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보물 및 국보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야생초요 2006. 7. 2. 14:22

    금동미륵반가사유상(金銅彌勒半跏思惟像. 국보 제83호, 93.5cm)


   이 불상은 돈자형(墩子形) 의자 위에 미륵보살이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앉아 있는 형태로 삼국 시대 말엽(7세기 경)의 대표적 미술품이다. 이 불상을 보고 어느 독일의 박물관 관계자는 ‘십 만금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진품이다’라고 극찬을 했다. 오른 손 끝을 빰에 살며시 대어 명상에 잠긴 보살은 왼발은 내리고 오른발은 왼쪽 무릎에 얹은 반가상의 모습이다. 또 얼굴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띤 명랑한 표정이고, 천의를 목뒤로 돌려 어깨를 감싼 형태는 부피감과 함께 탄력적이면서 부드러운 율동이 느껴진다. 소박한 삼산 보관, 벗은 상체, 간결한 목걸이에서는 단순함이 가늘고 긴 눈, 오뚝한 코, 미소를 머금은 입에서는 자비로움이 서로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한편으론 부드럽고, 한편으론 섬세하여 사실적인 느낌에 숨이 막히는 감동을 전해 준다.


   십 만금을 주어도 아깝지 않다


   우리 나라 국보 제1호가 ‘남대문’인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그럼 일본의 국보 제1호는 무엇일까? 놀랍게도 7세기 초 신라에서 전해 준 미륵보살반가사유상으로 상기의 불상과 매우 흡사하다. 다만 일본의 불상은 한 그루의 나무로 조각한 목조 불이고, 우리 것은 금동불인 점이 다를 뿐이다. 일본 교토(京都)의 코류지(廣隆寺)에 봉안된 이 불상은 높이가 123.5센티미터로 일본에서는 ‘보관미륵보살반가사유상(寶冠彌勒菩薩半跏思惟像)’이라 부른다. 불상을 친견한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Jaspers, 1883~1969)는 세계 최고의 걸작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고대 그리이스의 신(神)들을 조각한 조각과 로마 시대에 만든 수많은 기독교의 예술품은 아직 완전히 인간적인 냄새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불상은 지상에 있어서 모든 시간적인 것의 속박을 초월해서 이루워 낸 인간 존재의 가장 맑고 원만하고 영원한 모습의 표상이다.‘

   일본측의 기록에 의하면, 이 불상이 코류지에 봉안된 것은 603년의 일이라고 한다. 성덕 태자(聖德太子)가 교토의 지도자였던 신라인 진하승(秦河勝)에게 전해 주고, 진하승은 곧 코류지의 전신인 봉강사(蜂岡寺)를 창건하며 이 불상을 모시게 되었다. 이 불상이 신라인이 만든 불상이라는 과학적 근거는 재질이 적송(赤松)이란 점이다. 1980년 대 초, 불상의 미소에 반한 일본인 대학생이 자기도 모르게 불상에 접근했다가 실수로 오른손의 새끼손가락을 부러뜨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큰 소동이 일어났지만 다행스럽게 정밀 조사를 통해 재질이 한국에서 난 적송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 불상은 한국에서 적송을 들여다 일본 내에서 조각한 것인지, 아니면 신라에서 조각을 완성해 현해탄을 건너간 것인지는 입증되지 않았다. 다만 어느 쪽이든 한반도의 장인에 의해 조각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보아 완성된 형태로 건너갔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 절에는 또 다른 신라 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보관미륵보살 반가사유상’과 거의 같은 시기에 제작된 불상으로 균형도 잘 잡히고 기교도 뛰어나지만 어쩐지 우는 아이의 모습 같아 그곳에서는 ‘우는상투미륵상’으로 부르는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다. 그러나 재질은 장목으로 616년에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며 전해 준 것이라 한다.

   이 땅의 국권을 송두리째 빼앗아 간 경술국치가 있던 1910년 어느 날이다. 일확천금을 꿈꾸며 이 땅을 침입한 악질적인 도굴 앞잡이 가지야마 요시히데(梶山義英) 는 충청도 어느 산골에 버려진 석탑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 속에는 숨이 막히도록 빼어난 예술품이 천 수백 년의 잠에서 깨어나 침략자를 보고는 얼떨결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악질은 예술 혼이 빼어난 이 불상을 보고 어떠한 미소를 지었을까? 일본인은 집에 아담한 연못을 두고 비단 잉어를 기르기를 좋아한다. 따라서 일본 대신의 환심을 사야 하는 조선 총독부의 고관들은 그들이 정원을 꾸밀 마땅한 석등과 탑을 찾아 내 일본으로 보내야 했다. 마침 한국의 깊은 산에는 언제 없어진 지 모르는 폐사지가 널려 있었고, 잡초 속에는 탑이며 석등, 부도가 여기저기 널려 있어 일본인 골동상의 표적이 되었다. 탑이나 부도는 고승의 사리나 불경을 봉안한 무덤의 또 다른 형태이다.
   
이 땅의 백성들은 선조가 만든 예술품을 지독히도 즐기지 못하는 민족이다. 특히 효 사상이 뛰어나 조상의 묘를 파헤치면 죄를 받는다고 생각했고, 특히 그 속에 간직된 부장품을 꺼내 집안에 두면 부정이 탄다고 해 터부시하였다. 잡초에 뒹구는 탑이나 부도 또한 신앙의 대상으로만 경외시 했을 뿐 그것들을 마당에 설치해 감상하려고는 생각지 않았다.
계룡산에 살면서 백제 불상과 유물을 많이 연구한 이나다 순스이(稻田春水)는 이 불상을 보고 ’충청도 벽촌에서 올라왔다‘고만 발표했다. 그래서 이 불상은 백제 불상으로 간주되고 정확한 출토 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불상을 획득한 가지야마는 1912년, 이왕가 박물관장으로 있던 스에마쓰 마히코(末松熊彦)에게 접근해 이 불상을 2,600원(圓)을 받고 팔았다. 당시 쌀 한 가마니가 보통 5원 정도 했으니, 거의 5백 가마가 넘는 거금이다. 그러나 그 돈은 온전히 이 땅의 백성들이 낸 세금이었다. 고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이토가 창경궁에 지은 이왕가 박물관은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도굴한 문화재를 조선 백성의 세금으로 합법적으로 구매해 주는 고마운 루트였다. 그후 이 불상은 이왕가 박물관에 소장되어 전해 오다가 1915년 이왕가 박물관이 총독부 박물관으로 개칭되고, 해방 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칭되어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83호로 지정되었다. 지금은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국보 제 78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일본 국보 제1호를 만들어 낸 신라인의 예술 혼과 기예는 하늘의 작품이지 결코 사람의 것은 아니다. 현재 학교나 학원에서 미술의 데생을 배울 때 보통 서양의 비너스 상을 보고 그리는 현실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미를 자랑하는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모델로 삼아 그림을 배운다면 젊은이들에게 우리 것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일깨우는 좋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근자에 「법보신문」에서 이 불상의 모조품을 학교에 무료로 기증한다는 소식은 참으로 고마운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1910년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발표에 맞추어 또 다른 불상이 서울에 나타났다. 이 불상도 상기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크기와 형태는 거의 같다. 높이가 83.2센티미터이고 후치가미 사다스께(淵上貞助)가 입수하여 초대 총독 데라우치에게 기증하면서 세상에 밝혀졌다. 현재 국보 제 78호인 이 불상은 국보 제 83호와 비교해 한층 고식적(古式的)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6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개를 숙이고는 눈을 가늘게 내려 떠서 잔잔히 웃고 있는데, 얼굴에는 광대뼈가 약간 나오고 어깨에 날리고 있는 날카로운 옷자락, 얕게 새겨진 옷주름 선, 끝이 뾰족한 목걸이, 보관의 치밀한 장식이 돋보인다. 이와 함께 다리의 U자형 선각 주름이나 어깨에서 앞뒤로 내려간 옷자락의 특성적인 처리 등은 세장(細長)한 형태와 함께 6세기 초 이래의 중국에서 유행한 반가사유상의 형식과 비슷하다.

   이 불상은 데라우치가 은밀히 소장하다가 그가 1916년 총리 대신이 되어 일본으로 돌아갈 때, 총독부 박물관에 기증해 지금에 전해진다. 그러나 후치가미 역시 불상의 출토지를 밝히지 않아 현재도 불상의 정확한 출토지를 모르고 있다. 이 불상은 1998년 6월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한국실 개관에 맞추어 특별전 출품을 위해 출국하였다. 이 때의 불상 보험 평가액은 3천5백30만 달러로 원화 지급액은 4백80억원에 이른다.

   불상에 얽힌 이야기 중에서 불상의 내부에 보관한 여러 가지 물건을 몰래 훔치는 사건이 자주 발생한다. 이른바 ‘불복장(佛腹藏) 도둑질’이다. 불상을 완성하고는 등뒤나 아니면 밑바닥을 통해 경전이나 신자의 옷, 또는 곡식을 넣고는 뚜껑을 막는다. 불상의 몸 안에 성스러움을 불어넣는 행위로 복을 비는 신앙의 일종이기도 하다. 1996년 9월경이다. 하모(河某)씨 형제는 경북 안동에 소재한 광흥사에 불상을 깨고 복장물들을 꺼내 갔다. 사경(寫經)등이 들어 있었다. 이들은 도둑질한 복장 유물을 어느 교수에게 감정을 의뢰했다. 교수들이 그런 감정에 응하는 이유가 있다. “비밀을 보장해 주지 않으면 외부 공개를 꺼리는 특성상 다시는 가져오지 않아 연구가 부족할 수 있다.”“거래가 이루어질 때마다 진위 감정을 물어 와 결국은 해당 유물이 누구의 소장품이 되는 지를 알 수 있고, 따라서 해외 유출까지도 방지할 수 있다.” 불복장을 턴 범인을 잡는 경우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불상 안에 어떤 유물이 들어 있었는지를 알 수가 없고, 또 사찰에 보관된 문화재를 지키고 보존하고자 하는 일에 스님들은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광흥사 사건이 세상에 밝혀진 것도 거래 과정에서 싸움이 일어나 불만을 품은 쪽에서 경찰에 신고를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최근 2년 동안만도 무려 다섯 차례나 불복장을 털었다고 진술했다. 지금도 어느 절에서는 불복장이 터지는 소리가 똑-똑-똑하고 흘러나올 지도 모른다. 도난을 당한 후 신고조차 하지 않은 당시 광흥사 주지의 말은 곱씹어도 쓰기만 하다. “불경을 백 만 번만 외우면 되찾게 될 것으로 믿었습니다.”신고조차 두려워한 스님이다. 마음속에 과연 불경을 백 만 번이나 외어 볼 불심이 들어 있었을까?(참고:「한국문화재 비화」?이구열?한국미술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