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암종택(聾巖宗宅)
농암(聾巖 李賢輔1467-1555)은 호조참판, 형조참판, 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품계는 종1품 숭정대부에 까지 이르렀다. 청렴 강직하고 경로와 효성이 독실하여 몰 후 '효절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은퇴하여 우리말의 시가문학을 창작하여 당시 '관료적문학'이 성행하던 시절 새로운 문학의 지평을 열었다. 그리하여 국문학사에 '강호문학의 창도자'라 일컬어졌다. 청백리에 녹선 되었고, 분강서원에 배향되었다. 퇴계는 고향선배인 농암이 세상을 떠났을 때 만사와 행장을 지어 바쳐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문화관광부의 '2001년도 문화인물'로 선정되어 국가적 차원의 추모행사가 있었다.
1974년 안동댐이 되면서 안동 영천이씨의 집성촌인 '부내마을'(도산서원에서 2Km하류, 행정구역은 안동시 도산면 분천동)은 사라졌다. 620여년의 역사를 지닌 종택 '긍구당(肯構堂)'을 비롯하여 '어부가', '농암가'가 지어지고 400여 년간 '애일당구로회'가 행해진 유서 깊은 건물 '애일당(愛日堂)', 그리고 분강서원(汾江書院) 등의 유적들이 사방으로 분산 이건된 것을 남청량산 농암선생 묘소 뒤편인 도산면 가송리 올미재에 새로 유적을 모아 단계적으로 조성한 것이다. 머지않은 날 농암선생 관련 유적과 유물들이 옛 분천동(부내마을) 시절의 모습대로 복원될 것이다.
종택은 고가옥 개방프로그램의해 개방되어 학생과 학술단체를 비롯한 일반인이 숙박할 수 있다.
긍구당
농암종택의 서쪽에 있는 손님을 맞이하는 별당이다
고산정
고산정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퇴계 선생의 제자인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 1530년~1604년) 선생의 정자이다.
퇴계 선생은 특히 성재 선생을 아껴 자주 왕림하여 빼어난 경치를 즐기고 '유고산(遊孤山)', '고산견금문원(孤山見琴聞遠)' 등 여러 편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