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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뭐라해도 <中央塔>이다 - 中原 塔坪里 7層石塔

야생초요 2006. 7. 2. 14:13

우리의 정든 고향을 담고 있는 우리나라의 국토...그 형태는 어떤 모습일까요? 흔히 토끼가 서 있는 모습이라든지 또는 민화(民畵)속에 자주 등장하는 호랑이의 앞발을 든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아무튼 우리나라의 형태는 이렇게 야생 동물로 나타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토끼나 호랑이의 명치쯤 되는 곳은 과연 어디쯤 될까요? 배꼽보다 조금 위쪽을 명치라고 한다면 충주(忠州)쯤이 우리 국토의 명치가 될까요?

이렇게 유추하여 보는 이유는 바로 이 탑이「중앙탑(中央塔)」이라고 불리기 때문이며 이 탑이 위치한 지명이「중원군(中原郡)」이기 때문입니다.

                                                <탑평리 7층 석탑>

 그런데 지도를 놓고 살펴보면 중원군은 우리나라의 급소에 해당되는 중앙지역이 아닌 그 보다 조금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렇다보니 국토의 중앙에 관한 논쟁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강원도 양구군은 독도까지 포함하여 우리나라의 국토 중앙은 양구군이라 하여 지자체 시행이후 국토의 중앙이라는 문구를 포함하는 지자체 선전을 하고 있으며 또한 도서지역을 제외한 국토를 측량한 결과가 경기도 포천군이라면서 포천군도 국토의 정 중앙에 위치한 땅이기에 국토의 심장부가 발전해야 한다는 명제아래 군 발전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新羅의 文成王때 당시 국토의 중앙을 표시하기 위하여 이 탑을 세웠다고 하며 중앙을 알아내기 위하여 영토의 남단과 북단에서 보폭이 같은 두 사람을 동시에 출발토록 하여 이 탑에 도착하는 시간이 똑 같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걷는 속도나 능력 등등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전설은 억지에 불과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언제부터 이 탑이「中央塔」이라 불려지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위의 이야기는 재미있고 그럴듯한 이야기임에는 틀림이 없다 할 것입니다. 이 탑이 있는 이 지역이「탑평리(塔坪里)」라는 지명으로 이름 붙여져 있는데 우리나라의 지명 대부분이 아무 뜻도 없이 붙여진 것이 아니기에 탑이 있어 탑평리로 이름을 붙인 것인지 등에 대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며 실제 이러한 지명에 대한 연구가 책으로도 출간이 된 실정입니다.


 이 탑을 찾아 가려면는 안성↔제천간 도로나 청주↔충주간 도로에서 각각 조정지 댐 쪽으로 들어서면 되는데 新村마을 삼거리에서「중앙탑」이라는 표지를 따라가면 됩니다. 안내판이 가르키는 곳으로 약 600m를 더 가면 도로보다 10m 정도 돋운 땅 위에 높이 14.5m(일부에는 12.7m로 알려지고 있음)로 하늘로 향해 서 있는 탑을 볼 수 있는데 이 탑이「중앙탑」이며 행정구역상으로는「가금면 탑평리」입니다.


 이 탑은 경주 감은사지의 석탑(13.44m)이나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14.24m)보다 더 높아 현존하는 신라의 석탑 중 가장 높은 탑으로 중원 지방을 대표하는 문화재이며 정식 명칭인「中原 塔坪里 7層石塔」(國寶 제 6호)보다「중앙탑」으로 더 잘 알려진 석탑입니다.

이 탑의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지만 탑의 조성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에 속하는 8세기 말 경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한때 이 탑이 있는 주변 땅에서「중원 고구려비」(國寶 제 205호)를 비롯하여 석조물과 함께 고구려시대의 기와가 발견되어 고고학계가 흥분한 적도 있으나 아직까지 銘文등 유적에 관한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이 지역의 과거를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중원 고구려비>

 탑의 건립 동기에 대한 이야기 중에는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이 왕이 된다 하여 그 氣를 누르기 위하여 탑을 쌓았다는 설도 있으며 신라의 高僧이며 명필인 金生이 金加面 遊私里 盤松마을에 金生寺라는 절을 짓고 탑평리에는 탑과 책을 보관하기 위한 집을 지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현재도 金加面 盤松마을에는 예전의 절터와 金生堤라는 수해를 막기 위한 제방이 남아 있습니다.

 

 이 탑은 충주호 상류지역의 평원에 2층의 기단위에 세워진 일반형 석탑으로 相輪部는 露盤과 仰花만 남아 있고 基壇部에는 양쪽에는 隅柱가 세워져 있고 撐柱는 4개가 세워져 있으며 塔身은 통돌이 아닌 여러개의 석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塔身 부분에 있어서 초층 탑신의 몸돌은 높은 편이지만 2층 이상의 몸돌은 낮아지고 있어 높은 탑임에도 정연한 비례를 보이고 있으며 屋蓋石(빗물받이돌)도 올라갈수록 폭이 좁아져 큰 탑임에도 안정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옥개석의 받침돌은 신라 정형의 형태인 5단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각 층마다에는 落水를 위한 홈이 파여져 있습니다.


 이 탑의 특이한 점은 기단부에서 상하층 기단의 갑석 윗면이 옥개석과 같은 형태의 물매가 져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형태는 선산 죽장리 5층 전탑의 기단에서도 볼 수 있지만 그리 흔하게 사용되었던 양식은 아닙니다.

                             <선산 중장리 오층석탑 기단부 갑석의 물매진 모습>

 이 탑을 자세히 살펴보면 기단부의 탱주(撐柱:가운데 기둥)가 어느 면은 3개이고 또 다른 면은 4개로 되어 있음을 아래 사진에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1917년 일제 시대에 해체 보수를 하면서 조립할 때 잘못 쌓았기 때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모습이 원래의 모습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 수 없는 입장입니다.

       < 이 사진에 보이는 가운데 기둥은 4개지만 그 간격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사진 우측은 4개,좌측에는 3개의 가운데 기둥 -기둥 간격이 제 멋대로입니다>

 아래 사진에서 보면 지붕돌인 옥개석(屋蓋石)은 1층부터 5층까지는 4매로 이루어져 있으나 6층과 7층의 몸돌 위에 놓인 옥개석은 모두 통돌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통돌을 다듬고 깎아 5단의 받침을 만들었다는 것은 당시에 상당한 공을 들여 탑을 쌓았음을 알게 해 줍니다.

                                    <탑평리 7층석탑의 옥개석과 상륜부>

충주지방은 충주호와 조정지댐의 영향으로 안개가 자주 내려앉습니다. 그 안개 속에 보일 듯 말 듯 우뚝 솟아있는 탑.....이 탑을「中央塔」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지역을 국토의 중앙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淸州人의 자긍심때문이 아닐런지요....


출처 : 문화예술 |글쓴이 : 가시나무새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