浮石寺(부석사)에 대한 첫날
오전 답사를 끝낸 다음, 필자 일행과 동행했던 영주시 문화관광과 宋俊泰 학예사에게 영주에서 가장 특색 있는 향토음식점에서 점심을 하자고
제의했다. 그가 안내한 음식점이 順興面(순흥면) 읍내1리에 있는 「순흥전통묵집」이었다.
여기서 경북
영주시의 金鍾根 행정지원국장·권혁태 문화과장 등을 한꺼번에 조우하게 되었다. 그들도 이곳 가까이에 있는 소수서원에서 金晉榮 시장이 참석하는
관광객 맞이 행사에 참석한 뒤에 점심을 먹으러 왔다가 필자 일행과 합석하게 된 것이다.
가늘게 썬
도토리묵 채에다 밥을 비비는 묵밥은 양념장 맛과 어울려 고소하면서도 담백하다. 값 1인당 3500원. 여기다 동동주 한 사발까지 곁들이니 과연
별미다. 金국장은 『전통묵밥 팬들은 중앙선 기차를 타고 가다가도 일부러 하차하여 먹고 간다』는 둥 향토음식 자랑이 대단하다.
전통묵집에서 점심을 먹고 난 후 국보 제111호 晦軒影幀(회헌영정)을 모신 紹修書院(소수서원)으로 직행했다. 부석사가 좋긴
하지만, 마침 관광객이 몰리는 일요일이었고, 또 한꺼번에 오래 매달리면 오히려 판단이 흐려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날은 참으로 운수 좋은 날이었다. 문화재 담당 국장과 동행한 손님이어서 그랬겠지만, 필자 일행을
자원봉사자 權花子씨가 안내했다. 30代 주부인 그는 소수서원에 관해 대단히 요령 있게 설명해 주었다. 일류 안내자의 도움까지 받았던 만큼
우리나라 전통 書院의 참모습을 배울 수 있었다.
書院 뒤덮은 赤松 숲과 日本 국보
제1호 소수서원은 조선 中宗 37년(1542)에 豊基(풍기)군수 周世鵬(주세붕)이 우리나라 성리학의 祖宗인 회헌
安珦(안향) 선생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이듬해 白雲洞(백운동)서원을 세움으로써 출발했다. 당시 순흥은 풍기군에 병합되어 있었다. 원래 여기에
宿水寺(숙수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순흥에서 태어나 성장한 회헌 선생이 여기서 독학했다.
회헌
安珦(1243∼1306)은 특권화한 불교의 폐해로 온 나라가 흔들리던 고려왕조 말기에 통치기반의 안정을 위해 元나라에 가서 朱子學(주자학)을
배워 국내에 보급한 우리나라 최초의 성리학자다. 선생의 死後, 1318년 충숙왕은 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궁중의 화원에게 명하여 元나라 화공이
그린 선생의 영정을 모본으로 다시 그리게 했다. 그것이 현재 소수서원 內 영정각에 봉안되어 있다.
회헌
安珦은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都僉議中贊(도첨의중찬) 修文殿太學士(수문전태학사) 등 요직을 두루 거친 뒤, 全사재를 털어 육영재단
養賢庫(양현고)를 세우고 贍學錢(섬학전)을 마련, 인재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1392년 조선왕조가 개국되고 성리학이 국가의 통치이념이 되면서
그는 東方道學의 鼻祖(비조)로서 더욱 추앙받게 되었다. 시호는 文成公이다.
이 서원의 格을 한층 더 높인
분이 退溪 李滉(퇴계 이황)이다. 조선 明宗 4년(1549) 풍기군수에 재임중이던 퇴계는 백운동서원을 나라의 공식 교육기관으로 인정받기 위해
임금의 賜額(사액)을 요청했다. 그 이듬해, 明宗은 紹修書院이라는 편액과 전답, 서적 등을 하사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賜額서원이 되었다.
서원 입구에 들어서면 우선 赤松群落(적송군락)과 마주한다. 적송은 이름 그대로 겉과 속이 모두 붉다.
신라인들은 적송으로 불교의 메시아인 미륵을 빚어 냈다. 그 중 하나가 7세기 초 일본에 건너가 일본 國寶 제1호가 되었다.
신라가 기증한 日本 國寶 제1호 木造 彌勒半跏思惟像(미륵반가사유상)에 대해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일찍이 『진실로 완벽한
인간 실존의 최고 경지를 조금의 미혹도 없이 완벽하게 표현해 냈다』고 찬탄한 바 있다. 일본 땅에는 적송이 자라지 않는다. 영주 향토지엔 그것을
신라 때 이 고장(당시 奈己郡) 사람이 이 고장 적송으로 만든 것이라 쓰여 있다. 필자로선 확인은 어렵지만, 그럴 듯한 얘기다.
日本 國寶 제1호는 신라 때 만든 우리 國寶 제83호 金銅(금동) 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과 쌍둥이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메이드 인 신라」일 것 같다. 소백산 일대는 국내에서 가장 질 좋은 적송의 자생지다.
서원 창설자 周世鵬이 「敬」 자를 바위에 새긴
까닭 소수서원 경내는 수령 300년 이상 되는 적송 수백 그루와 오래된 은행나무 숲이
뒤덮고 있다. 이곳에선 적송을 「學者樹」(학자수)라고 부른다. 서원 학생들이 적송처럼 꿋꿋하게 자라 참 선비가 되라는 뜻에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숲속길 오른쪽으로 보물 제59호 宿水寺趾(숙수사지) 당간지주가 보인다. 통일신라 때
창건된 이 절은 조선조 世祖 3년(1457), 「官軍의 방화」로 폐허화했는데, 이곳이 숙수사의 옛터라는 사실을 이 당간지주 하나가 홀로 증명하고
있다.
이쯤에서 소수서원을 감싸고 흐르는 竹溪川(죽계천)의 맑은 물이 눈에 들어온다. 소백산을 발원지로
하는 죽계천은 낙동강의 원류 중 하나다.
세조 3년(1457) 10월, 端宗 復位(단종 복위)거사의
실패로, 그 본거지였던 순흥도호부의 백성들과 선비들은 토벌군에 의해 떼죽음을 당했다. 그 시신들이 죽계천에 수장되었고, 그 핏물이 20리 밖
안정면 동촌리까지 흘러가 그 동네를 지금도 「피끝마을」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이른바 丁丑之變(정축지변)이다.
죽계천 건너편 큰 바위에 새겨진 「敬」이라는 붉은 글씨가 눈길을 끈다. 敬이라면 유교의 근본사상인 敬天愛人(경천애인)에서
따온 것 같다. 서원의 창설자 周世鵬이 정축지변의 참상을 전해 듣고 그 원혼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직접 써서 陰刻(음각)과 붉은 칠을 하게 한
뒤 여기서 정성들여 제사 지냈다고 한다. 「敬」자 바로 위에는 「白雲洞」이라는 글자도 새겨 있는데, 이것은 퇴계의 글씨다.
숲속길이 끝나는 무렵에 죽계천변에 「景濂亭」(경렴정)이라 쓰인 참한 정자 하나가 서 있다. 1543년 周世鵬이 지었다고
한다. 현판의 글씨는 퇴계의 제자인 초서의 대가 黃耆老(황기로)가 썼다. 이제는 우리 전통적인 서원의 모습을 살필 차례다.
講學堂에 툇마루를 두른
까닭 소수서원의 대문인 紅箭門(홍전문: 홍살문) 바로 앞에 흙으로 돋운 壇(단) 하나가
보인다. 홍전문의 처마 밑에는 붉은 화살 모양의 장식을 달았다. 先賢(선현)의 위폐를 모시는 사당 또는 임금이 인정한 충신·효자·열녀 등을
배출한 마을에 세우는 旌閭門(정려문)이다.
홍전문을 지나면 동쪽에 門成公廟(문성공묘)가 있다. 文成公
안향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安軸(안축)·安輔(안보) 형제와 주세붕을 배향했다. 안축은 景幾體歌(경기체가)인 「關東別曲」(관동별곡)과
「竹溪別曲」(죽계별곡)을 지은 고려 말기의 저명한 문필가이며, 안보는 東京留守(동경유수:경주)를 지낸 대학자다. 이 祀廟(사묘)에선 매년 음력
3월과 9월의 초정일 文成公을 제향하고 있다.
문성공묘 서쪽에는 講學堂(강학당)이 있다. 이곳은 유생들이
모여서 강의를 듣던 곳이다. 배흘림기둥을 세운 건물 사방으로 툇마루를 빙 둘러 놓은 前廳後室(전청후실)의 양식이다. 강의실에서 공부하던 유생이
밖으로 나갈 때 감히 스승에게 등을 보이지 않고 뒷걸음을 쳐서 물러나도록 만든 구조인 것이다.
이렇게
서원에는 興學養士(흥학양사), 즉 학교 기능의 강학당 그리고 尊賢祭享(존현제향), 즉 제사 기능의 사당이 있다. 소수서원의 강학당과 사당의
배치는 좀 특이하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서원은 前學後廟(전학후묘)라 해서 학교를 앞세우고 사당을 뒤에
두는 중국식을 따르고 있지만, 소수서원은 동쪽에 학교, 서쪽에 사당을 둔 東學西廟(동학서묘)다.
사당과
강학당 구역 바로 뒤에는 直方齎(직방재)와 日新齎(일신재)란 현판이 붙은 건물 하나가 있다. 서쪽의 직방재는 소수서원의 원장, 동쪽의 일신재는
교수들의 숙소다. 그 중간방은 諸任(제임), 즉 행정요원들의 방이다.
그 서쪽에는 장서각이 있다.
오늘날의 대학도서관인데, 임금이 직접 지어 하사한 御製本(어제본)을 비롯, 3000여 권의 장서를 보관하던 곳이다. 서책은 座右之先(좌우지선)의
예에 따라 으뜸 자리에 둔다고 하여 스승 숙소보다 오른쪽에 세워진 것이다. 허헌영정은 장서각 뒤편 영정각에 봉안되어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뒤에
다시 쓸 것이다.
원장실과 교수실 뒤로는 學求齋(학구재)와 至樂齋(지락재)가 있는데, 유생들의 기숙사다.
학문을 상징하는 「三」을 취하여 세 칸으로 지었고, 공부 잘하라는 뜻으로 건물 立面이 「工」 자로 되어 있다.
학생은 스승의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에 따라 두 채의 학생기숙사가 원장실과 교수실 구역에서 훨씬 물러나 동쪽으로
치우쳐 세워져 있는 점도 흥미롭다. 제자는 스승의 발치 바로 밑에서도 잠들 수 없는 것이다.
大人君子의 온화함 표현한
걸작 서원 마당엔 해시계가 설치된 日影臺(일영대), 서원 사람들의 밤나들이를 위해 관솔불을 켜놓았던
庭燎臺(정료대)도 있다. 또 서원 담벼락 밖 죽계천변에는 『滄浪(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纓)을 씻는다(濯)』는 맹자의 말씀을 좇아 망명한
濯纓臺(탁영대), 柳雲龍(류운룡: 임진왜란 당시의 名재상 柳成龍의 친형)이 이곳 풍기군수 시절에 판 연못 濁淸池(탁청지) 등이 있다.
회헌영정은 좌측 30도 각도에서 그린 반신상이다. 서원 창설 초에 위패와 함께 봉안되었다. 창설자
주세붕은 「安文成公遺像跋文」(안문성공유상발문)에서 그 경과와 첫 참배 때의 감상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遺像=影幀).
<公의 유상은 본래 순흥부 향교에 있었는데, 丁丑之變으로 순흥부가 폐지되면서 서울에 있는 회헌 宗家로 옮겨졌다. 내가
앞서 公의 종손인 前 注書(주서:승정원의 정7품 벼슬) 安珽(안정)의 집에서 영정에 참배하며 바라보매 엄엄하고 가까이하면 온화하여, 실로
大人君子의 모습이어서 마음에 직접 뵙는 듯하여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았다>
영정에 나타난 안향 선생은
낮고 검은 儒巾(유건)에 주황색 도포 차림이다. 눈은 동그란 편이며 눈썹은 한 一字 형인데, 미간이 넓다. 코는 곧고 입술은 단정하며 수염은
부드럽게 흐르고 있다. 다음은 다시 주세붕의 발문.
<계묘년(中宗 38년=1543년) 3월, 公의
증손이 사당 건립 소식을 듣고 영정을 모시고 내려와 임시로 고을 서쪽 다락에 모셨다가, 그해 8월 비로소 새 사당에 봉안했다. …사당에 봉안하는
날 父老子弟 백여 명이 목욕재계하고 조심히 맞이했으며, 온 城中이 나서서 보았으니 실로 士林의 盛事(성사)였다. 내내토록 公의 사당을 공경하여
받들면 우리 儒道를 떨쳐일으킴에 보탬이 크리라>
안향 선생은 충렬왕 12년(1286) 왕을 호종하여
원나라에 들어가 朱子學을 깊이 연구하여 원의 順帝(순제)에 의해 安子로 칭송되었다. 귀국시에는 朱子全書(주자전서)를 필사하여 국내에 널리
전했다. 이로써 종래엔 訓♥(훈고)·記誦(기송)에만 주력해 오던 우리 儒學(유학)이 철학과 실천의 학문으로 도약한 것이다.
회헌영정을 그린 年代 둘러싼
시비 회헌영정에는 회헌의 아들 于器(우기)의 讚記(찬기)가 적혀 있어 그 조성연대가 확실한 것으로 보였다.
찬기에서는 충숙왕 5년(1318년)에 그려졌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의문도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회헌實記에는 「李退溪가 풍기군수일 무렵(明宗 3∼4년) 그 영정은 이미 몹시 낡아 헤어지고 떨어져 본모습을 알아보기 어렵게 된 지경이라, 그
본모습을 잃을까 두려워, 영정에 채색을 덧입혔다」는 구절이 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명종 13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張文輔(장문보)도 예조판서 沈通源(심통원)에게 보낸 私信에서 『지금 고쳐 꾸미지 않으면 방불한 형용이 아주 없어질까 두렵다』고
걱정하면서 대책을 가르쳐 달라고 간청하고 있다.
다음은 沈通源의 회답.
<安文成公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비조이며, 조정의 대신입니다. 후인들이 사모하여 우러를 것은 다만 遺像(유상)인데,
그같이 낡아서 형용을 잃을 지경이라면, 어찌 자손된 이들만의 한스러움이겠습니까. 마침 솜씨 높은 畵員 李不害(이불해)가 集慶殿(집경전)의 그림
일로 경주에 가 있는데…그리로 가게 하려니와 거기서도 소수서원 원장과 의논해서 정중한 인사와 후한 예물로 간청하면 마음껏 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昇平文獻錄)
그러나 장문보 군수는 곧 친상을 당해 귀향하고 후임으로 朴承任이 부임했다.
박승임도 이듬해인 명종 14년(1559) 경상감사 李戡(이감)에게 회헌영정 改修(개수)의 필요성을 보고했다. 이 보고가 예조에 移文(이문)되고,
예조는 『화원 이불해를 역마에 태워 내려보내 그리게 하여 길이 전하도록 함이 어떠하올지』라고 상주, 임금의 윤허를 받았다. 한 미술사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의 영정이 충숙왕 5년에 조성된 본래의 것이 확실하다는 주장은 그림 위에 적힌 찬기를
근거로 삼는가 보지만, 그것은 이불해가 다시 그리면서 본래대로 옮겨 썼을 수도 있는 것이며, 응당 그랬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혹 개수하노라는
記文을 붙일 수도 있었을 것이나 숭엄한 영정이라 감히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그림과 글씨에 빼어난 데다
해박한 학식을 겸하여, 저 安堅(안견)에 버금가는 명종-선조 때의 거장 이불해의 그림으로 봄이 마땅한 것으로 여긴다.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중요
문화재가 만일에라도 그 유래가 잘못 알려지고 있다면, 이는 심상히 여길 문제가 아니다. 모름지기 재조명으로 확실한 고증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학구재 뒤편에 있는 유물전시관도 둘러볼 만하다. 이곳엔 목판, 현판, 간찰, 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보물
제485호) 등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특히 보물 제717호 周世鵬 영정이 볼 만하다. 얼굴이 대단히 호걸스러운데, 조선왕조 최초의
사립대학 소수서원의 설립자인 그는 우리나라 인삼의 始培者(시배자)이기도 하다.
世祖에 반대한 殉節충신들의
祭壇 周世鵬 풍기군수는 고을 백성들이 나라에 공물로 바치는 山蔘(산삼) 때문에 고통이 심한 것을 알고 소백산에서
산삼 종자를 채취하여 처음으로 인공재배를 장려하여 貢蔘(공삼)의 폐단을 줄여 준 후덕한 목민관이었다. 풍기에서 처음으로 재배삼을 성공시킨 그는
그후 황해도관찰사 재직시에도 송악산에서 산삼 종자를 채취, 시험재배하여 개성을 제2의 인삼고을로 만든 장본인이다.
소수서원 입구에서 죽계천 위에 걸린 다리(제월교) 하나만 건너면 錦城壇(금성단)이다. 퇴계가 명명한 霽月橋(제월교)는
부석사로 가는 931번 지방도를 이어 주는데, 이곳 사람들은 쉽게 「청다리」라고 부른다.
금성단은
순흥도호부 선비와 부민들을 대거 역당으로 몰아 죽여 소수서원을 끼고 도는 죽계천을 피로 물들게 한 세조 3년(1457) 정축지변과 연관된
유적이다. 소수서원을 국내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격상시키고 순흥부를 다시 설치하고 「선비의 고장」으로 칭송한 것도 순흥사람에 대한 조선왕조 차원의
유화정책으로 보인다.
錦城檀 안에는 壇 세 개가 있다. 상단은 錦城大君(금성대군), 우단은 순흥부사
李甫欽(이보흠), 좌단은 여러 殉節義士(순절의사)들의 제단이다. 그렇다면 소백산 남쪽 기슭과 世宗 임금의 여섯째 왕자인 금성대군은 어떤 인연이
있는 것일까.
단종은 1452년 父王 문종의 승하로 불과 열두 살의 나이로 즉위했으나 1455년 숙부
首陽大君(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해 上王으로 물러났다. 수양대군이 곧 世祖다. 세조 2년(1456), 死六臣의 단종 복위모의사건이 일어나고
여기에 연루된 금성대군은 유배처를 떠돌다가 마침내 소백산 남쪽 기슭의 순흥으로 귀양처를 옮겨 오게 된다.
세조 3년, 上王 단종은 다시 魯山君(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 단종은 바로 소백산 너머 강원도 영월땅 淸冷浦(청령포)로 유배를 왔다. 순흥과는
산 하나 사이를 둔 위치다. 금성대군은 심복을 소백산 북쪽의 청령포에 보내 단종과 가만히 접촉하게 했다.
드디어 금성대군은 순흥도호부사 李甫欽과 의기투합했다. 李甫欽은 세종 8년(1416)에 문과에 급제하자 곧 집현전 박사에 오른 학자였으며
實用(실용)을 중시한 强骨(강골)의 名官이었다. 또한 貢法(공법)의 폐지와 축성법 개선에 관한 상소, 빈민구제를 위한 社倉法(사창법) 시범실시
등 개혁정책에 힘쓴 뛰어난 목민관이었다.
端宗을 모시고 竹嶺과 鳥嶺을 막으려
했다 거사 계획은 순흥 군사를 동원, 단종을 맞아서 鷄立嶺(계립령)을 넘어 순흥에 옮겨
모시고, 영남을 호령하여 鳥嶺(조령)과 竹嶺(죽령)의 두 요충지를 막은 다음, 전국의 義士들에게 궐기를 재촉하는 격문을 보내 天下大義를 밝히고
전국의 義軍과 함께 世祖 정권을 무너뜨려 단종을 복위시킨다는 것이었다. 비록 귀양살이를 했지만, 왕자의 신분으로서 상당한 재력이 있었던 금성은
무사로 쓸 만한 사람이면 값진 물건을 주어 심복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금성대군과 이보흠은
좌우를 물리치고 밀담을 나눈 끝에 이보흠이 영남 각지에 보낼 격문을 지었다. 이런 모의를 순흥부의 及唱(급창)인 이동이라는 자가 몰래 벽장 속에
숨어 엿들었다. 급창이라면 고을 원의 명령을 받아 큰 소리로 전달하는 관노다.
이동은 평소 내통하던
금성대군의 시녀에게 『격문을 증거물로 훔쳐 조정에 바치면 큰 상을 받아 팔자를 고칠 수 있다』고 꾀었다. 시녀는 격문 몇 장을 훔쳐 이동에게
넘겼다.
이동은 격문을 깊이 간직한 뒤 서울을 향한 450리 길로 튀었다. 격문이 없어진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금성대군과 이보흠은 基川(기천: 지금의 풍기) 현감에게 말을 타고 뒤쫓게 했다. 역마 서너 필을 갈아 타고 달려간 기천현감은 이동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그러나 격문을 빼앗아 읽어본 그의 생각이 달라졌다. 그는 닫는 말에 채찍질하여 서울에 입성, 역모를 고변해 버리고 말았다.
『여우와 쥐 같은 놈들의
붓장난』 드디어 살육사태가 빚어졌다. 조정은 정3품관이 수령이던 安東대도호부 군사를
주력으로 삼고 인근 예천, 영천 군사를 움직여 순흥도호부를 덮쳤다. 순흥향토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어느 날 한 밤중에 관군의 습격을 받은 순흥부는 미쳐 손 쓸 겨를도 없이 무너져버렸다. (거사계획) 주역들은 물론 순흥 백성은 송두리째
도륙되었으며, 고을은 불바다 피바다가 되었다. 고을 주변 30리에는 사람 그림자는 물론 개와 닭 울음소리조차 끊겨져 하루 아침에 폐허가
되었다>
금성대군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보흠도 귀양 가서 교살되었다. 이 사건을 빌미로 삼은 世祖
정권의 반대파 탄압은 악독했다. 단종의 장인 宋玹壽(송현수)와 그 부인 閔씨를 목졸라 죽였다. 단종의 누님인 경혜공주는 관비로 삼아 진주로
보내고, 그 남편 鄭悰(정종)도 죽였다.
세조의 이복동생인 漢南君(한남군) 어와 永豊君(영풍군) 선은
그들의 어머니 惠嬪(혜빈) 楊씨와 함께 죽임을 당했다. 혜빈 양씨는 출생 후 이틀 만에 어머니를 잃은 단종에게 젖을 먹이고 키운 분이다.
노산군은 庶人(서인)으로 다시 강등당했는데, 그것도 잠시요, 곧 교살되었다. 사약을 가지고 내려간
금부도사가 차마 그 사유를 아뢰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통인(고을 원의 심부름을 맡은 관노) 하나가 죽이겠다고 자청했다. 통인은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등 뒤에서 단종의 목을 옭아 잡아당겼다. 그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세조의 治世 14년
중에 실제로 볼 만한 업적도 없지는 않았다. 단종실록과 세조실록을 보면 세조는 왕가와 나라의 위기를 구한 不世出의 영웅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이건 世祖에게 붙었던 자들이 편수했던 것인 만큼 믿을 것이 못 된다.
李肯翊(이긍익)은 그의
練藜室記述(연려실기술)에서 『이것은 당시의 여우와 쥐같은 놈들의 간악하고 아첨하는 붓장난이다』라고 엄정하게 경계하고 있다. 어린 조카와 충신들을
무참하게 제거하고 성립된 세조 정권은 조선왕조의 정통성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반면 순흥은 「충절의 고장」이 되었다.
세조실록에는 「순흥을 풍기군에 부속시킨다」고 되어 있지만, 실은 榮川(영천: 지금의 榮州市 도시지역),
基川(지금의 풍기읍), 봉화에 나누어 붙였다.
순흥은 폐부된 지 227년 만인 숙종 9년(1683)에
도호부가 復設(복설)되어 명예를 회복했다. 숙종 24년에는 노산군이 단종대왕으로 복위되고, 그 무덤도 莊陵(장릉)으로 격상되었다. 영조
14년(1738)에는 금성대군과 이보흠이 복권되었다. 이때 이보흠은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금성단
서북쪽에는 「鴨脚樹」(압각수)라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수백년 된 이 고목의 잎이 오리발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압각수는 정축지변 때 고사했다가 순흥도호부가 복설되자 재생했다고 전해진다. 순흥과 흥망성쇠를 함께한 나무다.
금성단 인근 동네는 「충절의 마을」이라고 하여 현재 院檀村(원단촌)이라고 불리고 있다. 영주시는 소수서원 동쪽에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재현한 선비촌을 수백억원을 들여 조성하고 있다. 선비촌에는 박물관, 수련원, 그리고 순례객을 위한 전통 숙박시설·음식점 등이 들어서고
있다. 공정의 80%가 진행된 상태다.
경쟁력은 소백산의 맑은 물과
공기 소수서원과 금성단 취재를 일단 마친 필자 일행은 영주시 이산면 석포리에 있는
黑石寺(흑석사)로 이동했다. 흑석사는 국보 제282호 「木造 아미타불坐像 및 腹藏(복장) 유물」을 모시고 있는 절이다. 답사 첫날인 이 날
영주시의 송준태 학예사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동행해 주었기 때문에 취재가 날랠 수 있었다.
소수서원에서 50리 길인 영주역 앞으로 다시 나와 여기서 36번 국도를 달리다 다 중도에서 10번 지방도로 진입하여 좀 가다 보면 길가에 흑석사
진입로를 표시한 안내판이 서 있다. 흑석사에 도착하여 경내를 둘러보고 극락보전에 봉안한 아미타불좌상도 배견했다.
극락보전 안은 어두웠고, 스님도 없었다. 필자가 플래시를 들고 李부장의 촬영을 도왔지만, 방탄유리 안에 모신 木佛(목불)의
사진이 어찌 나올지 걱정스러웠다. 흑석사에는 이번 답사 사흘째 다시 찾아와 심층취재를 하게 되므로 이 글의 뒤편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밖으로 나오니 짧은 겨울해가 꼴깍 넘어가 주위가 벌써 컴컴하다. 필자 일행은 다시 영주역 앞으로 20리
길을 되돌아 나왔다. 영주에 온 김에 영주가 자랑하는 쇠고기를 한번 맛보고 싶다고 했더니 宋학예사는 역 부근 휴천2동에 있는 「청우숯불가든」으로
데려다 주었다. 필자는 평소 상호 중에 「가든」이 포함된 음식점엔 발걸음을 끊어 왔지만,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셋이서 쇠고기 안심 4인분(1인분 1만2000원)을 주문하여 숯불에 구워 먹으니 단맛이 났다. 『이곳 소도 수입사료를 먹고
자랄 터인데, 왜 단맛이 나느냐』고 물었더니 宋학예사는 『소백산의 맑은 물과 공기 때문인 것 같다』고 답했다. 영주 韓牛는 서울공판장에서 전국
쇠고기 중 육질이 가장 좋다는 판정을 받고 있다고 한다. 기분 좋을 만하게 소주까지 곁들인 李부장과 필자는 宋학예사와 헤어져 영주호텔에 들었다.
2인 1박 4만원.
崔淳雨의 「사무치는
고마움」 답사 이틀째, 오전 7시에 영주호텔을 나선 필자 일행은 영주역 앞 해장국집 「만당」으로 직행했다. 호텔
프런트에서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전주 삼백집의 콩나물 해장국이나 진주 중앙식당의 뼈다귀 국물 해장국도 좋지만, 이곳 만당의 매운
콩나물해장국도 버금갈 만하다. 값 3500원.
해장국집을 나와 부석사를 다시 찾아갔다. 한겨울 월요일
아침의 부석사는 관광객이 몰려왔던 전날인 일요일과는 딴판으로 山寺의 고요함, 그대로였다. 총무 藤悟(등오) 스님을 만나 깔끔한 승방에서 차 한
잔을 대접받으면서 부석사의 사적에 관해 담론했다.
등오 스님은 『나도 여기 와서 崔淳雨(최순우) 선생의
글을 읽고 「사무치는 고마움」이란 말의 의미를 배웠다』고 말했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故 최순우 선생이 남긴 수필 「부석사 무량수전」의 맨
앞 귀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 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안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안양루에 올라 첩첩히 겹친 먼 산들의 그림 같은 실루엣을
바라보니 그 모든 것은 무량수전을 꾸미는 하나의 넓고 넓은 무대다. 필자도 이 절터를 잡은 義相 스님에게 「사무치는 고마움」을 느꼈다.
전날엔 국보 제18호 무량수전의 내부 사진촬영을 제지당했는데, 총무 스님의 호의로 李부장은 무량수전 내부
架構(가구)는 물론 국보 제45호 조소여래좌상도 촬영했다. 보수작업중인 국보 제46호 조사당 벽화의 사진자료도 보여 주었다.
범종루 옆 약수터까지 내려와 安養樓를 바라보면서 공간의 절묘한 활용에 놀랐다. 그 처마 밑 ♥包(공포)와 공포 사이의
空間(공간) 6군데가 모두 부처님 형상을 하고 있다.
바로 뒤편 무량수전의 노란 벽면이 6개의 공간의
안쪽을 채워 여섯 구의 黃色 坐佛(황색 좌불)이 또렷한 형태를 나타낸다.
이렇게 부석사는 겉으론 人工美를
배제하는 척하면서도 실은 디테일 하나하나에 정성스럽게 인공을 들인 초일류의 예술품이다. 부석사 답사기는 이미 前回에서 썼으므로 여기서 더 이상의
언급은 생략한다.
赤城은 新設 고속도 丹陽휴게소 바로
뒷산 부석사를 나와 국보 제198호 赤城碑(적성비)가 있는 충북 丹陽(단양)을 향해 출발했다.
부석면-단산면-순흥면-풍기읍에 이르는 931번 지방도는 볼거리가 많다. 부석면 사거리 바로 아래는 외가리 도래지, 단산면에는 고려 세 임금의
태를 묻은 태장마을, 순흥면에는 순흥항교·초암사·읍내리벽화고분, 풍기읍에는 인삼시장이 있다.
풍기IC로
들어 중앙고속국도를 달려 죽령터널을 지나니까 곧 단양IC. 단양IC를 빠져나와 남한강을 끼고 5번국도를 달리다 단양교를 건너 단성면 면사무소를
지나니 충주호 수몰지구가 나타난다. 호수 속으로 마을 하나가 통째로 들어가 갑자기 먹이가 많아지는 바람에 크게 늘어난 물고기를 겨냥, 휴일이면
낚시꾼이 몰려드는 곳이다.
단성면 면사무소에서 400m 쯤 전진하면 단양농협 단성지소. 여기서 우회전하여
동네 사이로 뚫린 좁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고 단성면 수몰이주기념관 옆길을 돌아, 다시 중앙고속국도 위로 놓인 다리를 건너가는 등 꽤 복잡한
2km의 경로를 거치면 마주 보이는 산 위로 사적 제265호 赤城(적성: 벌재)의 성벽이 보인다. 알고보니 赤城은 중앙고속도로 상행선
단양휴게소의 바로 뒷산이다.
편한 길(중앙고속국도)을 몇 십리만 내쳐 달려 승용차를 단양휴게소 주차장에
세워 두고 적성에 올랐으면 좋았을 걸, 이렇게 애둘러 오며 헤맬 게 뭐람! 최신판 교통관광지도에도 단양휴게소가 표시되어 있지 않은 바람에 빚어진
해프닝이었다.
단양휴게소 뒤편 적성 자락에 이르니 날씨도 차고 걷기도 싫어 승차한 채로 승용차 한 대가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산길을 오를 수 있는 데까지 올라갔다. 赤城碑(적성비)를 500m 앞두고 아뿔사! 길은 끊어지고 차를 돌릴 공간조차
없다. 산쪽으로 차바퀴를 밀어올려 회전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려고 해도 비탈지고 미끄러워 어림도 없다. 삽질을 해야 될 것 같은데 삽은 또
어디서 구한담! 이럴 땐 잊어버리고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는 것이 상책이다.
眞興王의 긍지가 배인
척경비 우선, 승용차를 그대로 세워둔 채 산길 500m를 올라 國寶 제198호 적성비를
찾아갔다. 赤城 서북쪽에 적성비가 세워져 있다.
1978년 단국대학교 답사반에 의해 발굴된 이 비석은
진흥왕 11년(550) 전후한 시기에 중흥기를 이룬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단양 땅을 탈취하여 성을 쌓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三國史記에 나타난 그 무렵 신라군의 북진 상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진흥왕 11년 봄 정월,
백제가 고구려의 道薩城(도살성)을 빼앗았다. 3월, 고구려가 백제의 金峴城(금현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두 나라 군사가 피곤함을 틈타 이찬(신라
17관등 중 두 번째) 異斯夫(이사부)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두 성을 빼앗아 더욱 높이 쌓았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단에 치우쳐 있어 오랫동안 정치적·군사적으로 후진성을 면치 못했다. 따라서 北進은 곧 팽창기 신라의
국가목표였다. 신라의 北進은 두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그 하나는 상주-점촌-문경-계립령-충주의 西方路였고, 다른 하나는 영주-풍기-죽령-단양의
東方路였다. 신라는 고구려의 세력이 비교적 약한 東方路 진출에 주력했다.
진흥왕 11년은 서기 550년.
이 시기에 신라군은 소백산을 넘어 단양 지역으로 진출했다. 신라 진흥왕은 고구려군의 南進을 막고 적성에다 北進을 위한 전진기지를 둔 것이다.
이제 고구려는 한강 상류로부터 그 영향력을 잃기 시작했다.
적성비는 자연석 화강암에 글자를 새긴 것인데,
세 조각으로 갈라진 판석 중 아랫 부분 두 조각만 발견되어 복원되었을 뿐 상단부는 찾지 못했다. 碑身(비신) 위쪽이 떨어져 나가 정확한 설치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물론 북한산 순수비(국보 제3호)나 창녕 척경비(국보 제33호)보다 앞선 것이다.
글씨는 화강암의 반반한 면에 얕게 음각되어 있다. 글자수는 당초 400여 자였던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모두 288자이다. 그
내용은 당시 신라의 拓境(척경) 방식과 법률제도, 호적 기재 방법 등에 관한 것, 그리고 異斯夫, 居柒夫(거칠부), 武力 등 丹陽 점령 주역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받침돌과 지붕돌은 사라졌다. 거의 원반형 쑥돌로 되어 있는 碑身은 높이 93cm,
너비 107cm, 중앙 두께 25cm. 글씨는 해세체에 가깝고 모두 22행이다.
진흥왕 12년(551),
신라는 開國이라는 연호를 세웠다. 이후, 진흥왕의 북진은 더욱 눈부셨다. 다음은 이어지는 삼국사기의 요약.
<진흥왕 12년 3월, 왕이 국내를 순행하던 중 娘城(낭성: 충주)에 이르렀다. 가야국 출신 음악가로 이름 높은
于勒(우륵)과 그의 제자가 근처인 國原城(국원성: 충주)에 있다는 말을 듣고 낭성으로 불러 그들이 새로 지은 노래를 연주하게 했다>
위의 기록을 보면 신라군은 단양의 북쪽인 충주까지 점령했음을 알 수 있다. 진흥왕의 충주에 순행은 이곳이
신라 영토임을 대내외에 선언한 것을 의미한다. 이어 신라는 죽령 이북 10개 郡을 攻取(공취)했다. 신라와 군사동맹을 맺은 백제도 한강 하류의
故土 6개 郡을 탈환했다. 공동의 적국 고구려가 패퇴하자 이번에는 신라와 백제의 군사동맹이 깨졌다. 다시 三國史記 기사의 요약.
<진흥왕 14년 7월, 백제의 東과 北의 변읍을 빼앗아 新州를 설치하고, 아찬(17관등 중 제6위)
武力을 軍主로 삼았다>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탈환한 한강 하류 6개 군까지 신라가 뺏은 것이다.
신주의 군주 武力은 삼국통일의 원훈 金庾信(김유신)의 조부다. 금관가야 마지막 임금 仇衡王(구형왕)의 아들인 武力은 이때 비로소 軍管區(군관구)
사령관의 지위에 오른 셈이다.
<진흥왕 15년(554) 겨울, 백제 제26대 聖王이 加良(가량:
대가야)와 함께 管山城(관산성:충북 보은)을 공격해 오니 軍主 각간(신라 17관등 중 제1위) 于德, 이찬 耽知 등이 불리하여 新州의 군주
武力이 州兵을 이끌고 달려왔다. 싸움이 시작되자 武力의 비장인 都刀가 급히 공격하여 성왕을 죽였다. 이에 여러 군사가 승세를 타 크게 이기고
좌평(백제 16관등 중 첫째) 4명, 사졸 2만9600명을 베어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했다>
신라의 배신을 응징하려던 백제 聖王이 오히려 敗死한 것이다. 신라는 백제로부터 황해직선항로를 탈취하여 중국과의 직접 교섭도 가능해졌다. 다시
삼국사기의 기록.
<진흥왕 16년(555) 겨울, 진흥왕은 北漢山(북한산)을 순행하고, 이곳을
고구려와의 경계로 정했다>
진흥왕은 한반도 핵심지역인 한강유역 확보의 기념물로서 순수비를 세웠다.
그것이 국보 제3호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다(국보기행 제1회 참조).
적성비 답사에 이어 바로 동쪽의 사적
제265호 적성의 성벽 위를 걸었다. 적성의 東門 부근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소백산과 南漢江 일대가 손에 잡힐 듯하다. 충주호는 물론 멀리
도담삼봉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과연 北進의 기지가 될 만한 지형이다.
적성에서 내려와 길가의 깊은 하수도
밑바닥으로 추락할세라 승용차를 300m쯤 조심조심 후진시켜 단양휴게소 철조망 옆 빈터까지 내려왔다. 여기에 승용차를 세워두고 사람만 통과할 수
있는 쪽문을 통해 휴게소로 들어가 뜨거운 커피 한 잔으로 얼어붙은 몸을 풀었다.
사랑이란 영원하지도
않더라 귀로엔 죽령 옛길을 넘어 다시 영주에 들어가기로 했다. 단양교를 건너 5번국도로
길을 잡아 20리만 달리면 곧 충청도와 경상도를 가르는 죽령(689m)이다.
고속도로가 뚫린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죽령 옛길은 소박데기가 되어 있었다. 한동안은 마주 오는 앞차도 따라오는 뒤차도 없어 길을 전세 낸 기분이었다. 옛길은 4차선으로
확장되어 있고 새로 포장한 지도 몇 개월 되지 않은 것 같다.
적설을 적당히 머리에 인 소백산은 겨울산의
호젓한 맛을 眞景(진경)으로 보여준다. 李부장은 『水墨淡彩(수묵담채)의 山水畵(산수화), 바로 그것』이라고 표현했다. 죽령휴게소에 들러보니 불이
꺼져 있다. 길손이 끊겨 장사가 안되는 바람에 철시한 것 같다.
표지판에 「청풍명월의 고장」(충북),
「선비의 고장」(경북)이라 쓰인 道界(도계) 바로 아래에 있는 죽령주막도 「불 꺼진 창」이었다. 삼국사기에는 『아달라왕 5년(158)에 죽령의
길을 열었다』고 쓰여 있다. 그렇다면 이 길은 2000년의 세월 동안 한반도 동남지역 교통의 대동맥이 아니었던가? 그런 길도 사랑처럼 영원하지가
않다.
굽이굽이 산길을 내려오니 영남 제일의 희방폭포(높이 28m)와 희방사로 가는 등산로가 보인다.
여기가 무박 3일 소백산 橫走(횡주)의 스타트라인이다. 5번 국도 아래로 중앙선의 喜方寺驛(희방사역)이 앉아 있다.
5번 국도로 따라 조금 내려오니 길 왼쪽 넓은 부지에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소백산풍기온천」이 들어서 있다. 550명이
동시 입욕이 가능하다는 영주市營 욕장이다. 뒷산에는 눈이 소복하게 쌓였는데, 그 품 속에서 온천욕을 즐기는 일이 로맨틱하지 않을 리 없다. 1인
입욕 요금 4000원.
「알카리性 유황온천」이라 하더니 과연 소문처럼 온천수가 미끈미끈했다. 아직
숙박시설은 갖춰져 있지 않다. 목욕을 마친 후 잠자리를 구하기 위해 5번 국도로 다시 좀 내려와 풍기읍 중심가에 있는 풍기호텔에 들었다.
2인1실에 5만원. 짐을 푼 뒤 풍기읍의 유명음식점인 풍기역 앞 「서부냉면」을 찾아가 저녁을 먹었다.
황해도 출신인 서부식당 여주인은 이 지역에 의외로 황해도 사람 등 이북 출신이 많다고 말했다. 이중환의 擇里志(택리지)에 전란을 피해 잘 살 수
있는 10개 고을, 즉 十勝之地(십승지지)의 첫째 고을로 풍기를 손꼽았기 때문에 많은 이북사람들이 이곳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頂骨사리
틀림없다』 답사 3일째 아침밥도 거른 채 풍기읍에서 50리 길을 달려 영주시로
들어갔다. 영주역 앞 해장국집 만당에 다시 가기 위해서였다. 조식 후 곧장 영주시청 문화관광과에 들렀다. 여기서 宋俊泰 학예사를 만나 여러
자료들을 얻었다. 그리고는 이틀 전에 찾아갔던 이산면 석포리 소재 黑石寺를 再방문했다.
흑석사는 겉보기에
의외로 초라한 절이다. 흑석사가 세인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10년 전, 조선 초기 왕실에서 시주한 목조 불상과 부처님의 頂骨(정골:
이마뼈)사리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흑석사 木造아미타불좌상 및 복장 유물」로서 곧 국보 제282호로 지정되었다.
이 木佛坐像은 원래 정암산 法泉寺에 봉안했던 것인데, 6·25 전쟁 중 전란을 피해 김상호 스님이 등에 업어서 흑석사로
옮겨온 것이라 한다. 「정암산 법천사」가 강원도 원주의 「明鳳山 법천사」의 잘못인 것 같지만, 이를 확인해 줄 수 있는 주지스님이 장기간 출타
중이었다. 당시 흑석사는 폐허 상태였다. 김상호 스님이 법당을 지어 목불좌상을 모시고 흑석사의 주지가 된 起然 스님이다.
국보로 지정되기까지의 사연은 매우 드라마틱하다. 1993년 4월, 법당內 목조 불상의 복장(몸 안)에서 世宗의 둘째형인
孝寧大君(효령대군)의 낙관이 찍힌 腹藏記(복장기)와 함께 부처님의 정골사리, 법화경, 목판, 다라니, 거의 원형에 가까운 다섯 가지 곡식 등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당시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西庵(서암) 스님은 『사리는 희귀한 석가여래 眞身정골사리가 틀림없다』고 말했다.
8等身 美人 만나 황홀
黑石寺 목조불 아미타불좌상은 細柳美人形(세류미인형)이다. 다른 불상처럼 풍만한 체수가 아니다. 얼굴 역시 길고 갸름하다.
몸매도 늘씬하고 손가락도 셈세하다. 마치 현대판 8등신 美人像을 보는 것 같다.
아미타불은 중생이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여섯 자 명호만 외워도 成佛시켜 극락정토에 이끈다는 마음씨 고운 부처다. 排佛崇儒(배불숭유)의 나라 조선왕조에서 어떻게 왜
이다지도 아름다운 불상을 만들었까. 보존상태도 아주 좋다.
세종 3년(1457) 이 불상을 조성하는 데
시주한 사람은 의빈 權씨, 명빈 金씨, 그리고 太宗의 둘째 왕자 효령대군이다. 효령대군이라면 태종이 난봉을 일삼던 세자 讓寧大君(양녕대군)을
내칠 때 은근히 세자 자리를 기대하고 있었으나 태종의 의중이 셋째 왕자 忠寧大君(충녕대군)에 있음을 알자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된
인물이다.
충녕대군이 태종을 이어 왕위를 이은 世宗이다. 그렇다면 大시주자 효령대군은 今上의 형님이 되는
왕가의 어른이다. 목불은 왕가에서 정성을 들여 만든 것인 만큼 매우 수준 높은 작품이다. 비례가 상쾌하고 조형미가 뛰어나 발견 당시에 벌써 조선
초기 예술을 대표하는 목불좌상으로 점 찍혔다. 높이 72cm.
법당에는 우리 일행밖에 없었다. 두터운
방탄유리의 차단막 안에 안치된 목불좌상에 한 걸음이라도 더 다가서고 싶었다. 동행했던 宋학예사가 황급히 외쳤다.
『조심해욧! 거기 붉은 선 안으로 손만 들어가도 요란한 경보음이 울려요』
사연은
이러했다. 3년 전 도둑이 들어 이 목조불상을 업고 나가려 하다 막바지에 발각되어 미수에 그친 사건이 일어났다. 그 후 흑석사 측에서
안전경비회사에 의뢰하여 방탄유리로 목불좌상을 덮어씌우고, 그 바로 앞에 요란한 경보음을 발하는 적외선 감응장치를 깔았다는 것이다. 또한 법당
내부에 감시 카메라가 24시간 작동되어 흑석사 사무실에서 모니터를 하고 있다고 한다.
五鳳爭珠의 明堂 목불좌상을 모신 극락보전에서 물러나 안내판을 읽어 보니 극락보전을 「大雄殿」이라고 표기해 놓았다. 서방정토의
교주 아미타불을 모신 불당이라면 당연히 극락보전이라 써야 올바를 터인데, 현재의 흑석사는 이만큼 엉성한 절이다. 堂宇로는 극락보전과
요사채뿐이다. 주지스님은 모종의 사건으로 경기도 어디에 머물고 있고, 절의 일은 총무스님이 맡고 있다는데 만날 수 없었다.
그러나 옛적 흑석사는 결코 만만한 절이 아니었다. 통일신라시대에 義相 스님의 10大 제자 중 한 분인 眞定(진정)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던 유서깊은 사찰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이 뚜렷한 石造 여래좌상(보물 제681호)도 이 고찰의 품격을 더한다. 조선 초기까지도
法燈이 이어져 동국여지승람에도 그 이름이 뚜렷하게 나와 있다.
흑석사는 임진왜란 때(1592) 불탔는데,
그후 황폐일로를 걸었다. 풍수학자 崔昌祚 前 서울大 교수는 흑석사 터를 『다섯 마리 봉황이 구슬을 받들어 모시는(五鳳爭珠) 명당으로서 큰 인물이
태어날 땅』이라고 말한 바 있다.
두 번째의 흑석사 답사를 마치고 세 번째로 부석사를 방문했다. 부석사는
이렇게 여러 번 잇달아 보아도 물리지 않고 심심하지도 않은 그윽한 절집이다. 귀로에 소수서원 숲속을 잠시 산책하고, 931번 지방도로변에 있는
순흥면 읍내리 벽화고분도 구경했다. 이 고분은 539년경에 축조된 것으로 고구려에 인접한 지리적 위치 때문인 듯 고구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양식이다.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의
추억 영주역으로 나오는 길에 수달 서식처를 지났다. 수달이 밤에 멋 모르고 길로 나와
교통사고를 낼 만큼 출몰이 잦다고 한다. 어떻든 영주 일대는 그냥 돌아다니기만 해도 자연과 문화의 향기를 가슴속 깊이 호흡할 수 있는 고을이다.
영주역 앞에서 李부장과 헤어졌다. 李부장은 중앙고속국도로 가다 단양휴게소에 들러 그 뒷산에 있는 적성비를
한 번 더 답사한 뒤 上京했고, 필자는 다른 일로 오후 4시5분 영주 발 부산行 완행열차를 탔다.
차창
밖으로 무열왕릉, 사천왕사터 등 경주 일대의 유적과 코발트 블루의 동해 바다를 볼 수 있는 절묘한 철로지만, 밤중이라 몹시 아쉬웠다. 다만
초등학교 시절, 석탄을 때는 기차를 타고 경주로 수학여행 가면서 터널을 지날 때마다 전등 없는 캄캄한 기차 안에서 벌이던 장난이 주마등처럼
어른거려 지겹지는 않았다.
그때 우리는 차창을 통해 열차 안으로 기어들어오는 시커먼 석탄연기를 코가
시커멓게 마시면서도 뭐가 그리 좋았는지, 옆자리 앞자리 아이들과 어울려 서로 꿀밤을 먹이며 깔깔거렸었다. 추억의 열차는 출발 4시간45분 만에
부산역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