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보물 및 국보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고구려

야생초요 2006. 7. 2. 14:20
 

   고구려 금동미륵반가사유상(金銅彌勒半跏思惟像, 국보 제118호)


   이 불상은 높이가 17센티미터나 되는 당당한 크기에 연잎을 두른 둥근 의자에 미륵보살이 반가 한 채 앉아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불상 전면에는 녹이 나고 불에 탄 흔적도 있으며 침식으로 뺨을 짚었던 오른손은 결실되었다. 고개 숙여 명상에 잠긴 미륵보살은 머리에는 삼산관(三山冠)을 썼고, 머리 뒤쪽에는 광배를 꽂았던 광배꽂이가 돌출 되어 있는데 광배는 없다. 부리부리한 눈에 꼭 다문 입, 그리고 가슴을 드러낸 상체의 모습에서 고구려 무인의 씩씩한 기상이 느껴진다


   우물에서 나왔어요


   1940년 어느 날이다. 일본인이 모여 사는 평양의 남선동에 아침이 밝았다. 이 마을은 1905년 이후 일확천금을 꿈꾸며 이 땅에 들어온 일본인 골동상과 관리들이 모여 사는 동네로 김동현은 화천당(華泉堂)이란 골동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일본인 골동상들이 평양으로 모여든 것은 1916년 이후이다. 세끼노 다다스(關野 貞)의 고적 조사가 있고 서, ‘낙랑 고분에 순금 보화가 무더기로 묻혀 있다’라는 소문이 일본인 사이에 퍼졌다. 그러자 그 때까지 개성과 강화도에서 청자를 약탈하던 일본인들이 대거 평양으로 몰려들어 너나할 것없이 임자 없는 무덤을 파헤쳤다. 그 중에서 평양 중학교에 선생으로 재직하던 기다무라 주지(北村 忠次)는 대낮에도 낙랑과 고구려 고분을 당당하게 약탈해 부장품을 꺼내 팔던 자였고, 시라까미 주키치(白神 壽吉)는 수집한 고미술품을 모조리 싸 가지고 평양을 떠난 악질 골동상이다.

   김동현은 어린 시절(4~12세)을 중국 상해에서 지냈는데, 아버지는 의사 출신의 항일 독립군으로 활약하였다. 당시 상해는 중국 침략을 노리는 제국 열강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거리에는 진? 한 시대의 유물들이 지천으로 넘쳐 자연스럽게 고미술품을 바라보며 자랐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평양의 대동강 근처에서 살았는데, 그곳에는 약 4세기에 걸친 낙랑의 귀족과 무사들이 남긴 천 수백 기의 무덤들이 있었다. 금속 유물에 대해 눈을 뜬 그는 결혼 후 평양에 골동 가게를 내고 있었다.

   하루는 작업복을 입은 한국인이 보자기에 기와와 벽돌을 싸 가지고 찾아왔다. “어디에서 나온 것들이지요?” 김동현은 깜짝 놀랐다. 물기 묻은 기와를 손톱으로 긁으니 명문(銘文)이 나왔다. 고구려 시대의 기와가 분명했다. “저는 평천리에 있는 일본인 병기창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몇 일전 버드나무 아래에 있는 우물을 팠는데, 이것들이 그 속에 있었어요.” 그 사람은 혹시 막걸리 값이나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와와 벽돌을 요모조모 살피던 김동현이 부인인 윤명숙(尹明淑)을 바라보며 떨리는 신음을 뱉어 냈다. “2백 원만 빌려 오지.” 인부와 부인은 그 말에 화들짝 놀랐다. 당시 병기창에서 죽도록 일해야 월급이 고작 20원이었다. 2백 원이라면 10달치 월급, 아니 일년 봉급과 맘먹었다. “적당한 값보다 더 드립니다. 물건이 또 있으면 가져오세요.“ 그 사람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돈을 받더니 꽁지가 빠지도록 사라졌다. 그로부터 몇 일이 지났을 때다. 기와를 가지고 온 인부가 또 다시 들어오더니 보자기를 내 밀었다. “기왓장과 벽돌 아래에 있던 불상이어요. 녹도 많이 슬고 손도 떨어져 나가 그냥 버릴까 하다가 가져왔어요.”
   
지난번에 값을 너무 많이 받았다고 생각한 그가 인사치레로 가져온 것이다. 흙과 녹이 범벅이 된 불상을 보고 김동현은 까무러칠 것같은 전율을 느꼈다. 반가상은 극히 희귀하고, 또 고구려의 것으로는 그 예가 없었다. 단번에 하늘에서 돈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또 얼굴을 약간 숙여 깊은 사색에 빠진 반가사유상은 서 있는 불상[立佛]에 비해 최소한 곱절의 가격을 받을 수 있다. 흥분을 주체할 수 없던 김동현이 급히 불상을 안으로 감추고는 차근차근 물어 보았다. “이 불상을 아는 사람이 또 있어요?” “없어요. 혼자서 우물을 파다가 나왔어요.” “불상에 대하여 앞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요. 너무 귀한 것이라 왜놈이 빼앗아 갈 수도 있어요.”

   국보급 불상으로 확신한 김동현은 그 불상을 헐값에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물건에 걸맞은 적당한 가격으로 물건을 사야 뒤탈이 없다’라는 신조가 있었다. 몇 일의 말미를 얻은 김동현은 처가와 친척집을 돌아다니며 당시 기와집 3채 값인 거금 6천원을 꾸어다가 인부의 손에 쥐어 주었다. “어디 먼 곳으로 떠나서 사시지요.” “돈이 생겼는데 무엇 하러 공사장에서 일을 하겠어요. 염려하지 마세요.” 그 날 밤, 김동현과 부인은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조심스럽게 불상을 감상하였다. 대단한 품격으로 세상에 내놓으면 금방 부자가 될 것만 같았다. “마치 법열을 깨우치는 순간 같아 보여.” 김동현이 부인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돈을 빌리느냐고 갖은 고생을 한 부인도 머리를 끄덕였다. “양다리와 의자를 덮은 법의를 보세요.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아름다운 무늬가 너무나 신비로워요.” 불교가 고구려에 전해진 것은 소수림왕 2년(372년) 경으로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순도(順道)를 시켜 불상과 불경을 전한 것이 시초이다. 소수림 왕은 감사의 뜻으로 순도에게 왕자에게 불경을 가르치게 하고, 그로부터 2년 뒤에 아도(阿道)라는 승려가 와 처음으로 절을 세웠다. 이 불상은 4세기말이나 5세기초의 고구려 불상으로 추정되며, 동양 삼국(한국. 중국.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평가되었다.

   일본의 골동상이 겹겹이 진을 친 평양이다. 만약 조선인이 대단한 불상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나면 순사에게 빼앗기기가 십상이다. 김동현은 먼저 쇠로 된 상자를 만든 다음 그 속에 불상을 넣고는 아궁이를 파고서 그 속에 묻었다. 재가 있는 아궁이는 누가 보아도 의심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속까지 불안을 몰아내지는 못했다. 밖에서 사람 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덜컹하고 무너져 내렸다. 자면서는 악몽에 시달리며 헛소리까지 해댔다. 다시 우물 속에도 넣었으나 물이 스며들까 불안했다. 다시 광으로 가 커다란 간장 독을 한 쪽으로 옮기고는 그 밑을 석 자나 깊이 땅을 팠다. 짚으로 똬리를 만들어 상자를 넣고는 흙으로 덮었다. 장독을 다시 제자리로 옮겨 놓았다. 그래도 불안했다. 사람 발자국 소리까지 무섭고 두려웠다. 김동현은 비밀리에 사진을 찍은 뒤에 평양 박물관에 학예관으로 근무하던 친구 황욱에게 불상을 보여주었다. “팔 것이면 내가 박물관장에게 얘기를 해 보겠네.” 숨이 멈추고 감상하던 황욱이 눈이 휘둥그래져 물었다. “설령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이 불상은 팔지 않겠네. 이 불상은 이 나라의 보배로 좋은 세상을 만나면 국보가 될 것이네.”

    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일본인이 평양박물관장에게 일러 받쳤다. 하루는 일본인 일당들이 김동현의 가게로 들여 닥쳤다. “김 상, 고구려 반가사유상을 박물관에 넘기시요.” 갸름한 얼굴에 콧수염을 뭉툭하게 기른 일본인이 협박조로 눈을 부라렸다. “일없오.“ “그 불상은 병기창에서 나왔으니, 나라 것이요. 또 박물관장이 불상 값으로 상당한 돈을 내겠다고 했소.” 그들은 김동현을 둘러싸고 금방이라도 덤빌 자세를 취했다. 김동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 불상을 묻어 놓은 곳은 세상에 나밖에 모르니, 설령 죽는다 해도 일본인에게는 넘길 수 없다.’ “잘하면 갑부가 될 수 있소. 내놓으시오.” “그 불상은 지금 가지고 있지 않소.” “집을 수색하겠소.” 그 말에 부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렇지만 김동현은 ‘네깐 놈들이 어떻게 하겠냐’ 하는 배짱으로 버텼다. 그러나 다행히 그 이상의 일은 없었다. 생각 끝에 그는 원산에 살던 처남 댁으로 갔고, 불상을 항아리 밑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오구라 상, 물러 가시오


   그러나 불상에 대한 소문은 금속을 다루던 일본인들에게까지 알려졌다. 그러자 대구에 살던 최고의 금속 유물 수장가 오구라 다케노스께(小倉武之助)가 평양으로 직접 찾아왔다. 그는 신라 금관을 위시하여 진귀한 금속 유물을 수백 점이나 가지고 있었다. 모두가 높은 안목과 감정을 거쳐 수집한 것들이다. 그러나 이찌다 지로(市田 次郞)가 소장한 백제 불상만 보면 금세 기가 죽었다. 세상에 ‘니와세 불상’으로 알려진 이 불상은 부여 규암리에서 출토된 것으로 거금 60만 원까지 보았던 물건이다. 그러나 골동계에서는 군계(群鷄)가 일학(一鶴)을 당해 내지 못하는 법이다. 아무리 많은 양의 물건을 가지고 있어도 우뚝 선 장수가 없으면 나머지는 모두 졸병일 뿐이다. 한 점의 명품이 들어감으로 소장품 전체가 빛을 발하고, 한 점의 명품이 빠짐으로써 전체가 빛을 잃는다. 오구라는 이찌다가 소장한 불상보다 시대도 앞서고 또 희귀한 반가상을 입수해 단번에 그를 압도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평양의 내노라 하는 골동상은 오구라를 환대하며 평양 제일의 술집으로 김동현을 불러냈다. 돈이라면 어떤 값이라도 치를 자신이 있어, 오구라는 처음부터 돈으로 승부를 걸었다. 검은 양복에 조끼까지 받쳐입은 오구라가 윤기 흐르는 이마를 쓰다듬으며 넌지시 물었다. “불상 좀 봅시다.” “지금은 없고 사진만 가지고 왔습니다.” 오구라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파노라마처럼 번져 나갔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숨을 삼킨 채 사진을 보던 오구라의 눈과 입에서 가는 신음이 터져나왔다. “대단한 명품이야.”곁에서 아량을 떨던 골동상들도 침을 삼킨 채 사진을 돌려보았다. 모두 오구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김 상, 어렵게 구하여 소장하고 계신 줄 알지만 넘겨주시지요?” 술이 몇 잔 돌았을 때, 오구라가 김동현의 눈치를 살피며 자신에 차 입을 열었다. 그러나 김동현의 눈빛은 냉랭하기만 했다. “가격이라면 50만 원까지 내겠습니다.” 앗! 귀를 기울이며 모든 사람들이 자기 귀를 의심하며 놀라 소리쳤다. 당시 살 만한 한식 기와집이 보통 2천원 정도했다. 50만원이면 기와 집 250채 값의 어마어마한 거금이다. 한국 최고의 갑부도 그만한 돈이 없었던 때다. 서로 입을 막고는 김동현의 대답을 숨을 삼킨 채 기다렸다. “미안합니다만 생각이 없습니다.” 오구라는 자기 귀를 의심하며 ‘앗!’하고 소리를 내 질렀다. “왜 그러십니까? 가격이라면 상당한 선까지 더 내겠습니다.” “오구라 상, 세상에는 돈을 가지고 되는 것이 있고, 안되는 것도 있습니다. 말씀 그만 하시지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당하는 모욕에 오구라의 등줄기에는 닭살 같은 전율이 돋아났다. 술자리는 즉시 파했다. 어떤 자는 주먹을 움켜쥔 채 김동현을 한 방에 때려눕힐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그 날 밤, 김동현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한번만 마음을 고쳐 먹으면 평생을 잘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고개가 절래절래 흔들었다. 다음 날 아침이다. 오구라가 벌건 눈으로 화천당을 찾아왔다. “김 선생, 한번 더 생각해 보시죠? 가격이라면 어느 정도 더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최고의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정말 이렇게 사정합니다.” 그 말과 함께 오구라가 득달같이 무릎을 땅바닥에 꿇었다. 당황한 김동현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어 그를 바라보았다. 오구라의 눈을 바라보았다. 지난 밤 한 잠도 자지 못한 시뻘건 눈이 태양처럼 이글거렸다. “오구라 상, 어제도 말씀드렸다 싶히 생각이 없습니다.” 김동현은 일체의 연민도 없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외면했다. 김동현의 다리를 부여잡은 오구라의 눈에 눈물이 비치더니, 이윽고 잔잔한 주름이 잡힌 눈까풀을 뚫고 방울이 되어 떨어졌다. “김 상, 내가 가진 물건을 모조리 다 줄 테니 그럼 넘겨주시겠습니까?” 으음. 김동현의 입에서도 어쩔 수 없이 신음이 배어 나왔다. 오구라가 투자한 돈은 거의 2천만 원에 육박하는 천문학적인 거금이다. 김동현은 숨을 들이 쉰 뒤 다리에 힘을 주었다. “오구라 상, 물러가시지요.” 김동현은 짧고도 비장한 말을 거침없이 뱉어버리고는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그 때까지 무릎을 꿇고 애원하던 오구라가 야수 마냥 튕겨 일어섰다. 젖은 눈에 살기가 번득였다. “김 상! 당신도 부자가 될 수 있고 서로 좋자고 하는데 무슨 고집이 그리….” 오구라는 자기 분을 못이기 듯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었다. 얼굴에는 노기가 충천하여 말도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눈은 불을 뿜듯이 격해 있었다. “물러 가시라요. 오구라 상!” 김동현의 손가락이 창날처럼 오구라를 향해 뻗어졌다. “….” 꽝!


   광배가 나왔어요


   해방이 되었다. 김동현은 서울로 남하할 생각을 했다. 북한에 소련 군정이 시작되자, 공산당이란 사람들이 개인의 재산을 인정치 않고 또 하루가 멀게 부역으로 내몰아 살기가 어려웠다. 특히 목숨을 걸고 지킨 고구려반가사유상과 많은 고미술품을 박물관에서 접수한다는 말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는 최학엽(崔學燁)과 함께 월남하면서 고구려반가상을 등짐에 넣고 내려왔다. 원산에서 배를 타고 내려온 그들이 주문진을 거쳐 동두천에 도착했을 때이다. 갑자기 소련군이 나타나 총부리를 들이대었다. “꼼짝 마!” 기겁을 한 두 사람이 짐꾸러미를 내려놓고 두 손을 들었다. 무장한 소련군은 두 사람의 등짐을 뒤졌다. 기대를 했으나 팔 잘린 불상만 나오자 실망한 한 놈이 군화 발을 들어 불상을 짓밟으려고 했다.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김동현이 잽싸게 무릎을 꿇어 엎드리며 비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는 시계와 돈을 몽땅 털어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팔목에 시계를 차며 자기들끼리 키들키들 웃더니 총부리를 옆으로 비켜 휘둘렀다. 오구라까지 무릎을 꿇인 자랑스런 문화재가 또 다시 살아남는 순간이었다.

   서울 영천(靈泉)에 세를 들어 살던 김동현은 일 년 뒤에 부인까지 데리고 내려와 장충동에 둥지를 틀었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았을 때다. 해방 후 평양 박물관장이 된 황욱의 아들 황병관이 인사 차 김동현의 집을 찾아왔다. 그는 레슬링 선수로 평안도 오성의 부잣집 큰아들이었다. “참, 고구려반가사유상의 광배와 대좌가 다시 나왔다는데 혹시 보셨어요?” 그 말에 김동현과 부인은 기절초풍을 했다. 방안은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긴장이 돌았다. 천하의 명품에 광배와 대좌까지 갖춘다면 세계 제일의 보물로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김동현은 불상 머리에 돌출한 빈 광배꽂이를 생각하며 경련을 일으켰다. “어디서?” “불상이 발견된 우물을 다시 조사했더니, 그곳에서 광배와 대좌가 나왔답니다. 평양서 내려온 동생한데 들었어요,” 그 날 밤, 두 사람은 평양을 다녀오기로 결심을 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월남하는 사람이 많아지자 소련군의 감시가 매우 심해 적을 때이다. 붙들리면 죽음을 면하기도 어려웠다. 그러자 부인이 고집을 부렸다. “여보, 차라리 내가 갔다 오겠어요.” 부인이 남편을 말을 막으며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남편을 다시는 사지로 보낼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가 서려 있었다. “뭣이?” “당신은 남자이고 붙잡히면 끝장이어요. 나는 여자니까 용서를 받을 수도 있어요. 당신을 보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가 죽는 편이….”

   부인의 서릿발같은 고집에 김동현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부인이 산길을 타고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잠입했다. 평양 박물관의 황욱 관장은 부인에게 우물에서 나온 광배와 대좌를 보여주었다. 광배는 주형(舟形)이었다. 그러나 불상을 가져가지 못해 실제로 광배를 꽂아 보거나 대좌에 앉혀 보지는 못했다. “관장님, 아무래도 불상의 것이 아닌 것 같아요. 광배도 지나치게 크고, 대좌도 아니여요. 혹시 그 우물에 또 다른 불상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까?” 당황하던 황욱이 놀랐다. 또 다른 불상이 나왔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행여 다른 불상을 누가 빼돌리지 않았나 의심도 생겼다. “서로 왕래가 어려우니 이 광배와 대좌를 일본이든 북한이든 인연이 닿으면 도록에 실어 주세요. 확인해 보게요.” 황욱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광배와 불상이 「조선 학보」에 실렸다. 김동현은 사진과 규격대로 광배를 만들어 불상에 꽂아 보았다. 광배가 지나치게 머리 위쪽으로 올라와 본래의 것이 아님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광배에 ‘영강 칠년 (永康七年)’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어 광배가 장수왕(長壽王) 6년, 그러니까 서기 418년에 주조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목숨을 건 북한 행으로 부인은 지독한 동상이 걸렸고, 평생 동안 아픔을 느껴야 하는 숙명으로 남았다.


   세월은 이기지 못한다


   이 불상에 얽힌 비화는 그 뒤에도 계속된다. 6. 25가 반발하자, 김동현은 부인을 혼자 서울에 남겨 둔 채 이 불상과 금동탄생불입상?고구려무량수삼존불입상만 들고 부산으로 피난 갔다. 자칫 난리 통에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자, 그는 부두 노동을 자원해 힘든 군수품을 날랐다. 그러나 배를 골아 가면서도 불상은 팔지 않고 안전하게 지켰다. 무서운 집념이 아니고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피난살이다. 김동현은 서울에 있는 여러 수장가들과도 사귀었는데 그 중에서 이병직(李秉直)과 친하게 지냈다. 서울 장안에서 7천석꾼의 부자로 소문났던 그는 나중에 교육 사업에 투신한 분으로 김동현을 통해 금속 유물에 심취하였다. 월남하여 어렵게 살던 김동현에게 이병직은 마음을 의지하던 형님뻘이었다. “고구려반가상을 양도하게. 내가 가진 모든 서화와 골동품을 다 주고 더불어 50만원을 더 주겠네.” 우리 나라 골동사를 얘기할 때, 이병직은 고미술품과 함께 자라고 고미술품과 함께 늙은 산 증인이다. ”형님, 죄송합니다. 운명이라 생각 듭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어떤 시련도 김동현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보릿고개의 가난한 시절에도 간장과 새우젓만으로 밥을 먹으면서도 팔지 않고 지켰다. 그 후 이 불상은 1964. 3. 30일 국보 제118호로 지정되어 세상에 찬란한 빛을 발하였다.

   그러나 세월만큼은 항우 장사도 이기지 못한다. 환갑을 지낸 1970년대이다. 김동현은 맹장수술에 이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곧 저 세상 사람이 되는 듯 싶었다. 그러자 그 동안 수집했던 300여 점의 금속유물의 처리가 걱정이 되었다. 자식도 없이 두 부부만 살아온 인생이라 더욱 그러했다. 그 후 다시 1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호암 미술관을 세운 이병철이 긴곡하게 양도해 줄 것을 부탁했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던 그는 1982년 그동안 수집했던 국보 3점, 보물 4점과 다수의 금속유물을 7억원에 양도하였다. 전논산출토청동기일괄(傳論山出土靑銅器一括, 초기철기시대, B.C3~2세기, 국보146호)?전대구비산동출토청동기일괄(傳大邱飛山洞出土銅器一括, 초기철기시대, B.C 1세기, 국보137-2호)?나전단화금수문경(螺鈿團花禽獸文鏡, 통일신라, 8~10세기, 국보140호)? 낙랑유문칠배(樂浪有紋漆盃, 낙랑, 보물559호)?.진솔선예백장동인(晉率善濊佰長銅印, 원삼국시대, 보물560호)?고령지산동출토금속유물(高靈池山洞出土金屬遺物一括, 보물570-2호)?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신라, 7세기, 높이 11.5cm, 보물 643호)가 대표적인 유물들이다.

   그 해, ‘호암 미술관’의 개관되었고, 이병철은 김동현과 부인의 손을 반갑게 잡으면 고생을 위로하였다. ”두 분의 박물관이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언제라도 들려 평생을 바쳐 지킨 문화재를 보십시오.“ 그러나 그 때도 김동현은 이 불상만은 양도하지 않고 끝까지 소장했다. 그러나 늘 어두운 금고 속에 갇힌 불상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다. 80살이 넘어 또 쓰러진 김동현은 이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1990년 초반, 삼성그릅의 이건희 회장을 만났다. 이건희는 우리 문화재를 훌륭히 지켜 낸 김동현을 높이 치켜세웠다. ”그 동안 간장만 찍어 진지를 드시면서 50년간이나 간직하셨으니, 부처님과 부인께 할 일을 다하신 거 아닙니까?“ 간곡한 부탁을 받은 김동현은 1992년 불상을 양도하기로 마음먹고, 가나 화랑의 이호재(李浩宰)를 중간에 세웠다. 이 때 넘긴 문화재는 고구려금동반가사유상과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상(보물 제401호), 금동신묘명무량수삼존불입상(국보 제85호) 3점으로 45억 원에 양도되고, ‘10만원 짜리 가짜 금불상’ 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했던 금은여래좌상은 덤으로 건네졌다. 골동계에서 중개인에게 주는 수수료는 거래 가격의 10~15% 수준이 묵시적으로 통용된다. 김동현은 이호재에게 거금 6억 원을 건네주었다. 필자는 1995년 소장자의 명의를 김동현에서 이건희로 변경하면서 고구려금동반가사유상은 25억원, 금동여래입상과 금동신묘명무량수삼존불입상은 각각 10억 원에 양도되었다고 문화재관리국에 신고하였다. 하지만 그 돈이 인생의 황혼에 선 노인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평생 동안 마음 든든하게 생각했던 불상을 더 좋은 환경으로 시집보냈다는 생각만이 가슴을 뿌듯하게 만들었다.

   1995년 봄날이다. 두 부부가 호암 미술관을 찾았다. 고구려반가상 앞에 선 김동현은 먼저 합장을 한 뒤에 통한 어린 눈으로 오랫동안 고구려 반가상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진열되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으니 참 잘된 일이야.“ 김동현의 말에 불상 때문에 격은 수많은 설음과 고생이 되살아나는지 곁에 있던 부인이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찍어댔다. ”나는 이 불상만 보면 눈물이 납니다.“ 회한에 젖어 불상을 바라보는 김동현의 모습이 어느 새 웅혼한 기상을 품은 불상의 얼굴과 닮아 보였다. 1997년 문화유산의 해를 맞이하여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호암 미술관은 민족문화재를 지킨 선각들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고, 또 병마에 시달리는 김동현을 위로하기 위해 ‘호암미술관 소장 금속유물특별전- 김동현 수집품을 중심으로’을 개최하였다. 전시회의 주빈으로 참석한 김동현과 부인은 나란히 휄체어를 타고 전시장을 관람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축하해 준 개막식에서 부인이 대신 인사말을 했다.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이런 전시회가 열리게 되어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눈물이 많은 부인이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훔쳐냈다. 그 곁에는 비록 귀는 어두우나 아직도 총기 있는 눈을 가진 김동현이 초대된 귀빈들을 회한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참고: 김동현씨 증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