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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북한산성 유래

야생초요 2006. 6. 2. 09:42

서울을 지키는 천년요새 북한산성

 

 이 성은 고구려·백제·신라가 서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면서 뺏고 빼앗기던 쟁탈 대상지로 원래는 백제시대에 쌓은 토축산성이었다. 고려 고종 19년 (1232)에는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거란이 침입했을 때에는 이곳에 고려 태조의 재궁 (梓宮)을 옮겨온 일도 있었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외침을 당하여 도성 외곽의 축성론이 일어나 숙종 37년 (1711)에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 공사를 하여 석성으로 완성되었다. 조선 영조 21년 (1745) 스님 (僧) 성능 (聖能)이 지은 『북한지 (北漢誌) 』라는 문헌에 북한산성의 축조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북한산성

당시의 성의 길이는 21리 60보이며 시설로는 14개의 성문과 동장대 (東將臺) · 남장대 · 북장대와 행궁· 군창 (軍倉)이 있었으며, 성내에는 승군이 주둔했던 중흥사 등 12개 사찰, 99개소의 우물, 26개소의 저수지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성의 둘레는 12.7km이며 성안의 면적은 2백여만평으로 훼손된 대남문· 대성문 ·대동문·보국문과 성곽들은 일부 보수·복원하였다.

이 성벽에는 정문이 되는 서쪽의 대서문을 비롯해 대남문, 대동문 등 누각을 갖춘 큰 문과 보국, 용암 등 누각이 없는 암문(暗門)을 합해 14개 성문이 요소요소 여러 곳에 있었다.  성 안에는 또 하나의 성을 쌓고 만약을 대비했다.  성을 쌓는 작업은 놀랍게도 시작한 지 불과 6개월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북한산은 그만큼 천연적 요새로서의 기막힌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세워진 북한산성은 안타깝게 한번도 써먹지 못하고 나라를 일본에 빼앗겨 버리는 굴욕의 역사를 겪게 된다.  북한사넝의 전략적 가치를 알아차린 일본은 한일합병 뒤 북한산성에 일본 헌병대를 곧바로 주둔시켰고 산성안의 시설물 대부분을 불태웠다. 그렇게 북한산은 한민족 역사의 조락에 휩싸여 폐허의 내리막길로 접어 들었던 것이다.

자연재해와 뒤이은 분단시대의 비극은 산성계곡에 그나마 남아있던 유적을 홍수로 휩쓸려 보냈고, 산사태에 묻혔고 폭격으로 모조리 초토화시켜 버렸다.  지금은 그 슬픈 역사의 쓸쓸한 잔해들만 풀섶에 나뒹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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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 축조
지금의 북한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나서 부터였다. 서울 도성 배후에 있는 북한산의 전략적 가치를 새삼 인정하고 산성의 수축을 강구하게 된 것이다. 조선조 숙종 57년(1711년) 서울백성들과 삼군문(三軍門)의 군사들이 놀랍게도 6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완공 한 것으로, 수축 당시 13개의 크고 작은 성문과 여장 2,807첩을 축조하였으며 성의 총연장은 7,620보(약 9,500m)에 높이는 3~5m에 가까운 방대한 규모이다. 또한 북한산성 축성후 수비 보완책으로 성내 계곡에 중성)을 축조하였고, 숙종 말년에는 북한산성과 도성 중간지역인 세검정 서편에 홍지문을 비롯한 탕춘대성을 축조함으로써 도성(都城)을 모성으로 하고 북한산성을 자성(子城)으로 하는 이 일대 전략개념에 완벽을 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위급시 왕과 백성이 함께 들어가고자 했던 북한산성은 이후 전란이나 우환이 없어 산성을 이용한 경우는 없다 한다.

 

북한산성 성문
북한산의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어김없이 성문을 만나게 된다. 숙종 37년 축성 당시 수문(수문), 서암문(서암문), 북문, 백운봉 암문(백운봉암문), 용암 암문(용암 암문), 소동문(소동문), 동암문(동암문), 대동문(대동문), 소남문(소남문), 청수동 암문(청수동 암문), 부왕동 암문(부왕동 암문), 가사당 암문(가사당 암문), 대서문(대서문) 등 13개의 문을 완성하였으며, 숙종 40년에는 중성 축조때 중성문, 시구문, 수문 등 3개의 문을 추가로 만들어 모두 16개에 이르렀다.
이중 이번에 살펴볼 것은 등산코스상에 있는 것이다.

 

▶ 대서문
북한산성의 중심이 되는 대서문은 해발 150m 높이의 낮은 구릉지에 서쪽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군사상 적(당시는 청, 왜)의 목표가 되기 쉬운 취약지이기도 하였다. 이문은 성내 북한리 주민들이 대대로 이용하던 애환이 깃들인 문으로 50년대까지만 해도 나무를 하여 달구지에 싣고 새벽같이 이 문을 통하여 서대문 영천에 내다 팔았다고 한다. 또한 이 일대는 살구나무가 많아 이른 봄철이면 화사한 살구꽃을 보기 위해 상춘객들로 붐비었으며 성곽을 배경으로 한 풍경이 아름다워 문인, 화가 등 예술가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대서문은 홍예식에 문루를 갖추고 있다. 현재 문루는 복원된 반면 문짝과 문루 양편의 협문 그리고 담은 아직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용마루와 추녀마루의 일부가 폭풍우로 떨어져 나가는 등 훼손되고 있어 최근 부분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
또한 육축은 무사석(무사석)으로 정교하게 수축하였으나 전쟁의 상처로 보이는 흔적이 있으며, 내부에는 차량 진동으로 인하여 벽석이 균열되는 등 파손이 심화되고 있다. 육축위에는 몸을 숨기고 총포를 쏠 수 있는 문루여장을 전면에 10개 두었는데, 일반 성벽의 여장과는 달리 한 덩어리의 화강암으로 된 평여장이며, 총구가 아래로 향한 근총안을 1개씩 둔 것이 독특하다.

 

▶ 수문
문헌에 따르면 대서문 아래 계곡에는 폭 50척, 높이 16척 규모의 수문이 있었다 한다. 이를 당시의 영조척으로 환산하면 폭 15.5m, 높이 5m에 이르는 큰 규모이나, 오래 전에 파손되어 소멸됐으므로 고증할 사람도 없거니와 문헌에도 생갬새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므로 주위 여건을 검토하여 당시의 형태를 짐작해 볼 수밖에 없다.
우선 폭이 15.5m나 되면 간단한 구조의 평거식으로는 설치가 불가능하므로 홍예식을 도입해야 하며, 단일 홍예로는 공법상 어려우므로 2~3개의 연속 홍예를 갖춘 교량형식으로 만들어 동대문 옆의 수문이나 홍지문옆의 오간대 수문과 유사한 형태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 서암문
서암문은 수문에서 원효봉으로 오르는 해발 180m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내에서 생긴 송장을 내보내던 문이라 하여 주민들은 시구문(屍久門)으로 부르고 있다.
서암문은 대서문과 마찬가지로 주변의 지형이 낮고 험하지 않으므로 방어상 취약지임을 감안, 주변 성벽을 구축하고 치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성문과 연결된 성벽을 'ㄱ'자 모양으로 돌출 되도록 축조하여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도 공격 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 북문
북문(북문)은 원효봉과 염초봉 사이의 해발 430m 능선에 당초 홍예식에 문루를 갖춘 큰문으로 축조되었다. 문루는 오래 전에 소실된 채 육축상단을 마감한 장대석은 전부 무너져 내리고 홍예돌 윗부분이 완전 노출된 채 균열이 가속화되고 있으며, 상부의 초석도 절반은 없어지고 5개만 위험한 상태로 몸을 지탱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이 1988년 큰비에 육축을 포함한 성벽이 15m가 무너져 성문 자체를 크게 위협하고 있는 바 대책이 절실하다.

 

▶ 백운봉 암문
이문은 일제때부터 위문(위문)으로 불리고 있다. 백운봉 암문은 백운대와 만경대사이에 있는데 출입구는 네모난 형태이며 여느 암문과 마찬가지로 문루는 당초부터 없었으나 문짝을 달았던 흔적은 남아 있다. 출입문 주위는 대체로 양호하나 여장을 비롯한 상단의 성돌이 무너져 내려 높이가 상당히 낮아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암문은 백운대 정상을 앞두고 반드시 들러 땀을 식히는 곳인데, 약수로 갈증을 풀며 노적봉과 염초봉 사이의 일직선으로 뻗은 계곡을 감상하는 사람들만이 갖는 기쁨일 것이다.

 

▶ 용암암문
용암봉암문, 용암문이라고도 부르며 용암봉 기슭 해발 580m 지점에 위치하여 도선사, 북한산장, 노적봉을 연결하며, 옛날에는 중흥사, 태고사로 통하는 길목이기도 하다. 한편, 부근에는 과거 이 일대 수비를 담당하던 용암사(용암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폐사되어 무너진 탑과 석축이 남아 있으며, 북한산장이 자리하여 많은 등산인들의 휴식처로 사랑을 받고 있다.

 

▶ 대동문
대동문은 우이동의 소위 '진달래능선'이 시작되는 해발 540m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서문과 같은 큰문이다.

 

▶ 보국문
보국사가 아래에 있었기에 보국문이라 부르는 모양인데, 해발 567m의 높은 지점에 위치하여 정릉을 내려다보고 있다. 보국문은 동쪽에 있는 암문으로서 당초에는 동암문으로 칭하였다.

 

▶ 대성문
대성문은 보현봉과 연결된 해발 625m의 지점에 위치하여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형제봉을 거쳐 보토현과 이어진다. 이 문은 우선 주변 여건을 검토해 볼 때 그 중요성은 크지 않은 듯하나 규모는 북한산 성내 성문 중에서 가장 크다. 보토현을 경유하여 경복궁과 행궁을 이어 주는 가장 가깝고 편리한 코스이므로 유사시 임금이 통행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큰문을 설치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 대남문
대남문은 보현봉과 문수봉 사이 해발 663m의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앞뒤로 넓은 터를 갖고 있어 마치 평창동 일대를 긴팔로 안고 있는 듯한 모습이 정겹게 보인다. 대남문은 백운대쪽에서 바라보면 성문이 보일 듯 말 듯 아득하게 보이며 보현봉에서 백운대를 뒷배경으로 내려다 보는 맛도 일품이다. 이문은 대동문과 구조가 흡사하다.

 

▶ 청수동 암문
청수동, 부왕동, 가상당암문에는 표지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예 명칭이 불리지도 않아 문의 명칭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청수동암문은 문수봉과 나한봉 사이의 해발 694m지점에 위치하여 승가사 뒷산 능선에 있는 비봉과 연결되며 대남문과 부왕동 암문 방향으로 갈라지는 요충지인데 이문도 여느 암문과 마찬가지로 네모난 출입구를 갖추고 있으며 문짝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 부왕동암문
청수동암문에서 대서문에 이르는 코스는 크고 험한 봉우리가 계속 이어지는 장쾌한 여정이다. 이 일대에서 내려다보면 아득하게 삼천동의 산계가 눈앞에 펼쳐지고, 좌측으로는 나한봉을 비롯한 연봉들이 까마득하여 마치 신선이 되어 심산유곡에 들어와 있는 기분에 빠져든다. 길이 이어질 듯 끊어질 듯한 능선과 벼랑 사이를 한시간여 정신없이 더듬다 보면 좌측으로 꽤 큰 성문이 나타난다. 거리로 보면 청수동암문과 대서문의 중간쯤 되는데, 해발 521m지점에 위치하여 좌측 계곡으로 내려가면 삼천사와 진관사가 나오고, 오른쪽 계곡으로 내려가면 부왕사터가 나온다. 부왕동암문(扶旺洞暗門)은 원각문이라고도 불리는데, 중취봉 기슭의 험준한 능선에 잘 감추어져 있어 신비스럽기 그지없다. 암문중 제일 규모가 커서 폭은 16~54㎝, 높이는 53~81㎝ 차이를 보여 폭이 2.54m, 높이가 2.83m에 이르고 있다.

 

▶ 가사당암문
가사당암문(袈裟堂暗門)은 부왕동암문에서 중취봉과 용혈봉을 넘어 의상봉을 향하다 보면 해발 448m의 험한 능선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성밖으로 내려가면 중골이 나오고, 성내 계곡으로 내려가면 국녕사를 경유하여 성내 주차장이 나온다. 이문은 국녕문(國寧門)이라고도 불리며 규모나 구조에서 청수동암문과 흡사하다.

 

성내시설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산성내에는 많은 건물을 지었다. 위급시 왕의 피난처가 될 120여칸 규모의 행궁(行宮), 장수의 지휘본부로 쓸 3개소의 장대(將臺), 성을 관리하고 사무를 보기 위한 관성소(管城所)와 3개소의 유영(留營), 군량을 비축하기 위한 4개소의 창고(倉庫), 승병들을 유치하기 위하여 새로 지은 13개소의 사찰(寺刹), 병사들이 묵을 수 있도록 한 143개소의 성랑(城廊), 군마 병사들의 식수로 사용키 위한 99개의 우물과 26개소의 못 등 수백채의 건축물과 많은 시설물을 2년 6개월만에 건립하였다.
이처럼 적과 지구전을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도 미흡한 부분에 대한 보완사업은 계속되었다. 다시 산성내의 허리부분을 차단하는 중성(重城)을 축조하여 바깥은 외성(外城)으로 하고 안쪽은 내성(內城)으로하여 모든 중요시설물이 소재한 내성만은 어떠한 위급한 사태가 있어도 사수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세검정 서편에는 탕춘대성(蕩春臺城)을 추가로 축조하여 2중, 3중으로 시설 방어에 완벽을 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많은 시설물들은 불과 80여년 전 조선시대가 막을 내리기 전에만 해도 일반인은 접근하기 어려운 요충지였다.

 

▶ 행궁
행궁이란 왕이 전란시 몸을 피하여 임시로 거처하는 별궁(別宮)으로 이궁(離宮)이라고도 하는데, 북한산성에는 상원봉 아래 깊은 계곡에 터를 잡았다. 당시 행궁의 규모는 상당히 커서 내전과 외전을 합하여 120여칸에 이르는 웅장한 모습이었다.
대남문을 넘어 산성계곡을 따라 30분 정도 내려가다 보면 개울 좌측으로 제법 잘 다듬어 쌓은 거대한 석축과 함께 건물터가 나타난다. 이곳이 바로 성내에 설치한 창고중 가장 규모가 컸던 경리청 상창(經理廳上倉)과 호조창(戶曹倉)이 있었던 곳이다. 상창터를 왼쪽으로 끼고 상원봉을 향해 갈대와 풀섶을 헤치며 산기슭을 오르다 보면 10여개의 작은터가 계단식으로 배치되어 있다. 건물터를 헤아리며 계속 오르다 보면 왼편으로 잡목과 덩굴로 뒤섞인 밀림 속에 약 400평 정도의 넓은 터가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북한산성 행궁의 내정과 외전이 있었던 곳이다. 덩굴을 헤치고 남아 있는 유구를 찾아보면 내전에 이르는 돌계단과 정전의 기단석, 주춧돌들이 군데군데 풀숲에 묻혀 있어 폐허를 방불케하고 있으며, 뒤편에는 높이 1.2m, 길이 30m가량의 석단이 남아 있어 과거 행궁터였음을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은 개울과 접해 있는 관계로 암석을 파내고 지반을 돋우는 등 몹시 어려운 공사였다 하는데, 조정에서는 난공사임을 감안, 별도로 영건청(영건청)을 설치하고 축성감동당상(축성감동당상)인 호조판서 김우항과 공조판서 이언강을 주관당상으로 하고 호조와 공조의 양 낭관을 낭청으로 하여 축성의 공역과 함께 추진케 하였다. 재목은 지금의 은평구 진관내동 일대인 삼천동에서 벌채하여 송판, 서까래 등으로 사용하고 기와 굽는 데에도 이용하였다 한다.
행궁안에는 북한산 문고를 마련하여 조선시대 역대왕의 옥새와 금은 옥대, 의궤, 고문헌 등을 비밀리에 보관하여 오다가 행궁이 파괴될 때 규장각으로 이전하였으며, 도서는 현재 서울대학교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와 함께 전란에 대비하여 땅속에 비축하였던 돌소금과 목탄이 다량으로 발견되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 장대
장대란 장수의 지휘소로 사용하기 위하여 성내 지형중 높고 지휘, 관축이 용이한 곳에 설치한 건물을 말한다. 북한산성에는 각 군문별로 관할 구역내에 적정한 장소를 1개소씩 선정하여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 등 3개의 장대를 두었는데, 그 중 동장대의 규모가 제일 크고 공역 시에도 많은 자재와 인력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대동문에서 백운대 방향으로 등산로를 따라 산기슭을 오르다 보면 시단봉 정상에서 건물의 기단과 함께 쓰러진 여러개의 큰 돌기둥을 볼 수 있는데, 이곳이 북한산성의 최고 지휘본부로 쓰였던 동장대지(東將臺址)이다.
한편, 남장대와 북장대는 동장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작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나마 아예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다.
<북한지>에 따르면. "남장대는 나한봉 동북쪽에 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나한봉에서 능선을 타고 동북쪽으로 한동안 내려가다 보면 해발 678m지점에 너비가 5.4m되는 장방형의 건물터가 나타난다. 남장대는 행궁을 중심으로 동장대와 대칭되는 지점에 있어 기능 면에서 보면 최적의 위치라 아니할 수 없다. 이곳에서 주위를 살펴보면 전방에는 동장대와 대동문이 지척에 보이며, 오른쪽에는 대성문, 뒤에는 대남문과 청수동암문, 왼쪽으로는 보왕동암문, 계곡에는 행궁과 중흥사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훈련도감 관할에 있었던 북장대는 유구가 전혀 없어 정확한 지점조차 파악이 불가하다.

 

▶ 삼군문유영
북한산성이 완공되자 숙종 38년(1712) 산성수비와 시설물 관리를 효율적으로 전담할 정부차원의 기구시설이 절실하게 요청되었다. 이에 따라 경리청이란 주관부서를 설치하고 영의정이 도제조(수성대장)을 겸하고 제조관은 삼군문의 대장을 겸하도록 하였다. 삼군문이란 숙종 이후 서울 도성을 직접 방어하는 군영으로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을 말한다. 경리청은 본영을 도성 안에 두고 산성내에는 관성소와 삼군문유영을 설치하였으며, 관성장과 유영감관을 두어 관원을 감독하고 성내의 일을 총괄케 하는 한편 성내에는 1,000여명의 군병이 항상 주둔하였다.

 

1) 훈련도감유영(訓局 訓倉)
훈련도감 유영지는 노적봉의 거대한 수직 암벽 아래에 자리하고 있으며, 뒤로는 북장대가 있고 앞으로는 넓은 공간 아래로 중성문이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는 옛날에는 적석사라는 사찰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하는데, 주위의 지형이 특이하여 계곡에서 올려다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노적사를 통하여 언덕을 넘으면 골짜기 안에 거대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사람의 발길이 미치지 않아서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모습이다.
주위를 살펴보면 완벽하게 남아 있는 연못 깨끗하게 보존된 기단과 주춧돌 등 방금 전까지 건물이 있었던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며, 주위의 수목도 울창하여 늘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감돈다. 정교하게 축조한 6~8m높이의 석축위에는 가로 50㎝, 세로 25~35㎝ 규모의 터를 조성하였는데 약 500평 남짓해 보인다.
훈련도감유영은 당초 대청 18칸, 양곡창고 60칸, 무기고 16칸, 중군소 4칸, 낭청소 5칸, 서원청 5칸, 구류소 3칸, 행각 11칸을 두어 삼군문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고종 13년(1876)에 화약고의 실화로 보관되어 있던 화약 7,597근이 불탔다는 기록이 전한다.

 

2) 금위영유영(禁營, 禁倉)
어영청유영지에서 계곡을 따라 10분 정도 내려가면 밀집된 많은 건물 터가 발견되는데, 그 중에서도 개울 옆으로 거대한 석축과 함께 밀림처럼 온갖 잡풀로 뒤덮인 넓은 터가 바로 금위영유영지이다. 금위영유영지는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보국사라는 암자가 들어섰다가 없어졌기에 주민들은 대개 보국사지로 알고 있다(북한산성 축조시의 보국사가 아님). 그러나 이 곳에는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금위영이건기비(禁衛營移建記碑)가 위치하고 있음으로 금위영유영지임을 증명하고 있다.
금위영유영은 당초에 대청(大廳) 18칸, 내아(內衙) 6칸, 양곡창고 54칸, 무기고 13칸, 중군소 5칸, 면원청 4칸, 월랑 8칸 규모로 건립되었으나,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금위영이건기비를 비롯하여 여러 유구가 남아 있을 뿐이다. 가로 4m,세로 2m 크기의 건물 기단, 주춧돌 9개, 돌계단 2개소, 장대석 7개, 석누조 1개가 보이며, 산기슭에는 무너진 담장터가 남아 있다. 부근에 산재한 20~30평 규모의 부속건물터를 살펴보면, 둘레에 돌무더기로 담을 두른 것이 특색으로 대부분 건물 터였음을 알 수 있으나 일부는 개울과 접해 있는 것으로 보아 평시 물을 가두어 두는 저수지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3) 여영청유영(御營, 御倉)
대성문에서 성내를 살펴보면 가까운 계곡에 대성암이 자리하고 있는 꽤 넓은 터가 바라보인다. 건물 터를 살펴보면 가건물 형태의 암자에는 걸맞지 않은 오래된 석축, 주춧돌, 담 등이 발견되는데, 이곳이 바로 어영청유영지이다. 이곳은 폐허가 되어 방치되어 오던 것을 1950년대에 건물 터에 남아 있던 주춧돌과 석재를 의지하여 대성암을 건축,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며, 암자 측의 정성어린 관리로 그런 대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유영지는 개울 옆 산기슭에 1~3m 높이로 둥근 막돌을 이용 석축을 쌓아 730평 가량의 지반을 조성하였으며, 대지 뒤편으로 다시 2단의 석단을 쌓아 층을 이루게 하였다.
애초 여영청유영지에는 대청 18칸, 내아 7칸, 양곡창고 48칸, 무기고 10칸, 중군소 4칸, 서원청 2칸, 월랑 12칸이 있었다고 하며, 그중 양곡창고의 규모가 상당히 컸음을 말 수 있다.

 

산중승국(山中僧國)이던 북한산성


<북한지>는 조선 영조 21년(1745년)에 중흥사 주지이며 승영의 승대장으로 8도 도총섭을 겸했던 성능(성능)스님이 쓴 책이다. 이 책은 북한산성에 대한 자세한 기록으로 북한도 3장과 연혁, 장교, 사찰, 고적 등 14개 항목으로 편찬되어 있다. 장교편에 북한산성의 승영(승영)에 승대장 한 사람이 8도 도총섭을 겸하도록 했으며, 중군에 좌우별장 등 소임과 각 사찰에 승장 11명, 수승 11명을 두고, 350명의 의승을 각 도에서 분담하고 1년에 여섯 차례 교대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승영의 많은 승병들을 주둔 관리케 하기 위하여 절을 새로 지은 것이다. ,북한지에는 축성 전에도 문수사, 중흥사 외에도 용암사, 보국사, 보광사, 부왕사, 원각사, 국령사, 상문사, 서암사, 태고사, 진국사 등 10개의 절과 봉성암, 원효암 2개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북한산 주변의 절터로 향림사, 청량사, 승가사, 삼천사, 진관사, 도성암의 이름도 나온다.
따라서 당시에는 북한산이 불교 사찰 왕국이었고, 승병들의 주둔지로 산중승국(산중 스님의 나라)이었다. 그 뒤 제도의 변천과 불교탄압, 조선왕조의 몰락으로 산성 안 사찰들이 하나, 둘 쓰러지고 한국전쟁때 거의 없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왕성했던 불력이 산성 밖으로 퍼져나와 고려 8대 현종이 어릴 때 숨어서 죽음을 면했던 신혈사가 진관사의 이름으로 크게 번창해 있으며, 선조의 원 생가인 덕흥대원군가와 흥선대원군가의 원찰인 화계사에도 많은 명필 현판을 가지고 남연국 묘의 전설을 간직한 채 불자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고 있다. 또 비봉아래의 승가사, 우이동의 도선사, 기타 문수사, 삼천사, 태고사 등 북한산 주변 길목마다 수십 개의 사찰에 독경 소리와 향냄새가 끊이지 않고 있어 산중 승국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출처 : 대가야산악회
글쓴이 : 고령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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