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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할퀴고 간 성종 태실의 상처

야생초요 2006. 7. 2. 13:52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소재

경기도 광주시 경안면 태전동

효릉을 답사한 일행은 점심 식사 후에 바로 태실 집장지를 찾았다.

철제 울타리로 쳐진 300평 남짓한 부지에는 검은색 비석 22기와 백색 비석 32기를 합하여 모두 54기가 줄을 지어 서 있다. 검은 색은 비석은 왕을 지낸 분들의 태실 표지이며, 흰색은 공주와 대군의 태실이었음을 표시하였는데, 둘을 나누는 경계를 세워 전체적으로 日자가 되도록 하였다.

일제는 울타리 하나에도 점령자의 흔적을 남기려고 흉계를 꾸민다.

다행히 1996년 철제 담을 없애는 등 왜색을 걷어내는 작업을 하여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평소 공개되지 않는 장소에 자리잡은 태실비들. 그러나 이들은 광복 후에 발굴 조사를 통해 태반을 담았던 용기인 태항아리가 일부 바꿔치기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또다른 도굴을 방지하고 안전한 관리를 하기 위하여 모두 고궁박물관으로 가져가서 창고속 깊이 간직하고 있어, 지금은 실상 눈에 보이는 비석들 뿐이라고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는 생각으로 비석을 하나하나 살피다가 나의 눈길을 머물게 하는 비석이 하나 있었다. 바로 '成宗大王胎室'이란 글자가 선명하다.


 

 

뒷면에는 '昭和' 연호가 지워진 상태로 五月이란 글자와 함께 '自京畿道廣州郡慶安面移封(경기도 광주군 경안면으로부터 옮겨서 묻었다.)'라는 옮겨온 것을 표시하고 있다.

지난 2005년 이맘때 쯤에 경기도 광주 문화원의 의뢰로 광주 읍지인 '重訂 南漢誌'를 번역한바 있다. 남한산성을 위시한 광주군의 전반적인 사항이 한문으로 된 것으로서

그 안에는 광주에 소재한 두 기의 태실이 나오는데, 성종대왕태실과 중종대왕태실이다. 

번역을 직접 한 입장에서 성종대왕태실비가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반가움도 잠시다. 성종태실의 행적이 갈기 갈기 찢어졌구나 하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광주를 찾아가기로 했다.

곧바로 광주에 오래동안 터를 잡고 사시는 한국어문회 박광민 연구위원께 전화를 드려 토요일에 태봉을 방문하기로 했다. 박위원님 댁으로 찾아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박위원님 친구들이 전화를 하셨다. 매운탕을 해놓았으니 올 수 있으면 오라신다.

가까운 곳이기에 함께 갔더니 이름 모를 민물고기를 넣고 가는 국수를 넣은 얼큰한 매운탕을 내놓으셨다. 처음으로 먹어보는 걸쭉한 매운탕 맛이 인정만큼이나 깊은 맛이 우러났다. 매운탕으로 점심을 때우고 먼저 난설헌 허씨의 묘소에 들렀다가 태봉을 찾았다.

장지 나들목에서 태전동 이정표를 보고 돌아들자 마자 멀리 태봉이 눈에 들어왔다.

아파트와 주택에 묻혀 있는 태봉은 아주 나즈막한 산이다.

 

 

올라갈 길을 찾아 산 아래를 도는데 교회가 하나 보인다.

태봉교회! 전국 각지에 태봉이나 탯산, 태전이란 명칭이 있으면 주변에 태실이 있다는 뜻이다. 

태봉 교회 뒤의 자그마한 산이 바로 태실이 있었던 산인 것이다.

그런데 태산이 바로 이 교회 소유라고 박위원께서 귀뜸해주셨다.

 

 

구두를 신고는 미끄러워 오르기 힘들정도의 아주 가파른 길을 5분여 정도 걸어 정상에 오르니 넓지는 않아도 태실 석물이 자리했음직한 평지가 나왔다. 주변을 휘 둘러보니 아무것도 없는 평지 주변으로 옷가지와 폐가전 등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다. 관리라는 말 자체를 언급하는 것이 무색하다.

 

 

어릴 적에 인근에 초등학교를 다니셨기 때문에 여기 소풍도 자주 오셨다는 박위원께서는 태실이 있었을 만한 자리를 손으로 지적해 주셨다.

태실이 여기에 있었던 것도 1930년 전의 일이니 직접 본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 테지만 여기가 태실이 있었던 것만큼은 분명한 것같다. 

 

 

올라간 길과 반대로 내려오니 꽤나 차량이 많이 다니는 넓은 길이 나온다.

그리고 태봉 건너편에는 조그마한 정자를 만들어 놓고 그 앞에 태봉이 있었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초창기를 융성케 했던 제9대 왕(재위 1469~1494) 성종임금의 태실이 있었던 곳으로 후면에 보이는 봉우리가 태봉이고 부락의 자연명도 태봉으로 불려져 오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남한산성 수어장대로부터 전명 봉우리가 아흔아홉번 째 봉우리라 전하여 오고 있으며 원래는 태실 주변이 잘 정돈되어 있었으나 일본인들에 의해 파손되고 태실 또한 창경궁으로 옮긴지 오래 되어 현재는 흔적만 남이 있을 뿐이다. ..........1987년 7월 12일 태봉주민 일동>

 

이미 알고 있었던 바이지만 성종대왕의 태실이 창경궁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내친김에 직접 확인하기로 했다. 3월 5일 일요일 아침 일찍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메고 창경궁으로 갔다.

지하철 4호선을 타고 혜화역에 내려 4번출구에서 왼쪽길로 걸어서 한참을 걸어갔다.  

걷기에는 약간 먼듯한 거리였지만 노선 버스를 잘 모르니 지하철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창경궁의 정문격인 弘化聞에 도착하여 입장권(성인 1,000원)을 구입하고 안으로 드니 안개가 자욱한 일요일이어서인지 인적이 드물다.

홍화문을 들어서서 바로 오른쪽으로 계속 걸어가면 춘당지가 나오고 춘당지를 오른쪽으로 끼고 약한 오르막길을 오르면 '성종태실비'라는 빨간색 표지가 나온다.

 

 

아기의 태반을 보관하기 위한 석물로써는 지나치다 할 정도로 그 크기가 대단하다. 

그런데 처음 여기 설치하였을 때는 태실비의 이수 아래부분이 상당부분 땅 속에 있었을 터인데 지금은 거의 드러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오가면서 바닥이 다져지고 또 쓸려내려가면서 자연스럽게 돌출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가져본다.

 

 

태실은 4각형의 지대석 위에 석종형 몸체를 놓고 8각형의 지붕돌을 얹었으며 상륜부는 보주로 장식하였고 그 주위로 8각의 난간석을 둘렀다. 두르고 있는 난간석의 조각도 매우 정교하여 이끼와 함께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태실비는 성인 키를 훌쩍 넘는 높은 키에 글씨 또한 명필이다. 

석질은 별로 좋지 않은 듯 부식이 진행되고 있어서 촉감이 매우 거칠다.   

 

 

전면에는 '成宗大王胎室(성종대왕태실)'이란 글자가 아직도 분명하다. 글씨도 당대의 명필이 쓴 듯 단정하고도 힘이 있다.

 

 

그리도 뒷면에는

 

成化七年閏九月日立 - 成化 7년(1471) 閏 9월 일 세웠다.

萬曆六年五月日改立 - 萬曆 6년(1578) 5월  日 고쳐 세웠다. 

順治九年十月日改立 - 順治 9년(1652) 10월  日 고쳐 세웠다.

道光三年五月日改立 - 道光 3년(1823) 5월 日 고쳐 세웠다.

 

[중정 남한지]에는 보충 설명이 있어 참고로 여기 인용하면

<胎室의 表石은 成化 7년(1471)에 처음 세웠다가 淸나라 順治 9년에 이르러 모두 세 번을 고쳐 세웠으나, 純祖 23년 癸未(1823) 四月에 表石이 바람에 쓰러지는 나무에 눌려 부러졌으므로 5월에 禮曹堂郞이 와서 살피고 廣州府의 留守와 함께 새 表石으로 고쳐 세웠다.>

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현재 창경궁 태실 옆에 세워둔 안내판이다. 여기에는 1930년 5월에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역대 임금의 태실을 서삼릉으로 옮기면서 이곳으로 옮겼다고 되어 있으나 아래 신문을 바탕으로 하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신문은 昭和 3년(1928년) 11월 2일자 동아일보 기사로 "성종의 태봉을 창경원에 이봉"이라고 되어 있으며 옮겨진 상태의 사진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위에서 말한 1930년 5월이란 안내문은 잘못으로 보여진다. 

한편 같은 해 9월 10일 <매일신보>의 기사에서는 당시 태실을 옮기게 된 이유 중의 하나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있어 흥미롭다.  

"태봉에 암장시(暗葬屍)가 뒤를 이어 발견됨을 따라 이왕직에서는 황송함을 견디지 못하여 앞으로는 그 같은 일이 없게 하고자 신중히 협의한 결과 역대의 태봉 중에 가장 완전하며 가장 고귀하게 건설되었다는 광주(廣州)에 뫼신 성종의 태봉의 모든 설비를 그대로 옮겨다가 석물이고 건물이고 한결 같이 창덕궁 뒤 비원에다가 꾸며놓고 전문기사를 시켜 연구케 하는 중이라는데 새로이 건설되는 태봉은 성종태봉을 표본으로 경중히 뫼실 것이라 한다."

 

이는 태봉이 전국에 풍수가 뛰어난 곳에 모셨기 때문에 관리가 허술한 틈을 타서 발복을 위해 사람이 죽으면 몰래 그 태실에 가져다 묻는 일이 종종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이러한 불경스런 일을 방지하기 위하여 안전하게 한 곳으로 모셨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가 우리 왕실의 흥성을 가로막기 위한 계략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창경궁을 나와 다시 버스를 타고 옛 조선총독부 건물이 있던 국립고궁박물관으로 향했다.

 

일제가 태실을 한 군데 모으면서 보물이 될만한 태항아리는 빼돌리고 조잡한 항아리로 바꿔치기 했다는 것은 발굴조사에 의해 밝혀졌다. 그래서 안전한 관리를 위해 발굴된 태의 내용물은 다시 그 자리에 묻지 않고 모두 박물관으로 가져와서 보관했다가 지금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성종태실은 원래의 경기도 광주 태전동에는 터만 남아 있으며, 그곳에 있던 태실비와 석물은 아무런 연고가 없는 창경궁으로 갔다.

그리고 잠시나마 서삼릉 태실집장지에 있었던 태실은 조그마한 비석만 남긴채 내용물은 또 고궁박물관의 어둡고 깊숙한 수장고로 들어가 관리되고 있다.

더구나 고궁박물관에 있는 성종의 태항아리가 본래의 것인지도 의심스럽다.

혹시 일본으로 흘러들어가거나 다른 어느곳으로 가고 가짜 항아리로 대체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진다.

 

정리하자면 성종의 태실은 최소한 4-5 곳으로 갈라져 있다는 결론이 된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현재 아무런 이유도 연고도 없이 설치되어 있는 창경궁의 태실 석물들은 원래의 위치인 경기도 광주의 태봉으로 옮겨야 마땅할 것이다.

그게 어렵다면 광주의 태봉에 복제품을 설치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냥 방치한 채 세월이 흐른다면 저 조그만 산은 그냥 산으로 기억 저편으로 사라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종의 태실이 있었던 원래의 흔적은 영원히 자취를 감출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2006. 3. 5

 

글/사진

淨山/金柄憲

(http://www.birim.co.kr)