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발한 지 4시간째. 우린 아직도 길 위에 있었다. 지도상 출발지로부터 불과 3km 거리의 말잔등 캠프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수통의 물은 꽁꽁 얼었고, 배낭을 뒤져보니 먹을거라곤 핫초컬릿 분말 한 봉지와 새끼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초코바 한 개가 전부였다.
야영장비와 식량은 군용 케이블카에 실려 이미 말잔등 캠프에 올라가 있어 우리는 하이커처럼 간단한 보온의류가 들어 있는 배낭만 멘 채 스키 등반 중이었다. 순간 한 줄기 싸한 기운이 등줄기를 훑은 것은 땀에 젖은 셔츠 때문만은 아니었다.
-
- ▲ 성인봉 가는 길. 울릉도 전체를 조망하며 커니스 위를 걷는 이 구간은 이번 투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
“형, 저 먼저 올라갑니다.”
“으, 응. 그, 그래 ”
내키지 않는 대답을 하는 김형주 선배의 말끝이 잠겨들었다. 하지만 더 이상 기다리는 것은 내게는 물론, 뒤처진 이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남한 최고 적설량을 자랑하는 울릉도 성인봉을 스키로 오른 뒤, 역시 스키를 타고 나리분지로 활강한다는 실험적이며 야심 찬 프로젝트는 첫날 봉래폭포 코스로 말잔등까지 오르는 길의 ‘작은 조난’으로 시작됐다.
문제는 부실한 장비였다. 슬로프가 잘 정비된 스키장, 아니면 대관령목장 같은 곳에선 별 문제 없던 산악스키 장비들이 순도 100% 백컨트리(back country)인 야생의 울릉도를 만나자 온갖 말썽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잡목에 걸려 스키스톡의 바스켓이 빠져버리는가 하면 스키등반에 절대적 역할을 하는 실(sealㆍ클라이밍 스킨)이 떨어져나가는 경우가 속출했다.
-
- ▲ 성인봉 바로 아래 전망대에 선 필자. 발 아래 나리분지가 펼쳐져 있다. 전망대 나무 울타리는 눈에 덮여 거의 보이지 않았다.
-
봉래폭포 부근을 지날 때 적설량은 이미 1.5m를 넘었다. 바스켓 없는 스키 스톡은 손잡이까지 눈속으로 빠져들어 무용지물이었다. 가파른 설사면에서 접착력이 충분치 않은 실은 스키 베이스로부터 어이없을 만큼 쉽게 떨어져 나갔다. 예비 실이 없는 대원들은 임시방편으로 테이프를 동여맸으나 효율이 떨어져 속도를 낼 수 없었다.
날이 저물며 선두와 후미 사이에 커다란 갭이 생겼다. 행렬에서 6, 7번째로 가던 나와 김형주 선배는 뒤쳐진 대원 8명이 신경 쓰여 천천히 움직인 탓에 체온도 떨어지고 시나브로 페이스를 잃어가고 있었다. 다행히 출발 5시간여만인 오후 8시30분께 후미 그룹은 녹초가 된 채 눈이 2m나 쌓인 말잔등 캠프에 도착했다. 바람이 남서에서 북동으로 돌며 옅은 구름층을 벗겨가 별이 총총했다.
-
- ▲ 능선 상에서 가끔씩 만난 다운힐은 산악스키의 묘미를 더해줬다.
-
“이런 익스트림한 파우더 스킹이 가능할 줄이야”
이번 성인봉 스키등반-활강 프로젝트는 울릉군과 울릉산악회, 그리고 나리분지에서 말잔등까지 군사용 케이블카를 보유한 군 당국 등 3자의 공동 작품이다. 올해로 2회째를 맞은 울릉도 눈꽃축제에 산악스키를 끼워 넣자는 울릉산악회의 제안이 우여곡절 끝에 받아들여져 성인봉 스키등반-활강이 성사된 것이다. 그러나 울릉산악회는 이미 7~8년 전부터 산악스키를 꾸준히 해왔다.
“울릉도에서 스키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에요. 러셀로 올라왔다고 생각해보세요. 아마 6~7시간은 걸렸을 걸요?”
울릉산악회 구조대장 최희찬씨(41)의 얘기다. 그랬다. 올라오는 길에 스키를 벗어보니 가랑이까지 빠질 만큼 눈이 깊었다. 게다가 경사가 40~50도에 달했다. 러셀을 했다면 끔찍했을 터였다.
-
- ▲ (좌)날이 저물어가는 가운데 시도된 2차 활강에서 뉴스쿨러 김주용씨가 골짜기 옆 둔덕을 박차고 뛰어오르는 모습. 김주용씨는 스키 사이트 <박순백 스키칼럼>의 뉴스쿨 분야 운영자이기도 하다.(우)1차 활강 도중 뉴스쿨러 김광진군이 클리프 점프를 시도하고 있다.
-
이튿날 아침, 쌀쌀하고 맑은 가운데 말잔등에서 성인봉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능선으로 진입했다. 능선엔 대형 커니스가 생성되어 울릉도의 적설량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울릉도는 통상 2월에 최고 적설량을 기록하지만 이미 쌓인 250cm 가량의 눈도 육지에서 온 우리에겐 과했다.
1차 활강코스는 성인봉에서 알봉을 향해 북서쪽으로 뻗어가다 섬백리향 군락지에서 동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나리분지 중심으로 이어지는 4km 계곡. 초입엔 경사도 그다지 세지 않은 가운데 고로쇠, 너도밤나무 사이로 고품질의 분설이 두텁게 깔려 있어 북미지역에서나 경험할 수 있었던 파우더 트리 런(powder tree run)을 만끽했다.
그러나 계곡은 잠시 후 화산섬 울릉도의 본색을 드러냈다. 거의 벽에 가까운 경사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멋지게 턴(turn)을 이어가려던 꿈은 까무라칠 듯 가파른 각도와 알파인스키 부츠와는 달리 발목을 단단히 지탱해주지 못하는 산악스키 부츠 탓에 철저히 좌절됐다. 스키 강사 자격증 보유자인데다, 헬리스키 등 파우더 스키 경험이 있는 나였지만 울릉도는 그런 계급장 따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활강 시작 불과 3~4분만에 스키를 처음 신었던 십수 년 전 초보자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
- ▲ 첫날 스키 등행 중 봉래폭포 부근을 지나는 대원들. 이곳의 적설량은 2m에 달했다.
-
알파인스키 실력이 나보다 서너 수는 윗길인 박경이씨(대산련 산악스키위원회 총무)도 적잖이 당황하는 눈치였다. 반면 안내를 맡은 울릉산악회 김경태, 최희찬씨는 얄미우리만치 사뿐사뿐 내려간다. 낭패감, 좌절감을 느끼며 그들의 움직임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비결이 있긴 있었다. 완경사에선 턴을 이어갔으나 급경사지역에선 사활강을 하다 정지한 후 킥턴으로 스키의 방향을 바꿔 또 다시 사활강한다.
그러나 그 흉내도 처음엔 쉽지 않아 서너 차례 설면에 얼굴 도장(?)을 선명하게 찍은 후에야 나리분지로 내려서 신령수 샘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2차 활강은 케이블카로 말잔등으로 올라가 곧장 나리분지로 내려오는 약 2.5km의 골짜기였다. 첫 시도에서 쓰라린 깨달음을 얻은 대원들은 킥턴을 적절히 사용하며 한층 여유있게 스키를 즐길 수 있었다.
-
- ▲ 1차 활강 후 나리분지를 횡단하고 있는 일행.
-
대부분 골짜기는 천연의 하프파이프
남쪽 사면의 무거운 눈과는 달리 북사면엔 가볍고 부드러운 눈이 1.5m 가량 쌓여 있어 스키활강엔 최적이었다. 장애물이 있다면 쿨와르 중앙 여기저기 숨겨진 커다란 얼음덩이들. 눈사태로 굴러온 눈덩이가 차가운 기온에 다시 얼어붙은 것이다.
대부분의 골짜기는 천연의 하프파이프였다. 스키계의 뉴스쿨(New School)로 불리는 프리스타일 스키팀 X-CREW 멤버들은 연신 “대박!”을 외치며 골짜기 하프파이프를 마음껏 누볐고, 3~4m의 절벽쯤은 가볍게 점프하며 아크로바틱한 스키를 뽐냈다. X-CREW의 김주용 팀장(28)은 “우리나라에서 이런 익스트림한 파우더 스킹이 가능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이번 울릉도 산악스키 투어는 일종의 실험이었다. ‘과연 한국에서 스키등반과 스키활강이 동시에 가능한 산이 있을까’라는 문제에 대한 구체적 실험-.
총 4km의 스키등반과 두 차례에 걸친 총 6.5km의 활강을 통해 얻은 결론은 ‘Yes’였다. 당초 한 몸이었던 등산과 스키가 어느 샌가 완전히 분리되어버린 한국적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단초를 울릉도가 갖고 있었다. 풍부한 적설량, 육지에 비해 나무가 적고 가파른 계곡은 울릉도 산악스키를 통해 갈라섰던 스키와 등산이 다시 봉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
- ▲ 눈에 ‘峰’자가 파묻힌 성인봉 정상에 모여선 참가자들.
-
다만 울릉도 산악스키는 일반 스키장과는 완전히 다른, 야성이 살아 숨 쉬는 무한 도전의 장이다. 그동안 스키장에서 배운 기술 중 울릉도에서 먹히는 것은 밸런스 유지 능력과 숏턴 능력 정도. 창의적인 루트파인딩, 과감한 무브와 강인한 체력이 울릉도 스키 성패의 관건이었다.
울릉도는 이 행사를 향후 겨울철 주요 이벤트로 키워갈 계획이다. 나는 벌써 내년 겨울 울릉도를 기다리고 있다.
/ 글·사진 송철웅 익스트림스포츠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