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 나는 글/좋은 글

게으른 눈에 속으면 안된다

야생초요 2024. 11. 5. 06:32

게으른 눈에 속으면 안된다

 

엄마가 말했다.

"해가 지면 그날 하루는 무사히 보낸 거다

엄마, 아버지도 사는 게
무섭던 때가 있었단다.
그래도 서산으로 해만 꼴딱 넘어가면
안심이 되더라.

아, 오늘도 무사히 넘겼구나 하고
그러니 해 넘어갈 때까지만 잘 버텨라.
그러면 다 괜찮다. "

또 한번은 고랑을 맡아 김을 맨 적이 있다.
엄마는 벌써 저만치 앞서 갔는데
난 힘들어 입에서 단내가 났다.

"엄마아! 이 넓은 콩밭을 언제 다 맨대요?"

그때 엄마가 던진 한마디
"야아, 눈이 게으른 거란다."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벽에 부딪쳐
그만 포기하고 싶어질 때면
엄마의 어록을 떠올린다.

해가 지면 안도하고 새벽이 오면
또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 겁났다는 분들.

그런 세월을 살면서 알아차린 것이다.
게으른 눈에 속으면 안 된다는 것을.

사람의 눈은 어리석기 짝이 없어서
해야 할 일 전부를
인생 전체를 돌아보며 겁먹기 쉽다는 것을.

엄마는 말했다.
오직 지금 내딛는 한 걸음
손에 잡히는 잡초 하나부터 시작하면
어느새 넓은 콩밭은 말끔해진다고.

반드시 끝이 있다고.

어쩌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 중에서 / 정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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