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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룡사지

야생초요 2006. 7. 2. 14:16

 
블로거기자 변함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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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늦은 밤에 이곳 천년 서라벌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시내어딘가 .. 아마 오릉 근처였을 것 입니다.
          이불마다 쾌쾌한 냄새가 잔뜩 밴 이층집 여인숙을 잡고
          그래도 싼 맛이려니 위안하며 밤새 잠을 뒤척였었지요.
          그리고 시린 칼바람의 날이 아직 여전한 이른 아침에
          서둘러 오릉에 입성하여 참배하고 안압지에 마음 속
          목배를 띄워 노닐다 조금 전에는 그 어린 날 철모른
          마음으로 뛰어다녔던 경주박물관의 수많은 유산들을
          이제는 훌쩍 저물어 버린 마음으로 다시 담았지요.
          그리고 이곳, 황량함 가득한 신의 성지에 섰습니다.
          들어서는 입구에서 예전 어울려 다니던, 이제는 여염집
          규수가 되어버린 문디 가시나에게 전화가 걸려와 의미
          없는 몇몇의 대화를 나누며 걸었었나 봅니다.
          문득 멈춰선 벌판의 중심에서 저 멀리 제 남편자랑의
          웃음소리 가득한 그녀의 전화를 저도 몰래 끊어버리고
          다만 이 시린 바람에 얼어붙은 축조물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과 내 눈앞 십척 거리는 되었을까요..
          외로운 벌판에 그보다 더 외롭게 서있는 안내판엔
          내가 지금 서 있는 이곳이 바로 그 옛날 이 땅 서라벌의
          부귀였으며 영화였었던 바로 그곳 황룡사 터라고 ..
          다만 무덤덤하기만 한 문맥으로 풀어져 있습니다.
          아! 그대여.. 전 차라리 시선을 하늘로 두고자 했지요
          쓸쓸함을 .. 시린 바람과 시린 햇살이 마른 풀잎을
          지분거리는 이 부귀영화의 쓸쓸함을, 전 차마 견디어
          낼 수 있는 여유를 가지지 못했었나 봅니다.
          하늘을 보았지요 .. 하늘은 그저 파랗기만 했습니다.
          시월도 아닌 하늘이, 이 잠들어 있는 일월에 그토록
          파래도 되는 모양인지 죽도록 파랗기만 해서 그마저도
          오랜 시선을 두고 보지는 못합니다.
          저의 기행길이란게 늘 이 모양이었지요.. 이리도 나약한
          마음이 내가 본 것, 담은 것 그 모두를 그저 마음으로만
          머물게 만들어 그대에게 밤을 헤이며 썼던 그 수많은
          연서들은 그저 부질없이 되 뇌이다 만 독백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될 수 없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저 이곳 황룡사지에서 주워 담은 쓸쓸함을 담아서..
          그 천년 서라벌 환희가 기밀인 듯 품어왔던 이 쓸쓸함을
          주체 할 수 없을 만큼만 담아서.. 가슴 메이다 속절없이
          떨 군 나의 한숨처럼 그대에게 전할 뿐입니다.
          늘 그대에게로 달려가고픈 억수의 간절함이 늘어놓은
          부치지 못한 넋두리로서 말입니다.
          이 편지가 닿는 그곳은 봄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제국에 다시 중건한, 황룡사 구층목탑 꼭대기에
          오르면, 아득히 꽃 사위 만개한 그대만의 봄날 영토가
          지금 내 눈가에 이슬 번지듯 얼룩져 흐르다 마니까요
          그대 다시 행복하시기만을 .. 소중히 감싸 안습니다.
          [since 0106,05..황룡사지, 그 칼바람에 베여 서서]
그 겨울에 홀로서..황룡사지 이야기, 둘 일월의 칼바람은 서슬 퍼렇다. 그 퍼런 번득임은 마치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찰나의 순간으로 베어버릴 듯이 잔뜩 기세 잡은 가객의 그것처럼 무심함으로 일관한다. 나는 이 가객의 검 끝을 명치에 겨누이고 포위당한 채 여기 이곳 성지의 벌판에 오직 홀로서 섰다. 황룡사지 .. 그저 고고학 학자들에게만 그 의미가 포석 되어진 채, 천년을 잠들어 있는 무심한 신의 성지 .. 이 무심함이란 경주의 관광행정에서부터 시작하는데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란 칭호에 맞게 그 짜임새부터가 여타 도시의 구색맞추기식 관광홍보책자와는 사뭇 다른 경주여행안내서에도 이곳 황룡사지의 가치와 안내에 대해서는 인색하다. 아니, 각 일정별 맞춤식 코스여행 에는 아예 그 존재의 이름조차 빠져있으니 이건 인색을 넘어서 외면이란 단어가 더 어울릴 듯싶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는 유물이 넘쳐 포화상태에 닿아 적의 땅 부여로 이적을 행하고 있다는 작금의 안타까운 천년 서라벌 사연이 나오는 마당에 이러한 결과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저 횅하니 불국사, 석굴암 경주박물관, 안압지 등 널리 알려진 유산만 탐하여도 빠듯한 그 일정 속에 그 어느 누가 이 황량의 벌판을 애써 발걸음 하려는가 생각하니 이해도 될 만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나 역시도 예외는 아닌지라 무수한 발걸음으로 닿았던 이곳 경주임에도 국사책에 전설처럼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이곳 황룡사지의 참모습을 찾는 길은 이 겨울의 길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작금의 이발길 또한 처음부터 예정되었던 길이 아니라 이곳을 닿기 전 경주박물관에서 담았던“황룡사지 금당치미“의 그 표현 못할 아름다움에 취하여 저도 모르게 이곳으로 이끌리어 향할 수밖에 없는 길이었을 뿐 ..
파격의 멋, 그리고 亡과 衰..황룡사지 이야기, 셋 이 금당치미는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치미 중 가장 크다 하는 위용의 가치 또한 큰 것이나 그보다 앞서 논해야 할 것은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측면과 뒷면에 직접 손으로 빗어 만든 토우 조각상들이다. 이 치미 하나에 무려 스물 네 개의 조각들이 기하학적으로 형성되어있고 사람, 연꽃 그 상들의 하나하나 부드러우면서도 투박스러운 양감의 질은 내 미천한 글로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이다. (이렇게 손으로 빚어 만든 기와들을 붙여 만든 치미는 동양건축에서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파격적인 조형이라 한다.) 나는 이 치미가 얹힌 금당의 위용을 상상해 보며 동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려 건립한 황룡사의 규모를 막연히 가름한다. 그리고 칼바람 번득이는 황량한 대지에 홀로서서 흥망성쇠라 하는 이 변하지 않을 불변의 공식에 대해서도 원망 아닌 원망의 상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亡과 衰만을 가늠하는 그곳 황룡사지에서 ..
이루지 못한 불국토의 꿈..황룡사지 이야기, 넷 이차돈의 순교 후 불교는 신라의 두말 할 것 없는 국교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되고 진평왕에 이르러 왕과 그 왕비의 이름을 석가불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과 같은 백정과 마야라고 하였다. 그들은 왕이 곧 부처라는 관념의 불교를 전파하는데 힘을 기울여 사회통합력을 높이려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신라 불교의 속성을 그대로 간직하며 그 목적을 위해 지어진 절이 황룡사라 한다. 이 동양최대의 사찰이라 전해오는 황룡사는 진흥왕 14년, 처음 공사를 시작한 이래, 9층 목탑이 완성되는 선덕왕 14년까지 무려 92년간에 걸쳐 당시 신라의 중심 이었던 경주 한복판에 건립된 신라 최대의 국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몽고 침략으로 소실된 이후 736년간 황량한 벌판으로, 때로는 농토로, 민가(民家)의 집터로 이어오며 문헌과 마을 주민들의 전설 속에서나 존재했던 신비의 사찰로 남아 있었다. 1976년 6월 시작된 황룡사터 발굴은 1993년까지 진행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밝혀진 황룡사 터의 규모는 8천 8백여 평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 되고 강당터, 회랑터, 승방터, 목탑터, 종루터, 중문터, 당간지주, 담장터, 남문터 등이 확인됐다. 이 중 목탑 터에서는 그동안 전설로 내려오던 황룡사 9층 목탑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찰주본기(刹住本記)가 발견 되었는데 이 찰주본기에 따르면 9층 목탑은 철반이상의 높이가 42척, 이하는 183척, 즉 약 80m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금당터에서는 장육존불이 있었을 석조 좌대도 확인돼 삼국유사에 기록된 황룡사 장육존불의 존재 여부가 확인되기도 했다. 삼국유사는 황룡사 종에 대한 기록도 남겼는데 그 기록에 따르면 황룡사 종은 성덕대왕 신종 무게의 4배 정도인 497,581근에 달했다. 황룡사 9층 목탑은 당(唐)에 유학 갔던 자장스님이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태화지(太和池)에서 만난 선인의 예언에 따라 만든 것이다. 1층은 일본, 2층은 중국, 3층은 오월, 4층은 탐라, 5층은 응유, 6층은 말갈, 7층은 계단, 8층은 여적, 9층은 예맥을 상징했던 9층 탑이 완성되면 이들 9개국이 신라에 조공을 바치고 평화가 지속된다고 유사는 못 전한 역사로서 남긴다. 하지만 1238년 몽골의 병화(兵火)로 가람전체가 불타버리는 비극을 겪게 되고 결국 불국토의 꿈은 다시 중수 되지 못한 채 이루지 못한 전설처럼 남아 세인에게 전해져 온 것이다.
다시 천년학 날개를 펴고..황룡사지 이야기, 다섯 황룡사 9층 목탑에 오르면 서라벌 땅이 한 눈에 들어와 그 광경이 장관이었다는 고려시대의 몇몇 문헌에 지금 이 황량함에 힘없이 선, 나의 허한 마음이 한 올, 한 올 옭아 단단한 얽힘이 되고 이제 다시 힘찬 날개가 된다. 더 이상 내게 이곳은 주춧돌과 홈자리 몇 몇 개가 남아 옛 영광을 재현하는 쓸쓸함의 사지(寺址)가 아니다. 내 마음은 천년의 세월을 거슬러 오르는 한 마리 학이 되어 비상하고 지금 내 힘찬 날개 짓 아래론 백제 장인 아비지의 구령과 그을린 목공들의 도리질이 한창이다. 백팔십삼척 목탑이 내 마음 우뚝 솟아 중건 한창이다. 잠시 이웃 사찰 분황사 내의 굳건한 모전석탑을 만나고 올 때쯤 .. 어쩌면 완공된 구층목탑, 그 서라벌 정상에 사뿐히 내려 앉아 고요한 천년의 아침을 깨우는 청연한 그 울음을 다시 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황룡사지, 천년 비경을 몽환하던 일월에 .. 변함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