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보물 및 국보

국보기행(18) - 비단강변 百濟의 古都 고마나루(公州)

야생초요 2006. 7. 3. 13:00
국보기행(18) - 비단강변 百濟의 古都 고마나루(公州)
 
武寧王陵이 드러낸「화려한 百濟」
 
만약 무령왕릉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熊津百濟시대의 수도 公州는 참으로 쓸쓸하고 優雅의 極致 백제문화의 증거물도 없을 뻔했다. 국제성 짙은 화려한 무늬벽돌의 이 왕릉에서 쏟아져 나온 2900여 점의 유물은 質과 量에서 한국인의 자존심을 드높였다.

武寧王陵에서 출토된 國寶(12件 16점)
제154호 金製 冠飾(금제 관식·왕), 제155호 金製 冠飾(왕비), 제156호 金製 心葉形(심엽형) 귀고리(왕), 제157호 金製 垂飾(수식) 달린 귀고리(왕비), 제158호 金製 목걸이(일곱 마디짜리와 아홉 마디짜리), 제159호 金製 뒤꽂이(왕), 제160호 銀製 팔찌(왕비), 제161호 靑銅 神獸鏡(청동 신수경)·宜子孫獸帶鏡(의자손수대경)·獸帶鏡(수대경), 제162호 石獸, 제163호 誌石(지석·왕의 지석·왕비의 지석), 제164호 베개(왕비), 제165호 足座(족좌·왕)

글 : 鄭 淳 台 月刊朝鮮 편집위원〈st-jung@chosun.com〉
사진 : 李 五 峰 月刊朝鮮 사진팀장〈oblee@chosun.com〉
鄭淳台 月刊朝鮮 편집위원 (st-jung@chosun.com
1500년간 누구도 손대지 않았던 處女墳
<조선일보사 社機 제비호(기장 金眠壽)에서 촬영한 백제의 古都 공주. 옛 이름 고마나루(熊津)를 비단강(錦江)이 그림같이 휘감고 있다.>
 5월26일 오전 8시30분, 국보 제247호 금동관음보살입상 등 문화재 4점의 강탈사건으로 한창 뒤숭숭한 충남 公州(공주)를 향해 고속도로 승용차 편으로 서울톨게이트를 벗어났다. 공주경찰서는 이 날 새벽 1시20분, 사건 발생 11일 만에 금동관음보살상을 경기도 용인에 있는 한 우유대리점 출입문 앞에서 되찾았지만, 나머지 세 점은 못 찾은 가운데 용의자 任모씨(31)를 검거하여 수사를 계속하고 있던 무렵이었다.
 
 
 
 
 
  경부고속도로로 남진하다가 天安(천안)분기점에서 새로 뚫린 25번 고속도로(천안~논산)로 길을 바꿔 남행하다가 南공주 인터체인지로 나와 40번 국도를 따라 5km쯤 북상하면 松山里 古墳群(송산리 고분군)이다. 아침 출근시간과 겹치지만 않았다면 1시간3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300리 길이다.
 
  오전 10시 松山里 떼무덤 〔古墳群〕 남녘 언덕배기에 위치한 武寧王陵(무령왕릉)으로 올라갔다. 무령왕릉 앞에 서기만 하면 百濟(백제)가 보인다. 무령왕릉과 그 유물은 백제문화의 국제성과 우아함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유산인 것이다.
 
  이 왕릉에서는 모두 108종 2906점의 유물이 발굴되었는데, 그 중에서 국보로 지정된 것만 12종 16점에 달한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국보 등 유물은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보존·전시되고 있다.
 
  무령왕릉은 만들어지고 난 뒤 1500여 년 동안 그 누구도 손대지 않은 處女墳(처녀분)으로서 葬具(장구)·木棺(목관)·裝身具(장신구)·副葬品(부장품=껴묻거리)이 그대로 남아 있던 무덤이다. 무령왕릉 바로 앞에 놓인 5호분과 6호분, 그리고 그 동북쪽 100m에 위치한 1·2·3·4호분은 일제시대에 이미 발굴 조사되었다. 「송산리 고분군」이란 이름을 얻은 것도 이때였다.
 
  그러면서도 무령왕릉의 존재만은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공주관광안내소에서 문화유산 해설사로 자원 봉사하는 李惠影(이혜영)씨는 이렇게 말했다.
 
  『日帝(일제)가 무령왕릉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은 우리 민족사에서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닙니다. 조선총독부는 1∼4호분을 熊津(웅진)백제시대 네 왕의 무덤이라고 의식하여 샅샅이 뒤졌고, 그 후에 5호분과 6호분도 발굴했는데, 껴묻거리는 전혀 발견하지 못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6호분 발굴 현장을 지휘한 일본인 가루베 지온(輕部慈溫)도 그에 대한 조사보고서에서 「이미 도굴당해 유물이 남아 있지 않다」고 썼어요. 그 말 누가 믿겠어요. 평양고보 교사로 재직하다가 당시로선 좌천을 자청해서 공주고보 교사로 전근해 온 가루베는 그의 아버지가 유명한 골동품상이라고 하데요. 그 시절, 왕릉에서 발굴한 많은 유물들을 지게로 져서 날랐다는 여러 분의 증언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때의 진실을 끝내 고백하지 않은 채 1970년대에 일본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심증이 가더라도 물증은 없는 傳言(전언)이다. 그야 어떻든 무령왕릉이 발견되기 전까지만 해도 송산리 고분군 중 가장 주목받은 것은 6호분이었다. 6호분은 인근 다른 무덤과는 그 규모, 형태, 건축재료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교하게 제작한 무늬벽돌을 사용했다. 또한 지하에 아름다운 아치형 곡선의 玄室(현실=무덤방)을 갖추었는데, 그 벽면에는 사방으로 四神圖(사신도)의 벽화까지 그려져 있다.
 
 
  드라마틱했던 무령왕릉의 발견
 
  무령왕릉의 발견은 참으로 드라마틱한 사건이었다. 1971년 여름은 유별나게 무덥고도 지루한 장마가 계속되었다. 계속되던 폭우 때문에 松山 위쪽에서 빗물이 쏟아져 내려 제6호분에 물이 보永榕駭? 6호분의 보호가 관련 기관과 학계의 걱정거리였다. 빗물이 6호분에 줄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배수시설의 보완 축조가 시급했다.
 
  6호분 위쪽의 배수시설 공사가 진행된 7월5일, 한 현장 인부의 삽이 땅 속의 어떤 단단한 물체와 부딪쳤다. 그것은 아름다운 무늬벽돌이었다. 땅 표면 바로 밑에 무령왕릉의 앞부분 건축부 윗모서리가 노출되는 순간이었다.
 
  더욱이 그 무덤의 주인공은 백제 역대 왕들 중에서도 가장 멋쟁이 왕으로서 웅진시대의 백제문화를 화려하게 滿開(만개)시킨 무령왕 부부라는 점에서 세인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三國史記(삼국사기)에 따르면 그는 8척 장신에 미남으로서 인품 또한 인자하고 관대하여 민심을 모았던 임금이었다.
 
  무령왕의 이름은 斯麻(사마), 성은 복성인 扶餘(부여)인데 흔히 외자 餘로 약칭된다. 무령왕은 501년 12월 加林城(가림성·지금의 부여군 임천면 성흥산성)의 성주 加(백가)에게 피살된 東城王(동성왕)에 이어 백제 제25대 왕으로 즉위했다. 무령왕은 加 세력 등에 옹위되었던 것이다.
 
  어떤 왕이 피살될 경우 누가 최대의 수혜자인가를 살펴 암살의 배후를 판별하는 것이 왕조사의 한 법칙처럼 되어 있다. 동성왕의 피살로 가장 덕을 본 인물은 동성왕의 이복형인 무령왕이다. 그래서 무령왕을 궁정 쿠데타의 주역이라고 보는 연구자들도 적지 않다.
 
  三國史記에 따르면 동성왕은 부여로 사냥을 나갔다가 가림성에 들렀는데, 때마침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히는 바람에 그곳에서 며칠을 묵게 되었다. 동성왕은 사냥을 겸하여 천도 후보지를 찾았는지도 모른다. 사비 천도는 동성왕 재위 말기부터 추진되었던 국가적 대사업이었다. 웅진은 지키기에는 좋았으나 번영의 터전으론 너무 좁았다.
 
  그러나 웅진의 토착 신흥 귀족들은 천도에 반발했다. 특히 백가는 衛士佐平(위사좌평: 백제 제1 官等의 大臣으로서 국왕 경호를 담당한 親衛長官)에서 가림성주로 좌천된 인물로서 웅진 토착 귀족인  씨를 대표하던 인물이다. 추측컨대 백가는 그를 좌천시킨 동성왕에 대해 원한을 품었고, 천도에도 역시 반대했을 것이다. 자객의 칼에 찔린 동성왕은 상당 시일 혼수상태를 헤매다가 죽었다. 그때까지도 동성왕을 보위하려는 무령왕의 액션은 역사기록에선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곧 백제판 兎死狗烹(토사구팽)이 전개된다. 즉위 직후 무령왕은 그의 옹립 功臣(공신)인 加를 토벌하여 그 시체를 백마강에 던져 버렸다. 왕권을 우습게 알던 토착 신흥귀족 세력에 대해 본때를 보인 셈이다.
 
  이미 인생의 山戰水戰(산전수전)을 다 겪은 40세의 무령왕은 이복동생 동성왕을 백가의 兇手(흉수)를 빌려 암살한 다음에 滅口(멸구)를 위해 백가의 모반을 충동 또는 조작했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무령왕은 帝王學(제왕학)의 達人(달인)인 셈이다. 제왕학과 인격은 별개의 문제이다.
 
  무령왕이라면 웅진시대 백제를 정치적으로 안정시키고 해양강국으로 재건한 백제의 英主(영주)이다. 백제의 웅진시대는 제21대 개로왕(455∼475)이 고구려군의 침공을 받아 참살되고 수도 漢城(한성·지금의 서울)이 함락되자 그의 동생 文周王(문주왕)이 이곳 웅진으로 내려와 수도로 삼은 후 제26대 聖王(성왕)이 사비로 都城(도성)을 지금의 부여로 옮겼던 때(성왕 16년=538)까지의 63년간을 의미한다.
 
  무령왕 즉위 이전 웅진시대의 왕권은 허약했다. 문주왕(475∼477), 삼근왕(477∼479), 東城王(579∼501)이 한결같이 비명에 생을 마쳤던 것이다. 동성왕대에 추진된 일련의 왕권강화책은 일정 부분 성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在地 귀족들의 발호를 제어하지 못했다.
 
  또한 기질이 드셌던 동성왕은 신하들의 진언을 무시하고 도성 안에 臨流閣(임류각) 등 호사스런 토목공사를 벌여 민심을 잃고 있었다. 백제가 침체와 혼돈의 밑바닥에서 벗어나 회복국면에 접어들게 된 것은 바로 무령왕 즉위 이후였다.
 
 
  한반도에서는 이례적인 벽돌무덤
 
  무령왕릉은 1997년 6월까지 공개되었으나 내부 조명으로 열이 발생하여 조명기구 주변에 곰팡이가 서식하는 등 문제가 발생했다. 특히 고분 내부의 공개로 인하여 통로가 열리고 관람객의 출입으로 結露(결로) 현상까지 나타나 방치할 경우 무덤 손상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문화재 당국은 몇 차례의 보수공사를 거듭하다 1997년 7월 무령왕릉의 입구를 폐쇄했다. 닫아 놓는 것이 최선의 보존책임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무령왕릉 발굴은 당시부터 「졸속 작업」 이란 비판을 받았다. 공주大의 이남석·서만철 교수는 「무령왕릉의 발견과 보수의 역사」라는 공동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유적의 중요성, 그것도 처음 발견된 왕릉이면서 聆寬坪?확실한, 더욱이 백제의 유적이라는 점에서 발굴 자체가 너무 신속하게 이루어졌고, 때문에 많은 문제를 남기게 되었다는 지적이 많다. (중략) 발견 후 발굴까지 조치라든가 발굴과정 및 후속조처에 대한 문제점이 적지 않았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무령왕릉을 통해서 얻을 수 있었던 고급정보의 상당량을 잃게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발굴을 시작한 지 불과 열흘 만에 묘실의 문이 열렸다. 유물이 반출되기 시작한 시각이 밤 12시, 마지막으로 묘실 바닥이 청소된 것이 아침 9시였다. 왕릉 내부 유물 잔존상태의 실측 및 촬영, 그리고 유물의 수습이 순서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1차 조사가 불과 10시간 만에 超(초)스피드로 해치워진 것이다.
 
  문화유산해설사 李惠影씨와 함께 무령왕릉이 위치한 언덕에서 내려와 실물 크기의 무령왕릉의 모형관에 들렀다.
 
  무령왕의 무덤은 바로 밑 6호분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선 드문 塼築墳(전축분), 즉 벽돌로 만든 무덤이다. 벽돌은 다른 건축재료에 비해 크기가 작고, 규격화되어 있어 설계자의 의도에 따라 자유롭게 건축물을 지을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무령왕릉에 사용된 벽돌에는 주로 연꽃을 소재로 한 무늬들로 표면을 장식하였기 때문에 전체적 외관이 매우 화려하고 세련미를 느끼게 한다. 벽돌은 당시의 첨단기술 제품이었다. 무덤 내부 규모는 남북 7m, 동서 4.2m이다. 무령왕 부부가 모셔진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약 3m. 부부가 합장된 왕릉으로선 그리 크지는 않고 낭비공간이 없을 만큼 알뜰하다.
 
  무덤의 구조는 널길(무덤의 입구에서부터 시체를 안치한 방으로 들어가는 통로) 부분과 玄室(현실·무덤방)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무덤방 벽면에는 5개소에 홈을 만들어 조명용 白磁(백자) 등잔을 설치했으며, 무덤방의 안쪽을 한 단 높게 하여 여기에 무령왕과 왕비의 관을 놓았다.
 
 
  역사의 미스터리 풀어준 국보 163호 誌石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유물 가운데 1500여 년의 역사적 미스터리를 푸는 것으로 가장 주목받아 온 유물은 무령왕과 그 왕비의 墓誌(묘지)와 買地券(매지권)이 새겨진 국보 제163호 誌石(지석)이다. 墓誌는 죽은 사람의 이름·신분·행적 등을 기록한 글이며, 買地券은 土地神(토지신)에게 묘터를 구입했음을 밝히는 道敎的(도교적) 증서다. 두 장의 청회색 돌판(가로 41.5cm, 세로 35cm, 두께 5cm)으로 이뤄진 誌石은 발굴 당시 널길 한복판에 세워져 있었다.
 
  지석의 墓誌에는 무령왕인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이 계묘년(523) 5월에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楷書體(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이로써 무령왕의 계보와 웅진시대 왕위계승을 둘러싼 권력관계에 대한 단서가 잡히게 되었다.
 
  또한 무령왕이 523년에 죽자 3년상을 치르기 위해 2년3개월간 가매장했다가 왕릉에 안치할 때 왕의 墓誌와 買地券을 만들었고, 526년에 왕비가 죽자 3년상을 치른 후 안치할 때(529년) 무령왕의 買地券 반대쪽에 왕비의 墓誌를 새겼음도 밝혀졌다.
 
  무령왕이 523년에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것은 그의 출생연도가 462년이며 즉위연도인 501년에 그의 나이가 40세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기록한 무령왕의 계보와 관련한 三國史記의 관련 기사가 의문시될 수밖에 없다.
 
  결론부터 말하면 무령왕은 그보다 최소한 세 살 연하인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동성왕은 즉위시 15세 이하의 나이인 「幼王」(유왕)이었으므로 피살된 해인 在位 23년째 되던 해인 서기 501년에는 37세를 웃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령왕은 누구의 아들인가.
 
  日本書紀(일본서기) 雄略 5년(461) 條에는 무령왕의 계보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며 개로왕의 동생인 昆支(곤지)의 의붓아들로 되어 있다. 개로왕이 곤지를 왜국에 사신으로 보낼 때(461) 곤지의 간청에 의해 임신한 왕비를 곤지의 아내로 삼아 보냈다는 것이다.
 
  이같은 兄弟共妻(형제공처)의 설화는 백제의 婚風(혼풍)으로 미루어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이 글의 뒤편에서 자세히 거론할 것이지만, 곤지가 왜국으로 건너간 시기, 무령왕의 출생연대와 출생장소 등에 관한 기록만은 신빙성이 높다. 그렇다면 일본서기에 기록된 무령왕의 출생설화는 어떤가? 다음은 그 골자이다.
 
  <임신한 夫人(삼국시대 왕비의 호칭)은 항해 중 산기를 느끼고 가카라시마(各羅島=지금의 후쿠오카 북방 加唐島로 比定됨)라는 섬에 내려 무령왕을 낳았는데, 이로써 무령왕의 이름이 섬왕(島王), 즉 사마왕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무령왕의 즉위 이후 백제인들이 왜국에 갈 때 지나치게 마련인 가카라시마를 일컬어 니리무세마(主嶋: 임금님의 섬)라고 하였다>
 
 
  公州 역사·문화의 제1번지 公山城
 
  필자 일행은 당초 무령왕릉 답사에 이어 곧장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이동하여 그곳에 전시된 무령왕릉 출토 유물을 취재할 계획이었다. 문화유산해설사 李惠影씨의 귀띔이 없었다면 필자 일행은 헛걸음을 할 뻔했다. 그날은 마침 월요일이어서 공주박물관뿐만 아니라 전국의 모든 박물관이 휴관하는 날이었다.
 
  李五峰 사진부장과 필자는 공주박물관 취재를 건너뛰어 다음 행선지인 公山城(공산성)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큰길을 사이에 두고 공산성 西門을 마주보는 「고마나루쌈밥집」에 우선 들러 점심을 먹었다. 「고마나루」라면 바로 公州의 옛 이름 熊津(웅진)의 백제식 발음이 아니었겠는가. 1만원짜리 쌈밥 2인분을 주문하니 반찬의 가짓수가 많아 밥상이 그득했다.
 
  공산성은 웅진시대의 王城(왕성) 소재지였다. 본래는 土城(토성)이었는데, 조선 선조·인조 때 石城(석성)으로 개축되었다. 북으로는 금강을 띠처럼 두른 해발 110m의 산성이다. 낮기는 하지만 사방경계와 방어에는 더할 나위 없이 양호한 천연의 요충지다. 성곽의 총길이는 2660m이며 성 안은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다.
 
  공산성은 공주 역사·문화의 제1번지다. 공산성이 역사의 무대로 등장하게 된 것은 漢城(한성: 지금의 서울) 백제시대 後期(후기)의 都城(도성)인 몽촌토성(前期의 도성은 慰禮城=지금 서울 천호동 風納土城)이 고구려군에 의해 함락된 475년 이후의 일이다. 여기서 그 전후의 역사를 좀 짚어 볼 필요가 있다.
 
  근초고왕(346∼375) 때 3만 명의 백제군은 평양까지 북진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최강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광개토왕(391∼412)이 즉위한 직후부터 고구려는 백제를 漢江(한강)경계선까지 밀어붙였다. 더욱이 396년 백제는 고구려군에 의해 도성인 漢城이 포위된 가운데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체결해야만 했다.
 
  고구려 장수왕(412∼491) 때 백제의 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427년 고구려가 수도를 압록강 북안 集安(집안)에서 평양으로 옮기면서 남진정책을 강화했기 때문이었다. 백제는 즉각 신라와의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한편 왜국과의 친선관계를 강화함으로써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백제의 개로왕(455∼475)은 461년 동생인 昆支를 왜국에 파견했다. 곤지는 동성왕과 무령왕의 아버지다. 무령왕은 바로 그 해 곤지가 왜국으로 가던 중에 규슈 연안의 가카라시마에서 태어났음은 앞에서 거론한 바 있다.
 
  개로왕은 야심만만한 군주였다. 472년에는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던 중국의 北魏(북위)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의 장수왕을 비방하면서 군사원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對북위 외교에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고구려의 대규모 침략을 유발시킨 도화선이 되고 말았다.
 
  장수왕은 475년 9월, 군사 3만 명을 동원하여 전격적으로 漢城을 포위했다. 사태가 절망적이라고 판단한 개로왕은 수십기를 거느리고 성을 빠져나와 달아나다가 고구려군에 붙잡혀 참살당하고 말았다. 곧이어 수도의 함락과 동시에 태후·왕자를 비롯한 최고 지배층의 다수가 몰살당했고, 8000명의 남녀가 포로로 끌려갔다.
 
  漢城이 포위되기 직전, 개로왕은 그의 동생이며 上佐平(상좌평)인 餘都(여도)에게 신라에 가서 구원병을 요청하도록 명했다. 명에 따라 餘都는 신라군 1만 명을 얻어 漢城으로 달려왔으나, 그때 이미 한강 하류 일대는 모두 고구려군에게 점령당해 버렸던 상황이었다.
 
  백제는 나라의 명맥이 거의 끊어지다시피 했다. 이에 餘都는 웅진으로 남하, 왕위에 올라 국가재건에 착수했다. 그가 바로 문주왕이다. 문주왕이 개로왕의 동생이라면 무령왕은 문주왕의 조카다. 그때 무령왕의 나이는 16세였는데, 그가 왜국과 백제 중 어디에 거주하고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日本書紀에 따르면 무령왕은 462년 출생 직후 생모(개로왕의 妃)와 함께 귀국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가 왜국에서 성장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들의 異論(이론)도 만만치 않다. 무령왕의 아버지 곤지는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그의 차남인 동성왕의 경우 문주왕의 아들인 三斤王(삼근왕)이 재위 3년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왜국의 군사 500명의 호위를 받으며 귀국, 왕위에 올랐다.
 
  그러면 곤지의 장남인 무령왕이 일본서기 본문에는 왜 개로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 일본서기의 本文과 달리 백제 사람이 쓴 일본서기의 百濟新撰(백제신찬)에는 무령왕이 곤지의 아들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왕실의 傍系(방계)인 무령왕이 스스로 개로왕의 직계를 표방함으로써 그의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한반도 최대의 穀倉을 거머쥘 수 있는 요충
 
  공산성의 西門인 금서루를 지나 성벽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전망대에 이르렀다. 여기서 그림 같은 비단강(錦江)의 흐름을 쳐다보니 영광과 좌절의 百濟史가 뇌리에서 결렬하게 교차한다. 그런 상념에 젖어 있는데, 「문화유산 해설사 洪貞姬」라 쓰인 명패를 가슴에 단 30대 여성이 다가와 공산성의 안내를 자청했다. 不敢請(불감청)이언정 固所願(고소원)이었다.
 
  洪貞姬씨의 설명을 들으니 과연 공산성은 우리 역사상의 큰 사건과 직결되어 있다. 이곳은 웅진백제시대야 왕도였으니 그렇다고 해도 그후에도 끊임없이 굵직한 역사적 자취가 찍힌 현장이다.
 
  통일신라 말기의 피 비린내 나는 왕위쟁탈전도 웅천주(지금의 공주) 도독 金憲昌(김헌창)의 반란에 의해 이곳 공산성에서부터 그 불길이 타올랐다. 왕건과 견훤이 패권을 다투던 후삼국시대에도 공산성은 쟁탈의 요충이었다. 고려 武臣정권기에 망이·망소이가 이끄는 賤民軍(천민군)은 제일 먼저 이곳을 공략했다. 조선왕조에 들어서는 仁祖가 李适(이괄)의 난으로 몽진했던 곳도 이곳이었고, 전봉준이 이끌던 동학농민군도 서울로 진격하려고 북진하다가 공산성 남방 우금치(고개)에서 관군-일본군의 연합부대에 패전했다.
 
  문화유산 해설사 洪貞姬씨는 약 2시간 동안 필자와 동행하면서 공산성 안의 유물들을 꼼꼼하게 안내했다. 공산성 안에는 웅진백제시대의 推定(추정) 왕궁터, 동성왕 22년(500)에 처음 축조했다는 臨流閣(임류각), 백제시대의 것을 개수한 蓮池(연지)와 그 앞의 晩河樓(만하루), 몽진 당시의 仁祖가 李适이 패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이곳 두 그루의 나무에 通訓大夫(통훈대부)를 내렸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雙樹亭(쌍수정) 등 둘러볼 만한 곳이 많았다.
 
  公州는 역사적으로 북으로부터의 침략을 막는 천혜의 전략적 거점이었다. 지리적으로 멀리 차령산맥의 높은 산줄기가 외곽에서 적을 막게 하고, 가까이에서는 금강이 다시 한 번 방어선을 만들어 준다. 남쪽으로는 고만고만한 산이 중첩되어 적의 접근을 어렵게 한다.
 
  공주만 장악하면 호남평야를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최대의 곡창지대를 거머쥐게 된다. 이 때문에 공주는 關防(관방)도시로 명성을 쌓았던 것이다. 공주는 조선시대 말기까지만 해도 관찰사가 주재하는 충청남도의 도청소재지였다.
 
  그러나 공주는 좁은 분지인데다 호남선 철도가 멀리 벗어나는 바람에 근대화 물결을 타지 못했다. 1932년 충청남도 도청이 이곳에서 교통의 중심지 大田으로 이전되었고, 공주는 교육도시로서 겨우 맹맥을 유지했다. 오랫동안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하숙업이 이곳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인구 4만의 공주읍은 1986년에야 공주시로 승격했고, 1995년 공주시·군이 통합되어 공주시가 됨으로써 인구 13만8000명에 이르게 되었다. 공주는 금강대교·백제큰다리가 놓이고 백제큰길과 공주터널이 뚫리는 등 백제문화권 개발이 진행됨에 따라 차츰 활력을 되찾아가고 있다.
 
 
  『22개 담로는 오늘날의 KOTRA의 해외지사 방불』
 
  국립공주박물관 취재는 5월27일 오후로 미루고 필자는 일단 부여로 떠났다. 5월26일 오후엔 4년제 국립대학교인 한국전통문화학교의 金秉模 총장(고고학)·李道學 교수(백제사)와의 면담약속이 잇달아 있었기 때문이다.
 
  공주~부여는 80리 길이다. 백제문화권 개발사업에 의해 최근 개통된 「백제큰길」을 달리면 30분이면 갈 수 있다. 승용차 편으로 송산리 고분 앞에서 비단강의 절경을 끼고 「백제큰길」을 25분쯤 달리다 이인 남쪽에서 40번 국도로 길을 바꿔 5분 만에 부여군 규암면 합정리 소재 한국전통문화학교에 도착했다. 일찍이 「金冠의 비밀」 등 고고학적 力作을 발표한 金秉模 총장을 총장실에서 만나 백제의 문화에 대한 견해를 들었다.
 
  ―무령왕은 어떤 임금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백제의 제2의 전성기와 국제화를 심화시킨 군주죠. 흔히 성왕(무령왕의 아들)을 중흥의 군주라고 하지만, 그 토대는 무령왕대에 마련된 것입니다』
 
  ―무령왕 시대에 백제가 설치한 22개 擔魯(담로)의 성격은 무엇입니까.
 
  『원래 담로는 邑城(읍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왕자·왕족을 파견하여 다스리던 백제의 지방행정구역이었어요. 이것이 무령왕대에 이르면 백제의 해외거점을 의미하게 됩니다. 지금의 제주도인 耽羅(탐라), 일본의 淡路(담로·현재 일본에선 아와지라고 읽음) 등이 바로 擔魯입니다. 이런 담로가 대만·필리핀 등지까지 뻗어나갔으니까 백제는 적어도 東아시아 스케일의 해양국가였던 것입니다』
 
  ―그런 해외의 담로에 백제의 통치권이 미치고 있었습니까.
 
  『백제인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던 담로라면 백제의 행정권이 작동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백제의 商圈(상권)이 그만큼 넓었다는 차원에서 담로를 보고 싶습니다. 요즘 용어로 말하면 백제가 東아시아 요소요소에 KOTRA(대한무역진흥공사) 지사를 다수 설치했던 것입니다. 다만 백제는 화폐교역이 아니라 바터무역(「물물교환」)을 했다는 데에서 그 한계점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의 「梁書(양서)」 등 南朝史에는 백제가 중국에 遼西郡(요서군), 晉平郡(진평군)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요서군이라면 지금의 遼寧省(요령성) 남부지역, 진평군이라면 지금의 北京 일대입니다. 이를 우리나라 재야사학계에서는 백제의 식민지 경영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천하대란기인 五胡十六國시대에 백제인들이 중국 동부해안 일대에 진출한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만, 나는 그것을 해외 식민지 경영이라고 하기보다는 백제인의 해외무역·이민거점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또 진평군은 지금의 북경 일대라기보다는 臺灣(대만) 건너편의 福建省(복건성)일 것으로 봅니다. 어떻든 강단사학자도 재야사학자의 아이디어로부터 적지 않은 힌트를 얻고 있습니다』
 
  ―백제문화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백제문화는 역시 부드럽고 우아하죠. 金元龍 박사(고고학·작고)는 인간적이며 자연주의적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바로 다음날 유럽지역 답사여행을 떠나는 金총장을 퇴근시간까지 붙들고 인터뷰했다.
 
  金총장과의 면담에 이어 이 학교의 연구실로 李道學 교수를 찾아갔다. 李교수는 오랜 知面인 필자에게 백제문화와 관련한 논문 등의 자료를 중형 여행가방 하나에 가득찰 만큼 챙겨 주었다. 李교수와 함께 부여읍 중심가에 나가 저녁을 먹으며 밤늦도록 백제사에 대해 담론했다. 李교수의 대화는 다음 호에 쓸 것이다.
 
  이날 밤은 부여읍 사비시대의 都城 부소산성 아래의 여관에서 묵고 5월27일 새벽부터 오후 2시까지 扶餘 답사를 마친 다음에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직행했다.
 
 
  무령왕릉 출토품의 집중 전시
 
  국립공주박물관은 1971년 7월5일 기적적인 무령왕릉의 발견 직후에 塼築墳(전축분)인 무령왕릉의 분위기를 흉내내 벽돌로 지어 1972년에 개관한 아담한 현대식 건물이다. 여기에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을 중심으로 국보 14건 19점, 보물 4점 등 약 1000점이 전시되고 있다.
 
  공주박물관에서는 감시TV 설치작업이 한창이었다. 범인들이 숙직 직원들을 묶어 놓고 국보를 강탈해 갔는데도 불구하고 박물관에 감시TV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 범인의 조기 체포와 문화재 회수가 늦어졌다는 사회적 비난을 잔뜩 받았기 때문인 듯했다.
 
  그렇다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라고 할 수야 있겠는가. 문화재청은 사상 초유의 국보 강탈 사건을 계기로 경찰·시민단체 등과 합동으로 「도난 문화재 되찾기 운동」을 펼치는가 하면 문화재 절도범 및 도굴범 등을 강력히 단속하기로 했다. 또한 보안관리 시스템을 체계화하고, 해외에 불법 유출된 문화재에 대해서도 외교경로 등을 통해 반환받는 방안을 적극 추진하기로 했다.
 
  필자의 공주박물관 방문 후의 일이지만, 경찰은 공범 朴모씨(36)까지 검거하고 나머지 문화재 3점도 회수했다. 국보 1점을 포함한 문화재 4점이 모두 공주박물관에 되돌아왔다.
 
  공주박물관의 학예연구실에 들렀는데, 실장 이하 연구원이 모두 출타중이었다. 박물관의 한 경비원은 『국보 강탈사건 이후 학예사들을 여기저기서 부르는 데가 많아서 그럴 것』이라고 했다.
 
  공주박물관 앞뜰에도 공주 일원에서 출토된 많은 石造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필자는 하루 전에 문화유산 해설사 李惠影씨로부터 잣나무·벗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박물관 앞뜰에 수령이 약 70년 된 金松 세 그루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金松이라면 일본열도 남부지방 고지대에서만 自生하는 침엽수로서 무령왕 부부의 목관도 金松으로 만들어졌다. 금송의 針葉(침엽)의 뒤쪽을 관찰했다. 과연 은은한 금빛을 띠고 있다.
 
  박물관 건물의 입구는 무령왕릉의 널길처럼 어둠침침한 조명으로 분위기를 잡았다. 전시실은 2실로 구성되어 있다. 제1실(2층)은 무령왕릉의 출토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제2실(1층)은 충남지역 출토유물을 시대순으로 전시하고 있다. 특히 제1실엔 무령왕릉의 실제 크기로 모형분을 만들어 왕릉 내부를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강도에게 강탈당했던 국보 제247호 공주의당금동보살입상도 경찰에 의해 회수되어 이날부터 공주박물관에 다시 전시되고 있었다. 얼굴이 풍만하고 입술과 눈가에 머금은 얇은 미소가 백제후기 불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1974년 공주군 儀堂面 松亭里에서 출토되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 전체 높이 25cm.
 
  공주박물관에는 무령왕릉 출토품이 아닌 국보가 하나 더 있다. 국보 제108호 癸酉銘 三尊千佛碑像(계유명 삼존천불비상)이다. 이 천불상은 蠟石(납석)이라는 무른 돌에 약 1000구의 작은 불상을 정교하게 새긴 것이다. 높이 94cm. 1961년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 瑞光庵(서광암)에서 발견되었다.
 
 
  백제의 국제성 입증하는 국보들
 
  앞에서도 잠간 언급했지만,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국보 제163호 誌石은 국보 중의 국보다. 우선, 이것은 우리나라 誌石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이다. 또한 이 誌石 두 개가 고분 축조연대를 분명하게 제시해 주었기 때문에 무령왕릉의 출토유물은 삼국시대 고고학 연구, 특히 편년 연구에 기준자료가 되었다.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왕릉 중 피장자의 신원이 확인된 유일한 무덤이다. 誌石에 쓰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무령왕)께서 나이 62세로 계묘년(523) 5월7일에 돌아가셨다. 을사년(525) 8월12일에 대묘를 모시고, 왼쪽(매지권)과 같이 기록하여 둔다』(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 六十二歲癸卯年五月丙戌朔七日壬辰崩到. 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 安犀登冠大墓立志如左)
 
  내용은 비록 소략하지만, 이 기록으로 三國史記에 누락되거나 잘못 기록된 역사적 사실을 보충·시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백제의 국제적 관계 및 위상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영동대장군」이란 벼슬은 중국 南朝의 梁(양)나라 高祖로부터 받은 것이다. 무령왕의 이름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斯摩」가 아니라 「斯麻」임이 밝혀졌다. 왕의 죽음을 중국의 황제와 대등한 崩(붕), 무덤을 大墓(대묘)라고 표기했다. 다음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발굴된 매지권의 내용이다.
 
  『돈 1만 문, 이상 1건/ 을사년(525) 8월12일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상기의 금액으로 토왕, 토백, 토부모, 천상천하의 여러 관리에게 문의하여 남서 방향의 토지를 매입하여 능묘를 만들었기에 문서를 작성하여 증명을 삼으니, 율령에 구애받지 않는다』(錢一萬文 右一件/ 乙巳年八月十二日 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 以前件錢訟土王土伯父母上下衆官二千石 買申地爲墓 故立券爲明不從律令)
 
  무령왕의 매지권(지석) 위에는 「五銖」(오수)라고 새겨진 쇠돈 한 꾸러미가 놓여 있다. 이 鐵製 오수전은 梁나라에서 유통되던 돈으로 무령왕이 토지신에게 땅값으로 지불한 것이다.
 
  「梁書」 高祖本紀(고조본기)에 의하면 普通 4년(523)에 처음으로 鐵錢(철전)이 주조되었다. 그렇다면 무령왕이 붕어한 해(523)에 梁의 新造錢을 곧바로 백제로 가져왔다는 것이 된다. 돈을 무덤 안에 넣는 것은 중국 南朝에서 유행되었던 도교적 풍습이다.
 
  지석의 바로 후방에서는 국보 제162호 石獸(석수)가 발견되었다. 이것 또한 매지권처럼 한반도에선 처음 출토된 것이다. 출토 당시 석수는 널길 중앙에서 밖을 향하여 놓여 있었다. 응회암으로 만든 이 짐승은 상상의 동물로 악귀를 쫓아 死者를 수호하는 鎭墓獸(진묘수)다. 진묘수 설치는 중국 전국시대 楚(초)나라 무덤에서 시작하여 漢代 이후 중국의 墓葬(묘장)풍습으로 보편화했다.
 
  무령왕릉의 석수는 뭉툭한 주둥이와 콧구멍이 없는 코, 부릅뜬 큰 눈, 통통한 몸체와 네 개의 짤막한 다리를 가지고 있다. 등에는 말 안장과 같은 융기가 네 군데에 양각되어 있고, 정수리에는 쇠로 만든 뿔이 꽂혀 있는데, 150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산화되어 부러진 상태다. 몸체 좌우에는 앞뒤 다리 위에 날개가 양각되었다. 높이 31.5cm, 길이 48.5cm, 폭 22cm.
 
 
  불꽃 타오르는 듯 역동적인 金製 冠飾
 
  널길을 지나면 玄室인데, 방처럼 꾸며져 있다. 안쪽에 한 단 높은 대를 만든 다음 여기에 무령왕과 그의 왕비를 관 속에 넣어 왕은 왼쪽에 왕비는 오른쪽에 안치했다.
 
  왕릉 내부에는 왕과 왕비의 관이 붕괴되어 뒤엉켜 있고, 관 안에 안치했던 유물과 관 바깥에 두었던 유물이 흩어진 상태이다. 이는 목관의 이동 과정에서 그 안의 유물이 다소 움직인데다 또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목관이 썩어 붕괴될 때 그 충격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목관의 재목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일본에서 자생하는 金松이다. 직경 130cm, 수령 300년으로 추정되는 원목을 1500여 년 전 왜국에서 벌채하여 원목 또는 板材 상태로 粗가공한 뒤에 백제로 반송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공주大 백제문화연구소의 분석).
 
  왕릉 내부에 남겨진 유물은 왕과 왕비의 木棺 안에 있던 장식품과 관 바깥에 두었던 부장품과 의식과 관련한 용구 등이다.
 
  왕의 목관 안 머리쪽에 있었던 것은 국보 제154호 금제 冠飾(왕)으로 두 개가 포개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역동적인 모습이다. 순금판 위에 忍冬唐草(인동당초) 무늬 윤곽을 線刻(선각)하여 예리한 칼로 도려낸 것으로 冠(관·모자) 뒤에 꽂은 威勢的(위세적) 장식품이다. 이 장식품에는 금실로 꼬아 만든 127개의 瓔珞(영락·구슬을 꿴 장식)이 달려 있다. 「舊唐書」(구당서) 동이傳 백제條에는 『백제왕은 烏羅冠(오라관·검은 비단 모자)을 썼는데, 여기에 금장식을 하였다』고 쓰여 있다. 높이 30.8cm, 폭 14cm.
 
  왕의 머리 위에는 국보 제159호 金製 뒤꽂이가 발견되었다. 역삼각형의 금판으로 되어 있고, 하부는 세 개의 핀으로 구성되어 전체적으로 나는 새의 모습이다.
 
  무늬는 打出法을 구사했는데, 상부에는 8개의 花文이 한 개씩, 아래 위 두 개의 원래 무늬를 사이에 두고 배치되었다. 그 아래는 S자형의 인동무늬 두 줄기가 서로 마주했다. 길이 18.4cm.
 
  왕의 얼굴 부위 좌우에는 가는 원형 금고리에 두 줄기의 수식(늘어뜨린 장식)이 달린 순금 귀고리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국보 제156호 금제 心葉形(심엽형) 귀고리다.
 
  두 줄기의 垂飾(수식) 중 하나는 속이 빈 원통형의 중간 장식에 하트 모양의 장식을 단 것으로 뒷면에 側葉(측엽)이 붙어 있다. 또 하나는 여러 개의 가는 고리로 이루어진 구슬 모양의 장식에 다섯 개의 영락을 금실로 매단 것을 다섯 개 연결하고 맨끝에 푸른색 고리구슬을 달았다. 길이 9.8cm.
 
  왕의 목부분에는 목걸이에 사용되었던 금구슬·옥구슬이 남아 있었다. 허리 부분에는 은제 허리띠 장식이 있고, 그 곁에 龍鳳무늬의 큰 칼이 발견되었다. 양의 高祖가 보통 원년(520)에 무령왕을 영동대장군으로 책봉할 때 節刀(절도)로서 하사한 것이다. 발끝으로는 긴 못이 박힌 금동제 신발이 있는데, 그 크기로 보아 의식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아래엔 다리를 받쳤던 국보 제165호 足座(족좌)가 발견되었다.
 
  이 족좌의 발견으로 백제시대 왕가에서 어떻게 시신을 염하는지가 밝혀졌다. 오늘날 시신을 염할 때는 백지를 접어서 양쪽 발목을 묶고 있지만, 백제시대엔 발목 베개를 사용했던 것이다.
 
  족좌는 두 다리를 안치할 수 있도록 두 군데를 U자형으로 파내고, 전면에 검은 옻칠을 했으며, 금판을 오려서 6각 거북등 무늬를 만들었다. 그 안에는 각각 하나씩의 꽃장식을 배치했다. 높이 19.5m, 길이 43.2cm, 너비 9.8cm.
 
 
  다이내믹한 청동거울의 돋을새김
 
 
 
  왕비의 머리 부분에서도 한 쌍의 순금 관모 장식이 발견되었다. 국보 제155호 금제관식(왕비)다. 좌우대칭의 忍冬(인동) 당초문으로 이루어졌고 영락이 달려 있지 않아 왕의 금제 관식에 비해 간결하다.
 
  문양은 좌우 대칭으로 표현하고 중간부터 위쪽의 가장자리 부분은 火焰文(화염문)으로 표현되었다. 왕의 관식과 같은 수법으로 제조되었는데, 줄기 아랫부분은 부러져 조금만 남아 있는 상태다. 높이 22.7cm, 폭 13.4cm.
 
  왕비의 얼굴 부위에도 귀고리가 있었는데, 두 쌍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상태였다. 이것이 국보 제157호 금제 수식 附 귀고리(왕비)다.
 
  왕의 귀고리와 마찬가지로 가느다란 금환에 자그마한 고리를 연결하고, 거기에 두 줄의 수식을 달았다. 한 줄기의 수식은 각각 4개의 둥근 영락이 금사슬에 의해 일곱 마디로 연결되었고, 그 아래에 여덟 개의 둥근 영락이 있다. 또하나의 짧은 수식은 하트 모양의 영락을 3단에 걸쳐 달았으며, 끝에는 나무 열매처럼 생긴 장식을 달아 놓았다. 길이 12cm.
 
  왕비의 목 부분에는 일곱 마디짜리와 아홉 마디짜리 순금 목걸이 두 개가 걸려 있었다. 국보 제158호 금제 목걸이다. 그 마디와 마디 사이에 끝을 구부려서 서로 연결되었다. 마디가 활처럼 약간 휘어지고 중간부가 부르다. 마디 길이 5.6∼6cm. 이 목걸이 주위에는 목걸이에 사용되었던 각종 구슬도 상당량 흩어져 있었다.
 
  몸체의 중심 부근에는 오른쪽에 금제 팔찌, 왼쪽에는 은제 팔찌가 한 쌍씩 있었다. 발굴 사례가 극히 드문 銀製(은제) 팔찌가 국보 제160호로 지정되었다. 팔찌는 원래 무사들이 활을 쏠 때 팔을 보호하기 위해 끼던 것인데, 후에 장식용으로 발전하여 남녀가 모두 착용하게 되었다.
 
  은팔찌에는 바깥에 두 마리의 용이 돋을새김되어 있는데, 용은 머리를 뒤로 돌린 채 혀를 길게 내민 모습이다. 안쪽에는 제작연대와 작가의 이름이 새겨 있다. 바깥 지름 8cm.
 
  왕비의 머리 아랫부분엔 나무 베개가 발견되었다. 시신의 머리 베개로 사용한 것이다. 이 특이한 베개가 국보 제164호 頭枕(두침)이다.
 
  머리를 고정시킬 수 있도록 중간부를 U자형으로 파내고, 전면에 朱칠을 했으며, 주변 윤곽을 따라 금박으로 띠를 두르고, 조금 가는 금박띠를 다시 둘렀다. 넓은 면에는 6각의 거북등 모양을 배열하고, 그 안에 봉황, 용, 꽃 무늬 등을 그렸다.
 
  U자형 표면은 부식이 심해 확실치 않고 양 옆 윗면에는 타원형의 자국이 나 있으며, 봉황을 고정시켰던 조그만 구멍과 꼭지가 보인다. 높이 23.7cm, 윗길이 44.2cm, 너비 12cm.
 
 
 
  무령왕릉에서 銅鏡(동경)이 무려 세 개나 나왔다는 점도 우리나라 고고학계에선 센세이셔널한 일이었다. 한반도의 고분에서 銅鏡의 副葬은 매우 드문 사례이다. 그것이 국보 제161호로 일괄 지정된 靑銅神獸鏡(청동신수경)·宜子孫獸帶鏡(의자손수대경)·獸帶鏡(수대경)이다.
 
  청동신수경은 중국 후한 때 유행하던 거울 양식을 본떠서 제조된 것이다. 거울 뒷면 한가운데의 배꼽처럼 튀어나온 돌기 주변으로 네모꼴의 윤곽을 만들고 12개의 작은 돌기를 둘렀는데, 그 사이사이에 십이지의 글자를 하나씩 새겼다.
 
  주위에 네 마리의 짐승과 사람 하나를 半입체적으로 돋을새김했다. 사람은 삼각 팬티만 입은 채 창을 겨누는 모습이고, 질주하는 동물의 모습은 다이내믹하다. 바깥 둘레에는 톱니무늬와 두 겹의 물결무늬를 둘렀다. 지름 17.8cm. 의자손수대경은 지름 23.2cm, 수대경은 지름 18.1cm.
 
 
  일본인들에게도 마음의 고향
 
  무령왕릉에서는 시신은 부식했지만, 인체의 유물로는 사망 당시 30대의 나이로 추정되는 여성의 치아가 하나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합장된 왕비는 사망 당시 62세였던 무령왕의 후처일 가능성이 높다. 후처인데도 불구하고 무령왕과 합장되었다면 그녀는 후계왕인 聖王의 生母(생모)일 가능성 또한 높다. 그렇다면 무령왕릉의 발치에 있는 6호분은 태자를 낳지 못한 무령왕의 첫부인일 것이라는 추리도 가능하다.
 
  무령왕릉에서는 이밖에도 도자기·식기·曲玉(곡옥: 굽은 옥) 등도 발견되었는데, 우리나라에 있어서 하나의 고분에서 출토된 것으로서는 질·양 어느 쪽에서도 최고의 것이었다. 만약 무령왕릉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제 아무리 『백제문화가 찬란했다』고 외쳐도 공허할 뻔했다.
 
  문화유산 해설사 李惠影씨는 『무령왕릉은 한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인에게도 메카가 되고 있다』면서 『갈수록 일본인 답사자가 늘어나고 있는데 그것이야말로 「渡來人」(도래인)의 후손인 그들의 歸巢(귀소)본능이 작동한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일본어 회화에 능숙한 그녀는 급증하는 일본인 답사자들에게 무령왕릉을 해설해 주기 위해 일본어 공부를 했다고 한다.
 
  필자도 일본인에게 무령왕릉은 「마음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느낀 적이 있다. 1984년 5월, 필자는 재일동포의 생활상을 취재하기 위해 재일동포 밀집지역인 오사카의 이쿠노區 일대를 답사했다. 그때 매일 밤 취재 대상 재일동포들에게 융숭한 술대접을 받는 바람에 배탈이 나서 약국에 들렀다. 뜻밖에도 약사가 학술서적급 百濟史의 무령왕릉 대목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
 
  『재일한국인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일본 사람이다』라고 답했다. 다시 『그 책을 왜 읽으냐』고 물었더니 『이번 여름에 무령왕릉을 답사할 예정』이라고 답했다. 그 순간, 백제와 일본 간에 이어진 끈끈한 역사의 끈을 실감할 수 있었다.
 
  百濟史는 우리 古代史(고대사) 연구에 있어 가장 부진했던 분야로 남아 있었다. 무령왕릉의 발굴과 출토 유물은 그런 백제사 연구의 취약성을 상당 부분 보완해 주었다. 그 고고학적 성과는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의 관계 학자들에게도 하나의 커다란 福音(복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