.
우수성을 인정한 일본인들이
반출하려고 암벽에 징을 댄 흔적이 남아있는 서산마애삼존불상은 지금 '장기적으로 보존하는 방법을 선택할 것이냐, 백제의 미소를 되찾을 것이냐'의
딜레마에 빠져있다.
서산시에서는 보호각 주변에 '백제의 미소' 본래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영상자료 전시공간을 만들고, 불상의
풍화상태 등을 관찰해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면 보호각의 지붕까지 해체할 방침이란다. 부디 백제의 미소를 되찾으면서 장기적으로 보존할 수 있는
문화정책이 수립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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