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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탄생불입상

야생초요 2006. 7. 2. 14:19

 

 


 


    금동탄생불입상(金銅誕生佛立像. 10.5cm)


   이 불상은 9개의 연꽃잎으로 에워싸인 둥근 대좌 위에 아기 부처가 서 있는 탄생불이다. 아기 부처는 상반신을 벗었으며 허리 아래로는 천으로 몸을 가렸다. 탄생불은 불상 중에서도 매우 귀한 형태인데, 오른손은 하늘을, 왼손은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외치고 있다. 얼굴의 뺨, 가슴과 배, 그리고 다리와 팔 등의 양감이 특히 강조되었고, 머리와 목 뒤쪽에는 네모난 판을 덧댄 뒤에 구멍을 뚫고서는 광배를 부착시킨 듯 하다. 하지만 광배는 전해지지 않는다.


기와집 15채 값의 불상


   1946년 어느 날이다. 평양에서 내려온 김동현(金東鉉, 1910~ )의 집에 개성 사람인 우영하(禹榮夏)가 찾아왔다. 김동현은 일제 때부터 금속유물전문가로 고구려금동반가사유상(국보 제118호)을 소장한 대 수장가였다. 우영하는 셈과 장부 정리를 무척이나 잘하던 사람으로 개성상인 특유의 기질을 발휘하여 이미 상당한 중진에 속해 있었다. 장충동에 자리잡은 나지막한 이층집으로 찾아온 우영하가 불상을 꺼내 놓았다. “자네, 이 물건을 좀 보게나.” 김동현은 불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나 희귀한 금동탄생불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입수했나? 귀한 것일세.” “어째서?” “불상이 많이 있지만 탄생불은 귀하고 또 1천 년을 넘었으면서도 이처럼 멀쩡하기는 힘들지.” 김동현이 확신에 차서 불상을 감정했다. 우영하도 맞장구를 쳤다. “통일 신라 9세기경의 불상인데 너무 멀쩡하지 않는가?” “그러나 상태가 좋은 것은 반가운 일이지.” “그렇지만, 자네 말고 누가 믿어 줘야지?” 아직 의심이 풀리지 않는 불안한 눈초리로 우영하가 한 숨을 쉬었다. “귀한 것이네. 도금도 온전하고 부식된 곳도 없잖아. 이처럼 훌륭한 불상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아. 입상 불상은 많아도 탄생불은 내가 본 것도 몇 개가 없어. 국보는 아닐지언정 보물급은 자신하네.” “그렇게 귀한 것인가?” “그렇다네. 사 두게.” 그 때서야 우영하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당시에 금속 유물에 대한 감정으로 김동현을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 “지금은 돈이 없네. 내가 고미술협회의 임원직을 맡고 있으니까 그쪽하고 얘기를 해 보겠네.” “아무튼 좋은 것이니까 꼭 사 두게. 나중에는 큰 빛을 볼 때가 있을 것일세.”

   우영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돌아갔다. 감정을 받은 그는 곧 자신 있게 불상을 들고 남산 아래에 있는 고미술협회를 찾아갔다. 협회는 현재 신세계 백화점 동쪽으로 난 큰 길 건너 맞은편에 자리잡은 목조 건물로, 그 이층에 세 들어 있었다. “한 사장님, 이 불상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시 고미술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던 한정수(韓鼎洙)는 어렸을 때 한자나 되는 산삼을 먹은 사람으로 신열이 많아 연신 땀을 흘렸다. “어째, 너무 멀쩡한 게 좀?” “그래서 김동현에게 보여 주었어요. 두말 말고 사 두라는 거여요.” 김동현의 감정에는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만큼 그의 금속 감식은 사계의 권위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래요. 음. 그런데 왜?” “마침 가진 돈이 없어 고미술협회와 반반씩 나누어 사면 어떨까 합니다.” “그래요. 그럼 이사들과 의논한 뒤 연락을 줄께요.”
   
김동현은 탄생불을 본 뒤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눈만 감으면 눈앞에 휘황찬란한 금빛이 번쩍거렸다. 이미 여러 형태의 불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탄생불만은 없었다. 그래서 무척이나 탐이 나 몇 번이고 양보해 달라며 조르고 싶었다. 하지만 워낙 귀한 것이라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로부터 몇 달이 흘렀을 때이다. 김동현의 집으로 우영하의 연락이 왔다. “나를 좀 만나주게?” “왜 그러나?” “왜, 예전에 보았던 불상 있지 않은가? 탄생불 말일세.” “있었지.” 머리에 번갯불이 들어오는 느낌으로 김동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네, 혹시 그 불상 사지 않을래나?” “뭐?” 사정은 이러했다. 우영하는 고미술협회와 협력해서 그 불상을 구입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운영 자금이 딸린 협회 측이 불상을 팔려고 한 것이다. 여러 곳을 수소문할 수도 있었지만 우영하가 먼저 친구인 김동현에게 말을 건넨 것이다. 김동현은 급히 고미술협회로 달려갔다. “미리 보셨던 물건이니 설명을 할 필요는 없겠고. 그래 수장하시겠소?” 한정수는 김동현을 맞이하며 불상에 대해 이야기를 건냈다. 그러자 김동현은 즉시 승낙을 했다. “그래, 얼마나 보겠소?” 한정수가 뜸을 드린 후 말을 꺼냈다. “불러 보시죠. 이 정도 물건이면 주인의 결정이 중요합니다.” “음. 6만 원은? ” 당시 보통 살림을 할 수 있는 기와집이 4천 원 정도 했으니, 기와집 15채 값이었다. 김동현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 동안 물건만 사들였지 팔아 보지 않았기 때문에 자금이 문제였다. 그러자 윤장화가 생각났다. 얼마 전 윤장화가 고미술품을 팔았다는 소문이 들려 돈을 빌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김동현은 불상이 든 상자를 소중히 껴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뒤로 무방비 상태로 6. 25가 터졌다. 김동현은 6월 28일 혼자 몸으로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부인까지 회현동 집에 내버려두고 오직 불상만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이 불상과 고구려반가사유상, 고구려무량수삼존불입상(국보 제85호)을 가방에 챙겨서 부산에 있는 '항도 여관‘에 묵었다. 당시 부산에는 친하게 지냈던 검사가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부두의 막일꾼을 자원해 군수물자를 나르는 일을 했다. 명품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나면 하루아침에 목숨을 잃는 것도 전쟁통에서는 부지기수이다. 국보급 골동품을 숨기기 위해 김동현은 갖은 고초를 겪었고, 결국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안전하게 지켜 낼 수 있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1960년 중반이 되었다. 삼강유지 사장인 이병각(李秉珏)은 항상 이 불상을 양도해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동현은 여러 번 거절했다. 그런데 마침 다른 국보급 문화재를 구입하면서 많은 돈이 필요 하자, 그는 생각다 못해 이 불상을 맡기면서 이병각에게 250만원이란 거금을 빌려 썼다. 그런데 곧 예상치 않은 일이 생겨났다. 1967년에 ‘10만원 짜리 가짜 불상’으로 신문에 대서 특필된 ‘금은여래좌상’ 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 불상을 입수했던 이병각는 구속되어 많은 고초를 겪었고, 재판 과정에서 김동현의 거짓 증언으로 풀려나기도 하였다. 당시의 사채 이자는 월 2할 정도였다. 5개월만 지나면 원금의 곱으로 빛이 늘어나던 시절이다. 그런데, 이병각이 재판을 받고 또 병원에 입원하는 과정에서 2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그 사이에 김동현이 빌린 원금 250만원은 600만원으로 불어났다. 불상을 되찾아 오려면 꼼짝없이 600만원을 주어야 했다. 그러자 그만한 돈이라면 다른 골동품을 구입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금동탄생불입상은 포기했다. 따라서 이 불상은 이병각의 소장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불행한 일이 발생했다. 이 불상은 이병각의 중간책으로 일하던 한국인 김일호(일본명: 다끼다)를 통해 일본으로 팔려 나갔다. 아마도 거액을 받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국보급 문화재의 일본 반출로, 이 사건을 두고 김동현은 오랫동안 마음 고생을 했다. 그런데 하늘이 도왔던지 반출된 뒤 3년 정도가 지났을 때다. 하루는 이병철이 사람을 보내서 불상을 감정해 달라고 했다. 물건을 본 김동현은 깜짝 놀랐다. 바로 일본으로 반출되어 꿈에도 잊지 못했던 금동탄생불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불상을 가슴에 품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었어요. 그 후 일본으로 반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 불상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본래 내가 소장했던 물건으로 돈 때문에 포기한 불상입니다. 무조건 사두십시요.” 김동현은 회한의 감정이 격해져 살 것을 특별히 부탁했다. 그러자 이 불상은 상당한 가격을 치르고 이병철이 되샀다. 해외로 빠져나갔던 조상의 예술 혼이 천행으로 되돌아와 이 땅에 안식하는 순간이었다. 이 금동탄생불은 현재 호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참고: 김동현씨 증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