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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가을 유서..

야생초요 2006. 10. 5. 13:27
가을 유서 ...

 
 
가을 유서 / 류시화 

가을에는 유서를 쓰리라 
낙엽되어 버린 
내 시작 노트 위에 
마지막 눈 감은 새의 
흰 눈꺼풀 위에 
혼이 빠져 나간 곤충의 껍질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차가운 물고기의 내장과 
갑자기 쌀쌀해진 
애인의 목소리 위에 
하룻밤새 하얗게 돌아서 버린 
양치식물 위에 
나 유서를 쓰리라 
파종된 채 
아직 땅 속에 묻혀 있는 
몇 개의 둥근 씨앗들과 
모래 속으로 가라앉는
바닷게의 고독한 시체 위에 
앞일을 걱정하며 
한숨짓는 이마 위에 
가을엔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가장 먼 곳에서 
상처처럼 떨어지는 별똥별과 
내 허약한 폐에 
못을 박듯이 내리는 가을비와 
가난한 자가 먹다 남긴 빵껍질 위에 
지켜지지 못한 채 
낯선 정류장에 머물러 있는 
살아 있는 자들과의 약속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가을이 오면 
내 애인은 내 시에 등장하는
곤충과 나비들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큰곰별자리에 둘러싸여 
내 유서를 소리내어 읽으리라 
출처 : 이쁘고 고운 마음으로
글쓴이 : 맘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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