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는 8월 26일(금) 조선일보 1면에 나온 최순호기자의 사진입니다.
사진 뒤에 보이는 편종의 모습을 보고 이 글을 쓰게 됐습니다..
종묘의 제사는 정전의 춘하추동 및 납일의 5대향,
영녕전의 춘추 및 납일의 3대향을 지냈으나 광복 후 한 때 중단되었다.
이것을 1969년부터 매년 1회 올리다가 1971년 이후에는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정전과 영녕전의 제사일을
매년 5월 첫째주 일요일로 정하여 각각 한 번씩 지내고 있다.
옛날에는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제왕은 먼저 종묘에 고한 후에 의결하고 시행하였다.
*납일:동지 뒤의 셋째 未日. 이날 조정에서는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드림.

문화재청의 종묘제례악 자료사진
제례악(중요무형문화재 제1호)은 종묘대제 때 연주한다.
옛날에는 국가의 기준을 예절과 악에 두었으며 악을 예의 다음으로 중요시하여
예악이 매우 중요시 되었다.
이와 같이 악을 중요시하는 것은 나라 안의 서로 융화를 이룩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정치형태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융화는 비단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악은 만민을 기쁘게 하여 신을 즐겁게 하기 때문에 국가제례에는
반드시 악이 수반되는 것이다.

문화재청의 종묘제례악 자료사진
우리나라 종묘제례악은 처음에는 아악, 당악, 향악이 섞여 있어 일정하지 않았으나
세종 9년 5월에 악학별좌봉상판관(樂學別坐奉常判官) 박연이
남양석(南陽石)으로 石磬을 만들었고 (세종실록 권36)
12년 윤 12월에 아악보(雅樂譜)를 만들었으며, 정인지가 서문을 썼다. (세종실록 권50)
보태평(保太平)은 열성조의 문덕(文德)을, 정대업(定大業)은 무공(武功)을 내용으로 하였다.

문화재청의 종묘제례악 자료사진
이와 같은 종묘제례악은 인조 3년에 이르러 임진란을 극복하고 나라를 중흥케 한
선조대왕을 찬미하는 중광장(重光章)을 첨가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종묘제례악은 동양사회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고전악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설명:문화재청 발간 '조선왕조 종묘와 제례'에서..

문화재청의 종묘제례악 자료사진
편종은 중국 고대에서 제사와 연향에 사용하기 위해 만든 樂鐘입니다.
西周 중기에 제일 먼저 만들어졌는데 이때의 편종은 대략 3개로 이루어 졌고
서주 말기에서 춘추시대로 들어가면서 종의 수가 8~9개로 늘어납니다.
전국시대의 편종은 13~14개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종묘제례악에서 편종 연주모습
한국의 편종은 고려 예종11년(1116)에 유입되었으며
이때 중국에서 들어 온 악기는 정성(正聲)과 중성(中聲)의 두 가지가 있었고
정성은 16개의 종을 달았고 중성은 12개의 종을 달았습니다.
지금까지 쓰이는 편종은 16개의 종을 단 정성이며
상당과 하단에 각각 8개씩 매답니다.
종의 크기는 다 같고 그 두께가 조금씩 다른데 종이 두꺼우면 소리가 높고
얇으면 소리가 낮으며 각퇴(뿔망치)로 당좌(撞座)를 칩니다. (사진 참조)
고려와 조선 초기 세종 7년(1425) 이전까지는 우리나라에서 직접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에서 수입해서 쓰는 관계로 악기 수가 모자라서
악기의 음률도 맞지 않는 등 어려움이 있었으나
세종 11년(1429) 한강변에 설치된 주종소(鑄鐘所)에서 만들어 쓰기 시작합니다.

편종의 모습
16개의 종은 나무틀인 가자(架子)에 8개씩 2단으로 나누어 달며
황종(黃鐘)부터 임종(林鐘)까지는 아랫단에,
이칙(夷則)부터 청협종(浹鐘)까지는 윗단에 답니다.
아랫단의 종은 오른손으로 치고 윗단의 종은 왼손으로 칩니다.
이 틀은 2개의 목사자(木獅子)에 꽂아 고정시킵니다.
틀의 양편에는 용의 머리가 조각되어 있으며 5개의 목공작(木孔雀)이 있습니다.

종묘제례악의 편종에 있는 사자와 용
제례에 쓰는 편종은 그림이나 장식 같은 것을 하지 않은
순검질박(純儉質朴)하게 만든 것을 사용하고,
조회(朝會)나 연향(宴饗)에 쓰이는 편종은 화려하고 아름답게 만든 것을 쓰며
종묘제례악, 낙양춘(洛陽春), 보허자(步虛子) 등의 연주에 쓰이고 있습니다.
*낙양춘은 나라의 경사나 제사 때에 하던 풍류의 하나.
*보허자는 조선조 아악의 하나인 합악(合樂)으로써 궁중의 잔치나 무용 때에 연주했고
세종이 처음 지었으나 세조가 다시 고쳐 지은 것임.

방향의 전체 모습과 청사자 꼬리 뒷 모습인데 광화문 해치의 꼬리와 똑같이 생겼습니다..
방향은 일명 철향(鐵響)이라고도 하는 대표적인 당악기로서
신라시대 이후부터 쓰이고 있습니다.
손바닥 크기의 16개의 철편을 틀의 상단과 하단에
각각 8개씩 매달아 놓고 쇠뿔망치로 쳐서 소리를 냅니다..
철편의 크기는 모두 같고 두께만 조금씩 달라서
철편이 두꺼우면 소리가 높고, 얇으면 소리가 낮습니다.
방향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에서 볼 수 있는데
문종 30년(1076)에 방향업사(方響業師)의 녹봉을 정하는 내용이 있으며
당악계 음악과 행악에 쓰였지만 지금은 거의 연주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특종의 전체모습
특종(特鐘)은 고려 때 중국에서 전해진 악기이며 금부(金部)에 속하는 몸울림악기입니다.
큰 종 하나를 가자에 매고 목공작 3마리로 장식했습니다.
틀의 양 옆에는 용의 머리가 있고 목사자 2마리의 등에 틀의 기둥을 꽂아서
안정시켜 놓았습니다.

특종 청사자의 귀와 꼬리
박(拍)의 신호에 맞춰서 소뿔망치로 치며 음악의 시작을 알립니다.
지금은 황종(黃鐘) 하나만 쓰지만 예전에는 12개월을 상징하여
12개를 만들어 썼다고 하고 문묘제례악에 쓰입니다.
편종과 특종의 기둥을 등에 꽂아 지탱해 주는 동물의 몸을
청색으로 색깔을 입히고 사자로 부르지만 두 악기에 있는
사자의 머리와 꼬리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편종 청사자의 귀와 꼬리
커다란 귀는 숙여져 있으며 꼬리는 동그랗게 말려서 등에 얹혀져 있는
저렇게 생긴 동물은 유일하게 티베탄 마스티프밖에 없습니다.
덧붙여서 얼굴의 모습에서 사자와 티베탄 마스티프의 특징을 구분하는
이마와 안면부 사이의 액단부 경사도를 보아도 사자가 아니며
몸을 덮은 털색도 사자에는 없는 청색이 칠해져 있습니다.
일본에 있었으면 고마이누라고 불렸을 거로 보이는 사자입니다.

편종 청사자의 귀와 꼬리
우리나라에서 벽사동물로 기르던 삽사리가
편종과 특종의 사자와 똑같이 귀가 숙여져 있고 꼬리가 말려져 있으며
이름도 청삽사리가 있습니다.
삽사리의 원형인 티벳의 짱쓰(藏獅)도 청색과 황색이 있습니다.
짱쓰는 중국에서 부를 때의 이름이고 ‘시짱의 사자’란 뜻으로 ‘짱쓰’가 되는데
이는 짱아오의 獒가 큰 개라는 뜻인데 반해서
짱쓰의 獅는 바로 사자라는 뜻이 됩니다..
짱쓰에는 개라는 의미가 없습니다..

특종 청사자들의 꼬리 모습 광화문 해치의 꼬리모습
삽사리는 티벳에서 벽사로 기르던 개중에 ‘사자’로 불리던 개가
당나라에 조공으로 들어 온 이후 신라에 불교문화와 함께 유입된 개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삽사리를 나타내는 글자를 尨으로 알고 있었던 것을
참고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나라 옥편에는 尨을 ‘삽살개 방’ ‘얼룩얼룩할 방’이라고 되어 있지만
중국 辭源이나 일본 大漢和辭典에는 ‘多毛狗’나 ‘털이 많은 잡색견’으로 되어 있고
우리가 알고 있는 ‘삽살개’라는 뜻이 尨에는 없습니다.

화엄사 문수보살이 탄 청색사자
대한화사전에 있는 尨狗도 ‘털이 많은 개’, ‘尨犬’으로 되어 있으며
전국시대에 죽간에 썼다는 중국 최초의 소설인 목천자전(穆天子傳,四)에는
‘天子之豪馬, 豪牛, 尨狗, 豪羊, 以三十祭文山’이라 되어 있어서
이미 중국 전국시대에 방구(尨狗)라는 개가 있었음을 말해 주어서
‘티벳의 짱쓰’가 당나라 때 중국에 들어 온 것과는
시대 차이가 상당히 많이 나는 것입니다..
북방 유목민족의 가축인 말, 소, 양과 함께
尨狗가 들어 있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것입니다.

전등사 불단에 청색사자
편종과 특종의 청색 사자뿐만 아니라
절에 가면 일주문이나 해탈문에 문수동자가 타고 있는 청색사자들이 있습니다.
이 청색사자들의 공통점은 청색 몸털에 얼룩무늬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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