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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문화재........

야생초요 2006. 7. 3. 13:15
경주는 다양한 유산이 산재해 있는 종합역사지구로서,유적의 성격에 따라 모두 5개 지구로 나누어져 있는데,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천년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신라 왕을 비롯한 고분군 분포지역인 대능원지구, 신라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구분되어 있으며, 52개의 지정문화재가 세계유산지역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산지구》
야외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신라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곳으로, 신라 건국설화에 나타나는 나정, 신라왕조의 종말을 맞게했던 포석정과, 미륵곡 석불좌상, 배리 석불입상, 칠불암 마애석불 등 수많은 불교유적이 산재해 있습니다.



-보리사 마애석불(시도유형문화재 제193호)
경주시 배반동 동쪽을 향한 높이 2m의 바위벽에 새긴 마애불(자연암석에 부조 또는 선각 등으로 새겨진 불상).



-경주남산 미륵곡 석불좌상(보물 제136호)
보리사터로 추정되는 곳에 남아 있는 전체 높이 4.36m, 불상 높이 2.44m의 석불좌상으로..
현재 경주 남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불 가운데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음.



-경주남산용장사곡 삼층석탑 (보물 제186호)



-경주남산용장사곡 석불좌상(보물 제187호)
경주 남산 전역에서도 손꼽히는 큰 사찰이었던 용장사터를 내려다보는 곳에 위치.
'삼국유사'에 나오는 유명한 승려 '대현'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유명한 불상.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보물 제913호)
용장사지석불좌상(보물 제187호)의 뒤쪽 바위벽에 새긴 마애여래좌상.



-천룡사지 삼층석탑(보물 제1188호)
천룡사의 옛터에 무너져 있던 탑으로, 1990년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여 새로이 복원한 것.



-남간사지 당간지주(보물 제909호)
절에서는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사찰 입구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매달아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의 좌우에 세워 단단히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함.
이 당간지주는 남간사의 옛터에서 약 500m 떨어진 논 가운데에 세워져 있음.



-남간사지 석정(문화재자료 제13호) = 돌우물(石井)



-경주남산리 삼층석탑(보물 제124호)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처럼 형식을 달리하는 쌍탑이 동·서로 건립된 특이한 예의 두 탑.



-경주배리 석불입상(보물 제63호)
남산 기슭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23년 지금의 자리에 모아 세운 것.
이 석불들은 기본양식이 똑같아 처음부터 삼존불로 모셔졌던 것으로 보임.



-경주남산 불곡 석불좌상(보물 제198호)
남산 동쪽 기슭 부처 골짜기의 한 바위에 깊이가 1m나 되는 석굴을 파고 만든 여래좌상.



-경주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보물 제199호)
칠불암 위에 곧바로 선 남쪽바위에 새겨져 있는 높이 1.4m의 마애보살반가상.



-경주남산 칠불암 마애석불(보물 제200호)



-경주남산 탑곡 마애조상군(보물 제201호)
통일신라시대에 신인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
하나의 바위면에 불상·비천·보살·승려·탑 등 다양한 모습들을 정성을 다하여 조각하였음은..
장인의 머리속에 불교의 세계를 그리려는 뜻이 역력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줌.



-경주 삼릉계 석불좌상(보물 제666호)
일명 '얼음골'이라고 부르는 삼릉계곡의 왼쪽 능선 위에 있는 석불좌상으로 화강암을 조각하여 만듦.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시도유형문화재 제19호)
돌기둥 같은 암벽에 돋을새김한 것으로 연꽃무늬 '대좌'위에 서 있는 관음보살상.



-삼릉계곡 선각 육존불(시도유형문화재 제21호)



-경주남산 입곡 석불두(시도유형문화재 제94호)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에는, 작은 부처가 연꽃모양의 대좌에 앉아 합장하고 있는 모습과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음.



-경주침식곡 석불좌상(시도유형문화재 제112호)
경주시 내남면 백운암 동편의 침식골에 있는 이 불상은,현재 머리 부분이 없어졌으나 나머지 부분들은 대체로 잘 남아 있다.



-경주 열암곡 석불좌상(시도유형문화재 제113호)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의 절터에서 발견된 불상으로, 현재 머리 부분이 없는 상태.



-경주약수계곡 마애입불상(시도유형문화재 제114호)
금오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바로 쏟아져 내린 골짜기를 산호곡 또는 약수계곡이라 한다.
이 계곡의 바위면에 높이가 8.6m나 되는 거대한 불상이 새겨져 있는데,현재는 머리 부분이 없어지고 어깨 아래 부분만 남아 있다.머리는 따로 만들어 붙인 듯 목부분에 머리를 고정시켰던 구멍이 뚫려 있다.



-삼릉계곡 마애 석가여래좌상(시도유형문화재 제158호)
경주시 배동의 거대한 자연 바위벽에 새긴 앉아 있는 모습의 석가여래불로 높이는 6m.



-삼릉계곡 선각 여래좌상(시도유형문화재 제159호)
높이 10m가량 되는 바위에 새겨진 앉아 있는 모습의 여래상.이곳은 신라 아달라왕, 신덕왕, 경명왕의 큰 무덤이 있어서 삼릉계곡이라고 불리는 곳.



-경주배리 윤을곡 마애불좌상(시도유형문화재 제195호)
남산의 여러 계곡 가운데 하나인 '윤을곡'의 ㄱ자형 바위벽에 새긴 불상.



-배리 삼릉(사적 제219호)
배리삼릉은 경주 남산의 서쪽 기슭에 동서로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밑으로부터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등 박씨 3왕의 무덤이라 전하고 있다.무덤은 모두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형태를 하고 있다.



-신라일성왕릉(사적 제173호)
신라 7대 일성왕(재위 134∼154)의 무덤.
왕은 북쪽 변방에 침입하는 말갈인을 막고, 농토를 넓혀 제방을 쌓는 등 농업을 권장했으며, 백성들에게 금·은·보석의 사용을 금지하여 사치풍조를 멀리하게 했다고 함.높이 5.3m, 지름 15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



-신라정강왕릉(사적 제186호)
경문왕의 둘째 아들인 신라 제50대 정강왕(재위 886∼887)의 무덤.
정강왕은 형인 헌강왕에 이어 886년 7월에 왕위에 올랐으나 887년 7월에 병으로 죽어,왕위에 있던 기간이 만 1년밖에 되지 않음.



-신라헌강왕릉(사적 제187호)
신라 제49대 헌강왕(재위 875∼886)의 무덤.
헌강왕은 왕위에 있는 동안 태평성대를 이루었는데,거리마다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일본왕이 황금을 바칠 정도였다고 함.



-지마왕릉(사적 제221호)
신라 지마왕(112∼134)의 무덤으로 23년간 재위하면서 가야, 왜구, 말갈의 침입을 막음.



-경애왕릉(사적 제222호)
신라 55대 왕인 경애왕(재위 924∼927)의 무덤. 포석정에서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서 비참한 최후를 마친 왕.



-신라내물왕릉(사적 제188호)
신라 17대 내물왕(재위 356∼402)의 무덤.
내물왕은 김씨 왕으로는 두 번째로 왕위에 올랐으며 이후 김씨 성에 의한 독점적 왕위계승을 이루었다. 마립간이란 왕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중국 '전진'과의 외교관계를 통해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백제와 왜의 연합세력이 침입하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도움을 요청하여 위기를 모면하였으며, 국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이다.높이 5.3m, 지름 2.2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



-경주포석정지(사적 제1호)
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있는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젊은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며 기상을 배우던 곳.



-경주 남산성(사적 제22호)
남산의 북쪽에 있는 신라 산성으로 '신라 남산신성'이라고도 함.경주평야 일대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이 산성은, 서쪽의 서형산성과 동쪽의 명활성, 그리고 북쪽의 북형산성과 함께 신라의 왕도를 호위했던 성으로서,역사적 의의가 있으며, 지금도 큰 창고 자리에서는 불에 탄 쌀이 나온다고 함.



-서출지(사적 제138호) - 남산 기슭에 위치한 삼국시대 연못.
<서출지의 전설>
신라 소지왕 10년(488)에 왕이 남산 기슭에 있던 '천천정'이라는 정자로 가고 있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쫓아 가보라' 하니, 괴이하게 여겨 신하를 시켜 따라 가보게 하였다. 그러나 신하는 이 못에 와서 두 마리의 돼지가 싸우는 것에 정신이 팔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헤매던 중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건네줘 왕에게 그것을 올렸다. 왕은 봉투 속에 있는 내용에 따라 궁에 돌아와 화살로 거문고집을 쏘게 하니, 왕실에서 향을 올리던 중과 공주가 흉계를 꾸미고 있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못에서 글이 나와 계략을 막았다 하여 이름을 '서출지'라 하고, 정월 보름날은 '오기일'이라 하여 찰밥을 준비해 까마귀에게 제사지내는 풍속이 생겨났다.조선 현종 5년(1664)에 임적이라는 사람이 못가에 건물을 지어 글을 읽고 경치를 즐겼다고 한다.
지금 이 건물은 연못 서북쪽에 소박하면서 우아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경주나정(사적 제245호)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난 전설을 간직한 우물.



-경주남산동 석조감실(문화재자료 제6호)
화랑교육원 내에 자리잡고 있는 석조 감실로, 불상을 모셔두던 곳.최초의 인공석굴 형태를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님.



-백운대 마애불입상(시도유형문화재 제206호)
경주시 내남면 마석산 암벽 위에 높이 4.6m에 달하는 커다란 불상으로 미완성 조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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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지구》
신라왕궁이 자리하고 있던 월성, 신라 김씨왕조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계림.
신라통일기에 조영한 임해전지, 그리고 동양 최고의 천문시설인 첨성대등이 있습니다.



-경주 계림(사적 제19호)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곳이라는 전설을 간직한 숲. 원래 신라를 건국할 때부터 있던 숲으로, 시림이라고 하던 것을 알지가 태어난 뒤로 계림이라 부름.

<명칭 배경>
탈해왕 4년(60)에 왕이 금성 서쪽 시림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온통 환한, 빛으로 가득하여, 날이 밝은 후 신하를 보내어 살피도록 하였다. 신하가 시림에 이르러 보니 금으로, 된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 울고 있어 돌아와 고하니,왕이 즉시 시림으로 가서 궤짝을 열어 보았다. 그 속에는 총명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있었고,왕은 하늘에서 보낸 아이라 하여 태자로 삼았다. 아기라는 뜻의 '알지'라는 이름을 주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


-경주월성(사적 제16호)
신라 궁궐이 있었던 도성으로 성의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다하여 반월성·신월성이라고도 하며,왕이 계신 성이라 하여 재성이라고도 함.삼국사기에 의하면 파사왕 22년(101)에 성을 쌓고, 금성에서 이곳으로 도성을 옮겼다고 전한다.이 성은 신라 역대 왕들의 궁성이었으며, 문무왕 때에는 안압지·임해전·첨성대 일대가 편입되어, 성의 규모가 확장되었다. 성을 쌓기 전에는 호공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탈해왕이 어렸을 때 꾀를 내어 이곳을 차지했다고 한다.남해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탈해왕을 사위로 삼았으며, 신라 제4대 왕이 되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성의 동·서·북쪽은 흙과 돌로 쌓았으며, 남쪽은 절벽인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다.성벽 밑으로는 물이 흐르도록 인공적으로 마련한 방어시설인 해자가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임해전으로 통했던 문터가 남아있다. 성 안에 많은 건물터가 남아있으며, 1741년에 월성 서쪽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석빙고가 있다.


-경주임해전지(사적 제18호)
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터.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안압지는 신라 원지(국유 연못)를 대표하는 유적.


- 경주 첨성대(국보 제31호)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높이는 9.17m.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내물왕릉, 계림, 월성지대(사적및명승 제2호)
신라 17대 왕인 내물왕(재위 356∼402)의 무덤은 약 1500여 년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사적 제188호로 지정되어 있다.무덤의 모습은 땅 위에 둥근 봉분만 갖춘 신라 초기의 양식이며, 근처에 있는 신라 13대왕인 미추왕의 무덤과 같은 양식이다. 계림은 고목이 무성한 숲으로, 무덤의 동쪽에 있으며, 첨성대와 가까운 곳에 있다.무덤의 남쪽으로는 모양이 반달같아 반월성이라고도 부르는 월성이 있다.이는 신라시대의 도성으로 성안이 넓고 자연경관이 좋아, 궁성으로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었으며 사적 제16호로 지정되었다.이 지대는 신라 왕궁지역의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이 조화를 이루어,편안하고 조용하게 역사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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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능원지구》
신라 왕, 왕비, 귀족 등 높은 신분계층의 무덤들이 있고, 구획에 따라 황남리 고분군, 노동리 고분군, 노서리 고분군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무덤의 발굴조사에서 신라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금관, 천마도, 유리잔, 각종 토기 등.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습니다.


-신라 미추왕릉(사적 제175호)
신라 최초의 김씨 왕으로 백제의 여러차례 공격을 막아내고 농업을 장려한,신라 13대 왕인 미추이사금(재위 262∼284)의 무덤.


-경주황남리고분군(사적 제40호)
경주시내 평지 무덤들 가운데 서남쪽에 있는 신라의 무덤들.


- 경주노동리고분군(사적 제38호)
노동동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고신라시대 무덤들로, 봉황대·식리총·금령총 등이 포함되어 있다. 봉황대는 높이 22m, 지름 82m로 황남대총 다음으로 규모가 큰 무덤.


-경주노서리고분군(사적 제39호)
서북쪽 노서동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의 무덤들로 현재 10여 기의 크고 작은 무덤이 남아있음.그 중 가장 북쪽에 있는 제130호 무덤은 노동동 고분군의 봉황대와 대칭을 이루어 서봉황대라 불림.


-신라 오릉(사적 제172호)
경주시내 평지 서남쪽에 위치한 4기의 봉토무덤과 1기의 원형무덤.
'삼국사기'에선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 등.신라 초기 4명의 박씨 임금과 혁거세의 왕후인 알영왕비 등 5명의 무덤이라 되어 있는데,'삼국유사'에는 혁거세왕이 임금자리에 있은지 62년 만에 하늘로 올라갔다가,7일 후에 몸이 흩어져 땅에 떨어지자 왕비도 따라 죽으니, 사람들이 같이 묻으려고 했으나,큰 뱀이 방해해서 몸의 다섯부분을 각각 묻었는데, 그것을 오릉 또는 사릉이라 했다고 합니다.


- 경주동부사적지대(사적 제161호)
여러 사적이 모여있는 곳을 보존하기 위해 하나의 단위로 정한 것.동서는 안압지부터 교동까지.남북은 월성남의 남천에서 고분공원 앞 첨성로가 있는 곳까지가 동부사적지대에 해당.


-재매정(사적 제246호)
김유신 장군 집에 있던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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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지구》
황룡사지와 분황사가 있으며, 황룡사는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으나,발굴을 통해 당시의 웅장했던 대사찰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40,000여 점의 출토유물은 신라시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산성지구에는 A.D 400년 이전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명활산성이 있는데,신라의 축성술은 일본에까지 전해져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황룡사지(사적 제6호)


-분황사 석탑(국보 제30호)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돌을 벽돌같은 크기로 다듬어 쌓은 탑)'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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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지구》


-명활산성(사적제47호)
경주의 동쪽 명활산 꼭대기에 쌓은 둘레 약 6㎞의 신라 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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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신라태종무열왕릉비(국보25호)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의 능 앞에 세워진 석비.


-경주석빙고(보물66호) = 얼음창고


-망덕사지(사적7호)
경주 '낭산'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절터.
이 절은 황룡사, 사천왕사, 황복사와 함께 경주의 중요한 사찰이었던 곳.


-사천왕사지(사적8호)
경주 낭산 기슭에 있는 신라의 절터로 신문왕릉 옆 ·선덕여왕릉 아래에 있음.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가장 먼저 지은 절.경덕왕 때 향가인 '도솔가', '제망매가'를 지은 고승 월명이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


-경주흥륜사지
신라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절로,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온 고구려 승려 '아도'가 지은 것이라 전해짐.


-김유신묘(사적21호)
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장군 김유신의 무덤.


- 경주부산성(사적25호)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쌓은 신라 산성으로 주사산성이라고도 함.주사산·오봉산·오로봉산·닭벼슬산이라고도 불리는 부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세 줄기의 골짜기를 따라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석축성.


- 문무대왕릉(사적158호)
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무덤.
동해안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으로, 신라인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곳.


-이견대(사적159호)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한 건물.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호국정신을 받들어,31대 왕인 신문왕이 681년에 세웠음.

답변들
re: 경주문화재

jse1312 (2004-09-28 21:14 작성) | | 이의제기
*경주서악동귀부*

이 귀부는 신라 문무왕(661-680)의 공적을 새긴 비석, 즉 김인문 묘비의 받침돌로 알려져 있다.

이 귀부는 용의 머리로 되기 이전에 거북이 모양의 머리를 지니고 있어서 돌로 만든 비석 받침의 초기형식이라 하겠다. 전체 구성이 조금 형식화되고 약해 보이는 느낌이 있지만 목을 길게 뽑아들고 멀리 앞을 바라보는 기상은 통일신라 초기의 호국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다.

눈여겨볼 만한 것은 무열왕릉비 귀부의 발가락이 앞이 다섯, 뒤가 넷 이었던 데 견주어 서악동의 귀부는 앞뒤 다섯 개라는 점이다. 정지해 있을 때와 전진할 때의 차이라고도 하나 그렇게 구별한 뜻을 알 길이 없다.

*감산사지삼층석탑*

이 탑은 719년(성덕왕 18)에 중아찬 김지성이 창건한 감산사지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삼층석탑으로서 높이는 약 3.3m이다. 도괴되었던 것을 1965년에 다시 세웠으며 현재 감산사 금당 앞에 세워져 있다. 하층기단은 4매석으로 구성되어 있고 면석에는 우주와 탱주 1주가 새겨져 있다. 갑석에는 각형과 호형의 2단 굄이 있어 상층기단 면석을 받고 있다.

상층기단 면석은 우주와 탱주 1주가 새겨져 있다. 갑석은 2매석으로 구성되어 있고 밑에는 부연이 있으며 상면에는 각형 2단의 굄이 있다. 초층옥신의 옥신과 옥개석은 각각 한 돌이고 옥신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다. 옥개석에는 4단의 받침이 있고 추녀밑은 직선이며 전각이 경쾌하게 들려 있다. 현재 2·3층은 옥개석만 남아 있고 상륜부는 노반만 남아 있으나,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양식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감은사트삼층석탑*

동서로 마주 서 있는 이 탑은 신라 신문왕 2년(682)에 세워진 석탑으로, 감은사의 창사배경에서 뿐만 아니라 조형양식에 있어서도 정립을 기해가는 우수한 작품이다. 이 탑은 전체적인 비례가 균형을 유지하고 있어서 매우 안정감을 주는 뛰어난 건축수법을 과시하고 있다. 화강암 이중기단 위에 세워진 방형 중층인 이 탑은 동서 양탑이 같은 규모와 구조를 드러내고 있다.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면석을 같은 돌로 각각 12매의 석재로 짜 맞추었다. 상층기단은 면석을 12매로, 갑석은 8매로 구성하였다. 탱주는 하층기단에 3주, 상층기단에 2주를 세웠다.

초층옥신은 각 우주와 면석을 따로 세웠으며, 2층은 각 면이 한돌, 3층은 전체가 한돌로 되었다. 옥개석은 받침돌을 별석으로 각층 4매씩의 돌로 되었다. 그리고 옥개석 받침은 각층마다 5단의 층급으로 되었다. 상륜부는 양탑 모두 노반과 높이 3.3m의 철제 찰주(擦柱)가 남아있으며, 이는 다른탑에서 볼수 없는 놀라운 사실이며 이 찰주까지 전체의 높이가 13.4m나 되어, 현재 경주지역에 남아 있는 삼층석탑으로서는 분황사석탑을 제외하고는 가장 크다.

목조가구를 모방한 형적을 보이며 옥개석 받침을 층단식으로 한 수법은 전탑의 전단계 모습을 추정케 한다. 기단을 이중으로 하는 형식은 새로운 방식으로, 이후부터 한국 석탑의 규범을 이루는 것이 되었다. 또한 1960년 석탑을 해체 보수할 때 3층 탑신에서 창건당시 설치하였던 매우 정교하고 귀중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으며 보물 제 366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전시중이다. 탑의 전체 높이는 13.4m 이다.

*경식(천마총)*

이 장신구는 천마총 목관안에서 출토된 너비 약 30cm, 길이 30cm의 신라시대 목걸이(頸飾)이다. 금관대륜 바로 밑에 늘어진 이 목걸이는 그 하단이 허리띠에 이르며 피장자(被葬者)의 가슴 한가운데에 드리워져 있었다. 대형의 주식(主飾)이 목좌우에서 길게 늘어져 하단에서 큰 굽은옥으로 결합되었다. 주식 좌우에는 소형식(小形飾)의 수식이 각각 따로 늘어져 주식 중간쯤에서 조금 작은 굽은옥에 의하여 결합되었다.

주식의 구성은 달개가 달린 은제구슬 여섯 개를 한 줄로 하여 3단, 그리고 다시 은구슬 3단을 끼운 끝에 방주형(方柱形) 금구(金具)를 끼워 그 밑에 감색 유리 구슬을 여덟 개씩 달아맨 것을 한조로 삼았다. 이들을 좌우 각각 여섯 줄로 형성하였으나 은제구슬은 부식되어 그 흔적만 남아 있다. 가운데에는 큰 굽은옥(曲玉)을 매달았다. 이와는 별도의 소형식은 작은 청색 유리옥에 흰색 또는 녹색의 굽은옥을 끼우고 주식에서와 같이 일정한 간격으로 장방형의 금판을 배치시켰으며, 끝부분에 소형의 경옥제 굽은옥을 매달아 균형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 사용된 각종 옥은 약 2000여 개나 되는데, 금제 중공옥이 181개, 장방형 금판이 22개 사용되었다. 이와 비슷한 목걸이는 금령총에서 발견된 일이 있다.

*경주골굴암마애여래좌상*

머리 위에는 육계가 큼직하게 솟아있고 얼굴윤곽이 뚜렷하다. 타원형의 두 눈썹 사이로 백호(白毫)를 상감했던 자리가 둥글게 파였다. 두 눈은 멀리 동해를 내려다보고, 귀는 어깨까지 내려오고, 가는 눈엔 잔잔한 웃음이 머물고, 굳게 닫힌 입술에는 단호한 의지가 서려 있다.

입체감이 뚜렷한 얼굴에 견주어 신체는 다소 평면적이다. 왼손엄지와 검지 손가락을 짚어 배 앞에 놓고, 오른손은 파괴되었으나 본래 무릎 밑으로 땅을 짚어 마귀를 항복케 하고 선도하던 순간을 나타낸 것이 확실하다. 머리 뒤엔 연꽃이, 후광에는 가늘게 타오르는 불길이 새겨져 있으며, 옷 주름은 물결치 듯 한 방향으로 조각되었다.

세련되지 못한 옷 주름때문에 학계에서는 이 마애불상을 삼국시대의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평면적인 신체와 수평적인 옷 주름, 겨드랑이 사이의 V자형 옷 주름들이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철안 도피안사와 장흥 보림사의 불상과 비슷해 통일 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

오랜 비바람에 석회질 암석이 마모되어 오른쪽 귀는 이미 떨어져 나갔고 가슴 위도 벗겨져 버렸다. 무릎 부분도 무너진 상태일 뿐 만 아니라 풍화 작용으로 균열이 심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여 안타깝다. 보물 제 581호이다.

*경주교동석등*

이 등(燈)은 대석 등을 흥륜사지(興輪寺址)에서 가져왔다고 전해지는 등 비교적 빠른 시기에 문화재자료로 지정될 정도로 잘 다듬어진 석등이다.

개인소유로 가옥 내부에 위치하고 있어 일반인에게는 그리 알려지지 않는 석등이다. 대석은 방형으로 된 복련 지대석이며, 사면에는 12지상 좌상이 부각되어 있다. 지대석 상부에는 간주가 있고 또 그 위에 앙련대석이 있다.

*경주구황동당간지주*

당간지주는 당을 걸었던 장대, 즉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좌우에 세우는 기둥, 돌로 만든 것이 보통이나 철제, 금동제, 목제인 경우도 있다.

분황사 남북중심선에서 서쪽으로 36m, 석탑 중심에서 남쪽으로 62m되는 지점에 분황사의 유구(遺構)로 판단되는 화강암으로 만든 당간지주 1기가 남아 있다. 65x40x370㎝ 크기의 지주석 2개를 70㎝ 간격을 두고 남북으로 배치했으며 그 사이에는 귀부를 조각한 받침석을 동쪽으로 향하여 놓았다.

기본 형식은 두 기둥을 60cm~100cm의 간격으로 양쪽에 세우고 그 안쪽 면에 상대하여 기단부(基壇部)를 설치하기 위한 간구나 간공을 마련하고, 아래에는 간대나 기단부를 시설하였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당간지주는 기단부의 구조가 거의 파손되어 있고 교란되어 있는 상태이다.

당간지주를 간구 또는 간공의 위치 및 형태 외형, 장식 등에 의하여 분류하여 보면 다음과 같이 몇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간공의 위치나 형태에 따라 구분하면 원형 또는 방형의 간공의 세군데 관통되어 있는 것, 윗부분에는 간구가 있고 그 아래로 두개의 관통된 간공이 있는 것, 윗부분에는 간구가 있고 그 아래로 방형(方形)의 작은 간공이 한개 또는 두개 있는 것 등이 있다.

둘째, 외형에 따라 분류하면 일자형 기둥의 바깥벽 주변에 한단의 굴곡을 주어 상하부로 나눈 것, 기둥 바깥 면의 두 곳에 굴곡을 주어 허리가 잘록하게 보이도록 한 것, 그 밖의 특수한 형태 등으로 나뉘어 진다.

셋째, 기둥에 새겨진 장식에 따라 구분하면 바깥 면의 모서리에 모죽임만 있는 것, 선당에 굴곡을 둔 것, 그 밖의 특수한 모양을 가진 것이다.

이러한 당간지주의 형태는 시대의 흐름에도 큰 변화가 없고, 다만 각면에 장식된 무늬와 기둥의 '치석수법'만이 시대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는 정도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당간지주들은 모두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것이며 그 이전에 조성된 예는 남아 있지 않다.

통일신라시대의 예로는 '부석사 당간지주' 와 '숙수사지 당간지주'를 비롯하여 귀단부까지 완전하게 남아 있는 '금산사 당간지주' 등으로서 각부에서 명문이 새겨져 있는 '중초사지 당간지주'는 다른 당간지주의 편년을 고찰할 수 있는 기준 자료가 되고 있다.

고려시대의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와 같이 안쪽면을 제외한 각면의 종선문을 조식하였고 주두도 원호를 이루었으며 간대와 기단 등 가부분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무늬가 형식화 또는 약화되어 정교하지 못하고 치석도 고르지 않아 둔준한 느낌을 준다. 대표적인 예로는 '보원사지 당간지주', '천흥사지 당간지주', '춘천근화동당간지주', '홍천희망리 당간지주', 등으로 들 수 있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통일 신라와 고려시대처럼 거대한 규모의 당간이나 지주가 조성되지 않았다. 법주사의 당간과 같은 경우도 원래의 있었던 신라 시대의 지주의 당간만을 근년에 다시 만들어 세운 것이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대게 작고 낮으며 선문등의 조식이 없는 지주의 목조와 당간을 세웠는데, 그나마 지금은 당시의 중창한 여러 사찰에 그 흔적만 남아 있다.

당간지주는 통일 신라 시대부터 幢을 세우기 위하여 사찰 앞에 설치되었던 건조물이면서 한편으로는 사찰이라는 신성한 영역을 표시하는 구실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당간지주는 선사 시대의 솟대와도 일맥상통하며 일본의 침공이나 신사 앞에 있는 도리이와도 특히 관련성이 많은 건조물이라 할 수 있다.
내용출처 : 인터넷 검색



경주의 문화재 종류와 설명들입니다.

dlruddmsdi (2004-09-28 21:14 작성) | | 이의제기
경주의 문화재는요
종류가 탑,능,불상,사찰,호수 등이 있습니다.
제가 다는 못 찾았지만 인터넷에서 찾은 것들입니다.
다는 못찾아서 죄송하지만 잘봐주십시요.


효현리 삼층 석탑

구분: 탑 - 보물 제 67 호
시대: 통일신라시대
위치: 경주시 효현동 420
교통: 경주시내에서 약 4km 떨어져있다. 그 석탑 근처에는 법흥 왕릉이 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이 석탑은 이중으로 된 기단위에 세운 일반적인 석탑이나 옥개의 층단받침이 4단으로 되어 있고 각 부의 세부조각이 섬약하게 나타난 것은 시대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통일 신라 시대인 9세기경의 제작으로 여겨지고 있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이 탑이 있는 곳을 애공사지(哀公寺址)라 전하고 있으나 현지에서 이를 증명할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부근은 전답으로 변하여 가람의 흔적도 없다.
화강암(花崗岩)으로 만든 이 석탑(石塔)은 이중의 기단 위에 세운 일반형에 속하는 것으로, 지대석과 하층기단 중석(中石)은 일석(一石)으로 만들고 사면에 1석식 2개 장석(長石)으로 맞추고 중석 각면은 일주(一柱) 탱주로서 2분하고 사우(四隅)에 우주(隅柱)가 있다.
갑석(甲石)은 동서로 긴 판석 2매로 덮고 밑에는 부연(副椽)과 상면중앙에 각형(角形) 몰딩이 있음은 모두 통식을 따르고 있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모두 1석식의 석재를 중적(重積)하였고 낙수면(落水面)은 경쾌한 곡선을 보이다가 전각에 이르러 반전되었다.
상륜부(相輪部)는 전실(全失)되어 남은 것이 없다. 옥신(屋身)에 비하여 옥개석이 넓어 안정감이 있다고 하나 탑신부에 비하여 기단부의 과중한 비율은 도리어 둔중(鈍重)한 결과가 되었다.
기단각부에선 생략과 이만(弛慢)의 징조가 뚜렷하다.
옥개< 屋蓋 >의 층단받침이 4단으로 되어있고 각 부의 세부조각<細部彫刻>이 섬약<纖弱>하게 나타난 것은 시대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통일신라시대< 統一新羅時代 >인 9세기경의 제작으로 여겨지고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모두 없어졌는데 현재 높이는 4.06m, 기단 폭 2.42m에 달하며, 1973년에 해체 복원하였다. 탑이있는 이 곳 일대는 신라시대에 애공사가 있었던 곳이라고 전해오기도 한다.

김유신 장군묘

구분: 능/묘 - 사적 제 21 호
시대: 통일신라시대 - 문무왕
위치: 경주시 충효동 산 7-1
교통: 경주시 충효동에 있다.고속터미널옆 서천교를 지나 삼거리에서 오른쪽 송화산 쪽으로 1.1km 정도 간다.고속터미널에서 불과 2km도 안되는 거리에 있는데다 형산강을 끼고 경주시를 바라보며 가는 길맛도 좋아 걸어가기를 권한다. 넓은 주차장이 있고 근처에 기념품가게가 한두곳 있으나 숙식할 곳은 없다.

김유신은 A 959 진평왕 (26대왕)때 태어났다.
묘자리는 송화산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 전망이 울창한 소나무 숲속이며,어느 왕릉에 견주어도 뒤떨어지지 않는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다.
지름 길이만 30m에 달하는 큰 원형분인데 둘레에는 호석과 돌난간사이 바닥에 돌을깔았다.
호석은 쥐,소,호랑이,토끼,용,뱀,말,양,원숭이,닭,개,돼지 등 십이지신상이다.
대개의 경우 능을 지키는 수호신으로는 갑옷을 입은 조각들이 새겨지는데 김유신 묘의 십이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었다.
동체는 정면을 보고 서 있으나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주시하는 머리 모습이 이색적이다. 무장을 하지 않아 그런지 매우 온화해 보인다.
「삼국유사」에 "김유신 이 죽은 뒤 흥무대왕으로 봉하였으며, 그 능은 서산(西山) 모지사(毛只寺)를 동향한 산봉에 있다"고 하고, 또 「삼국사기」에 "문무왕이 그 의 부음을 듣고 채백(彩帛)1천 필과 조(租) 2천 석을 보내고, 군악고취(軍樂鼓吹) 100인을 보내 금산원에 예장하고, 유사(有司)로 하여금 비를 세워 기공(紀功)을 기명하고, 민호(民戶)를 배정하여 묘를 수호하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죽은 뒤 그의 죽음을 애도한 문무왕이 호화로운 능을 마련해주지 않았나 싶다.
묘역에는 김유신장군의 위패를 모신 금산재의 비각이 있다.
관련 자료
재이와 점성
[삼국사기]에는 일식과 혜성 등 천문현상이 일어난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과 반란이 일어나거나 왕이 사망한다는 기사가 자주 나온다.
또 667년에는 동북 하늘에 나타난 혜성을 보고 고구려의 멸망을 예연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고대인이 천문현상에 얼마나 민감하였는지는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도 엿볼수 있다. 신라 선덕여왕 16년(647)에 비담등이 반란을 일으켜 김유신이 거느린 관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발 큰 별이 관군이 주둔하고 있는 월성에 떨어졌다. 반란군은 여왕의 군대가 패전할 조짐이라고 기세가 등등하였고, 반대로 관군은 크게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김유신은 꾀를 내어 연에 허수아비를 매달아 불을 붙여 하늘로 띄우고는,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을 퍼뜨렸다.
군사들의 마음은 다시 안정되었고 반대로 반란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지게 되었으니, 김유신은 이 기회를 틈타 반란군을 크게 무찔렀다고 한다. 이처럼 고대인들은 혜성이나 일식과 유성 등 천문현상을 인간에게 무엇인가 알리려는 하늘의 경고라고 받아들였다.
즉, 정치를 잘하면 천체운행과 기상이 순조롭고, 정치가 잘못되면 여러 변괴를 일으켜 경고를 하고, 그래도 잘못이 계속되면 재앙을 내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에 변고가 일어나면 왕은 정치를 반성하며 근신을 하고, 때로는 하늘의 노여움을 풀기 위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흉년이 들거나 곡식이 익지 않으면, 왕을 바꾸거나 심지어 왕을 죽이기까지 하였다는 옛 부여의 풍속도 이러한 생각과 통하는 것이다.
나라의 운명만이 아니라 개개 인간의 수명이나 갖가지 일도 하늘의 별에 매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제옹치기와 같은 점성풍습은 그러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별똥별이 떨어지면 영웅이 죽거나 혹은 위인이 탄생한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별과 인간의 탄생이 밀접히 관계가 있다는 생각은 김유신이나 원효라는 걸출한 인물의 탄생 이야기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김유신의 아버지 서현은 어느날 밤에 형성(화성)과 진성(토성)의 두 별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꿈을 꾸었는데, 얼마 후 아내 만명이 임신하여 김유신을 낳았다고 한다. 원효의 탄생도 이와 비슷한데, 원효의 어머니가 별이 떨어져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꾼 후 임신하여 원효를 낳았다고 전한다.
이런 생각들은 모두 하늘과 땅과 인간이 서로 상응하고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생각, 즉 천문과 인문의 감응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관념에서 출발한 천문에 대한 관심은 점성적 성격을 두드러지게 갖는 것이 당연하였다.
그래서 고대사회에서 왕과 국가기관은 백성들을 다스리는 일만이 아니라, 천문의 변화를 관측하는 일도 정치의 중요한 덕목의 하나로 생각하였다. 즉 천문관측은 하늘을 통한 정치행위였던 것이다.

진흥왕릉

구분: 능/묘 - 사적 제 177 호
시대: 삼국시대
위치: 경주시 서악동 산 92-2
교통: 고속 터미널 옆 서천교 건너 삼거리에서 건천행 4번 국도를 따라 좌회전해 1.7 km 정도 가서 선도산 아래 태종무열왕릉 앞에서 내리면 된다.

신라 24대 진흥왕(眞興王)(540-576)은 불교를 깊이 신봉하여 흥륜사(興輪寺)와 황룡사를 창건했고, 특히 황룡사의 장육존상(皇龍寺丈六尊像)을 세웠다.
재위 3년에는 화랑제도를 창설하였고 가야국을 정벌하여 통합하였다. 재위 12년에는 한강 유역에 진출(進出)하여 한산주(漢山州)를 두었으며 개국(開國)이라 건원(建元)하여 독립성을 표시하였다.
이어서 재위 16년에는 북한산순수비(巡狩碑)를 세우고 영역을 함경남도 일대까지 확장하였다. 왕릉의 봉분은 원형봉토분으로 봉분의 높이는 7m, 직경은 10m이며, 묘역은 11,493평이다.
봉분 저부에 50cm 내외의 할석이 일부 노출된 것으로 보아 호석을 사용한 듯하다.
무열왕의 가족묘로 추측되고 있는 서악동 고분군이 바라보이는 선도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규모도 크지 않고 별다른 특징이 없다.
화랑 제도를 창설하였으며,국토를 확장 순례하는 등 치적을 남긴 진흥왕의 능은 제일 위쪽에 있는데,치적에 비하여 능의 규모가 작은 점에 대하여 그 진부를 의심하는 학자도 있다.

서악리 마애 석존불

구분: 불상 - 보물 제 62 호
시대: 통일신라시대
위치: 경주시 서악동 92-1
교통: 서악동으로 향하는 버스 이용, 무열왕릉 옆으로 난 산길을 통해 1.5km 가량 걸어 올라가야 한다.

선도산은 경주시 서쪽에 있는 높이 390m의 낮은 산이다.
이 산에는 신라 건국설화와 관련 있는 선도산 성모가 신라 개국 이전부터 이곳에 살면서 신라를 지켜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 김유신의 누이동생인 보희가 왕비가 될 길몽을 꾼 것과도 관계가 있다.
태종무열왕릉을 비롯해 서악서원, 서악동 삼층석탑 서악동고분, 진흥왕릉 등이 이 선도산 기슭에 있다. 무열왕릉 입구에서 걸어서 1.5km 정도 올라간 선도산 정상에 거대한 마애삼존불상이 새겨진 암벽이 있다.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경사가 져 숨가쁘게 올라간다.
삼존불상의 크기는 본존불이 높이 6.85m, 오른쪽 협시보살이 4.62m 왼쪽 협시보살이 4.55m이다.
본존불은 경주 주변의 석불로는 가장 큰 불상이지만 파손이 심해 조각의 세부는 물론 옷무늬마저도 판별할 수 없을 정도이다. 특히 눈의 윗부분이 떨어져나갔고 몸의 정면에도 상하로 균열이 생겼다.
그러나 떡 벌어진 어깨, 턱을 들어 경주평야를 가리키는 당당한 기풍에는 역시 무한한 힘이 느껴진다.
본존불 좌우에는 협시보살이 있는데, 몇 개의 조각으로 파괴되어 아래 계곡에 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왼쪽 협시보살은 머리에 삼산(三山)보관을 쓰고 있으며 갸름한 얼굴에 윤곽선이 부드럽고 적당히 살져 복스럽다. 왼손은 내려서 정병을 잡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께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있어 관음보살로 추정된다.
오른쪽 협시보살은 5개로 조각을 이어붙인 것으로 왼쪽 보살보다 훨씬 파괴가 심하다. 왼쪽 팔이 심하게 떨어져나갔다. 얼굴은 왼쪽 보살과 비슷하지만 얼굴이 직사각형에 가깝다. 왼쪽이 관음보살임에 비추어 대세지보살로 추정된다.
두 협시보살의 모습은 길고 시원한 눈썹, 웃음 짓는 가는 눈, 큼직한 코, 입가에 깊이 파인 보조개, 터질 듯 부푼 뺨 등 어느 것 하나 소홀히 다룬 데가 없는 맵시 있는 조각이다.
세 불상 모두 발 아래에 복련 연화문대좌가 있다. 통일신라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62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악동 고분군

구분: 능/묘 - 사적 제 142 호
시대: 통일신라시대
위치: 경주시 서악동 750
교통: 무열왕릉으로 가는 버스 이용 17번 107번

서악리고분군은 무열왕릉(武烈王陵) 북쪽에 있다. 밑변이 45m 내외가 되는 초대형 봉토분 4기가 이에 해당된다. 선도산에서 뻗어 나온 지릉들이 고분군의 좌, 우편과 뒷편을 감싸고 있으며 앞은 탁 트인 곳이라 고분의 입지 조건으로 적격지라 할 수 있다. 신라 태종 무열왕릉의 후면 구릉에 있는 이 고분군은 누구의 무덤들인지 전혀 알 수 없으나 무열왕릉의 위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왕이나 왕족의 무덤으로 생각된다.
봉분의 높이는 15m 미만이며 밑둘레는 110-140m에 달하는 비교적 큰 무덤들이지만 경주시의 중심부에 있는 평지 고분들과는 다르게 구릉지에 있는 것으로 보아 그 구조 역시 적석목곽분과는 달리 무덤 내부를 돌로 쌓아 공간을 마련하고 시체를 넣는 석실고분으로 여겨지고 있다.
1971년 무열왕릉과 더불어 복원, 정비된 4기(基)의 고분들이 능선 사면을 따라 일렬로 위치하고 있다. 봉분은 저경의 장축이 모두 45m가 넘는 초대형급 고분들로 장축의 방향은 북동-남서향을 한 장타원형의 봉토분이다. 주변에 석물(石物)이나 호석(護石) 등은 보이지 않는다.

내부문화재 서악리 귀부, 김인문 묘

서악리 귀부<보물 제 70호>

이 귀부는 신라 문무왕의 공적을 새긴 비석 즉 김인문 묘비의 대석으로 알려지고 있다.귀부의 크기는 길이 2.81m,폭2.14m이며 귀갑무늬를 새긴 거북등에는 비석으로 꽂았던 흔적인 직사각형의 구멍이 뚫어져 있다.
이 귀부는 용두화되기 이전의 귀두의 원형을 지니고 있으나 한국 석비대석의 시원적 형식이라 하겠다.전체 구성이 조금 형식화되고 약해 보이는 느낌이 있으나 목을 길게 뽑아 들고 멀리 앞을 바라다보는 기상은 통일신라 초기의 호국정신을 잘 나타낸다.
눈여겨볼 만한 것은 무열왕릉비 귀부의 발가락이 앞이 다섯, 뒤가 넷 이었던 데 견주어 서악동의 귀부는 앞뒤 다섯 개라는 점이다. 정지해 있을 때와 전진할 때의 차이라고도 하나 그렇게 구별한 뜻을 알 길이 없다.


김인문 묘<기념물 제 32호>

태종무열왕릉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큰 고분중 큰것이 김인문의 묘이고 다른 하나는 김양의 묘로 알려져 있다.문인석이나 무인석,석수도 없는 간소한 묘이다.
김인문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며,문무왕의 친동생으로 진덕여왕 5년(651)에 당나라에 일곱 차례나 왕래하며 삼국통일 전후 당나라와의 외교에 큰 공로를 세운 뛰어나 외교관이었다.
묘 주위에는 별다른 석물은 없고 다만 북편에 정, 측면 1칸반의 사모지붕을 한 비각이 있다. 비각의 내부에는 비신과 이수가 없는 귀부가 머리를 앞으로 힘차게 나아갈 자세로 있다. 이 귀부는 1934년 8월 27일 보물 70호로 지정, 보호중이다. 묘는 저경 장축이 23m인 원형 봉토분으로, 높이는 4m내외이며 봉분 저부에는 직경 30cm 내외의 할석이 노출되어 있다.
김양은 무열왕의 9대손으로 통일 신라와 당나라의 화평 교섭에 지대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김인문은 글씨도 잘 써 태종무열왕릉 비문을 썼다.

무열왕릉

구분: 능/묘 - 사적 제 20 호
시대: 통일신라시대 - 문무왕
위치: 경주시 서악동 842
교통: 고속터미널 옆 사천교를 건너 삼거리에서 건천행 4번 국도를 따라 좌회전해 1.7km정도 가면 선도산 아래 태종무열왕릉에 이른다.시내에서 건천방면으로 가는 시내버스는 20분 간격으로 다닌다.넓은 주차장은 있으나 그 밖의 시설은 없다.

선도산 아래 나지막한 송림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 고분은 신라 태종 무열왕의 능이다. 무열왕릉(武烈王陵)은 북서쪽에 위치한 해발 380미터인 선도산(仙桃山)에서 뻗어나온 각 지릉들로 감싸여 있으며, 앞에는 서천과 서악들판이 넓게 펼쳐져 있어서 배산임수지형을 하고 있다. 경주에 있는 많은 능 가운데 누구의 왕릉인지 단정할 만한 확증이 있는 것이 많지 않은데, 이 왕릉은 앞쪽에 태종무열왕릉비가 서 있어 29대 태종무열왕의 능인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무열왕은 신라 제25대인 진지왕 손자이다. 그의 어머니는 26대 진평왕의 딸이자 27대 선덕여왕의 동생이었다. 조부가 실정으로 4년만에 왕위에서 추방된 후, 직계손들은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당대 명장 김유신의 도움으로 진골 중에는 처음으로 보위에 등극하여 신라 제29대 왕이 되었고 재위동안에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가 원효와 인연을 맺은 이야기,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김유신의 누이와 혼인하게 된 이야기 등 무열왕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일화와 전설이 전한다. 김유신의 누이와 무열왕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30대 문무왕이다.
능은 원형 토분으로 둘레 100m, 높이 12m 이며, 봉분의 아래에는 자연석으로 축대처럼 쌓고 큰 돌을 드문드문 괴어 놓은 호석을 둘렀는데 지금은 괴어 놓은 큰 돌만 보인다.
이와 같은 호석 구조는 경주 시내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고분의 호석 구조보다 한단계 발전한 형식이다.
능앞 비각에는 국보 25호로 지정된 신라 태종 무열왕릉비가 있는데,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난 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이 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비신은 없어지고,비신을 받치고 있었던 귀부와 비신의 머리를 장식하였던 이수만 남아있다. 목을 길게 내밀고 등이 육각형의 귀갑으로 덮인 거북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웅건하게 조각된 귀부와 좌우 모두 여섯 용이 몸을 틀고 여의주를 다투는 형상의 동감 넘치는 이수는 통일신라 초기 석조 예술의 높은 경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걸작이다.

내부문화재 무열왕릉비

무열왕릉비<국보 제 25호>

선도산 아래에 위치한 신라 제 29대 태종무열왕릉은 원형토분(圓形土墳)으로 둘레 110미터에 높이가 11미터에 이르고, 봉분(封墳) 밑변에 큰 돌을 심어 호석(護石)으로 삼은 형태의 능이다.
태종무열왕(654-661)은 신라 25대 진지왕(眞智王)의 손자이고, 이름은 춘추(春秋)인데 조부인 진지왕이 나라를 다스린지 4년만에 실정으로 왕위에서 밀려나면서 그 직계 후손(後孫)들은 왕위계승권 밖으로 잠시 밀려나는 듯했으나, 춘추공은 대망(大望)을 품은 김유신(金庾信)과 손을 잡으면서 왕좌(王座)에 올랐다.
김춘추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도 고구려, 일본, 당 등을 사행하면서 신라의 국제적 고립을 타개하는 외교에 심혈을 기울였고, 나당동맹을 성립시켜 통일을 위한 기틀을 다졌으며, 왕위에 오른 후 백제를 병합하고 고구려의 병합을 꾀하는 중에 세상을 떠났다.
능 앞 비각 안에는 비신이 없고, 아래 받침의 구부와 비신의 머리를 장식하는 이수만 남아 있는 능비(陵碑)가 있다.
이 능비는 태종무열왕릉비로 현재 남아 있는 이수와 귀부의 뛰어난 조각으로 널리 알려져 잇는데, 이수는 여섯 마리 용이 서로 얽혀 있고 가운데 부분의 평면에 태종의 둘째 아들인 신라의 명필 김인문(金仁問)의 글씨로 알려진 두줄 여덟글자 "太宗武烈大王之碑"라고 내리써져 있으며, 조각의 용모습은 모두 뒷다리를 들어 여의주(如意珠)를 받들고 있고, 귀부는 머리를 치켜들고, 네발을 힘껏 내디디면서 앞으로 갈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거북모습이다.
이 비석은 신라 문무왕 원년(661)에 무열왕의 위대한 업적을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인데,비신은 없어지고 지금은 대석이었던 귀부와 비신 위에 얹혔던 이수만 남아 있다. 목을 길게 쳐들고 힘차게 뒷발로 땅을 밀며 전진하는 거북의 모습에서 신라통일 초기의 씩씩한 기상을 볼 수 있어,여의주를 받들어 올린 여섯 용을 새긴 이수와 더불어 동양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는 칭찬이 높다. 그리고 이수에 새겨진 "태종무열왕지비"의 여덟 글자는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의 글씨라 전한다.
귀부의 길이 333cm,가로 86cm,높이 54cm,이수높이 110cm이다.


서악리 삼층석탑

구분: 탑 - 보물 제 65 호
시대: 통일신라시대
위치: 경주시 서악동 92-1
교통: 서악동으로 향하는 버스 이용


경주 서악동 삼층석탑은 신라무열왕릉(太宗武烈王陵)이 있는 곳에서 아미타삼존불상(阿彌陀三存佛像)이 있는 선도산(仙桃山) 정상으로 올라 갈 수 있는 길목에 위치한 삼층석탑이다.
통일신라시대의 모전탑(模塼塔) 계열에 속하는 석탑으로 지면에는 두툼한 장대석 4장을 동서로 깔아서 지대석을 삼았고 그 위에 8개의 석괴로 2단으로 축조하여 입방체의 이형기단을 구성하였다.
3층의 탑신은 옥신과 옥개석이 각각 1매 석으로 되었으며 초충에는 얕은 감형으로 호형을 만들고 있다. 이 호형 좌우에는 인왕상이 조각되었다. 탑신에 비해 옥개석(屋蓋石)이 커서 상하의 균형이 맞지 않는 것이 오히려 둔중한 감을 주게 한다.
따라서 경주 남산리 동탑(東塔)을 모방한 듯하면서도 시대도 떨어지고 조각수법도 퇴화한 듯하다. 현재 높이 5.07m, 기단폭 2.34m이다.
이와 같은 몇 가지 특징에서 이 탑은 일종의 모전탑식 석탑(模塼塔式石塔)일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 삼층석탑은 이러한 형태의 석탑 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두대리 마애석불입상

구분: 불상 - 보물 제 122 호
시대: 통일신라시대
위치: 경주시 율동 산 60-1
교통: 무열왕릉 입구에서 4번 국도를 따라 건천쪽으로 2.7km가면 왼쪽으로 두대리 가는 마을길이 나온다.마을길로 접어들어 회관 앞을 지난 후 왼쪽으로 꺽어들면 다시 오른쪽으로 마애불로 가는 비포장도로가 나온다.두대리 입구에서 마애불까지의 거리는 1.3km정도.승용차는 마애불까지 갈 수 있으나 대형 버스는 들어가기 힘들다.시내에서 건천방면으로 가는 버스가 20분 간격으로 있다.숙식할 곳은 없다.


무열왕릉이 있는 서악동을 거쳐 약 2.7km를 지나가면 왼쪽 산 아래에 율동 곧, 두대리 마을이 있다. 이 마을 뒷산 길을 따라 올라가면 마애삼존불이 서 있고 불상 앞쪽에 작은 암자가 하나 있다. 높이 2.5m 크기의 당당한 대장부 같은 몸체에 풍만한 얼굴 미소를 머금은 자비에 넘치는 본존불의 표정은 합장 예배할 마음을 절로 우러나오게 한다. 본존불이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방 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이라 여겨진다.
불상 위쪽으로 갈수록 조각이 깊어지고 머리는 거의 환조에 가깝다. 목에는 삼도가 있고 법의가 얇아 옷무늬도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오른손은 긴장을 한 듯 아래로 뻗어 있고 왼손은 가슴에 얹어서 마치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듯하다.
좌우의 협시보살은 높이 약 2m이며 본존에 비해 야위고 날씬한 느낌이나 당당한 기풍은 동일하다. 왼쪽 협시보살은 왼손에 정병을 쥐었고 오른쪽 협시보살은 합장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삼존은 모두 발뒤꿈치를 모으고 발끝을 바깥쪽으로 하고 있다. 화려하면서도 약하지 않고 섬세하면서도 흐트러짐이 없으며, 당당하게 위용을 자랑하면서도 예술적 향기가 짙은 8세기 중엽 신라 문화 전성기의 작품이다.
이 석불은 서쪽으로 향한 절벽의 바위면을 쪼아 삼존불입상을 얕게 부조한 것으로 굴불사면 석불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마애불상이다.즉 중앙 본존불은 얼굴보다 큼직한 머리,풍만한 얼굴,당당한 체구,흐르는 듯한 곡선미등 8세기 보살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삼존상은 왼손을 가슴에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댄 아미타수인과 왼쪽 보살상의 왼손에 든 보병의 표현으로 보아 당시 유행하던 아미타불과 관음,세지보살의 아미타삼존불로 생각된다.

여근곡

시대: 삼국시대 - 선덕여왕
위치: 경주시 건천읍 신평리
교통: 경주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건천과 영천으로 가는 4번 국도를 따라 16 km 지점에 이르면, 왼편으로 철도건널목이 보인다. 이곳이 건천읍 신평2리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철길을 통과하여 2 km 가면, 오봉산 유학사를 절에 다다른다. 이 길의 200m 정도는 비포장도로이다. 유학사에 주차하고 왼편 산길을 따라 5-10분 정도 오르면 넓게 운푹 파인 곳에서 샘이 솟고 있다. 현재는 샘을 볼 수 없고, 이곳에서 유학사의 우물로 연결되어 있다. 경주에서 이화리 간 300번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부산(富山)은 경주시(慶州市)에서 대구(大邱)방면(方面) 약 16km 건천읍(乾川邑)과 산내면(山內面) 사이에 자리잡고 있으며 높이 640m의 산으로 전설(傳說)과 사적(史蹟)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지리지(地理志)에는 부산(夫山)이라고도 기록(記錄)되었으며, 주사산(朱砂山)과 오봉산(五峯山) 등도 부산내(富山內)에 있는 주사암(朱砂庵)과 오노봉(五老峯) 등에서 온 별칭(別稱)이다. 부산(富山)에서 가장 유명(有名)한 곳이 여근곡(女根谷)이다. 산 지형이 영락없이 여자의 벌리고 있는 다리 가랭이와 그 국부를 닮았다고 하여 여근곡이라 한다.
현재 여근곡에는 유학사라는 조그만한 사찰이 있고, "옥문지(玉門池)"라는 샘에서 흘러나오는 우물이 있다.


법흥왕릉

구분: 능/묘 - 사적 제 176 호
시대: 삼국시대
위치: 경주시 효현동 산 63
교통: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무열왕릉이 있는 서악동을 거쳐 산등성이를 돌아넘어 약 2km를 지나가면 작은부락이 나온다. 여기서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법흥왕릉이 있다.


법흥왕릉은 와산마을 남동쪽 능선의 사면에 유존하는데, 이 능선은 선도산에서 뻗어내린 지릉으로 용이 누워서 여의주를 굴리는 형국이라 하여 와산(臥山)으로 불렀는데 마을 이름도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법흥왕은 신라 제23대 왕으로 휘(諱)는 원종(原宗)이며 지증왕(智證王)의 원자(元子)이다. 왕은 성품이 너그러워 사람을 사랑하였다 한다.
신라에서 처음으로 연호(年號)를 건원(建元)이라 정하고 율령을 반포하였으며 백관(白官)의 공복을 재정하는 등 내적으로 국가 체제확립에 힘썼고 외적으로는 금관국주인 김구해(金仇亥)가 투항해 오는 등 안팎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왕릉은 능선 사면을 그대로 이용하여 봉분을 조영하였으며 봉분 형태는 남-북 장축의 타원형이다. 봉분 크기는 저경 장축이 13m, 높이가 3m정도 되며 능 주위로 노송들이 둘러싸여져 있다. 봉분 저부에 직경 30cm 내외의 할석들이 노출된 것으로 볼 때 봉분 내에 호석을 돌린 듯하다.
왕릉 주변의 석물들은 후대인들이 만든 것으로 릉의 동편에 오석(烏石)과 화강석으로 배례석, 향대, 수세대 등을 조성하였다. 그 앞에는 표석과 안내판이 나란히 세워져 있으며 능 뒷부분은 사성(莎城)을 돌렸다.
법흥왕릉에 관한 기록은 애공사의 존재와 더불어 나타나는데, 조선시대까지의 관련 기록에는 모두 서악리에 왕릉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추사(金正喜)이래 모든 연구자들은 법흥왕릉을 무열왕릉 뒷편의 서악동고분군중 1호분을 법흥왕릉으로 생각하고 있다.
현재의 법흥왕릉은 일제시대 외외마을 앞의 전답지를 애공들(哀公梁)이라 한데 기인하여 마을안의 9세기경의 통일신라 삼층석탑을 애공사지(哀公寺址) 삼층석 탑이라 전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내용출처 :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1id=13&dir_id=130602&docid=269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